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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92화 (93/1,336)

#092

기연을 깨달은 천문석은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

이미 환해진 하늘 별은 보이지 않고.

일천한 무공에 하늘의 천의(天意)는 아득하여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수없이 생사를 가로지른 감각이 말한다.

이 기연은 도약의 순간이다!

무공은 계단을 오르듯 완만하게 올라가지 않는다.

전심전력으로 무공을 익히는 무인은 어느 날 문득 깨닫는다.

단전이 가득 차고,

높은 벽이 앞을 막고 있다.

엄청난 기연을 만났으나,

이 기연을 얻기 위해서는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백척간두 끝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나 모두 같은 상황.

이게 도약의 순간이다.

문득 무인을 찾아오는 시련의 순간.

이 시련을 뛰어넘으면,

무공은 단숨에 성장한다.

도약의 순간은 기회,

대나무의 마디이다.

대나무가 높게 자랄 수 있도록 생겨난 단단한 마디처럼.

무의 경지를 단숨에 뛰어넘어 나아갈 기회!

그렇기에 무인은 이 순간 선택해야 한다.

기회를 잡아 나아갈지,

몸과 마음을 닦아 다시 다음 기회를 노릴지.

나아간다면.

가득 찬 단전을 스스로 깨뜨려 넓히고,

온 힘을 다해 앞을 막은 높은 벽을 기어올라야 한다.

위태로운 백척간두에서 두려움을 이기고 한 발 내디뎌야 한다.

일류, 절정, 초절정.

언제 이 도약의 순간을 마주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도약의 순간은 진정한 무의 경지,

초월경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질을 가졌는지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이 질문을 하는 건,

자기 자신이다.

그리고 이 답을 듣는 것도,

자기 자신뿐이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기에 결코 속일 수 없는 질문과 답.

전생의 천문석도 이 순간을 몇 번이나 맞닥뜨렸다.

그리고 어린 시절부터 거듭된 고난과 시련에도 치열하게 살아온 천문석은 항상 같은 선택을 했다.

전생과 현생.

무공의 경지는 천지 차이지만 천문석은 알고 있었다.

삶과 무공은 너무나 닮았다.

매 순간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듯이,

무공 또한 온 힘과 마음을 담아 치열하게 익혀야 한다.

이 순간 마음이 끓어오른다!

당장이라도 저 영맥으로 들어가!

영혼육백 모든 걸 걸고 부딪히고 싶은 치열한 마음이!

하-

문득 터지는 헛웃음.

천문석은 폭풍처럼 일어나는 자신의 마음을 보며 깨달았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자신은 무인이었다!

다시 도약의 기연 앞에 선 지금,

들끓는 마음은 무인의 선택을 종용하고 있다.

수련은 천년을 떨어져 내려 바위를 깨뜨리는 물방울.

어떤 물방울이 바위를 깨뜨릴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직 일심으로 치열하게 정진할 뿐!

눈앞에 기연이 나타나고 도약의 순간을 맞이한 지금,

천문석이 할 일은 하나였다.

문득 고개를 내려 허리를 본다.

무장 벨트에 걸린 한 자루 검과 방패.

방패에는 커다란 홈이 파여 있다.

천문석은 김철수가 메고 있는 배낭 뒤에 걸린 방패를 집으며 말했다.

"철수형. 이따가 위에서 봐요."

"뭐···?"

김철수의 의아한 시선이 닿는 순간,

천문석은 자욱하게 안개가 차오르는 대지로 뛰어내렸다.

"...문석아!"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으나,

천문석의 정신은 이미 하나로 모였다.

도약의 순간은 언제나 한순간.

온 힘과 마음을 모아 답해야 한다.

일기일원공은 치열함 속에서 완성되는 무공!

그렇다면 당연히 그 답도 치열함 속에서 나와야 한다.

쿵-

화물차 지붕에 떨어진 순간,

어느새 검을 뽑아 든 천문석.

천문석은 가득한 영맥 속에서 혼백을 담아 영맥을 불렀다.

와라-

영맥이 천문석의 마음에 호응해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 낼 때.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을 일으켰다.

거대한 영맥의 흐름을 따라서 쏟아져 들어오는 진기!

검을 든 천문석은 안개 속으로 뛰어들어갔다.

---

자욱한 안개에 극도로 좁아진 시야.

그러나 천문석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주변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마음에 감응해 영맥 속에 만들어진 일기일원공의 흐름 때문이었다.

의식이 확장되고,

잠들었던 감각이 깨어난다.

확장된 의식과 감각이 끝도 없이 뻗어 나가,

영맥의 바닷속 점멸하는 수천 개의 크고 작은 별들이 느껴진다.

이 별 하나하나가 몬스터와 마수들.

이놈들은 사방에 가득한 영맥을 흡수해 점점 밝아지고 있다.

크르르륵-

와우우우-

...

