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카카캬-
천문석이 한 건 한 비열한 악당처럼 웃는 순간.
크르르르륵-
와우우우우-
늪지 트롤과 마스터 오크의 함성이 들려왔다.
천문석은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미 멀리 떨어진 격전지,
짙게 깔리던 녹색 안개가 흩어지고.
전신에 도끼 자국이 난 늪지 트롤,
몸 곳곳이 녹색으로 타들어 간 오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늪지 트롤과 마스터 급 오크는 전투를 멈추고 잠시 서로를 바라봤다.
폭풍전야의 바다처럼,
전투가 멈추고 조용해진 격전지.
천문석은 바짝 긴장해서 격전지를 바라봤다.
터질듯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늪지 트롤과 마스터 오크가 다시 움직였다!
크르르륵-
와우우우-
엄청난 고함과 함께 움직인 두 녀석은···.
"어? 뭐야. 저 녀석들 왜 저래?"
어이없게도 더는 싸우지 않고 나란히 앞으로 달렸다.
화물차를 향해서···.
그리고 그 뒤 격렬히 싸우던 오크 무리가 마수 해일에 합쳐졌다.
화물차를 향해 밀려오는 마수의 해일에 수백의 오크 무리가 더해져 업그레이드됐다.
"...."
순간 천문석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두껍게 깔린 구름 속을 이동하는 거대한 황금빛.
어이없게도 마수와 오크들은 싸움을 멈추고 하나로 합쳐져 고래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의 고래는 여전히 화물차를 쫓아왔다.
[화물차 <- 하늘 고래 <- 오크+마수 해일]
잠시 멈췄던 죽음의 행진이 다시 시작됐다.
---
킥, 키키킥-
끝없는 구름이 펼쳐진 하늘 위,
분노한 다람쥐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밤하늘을 나는 거대한 황금빛 고래의 머리 위에 앉은 새끼 다람쥐.
탁, 탁, 탁-
몇 번이나 고래 머리를 내려쳤으나 요지부동.
킥, 키키킥-
'이런 멍청한 하늘 고래!'
다시 한번 분통을 터트리는 새끼 다람쥐.
새끼 다람쥐는 143개의 보물 도토리를 가져간 범인을 찾는데, 결국 실패했다.
어째선지 사방에서 인간들이 자꾸자꾸 모여들어서!
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사이, 도토리 범인의 얼굴을 까먹은 것이다!
킥-!
분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원래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는 잘 까먹으니까.
그래서 새끼 다람쥐는 친구인 하늘 고래를 찾았다.
좀 멍청하기는 하지만,
친구인 하늘 고래는 그 누구든 찾을 수 있었다.
새끼 다람쥐는 얼마 남지 않은 '케페니안의 힘, 빛'을 모두 건네주고,
하늘 고래는 도토리를 가져간 범인에게 자신을 데려다주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멍청한 하늘 고래가 케페니안의 빛을 흡수하더니!
엄청나게 커져서는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새끼 다람쥐는 다시 한번 하늘 고래를 아프게 물었다.
콰득-
유령이나 골렘 같은 영체와 마법 생명체에게조차 무시무시한 고통을 주는 물기 공격!
그러나 거대한 산악 같이 커진 하늘 고래는 빙글빙글 지느러미를 휘저으며 즐거운 울음소리를 냈다.
구으으으으응-
천지를 떨어 울리는 거대한 울음소리에 담겨 전해지는 하늘 고래의 강렬한 심상.
-집, 즐거움. 친구, 반가움···.
킥, 키키킥-
새끼 다람쥐는 손을 탁탁 내려쳐 멍청한 하늘 고래의 방향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하늘 고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같은 방향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천지를 밝히는 황금빛 불꽃의 춤을 추며 하늘을 유영하는 하늘 고래.
이때 문득 하늘 고래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휘이이이이잉-
하늘 고래의 거대한 입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
바람에는 이세계의 힘, 마력이 실려 있었다.
