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93화 (94/1,336)

#093

대지에 생겨난 거대한 타원.

높이는 10여 미터,

광화문 게이트의 반도 안되는 크기다.

그러나 이 거대한 타원 안에서 일렁이는 푸른 물결을 보는 순간.

누구나 직감했다.

게이트다!

그리고 이 푸른 게이트 앞에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영맥 속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을 쫓아온 사람.

천문석이었다.

"..."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푸른 물결을 바라보는 천문석.

"마스터 급 오크?"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한 마디.

영맥 속 거대한 존재감은 마스터 급 오크가 아니었다.

거대한 존재감의 정체는 광화문 게이트와 비슷하게 생긴 푸른 물결이었다.

문득 주위를 향해 기감을 뻗어본다.

하늘 끝까지 뻗어 나가는 것 같은 기감!

이성에 달한 일기일원공이 전해주는 기감으로 알 수 있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순했던 영맥이 대부분 사라졌고,

남아있는 얼마 안 되는 영맥도 빠르게 흡수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이 푸른 물결로!

"..."

천문석은 영맥을 흡수해 짧은 시간 이성에 달하는 내력을 쌓는 기연을 얻었다.

그러나 뭔가 찝찝했다.

영맥이 갑자기 생겨나고,

다시 갑자기 사라졌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너무나 급변하는 상황.

천문석은 주위를 돌아보며 의아해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눈앞에는 게이트를 닮은 푸른 물결이 있다.

그리고 이 주위 대지에는 자욱한 흙먼지가 가득했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늘 고래!"

천문석은 하늘을 샅샅이 훑었다.

없었다!

거대한 산악 같던 하늘 고래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거대한 푸른 원 앞, 천문석이 경악하고,

장벽 위 헌터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봤다.

자욱한 먼지 속 영맥을 흡수하던 수천의 몬스터와 마수들은 갑자기 사라진 영맥에 굳은 듯 멈춰 있었다.

모두가 급변하는 상황에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할 때.

푸른 하늘을 열심히 나는 작은 생명체가 있었다.

검은 등과 새하얀 배,

길게 뻗은 유선형 지느러미.

동그란 얼굴과,

착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

작아진 하늘 고래였다.

케페니안의 빛으로,

산처럼 커졌던 하늘 고래.

하늘 고래는 모았던 영맥을 모두 쏟아내고,

어느새 1미터 남짓한 크기로 작아져 있었다.

기절한 새끼 다람쥐를 머리 위에 올린 채,

열심히 하늘을 가로질러 푸른 포탈로 날아가는 작아진 하늘 고래.

구으, 구으응-

하늘 고래는 작아진 몸,

작아진 울음소리로 기쁨을 표시하며.

붕, 붕-

열심히 지느러미를 움직여 날아갔다.

저 멀리 대지에 생긴,

익숙한 포탈을 향해서!

구으, 구으응-

포탈의 푸른 물결 너머,

너무나 그리운 고향 대지가 느껴진다!

하늘 고래는 눈물이 찔끔 났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도토리 숲에 떨어진 후,

돌아갈 방법을 찾지 못해 그리워하던 고향 대지가 분명했다!

고향 대지!

공허의 바다를 외롭게 유랑하던 선조들이,

부름을 받아 도착한 그리운 고향 대지.

고향 대지 가득 넘치는 선조들의 념(念)이 이곳에서도 느껴진다.

[모든 걸 풍요롭게 하리라.]

아주 오랫동안 하늘 고래들의 념(念)이 쌓이고 쌓여 풍요로워진 대지.

사람과 동물,

몬스터와 마수.

작은 풀에서 거대한 나무.

그리고 작은 돌에서 커다란 바위까지.

생명 있는 모두가,

생명 없는 모든 것이 풍요로운 대지.

그리운 고향 대지로 마침내 돌아간다!

구으-

구으응-

하늘 고래는 신나는 울음소리를 내고,

붕붕- 열심히 지느러미를 휘저어 하늘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작아진 몸이 포탈까지 날아가는 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빛이 더 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하는 순간 문득 기억나는 게 있었다.

'작은 친구!'

영맥이 없는 이곳에 떨어져 작아졌을 때.

도토리 숲에서 작은 인간들에게 맞고 있을 때 구해준 친구!

작은 다람쥐!

구으, 구으응-

하늘 고래는 이제야 깜빡했던 일이 생각났다.

머리 위 작은 다람쥐!

