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4
목적지로 삼았던 거점 마을이 드디어 나타났지만,
화물차 운전석의 천문석과 김철수의 표정은 어두웠다.
천문석은 고개를 들어 거점 마을을 살폈다.
거점 마을은 비포장도로에서 긴 오르막길로 이어진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높은 언덕은 강화 철근과 콘크리트로 쌓아 올린 십 미터가 훌쩍 넘어가는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언덕 자체의 높이를 더하면 지상에서 몇십 미터 높이에 있는 방벽.
어지간한 대형 몬스터도 넘는 게 불가능한 높이다.
저 거점 마을로 들어가면 해일처럼 밀려오는 마수들도 걱정할 게 없었다.
문제는 저 안으로 들어가야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 거점 마을과 이어지는 진입로에는 몬스터가 쫙 깔려 있었다.
오크 수백 마리!
그것도 완전히 무장한 오크들이다!
수백의 오크 무리가 진입로에 뭉쳐 거점 마을을 공격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성 무기 없이 돌과 창을 던지는 수준의 공격,
단단한 방벽이 있는 거점 마을에는 위협적이지 않은 공격이었다.
평소라면 방벽 위 헌터들의 지원을 받으며,
오크 무리를 꿰뚫고 밀고 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저 오크들을 뚫고 마을로 들어가는 사이,
등 뒤에서 밀려오는 마수의 해일에 삼켜질 것이다.
오크와 마수 사이에 갇히게 되면 끝장이다.
그리고 무리하게 마을로 진입하려다가 상황이 더 안 좋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
혹시나 오크나 마수가 마을로 새어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거점 마을은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다.
"문석아. 어떡할까?"
김철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나 이미 묻고 있는 김철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저 거점 마을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천문석은 들고 있던 지도를 내려놨다.
고산 마을까지 이어진 경로 중에 있는 거점 마을의 수는 모두 5개!
지금으로서는 적당한 거점 마을이 나올 때까지 계속 달릴 수밖에 없었다.
"철수형. 우선은 달려야 할 것 같네요."
“알았다.”
김철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천문석은 다시 화물차 위로 올라갔다.
여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하늘 위 구름 속에는 거대한 황금빛 고래가 날고,
네 명의 헌터는 여전히 죽을힘을 다해서 달린다.
그리고 네 명의 헌터 뒤에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마수의 무리도 마찬가지다.
순간 천문석은 이상함을 느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마수들.
그리고 하늘을 나는 황금빛 고래.
저 마수들 고래한테 겁을 먹고 도망친 게 아닌가?
왜 계속 고래가 날아가는 방향으로 쫓아오는 거지?
그러나 생각을 길게 이어갈 틈은 없었다.
와우우우-
화물차 전면에서 들려오는 전투 함성!
비포장도로 위에 하나둘 오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화물차가 계속 달리기 위해서는 길을 뚫어야 했다!
"문석아! 오크!"
천문석은 툭 튀어나온 화물차 보닛으로 이동해 창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철수형! 정면으로 계속 달려요! 피하지 말아요!"
순식간에 도로 앞에 모여들어 무기를 들어 올리는 십여 마리의 오크들.
오크들의 함성이 쏟아지고,
각자의 무기로 방패를 두들긴다!
와우우우-
쾅, 쾅, 쾅-
마치 전장의 북소리처럼 심장 고동이 점점 빨라지고,
피가 끓어 오르는 순간!
콰앙-
화물차 보닛 위,
천문석의 창과 오크의 무기가 충돌했다.
아니 충돌한 것처럼 보일 때.
파르륵-
진동하는 창이 무기를 타고 흘러 오크의 투구를 빗겨 때렸다.
창과 투구가 부딪히는 임팩트의 순간!
천문석은 창을 잡은 손목을 부드럽게 움직여 창을 빗겨 때렸다.
픽-
제대로 들어가지 않은 타격!
그러나 이 창에는 화물차의 돌진력이 실려 있었다.
오크의 투구는 빗겨 때린 엄청난 힘에 단숨에 회전했고.
우드드득-
회전하는 투구에 목이 돌아간 오크는 일격에 절명했다.
콰앙-
화물차는 절명한 오크를 들이박고 나아갔다!
하앗-
천문석은 기합을 지르며 들이받힌 오크를 옆으로 걷어차고,
화물차 보닛을 밟고 일어서 쉬지 않고 창을 찔렀다.
파르르륵-
천문석의 창대가 부러질 듯 요동치고,
타점을 흘리는 공격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픽, 픽, 픽-
빗겨 때리는 공격이 적중할 때마다,
전혀 위력적이지 않은 소리가 터져 나온다.
그러나 화물차의 돌진력이 실린 창을 빗맞는 순간.
오크의 목이 돌아가고 팔이 꺾이고 다리가 으스러져 주저앉았다.
중세 기사의 기마 돌격 이상의 힘과 속도가 실린 화물차 돌격!