다람쥐가 넘겨준 케페니안의 빛,
하늘 고래의 황금빛에 이끌린 엄청난 마력이 거대한 산악 같은 육체로 쏟아져 들어온다.
엄청난 마력을 빨아드린 하늘 고래는 숨구멍으로 바람을 내뿜었다.
부우우우우-
숨구멍에서 솟구쳐,
하늘로 흩날리는 뿌연 빛을 뿌리는 안개.
안개에는 하늘 고래의 념(念)이 담겨 있었고,
하늘 고래의 전신에는 정제된 마력이 쌓이고 있었다.
그리고 정제된 마력은 케페니안의 빛을 흡수한 하늘 고래의 념(念)으로 형질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아주 오래전 세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아무것도 없는 공허의 바다에서 불려온 여행자 하늘 고래.
케페니안의 빛이 하늘 고래의 잃어버린 본질을 일깨웠다.
하늘 고래의 념으로 마력이 정제되고,
정제된 마력이 다시 한번 변화하는 순간.
하늘 고래의 전신에서 뿜어지는 엄청난 황금빛!
정제된 마력은 자연지기(自然之氣)로 변화하고,
엄청난 자연지기가 하늘 고래의 영체 안에서 격류가 되어 흘렀다.
자연지기의 흐름!
이것은 바다에 부는 바람이고,
계곡을 흘러내리는 격류이다.
생명을 키워내는 힘이자,
변화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의지가 깃든 흐름.
그렇기에 이 흐름은 이렇게 불린다.
영맥!
천문석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영맥이,
케페니안의 빛을 흡수한 하늘 고래의 영체 속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순간 하늘 고래의 영맥을 본능적으로 느낀 마수와 몬스터들이 하늘 고래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원인.
케페니안의 빛을 하늘 고래에게 넘겨준 새끼 다람쥐는 분통을 터트리며 마구마구 하늘 고래를 물었다.
키키키킥, 킥-
하늘 고래의 황금빛이 더욱 강해지고,
천지를 뒤흔드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구으으으으응-
울음소리에서 전해지는 강렬한 심상!
-작은 친구 좋아! 고마워!
새끼 다람쥐는 두 배로 분노했다!
킥, 킥, 키킼키킥-
좋으면! 고마우면! 약속을 지키란 말야!!
---
어느새 여명이 밝아오는 도로 위.
쿠르르릉-
비포장도로 위를 빠른 속도로 달리는 화물용 탑차가 한 대 있었다.
화물차는 움직이는 게 이상할 정도 멀쩡한 곳이 없었다.
범퍼는 어디론가 날아갔고,
차체에는 부러진 창과 검이 박혀 있다.
우둘투둘 찌그러지고 도색이 벗겨진 차체.
차체 지붕과 벽 곳곳에는 구멍이 뚫렸고,
몬스터와 마수의 피와 살점이 곳곳에 흐트러져 있었다.
이 화물차 지붕 위,
창에 기대어 서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천문석.
여명이 밝을 때까지 밤새 수십 번의 격전을 치른 천문석이었다.
후, 하-
후, 하-
천문석은 가쁜 숨을 고르며 앞과 좌우를 확인했다.
더럽게 끈질기게 달라붙던 놀 무리를!
이제야 모두 떨궈냈다!
우워어어어-
이때 문득 들려오는 놀의 울음소리!
"아, 시바!"
반사적으로 울음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놀 무리가 마수와 오크 그리고 기타 등등이 합쳐진 '해일'에 합류하는 게 보였다.
크르르륵-
와우우우-
카아아앙-
...
순간 뒤섞여 들려오는 마수와 몬스터들의 울부짖음!
여전히 거센 기세로 밀려오는 거대한 '해일'!
이제는 마수와 몬스터 해일이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이 해일 안에 들어가 있는 생물들의 종류가 많아졌다.
"...저거 곰 아냐?"