다람쥐 친구가 자기 보물 도토리를 가져간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었다!

힘이 없다니까 ‘황금빛’을 줘서 먼저 먹었었다!

“...”

그러나 황금빛을 먹고 몸이 커지자,

그리운 고향 대지의 흔적이 느껴졌다.

갑자기 찾은 그리운 대지의 느낌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날다가 보니···.

보물 도토리를 가져간 사람은 찾지도 못한 채,

다람쥐가 준 빛을 모두 써버리고 말았다!

구으, 구으응-

하늘 고래는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며 안절부절못했다.

작은 다람쥐 친구는 엄청 무서웠다!

정신을 차리면,

아주아주 아프게 마구마구 깨물 것이다!

숲에서 도토리를 훔쳐먹은 동물들을 사정없이 물어 버렸을 때처럼!

‘어떻게 하지?!’

한참을 빙글빙글 돌던 하늘 고래는 결심했다.

육체를 태워 힘을 쓰기로.

구으, 구으응-

하늘 고래는 울음소리와 함께 점점 투명해지기 시작했다.

30cm 남짓한 크기로 작아진 하늘 고래는,

푸른 하늘이 비쳐 보일정도로 투명한 영체로 변했다.

하늘 고래는 육체와 영체에 걸쳐진 생명체.

언제든 육체과 영체를 오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육체 없이 영체만으로는,

영맥이 없는 이곳에서 오래 버틸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곧 고향 대지로 돌아갈 것이니 상관없었다.

하늘 고래는 육체를 태워 만들어낸 영맥에 '념'을 담았다.

오랜 시간 공허의 바다를 유랑하던 하늘 고래가 고향 대지로 불려왔을 때 받은 힘.

'념(念).'

하늘 고래는 영맥에 친구의 도토리를 가져간 범인을 찾길 바라는 간절한 '념'을 담아 숨구멍으로 쏟아냈다.

부우, 부우우-

몽글몽글 숨구멍에서 쏟아진 영맥이, 머리 위 다람쥐 친구를 감쌌다.

기절한 새끼 다람쥐는 간절한 념이 담긴 영맥에 휩싸여 바람에 날린 깃털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간절한 바람은 인과를 잇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하늘 고래의 간절한 념이 담긴 영맥이,

작은 친구를 도토리를 가져간 그 사람에게로 인도할 것이다.

육체를 태워 친구와의 약속을 지킨 하늘 고래는,

빠르게 멀어지는 작은 친구에게 지느러미를 흔들어 작별인사를 했다.

-작은 친구 안녕! 고마워!

기절한 새끼 다람쥐는 친구의 인사를 듣지 못한 채 멀리멀리 날아가 고산 마을 장벽을 넘어갔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떨어져 내렸다.

"...보안관 사무소 어딘가요?! 지금 밖에 친구가 고립됐습니다!"

앞뒤로 배낭을 메고 손에는 뼈 도끼를 든 채, 보안관 사무소를 찾아 달리는 사람.

기절한 새끼 다람쥐를 품은 하늘 고래의 념은 잠시 빙글빙글 허공을 돌더니.

김철수가 메고 있던 천문석의 배낭 안으로 쏙- 들어갔다.

“응?”

돌연 느껴진 기척에 돌아봤지만,

김철수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이렇게 약속이 지켜졌을 때,

영체가 된 하늘 고래는 열심히 하늘을 날아 대지에 생겨난 포탈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퐁, 퐁, 퐁-

영체가 된 하늘 고래의 궤적을 따라 생겨나는 물방울.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하늘 고래의 영체가 방울방울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잠시 후.

하늘 고래는 포탈의 푸른 수면 너머,

안개가 바다처럼 흐르는 풍요로운 봉우리를 볼 수 있었다.

구으으응-

구으으으응-

...

포탈을 넘어 전해지는 친구들의 거대한 울음소리!

구으, 구으응-

영체가 된 하늘 고래는 다시 한번 작별인사를 했다.

-작은 친구 고마워!

-그때 다시 보자!

하늘 고래는 신나게 지느러미를 움직여 포탈로 움직였다.

퐁, 퐁, 퐁-

그리고 포탈이 가까워 졌을 때.

탁-

누군가의 손에 꼬리가 잡혔다.

"...이 녀석 하늘 고래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의심스러운 눈으로 영체가 된 하늘 고래를 살피는 사람.

천문석이었다.

---

천문석은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거대한 푸른 원과 하늘을 번갈아 봤다.