소름 돋는 늪지 트롤의 포효와 마스터 오크의 함성!

크아아아-

키에에엑-

...

해일처럼 밀려오던 마수와 몬스터들의 울부짖음!

생명을 키우고 나아가게 하는 힘, 영맥.

엄청난 영맥에 희열에 찬 마수와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터진다!

이 순간 천문석은 생사팔문의 보법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쿵, 쿵, 쿵-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상념들.

하늘 고래,

금속 상자,

배송 의뢰.

...

머리를 메운 상념이 모두 사라진 자리에,

일심으로 나아가는 무인의 치열한 마음만이 남았다.

공(功)을 성취하는 순간은 언제나 일순.

일심으로 정진하는 마음만이 이 일순간을 잡을 수 있다.

반개한 눈으로 안개 너머 영맥을 보고,

왼손은 전법륜인을 오른손에는 검을 들었다.

천문석은 일심으로 영맥의 바닷속을 걸으며 일기일원공에 집중했다.

혼백에 짜여진 틀로 영맥을 걸러,

영육의 토대 위에 일기일원공이라는 집을 쌓아 올린다.

크아앙-

문득 포효가 들려오는 순간.

핑, 핑, 핑-

천문석의 검이 움직이고 강철 현이 끊어지는 날카로운 소리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안개조차 잘려나가는 극한의 쾌검!

툭, 투투툭-

마수의 육체가 단숨에 잘려나가고,

마수의 피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천문석은 쏟아지는 마수의 피를 뒤집어쓴 채 무심하게 걸으며 검을 움직였다.

생사의 간극을 넘나드는 보법과

임팩트의 순간 터져 나오는 한 호흡의 진기!

핑, 핑, 핑, 핑-

천문석의 쾌검이 광기에 찬 마수와 몬스터의 무리를 직선으로 뚫어냈다.

목표는 영맥에 느껴지는 가장 거대한 별!

도로 위에서 도망쳤을 때,

느꼈던 것보다 몇 배는 커진 존재감!

이 거대한 존재감은 분명 마스터 급 오크일 것이다!

영맥 속에 들어온 지금,

천문석은 알 수 있었다.

이 마스터 급 오크가 하늘이 준비한 마장의 핵심이었다!

영맥을 삼키며 점점 밝아지는 거대한 별,

이놈을 넘어서야 했다!

---

하늘 고래가 장벽 위에서 불꽃의 춤을 출 때,

늪지 트롤의 발을 묶고 있던 추이린은 경악했다.

"...!"

궁, 궁, 궁-

앉아 있었던 금속판이 진동하며,

하늘로 파동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또 왜 이래!?"

이 파동은 장벽 아래에서 전해지는 파동과 중첩돼,

커다란 파형을 허공에 그리고 있었다.

중첩된 파동이 천지에 가득한 안개 속으로 퍼져 나가며 물결을 닮은 파형을 그려내고 있었다.

이 파형 속을 헤엄치는 황금빛 고래의 울음소리!

구으으으으으응-

추이린은 눈으로 직접보고 있는 이 순간에도 믿을 수가 없었다.

여명이 밝아올 때 갑자기 나타난.

하늘을 나는 거대한 고래.

파동을 뿌리는 화물차.

그리고 그 뒤 수천의 마수와 몬스터 무리!

자세한 사정을 알 수는 없었지만,

추이린은 직감했었다.

저 화물차가 자신이 인수할 화물을 싣고 있는 화물차다!

그런데 저 산처럼 거대한 황금빛 고래는 무엇이란 말인가!?

1세대 헌터로 온갖 일들을 겪은 추이린조차 듣지도 보지도 못한 존재!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산처럼 거대한 황금빛 고래라니!

이 고래가 나타났을 때부터 상황은 다급하게 돌아갔다.

재금 보안의 지휘관은 공격 지시를 내렸고 장벽 위 헌터들도 마탄을 쏟아냈다.

고산 마을의 보안관은 화물차를 운전하는 헌터를 구하기 위해 장갑 SUV를 타고 직접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추이린은 광역 마법을 준비했으나,

화물차와 마수 무리의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이대로라면 화물차까지 휩쓸렸다.

그래서 추이린은 위협적인 늪지 트롤의 발을 묶었다.

간신히 한숨 돌리나 했는데,

이 거대한 고래가 개틀링 기관포의 마탄에 담긴 마력을 삼켰다.

"...!"

이 순간 추이린은 깨달았다.

이 거대한 고래는 주위의 마력을 삼키고 있었다!

엄청난 마력을 삼키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황금빛 고래.

황금빛 고래가 마력을 흡수한 순간.

마력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고래의 거대한 육체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때 추이린의 상념을 깨는 거대한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으으으으응-

추이린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중첩된 파동이 안개 위에 그리는 물결 같은 파형.

이 파형 속을 나는 황금빛의 거대한 고래가 울고 있었다.