이런 미친!
곰이 왜 마수랑 몬스터랑 같이 달린단 말인가!?
수천의 마수와 몬스터, 맹수가 뒤섞여 밀려오는 해일!
보통사람 아니, 어지간한 헌터라도 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릴 광경.
하지만 밤새 이 녀석들과 격전을 치른 천문석은 담담하게 말했다.
"시끄럽다."
이제는 전율, 공포 그런 건 느껴지지도 않았다.
두서없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
'시끄럽다. 힘들다. 피곤하다. 집에 좀 갔으면···.'
거점 마을 보안관의 말이 맞았다.
고산 마을까지 이어지는 비포장도로 위 5개의 거점 마을 모두 몬스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몬스터들은 하늘 고래가 나타나자,
먹음직한 미끼라도 본 것처럼 거점 마을을 버리고 하늘 고래를 따라 달렸다.
하늘 고래를 따라 달리는 엄청난 수의 마수와 몬스터.
그리고 하늘 고래가 따라가는 천문석이 탄 화물차.
화물차는 밤새 비포장도로 위를 달렸고,
천문석은 쉴 새 없이 쫓아오는 몬스터를 떼어내고 길을 뚫었다.
수십 번의 격전을 치른 지금 상황은 이렇다.
[화물차 <- 하늘 고래 <- 엄청난 수의 마수와 몬스터의 해일!]
“...”
천문석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단지 물품 배송일을 맡았을 뿐인데···.
뭔가 뭔가. 아주 대단히 크게 잘못 돼가고 있었다.
천문석은 화물차를 따라 달리는 마수와 몬스터의 해일을 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거 고산 마을에서 진짜 해결할 수는 있는 거야?"
보안관의 말에 따르면 고산 마을로 재금 보안과 재금 연구소의 사람들이 이동했다고 했다.
지금 믿을 건 재금 보안의 전투 병력과 재금 연구소의 마력 각성자뿐이다.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의 전투 병력과 마력 각성자들은 일본 섬 1000엔 매입 사건 같은 어이없지만, 엄청난 일을 해낸 실력자들이다.
그러나 화물차를 쫓아 달리는 '해일'을 보고 있으면 의문이 들었다.
엄청난 수의 마수와 몬스터의 해일.
단지 숫자만 많은 것이 아니다.
저 안에는 늪지 트롤과 마스터 급 오크.
그리고 여러 몬스터의 우두머리들까지 모여있었다.
이놈들을 고산 마을에서 막지 못한다면 끝장이다.
더는 화물차로 갈 곳이 없었다.
비포장도로는 고산 마을을 지나 좀 더 이어지지만,
그 뒤로는 끝없이 펼쳐진 산맥뿐 거점 마을은 없었다.
어떻게든 고산 마을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천문석이 마음의 결심을 하는 순간,
하늘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진동.
구으으으응-
여명이 밝아오는 하늘.
거대한 황금빛 고래가 빙글빙글 하늘을 유영하며 춤을 추고 있었다.
"저건 또 어떻게 처리하지···?"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깊은 한숨.
하늘 고래는 공격성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 고래를 따라 수많은 마수와 몬스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황금빛 고래는 마수와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등대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아득하게 높은 하늘을 나는 거대한 산악 같은 고래를 처리할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때 김철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문석아!"
천문석은 단숨에 지붕을 달려 화물차 보닛으로 이동했다.
"철수형?"
금간 유리창 너머 운전석,
김철수는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고산 마을! 드디어 보인다!"
천문석은 정면을 봤다.
여명에 모습을 드러내는,
하늘에 닿을 듯 거대한 산맥!
시야 전체를 가리는 거대한 산맥으로 황토색 비포장도로가 이어진다.
마치 하늘로 이어지는 듯 위로 솟구친 비포장도로 끝에는,
회색빛 강화 콘크리트 성벽에 둘러싸인 거점 마을이 있었다.