거대한 하늘 고래가 사라졌다!

그리고 생겨난 게이트를 닮은 거대한 푸른 원!

느낌상 이 푸른 원이 영맥을 빨아들인 것 같았다.

갑자기 영맥이 사라졌지만,

손해 본 것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기연을 얻었다.

일기일원공의 내력을 이성(二成)을 넘어 거의 삼성에 가깝게 쌓은 것이다.

거의 삼성에 가까운 내력!

이 정도 내력을 지구에서 쌓았다면 4, 5년은 걸렸을 거다.

이것만으로도 엄청난 기연이다.

그러나 얻은 것보다 얻지 못한 것을 더 아쉬워하는 건 사람의 본성.

천문석이 사라진 영맥에 허탈해할 때,

문득 흐릿한 무언가가 다가오는 걸 느꼈다.

퐁, 퐁, 퐁-

하늘에 생겨나는 작은 영맥의 방울들.

작은 영체가 영맥의 방울을 흘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영체형 몬스터?

천문석이 유심히 보는 순간,

익숙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구으, 구으응-

"...!"

어제와 오늘 이틀 동안 수백 번은 들었던 울음소리.

울음소리가 확 작아졌지만,

천문석은 듣는 순간 알아챘다.

하늘 고래 울음소리다!

퐁, 퐁, 퐁-

작은 영체가 된 하늘 고래가 열심히 지느러미를 휘저어 푸른 물결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순간 푸른 물결에서 전해지는 진동!

구으으응-

구으으으응-

...

너무나 익숙한 진동, 하늘 고래!

푸른 물결 너머,

수많은 하늘 고래들의 울음소리가 전해지고 있었다!

구으-

구으응-

이 순간 작은 영체 하늘 고래가 작게 울더니.

퐁, 퐁, 퐁-

천문석을 지나쳐 날아갔다.

탁-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여 하늘 고래의 꼬리를 잡았다.

퐁, 퐁, 퐁-

꼬리가 잡힌 줄도 모르고 열심히 지느러미를 흔드는 하늘 고래.

"...비슷하게 생겼는데? 너 하늘 고래 맞지?"

천문석이 묻자,

하늘 고래가 고개를 돌렸다.

동그란 얼굴과 착해 보이는 검은 눈동자.

하늘 고래는 몸이 움직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는 듯이 지느러미를 흔들며 울음소리를 냈다.

구으-

구으응-

하늘 고래의 울음소리에서 가슴이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천문석이 전법륜인을 짚으려 할 때,

등 뒤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기척!

재빨리 몸을 돌리자 보였다.

꿰에에엑-

자욱한 먼지 속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멧돼지 마수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뒤이어 느껴지는 진동!

두드드드드-

대지가 북처럼 울리기 시작하고,

자욱한 먼지 속에서 하나둘 튀어나오는 마수와 몬스터!

순간 귀에 익은 포효가 멀리서 터진다.

크르르르륵-

와우우우우-

...

늪지 트롤과 마스터 급 오크다!

천문석은 재빨리 달리기 시작했다.

영맥이 모두 사라지고,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고 있었다.

영맥이 사라진 이상,

시야가 탁 트인 개활지에서 수천의 마수와 몬스터, 강적과 싸우다가는 말라죽을 뿐이다.

장벽으로 달려야 했다!

쿵, 쿵, 쿵-

천문석은 엄청난 속도로 푸른 물결에서 멀어졌다.

두드드드드-

반대쪽 먼지구름 속에서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마수와 몬스터들이 보였다.

다행히 이 녀석들은 천문석에게는 관심도 없이 푸른 물결을 향해서 돌진했다.

내심 안도할 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구으, 구으응-

하늘 고래에게서 들려오는 울음소리.

손에 잡힌 하늘 고래를 보는 순간 천문석은 깜짝 놀랐다.

하늘로 흩날리는 물방울!

하늘 고래의 까만 눈에서 물방울이 쏟아지고,

손에 잡힌 하늘 고래의 몸이 빠르게 작아지고 있었다!

천문석은 문득 든 생각에 하늘 고래를 잡은 손을 놓았다.

구으, 구으응-

눈에서 물방울을 쏟아내며,

다급하게 지느러미를 휘저어 나아가는 하늘고래.

하늘 고래는 푸른 물결로 날아가고 있었다.

퐁, 퐁, 퐁-

“...!”

천문석은 깨달았다.

이 하늘 고래는 저 푸른 물결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그걸 자신이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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