고래의 울음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심상.

심상은 추이린의 마력에 뚜렷한 파문을 만들어냈다.

아연한 표정의 추이린이 문득 말했다.

"아득한 그리움···?"

황금빛 고래는 그리움을 노래하며 하늘을 날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추이린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배송품 인수 업무지시가 떨어진 그 장소에,

하늘을 나는 거대한 황금빛 고래가 나타났다.

이게 우연일 리 없다.

분명 누군가 의도한 일이다!

순간 느껴지는 직감!

추이린은 직감에 따라 고개를 돌려 자기가 앉았던 의자를 봤다.

이때 소리가 들려왔다.

철컹, 철컹, 철컹-

신형 게이트 안정화 장치가 작동하고 있었다!

2미터 남짓 되는 기둥이 하늘을 향해 길어지고 있었다.

중첩된 파동이 흐르는 하늘 너머,

안테나처럼 길게 솟아나는 십여 개의 안정화 장치!

그리고 길어진 안정화 장치 위에 생겨나는 마력광.

휭, 휘잉, 휘이이잉-

마력광이 흐르는 안정화 장치가 중첩된 파동에 흔들릴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휘파람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 퍼진다.

구으으으으응-

하늘 고래의 울음소리.

휭, 휘잉, 휘이잉-

안정화 장치의 휘파람 소리.

부드드드드-

대기를 북처럼 진동시키는 중첩된 파동.

그리고 셋이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부우으으으으응-

하늘 고래가 떨어져 내리며 엄청난 안개를 쏟아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짙은 안개!

순식간에 장벽 위가 안개에 잠기고,

짙은 안개가 대지로 쏟아져 거대한 안개의 바다를 만들어냈다.

"으아악-"

"이거 뭐야!?"

"안개?! 무슨 안개가 이렇게 짙어!?"

...

사방에서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올 때,

추이린의 시선은 게이트 안정화 장치에 향해 있었다.

안개가 닿는 순간 미친듯이 요동치는 게이트 안정화 장치!

지금 뭔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이때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

"어, 어! 저 헌터 뛰어내렸어!?"

이 순간 마력광이 폭발했다.

쩡, 쩡, 쩡-

십여 개의 안정화 장치에서 쏘아진 마력광이 장벽 앞 대지에 차오르는 영맥을 꿰뚫었다.

대부분의 헌터는 자욱한 안개에 뭐가 일어나는지 알수 없었다.

그러나 마력 각성자 추이린은 눈앞에서 보듯 느낄수 있었다.

영맥 속에 거대한 원을 그려내는 마력광!

장벽 앞 비포장도로 위에 엄청난 크기의 원이 그려지고, 이 원안에 마력 회로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마력 회로?!'

추이린은 경악했다.

이해는커녕 어떤 기능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초고도의 적층식 마력 회로가 그려지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이거 뭐야? 누가 이런걸!?"

게이트 안정화 장치와 나이트 아머를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의 마력 회로!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추이린은 이런 적층식 마력 회로를 본 적이 있었다.

재금 그룹의 본사가 있는 천공의 섬, 부유 기관실!

이 순간 추이린은 깨달았다.

재금 그룹 오너!

이건 그가 준비한 마력 회로다!

깨닫는 동시에 머리에 떠오르는 의문.

'어떻게 가동하려고?!'

이 정도 수준의 마력 회로를 가동하려면 엄청난 양의 정제 마석이 있어야 한다.

어지간한 마력 각성자 백 명이 모여도 가동이 불가능한 수준의 마력 회로다.

이때 적층식 마력 회로가 완성되고 푸른 빛이 터졌다.

지상에 태양이 떨어진 듯 엄청난 빛이 뿜어질 때,

하늘에서 쏟아지는 거센 바람!

후우우우웅-

엄청난 바람이 적층식 마력 회로를 향해 불어가고 있었다.

쾅, 쿠르르릉-

"어엇! 이게 뭐야!?"

"거기 잡아! 몸이 들린다!"

"으아앗- 이거 뭐야!?"

"조심해 떨어진다!"

...

장벽 위 곳곳에서 쏟아지는 다급한 외침들.

거센 바람이 대지로 쏟아지며,

자욱하게 깔린 안개가 순식간에 사라지기 시작했다.

추이린은 깨달았다.

마력 회로가 가동하고 있다!

하늘 고래가 쏟아낸 안개,

이 안개를 마력 회로가 흡수해서 가동하고 있었다!

"이 안개가 마력 회로를 가동했다고?!"

추이린은 흩어지는 안개에 마력장을 투사했다.

그러나 이 안개에서 마력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는 볼 수 있었다.

자욱한 안개가 사라진 대지.

푸른 빛으로 이뤄진 거대한 원이 생겨나 있었다.

"..."

"..."

당장이라도 깨질듯한 아찔한 침묵 속.

누군가의 어이없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거 게이트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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