수많은 마경,
마석 광산과 몬스터 광산들.
그리고 아직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마수와 몬스터들이 있는 곳.
신 태백산맥의 입구,
고산(高山) 마을이었다!
이번 일의 마무리를 지을 장소가 눈앞에 나타났다!
---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으로 강화된 시력으로 고산 마을 주위를 샅샅이 살폈다.
보안관의 말대로 고산 마을 주위에는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천문석은 바로 고개를 돌려 김철수를 봤다.
"철수형. 몬스터가 없습니다. 계획대로 갑니까?"
바로 고개를 끄덕이는 김철수.
"그래 계획대로 가자."
천문석은 우선순위를 확인했다.
"1순위는?"
"생명!"
"2순위는?"
"화물!"
우선순위를 다시 한번 확인한 두 사람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철수형. 로프 확인하세요. 전 화물 묶을게요."
김철수가 로프와 하네스를 확인하는 사이.
천문석은 지붕에 뚫린 구멍을 통해 화물칸으로 들어갔다.
화물칸은 사방에 뚫린 구멍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환했다.
밤새 치른 격전으로 곳곳에 뚫린 구멍이 한두 개가 아니다.
게다가 천문석이 안에 들어가자.
파드드득-
사방으로 도망치는 동물들 소리까지 들렸다.
얼핏 보이는 토끼, 오소리···.
"저거 너구리야?"
어이없게도 어느새 작은 동물들이 구멍으로 들어와 화물칸 안에 숨어 있었다.
천문석은 동물들은 신경을 끊었다.
지금은 화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재금 그룹에서 의뢰받은 배송품.
가로세로높이 1미터.
정사각형 모양의 금속상자.
다행히 금속상자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다.
배송품을 확인한 천문석은 로프를 풀어 금속상자를 단단히 묶기 시작했다.
천문석은 머릿속으로 계획을 점검했다.
1. 가능하면 화물차째로 고산 마을로 들어간다.
2. 그게 여의치 않으면 로프를 장벽 위로 던져 올려 몸을 우선 빼낸다.
3. 그리고 가능하다면 배송 화물을 묶은 로프를 당겨 배송품을 장벽 위로 끌어 올린다.
탁, 탁-
로프를 매듭짓고,
다시 한번 묶기 위해 금속상자에 몸을 붙인 순간.
익숙한 감각이 느껴졌다.
불과 얼음이 동시에 움직이는 듯한 뜨거운 선연함!
선연함이 느껴지는 곳은 장갑이 밀려나 드러난 손목이었다.
'천강흔?'
천문석은 재빨리 건틀릿과 안전 장갑을 벗었다.
선명한 천강흔이 손에 떠올라 있다!
순간 천강흔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떨림.
"어?"
거대한 생명체의 울음소리 같은 파동이 천강흔이 나타난 손을 훑고 지나갔다!
강화 전투복을 입은 몸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기묘한 파동이 천강흔이 드러난 손에서만 느껴지고 있었다.
천문석은 파동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바로 알아챘다.
의뢰받은 배송 화물!
정사각형 모양의 금속상자!
여기서 파동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파동을 인식하는 순간,
천문석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이 금속상자에서 흘러나오는,
눈에 보이지도 기감에도 걸리지 않았던 파동이 하늘로 뻗어 나간다.
문득 고개를 들어 뻥 뚫린 천장을 본다.
천장의 구멍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
호수에 던져진 돌이 일으킨 물결처럼.
푸른 하늘로 퍼져나가는 거대한 파동.
이 거대한 파동이 물결치는 푸른 하늘,
거대한 황금빛 생명체가 춤을 추고 있었다.
기묘한 파동과 하늘 고래.
천문석은 마침내 진실을 깨달았다.
하늘 고래는 화물차를 따라온 게 아니었다.
하늘로 퍼져나가는 파동을 따라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이 파동은 재금 그룹에서 의뢰받은 배송 화물, 금속상자에서 나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