천문석이 탄 화물차는 거의 속도를 줄이지 않고,
점점히 흩어진 오크 무리를 꿰뚫고 비포장도로 위를 달렸다.
그리고 화물차가 흩어진 오크 무리를 돌파해 거점 마을을 지나치는 순간.
하늘에서 신호탄이 터졌다.
파아아앙-
피시시시-
하늘 높은 곳에서 폭발해 푸른 빛을 뿌리며, 천천히 떨어져 내리는 신호탄!
신호탄을 발사된 위치는 언덕 위 거점 마을 장벽이었다.
장벽 위 다급히 손을 흔드는 경찰 복장의 사람이 보였다.
경찰 복장의 사람은 장벽 위에 거치된 무기를 가리키며,
도와줄 테니 거점 마을로 들어오라는 듯 손을 흔들고 있었다.
천문석은 창으로 허공에 'X'를 그어 안된다는 뜻을 밝혔다.
무리하게 거점 마을로 진입하려다가 잘못되면 거점 마을이 초토화된다.
이때 거대한 함성이 터졌다.
와우우-
와우우우-
와우우우우-
...
곳곳에서 터져 나와,
순식간에 하나로 뭉치는 함성!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함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함성이 터진 곳은 마을로 올라가는 진입로 오크들이 모인 곳이었다.
“...쟤네들은 또 왜 저래?”
진입로에 가득 깔린 오크들이 도끼와 검, 몽둥이를 들어 올리며 미친듯이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와우우우우-
하늘을 향해 솟아나는 무기들!
땅을 뒤흔들며 들려오는 진동!
쿵, 쿵, 쿵, 쿵-
수백 오크의 발 구름에 도로가 요동치는 순간!
진입로에 가득한 오크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경사지를 뛰어 내려왔다.
와우우우우-
두두두두두-
거대한 함성에 천지가 요동치고,
폭발하듯 일어나는 투지가 전신을 따끔 거리게 한다!
수많은 오크는 하나같이 무기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늘!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자 보였다.
자욱하게 깔린 구름 속에서 이동하는 거대한 황금빛.
환호성을 지르는 오크들의 무기가 향한 하늘,
두꺼운 구름 속에는 거대한 황금빛 고래가 날고 있었다.
이 순간 천문석은 모든 걸 깨달았다!
마수의 해일은 고래에게서 도망쳤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늘을 나는 황금빛 고래를 쫓아 달린 것이다!
이 오크들처럼!
순간 천문석의 머리가 번뜩였다!
즉, 황금빛 고래만 피해서 달리면 마수와 몬스터들을 피할 수 있다!
"철수형! 오른쪽! 도로 가장자리로 달려요!"
천문석은 바로 외쳤고 화물차는 도로 가장자리로 이동했다.
구으으응-
"어···?"
너무나 거대해 오히려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천문석은 알 수 있었다.
순간, 구름 속을 나는 고래의 움직임이 미세하게 변했다.
‘설마···?’
"철수형! 왼쪽! 도로 왼쪽 가장자리로 붙어요!"
구으으응-
도로 왼쪽 가장자리로 이동하는 화물차.
그리고 다시 한번 미세하게 변하는 고래의 움직임.
설마가 맞았다.
거대한 고래는 화물차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아니···. 왜 따라오는 거야···?"
천문석이 어이없어할 때,
뒤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비명.
"오크가 왜!? 으아악-"
"말하기 전에 달려! 휩쓸리면 끝장이다!"
"시바, 시바! 한국에 누가 오자고 한 거야!"
"야! 선생···. 아니 시발놈아! 인간적으로 이제는 좀 세워 줘!"
...
네 명의 헌터들은 옆에서 쏟아져 들어온 오크들을 간신히 떨쳐내며 미친듯이 화물차로 달리고 있었다.
"하-. 저런 멍청한 녀석들."
천문석은 이들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마수의 해일과 오크 무리는 모두 하늘의 고래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지금 상황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화물차 <- 하늘 고래 <- 악당 헌터 <- 오크 무리 <- 마수 해일]
화물차를 따라오는 게 아니라,
그냥 옆으로 빠져서 달려가면.
[화물차 <- 하늘 고래 <- 오크 무리 <- 마수 해일]
[악당 헌터]
이렇게 된다.
즉, 죽음의 행진에서 빠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악당 헌터들은 눈앞의 당근에 홀린 당나귀처럼,
시야가 좁아져 맹목적으로 눈앞의 화물차를 향해서 달리고 있었다.
악당이라면 빠른 눈치로 항상 주위의 위험을 살펴야 하는 법.
"...이런 눈치 없는 녀석들···."
저 멍청하고 눈치 없는 악당 놈들이 이제는 불쌍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이때 진입로에서 쏟아지는 오크 무리와 마수 해일이 충돌했다.
그르르르륵-
늪지 트롤의 나무를 비비는듯한 포효가 터지고.
와우우우우-
오크들의 피를 끓게 하는 함성이 폭발하는 순간.
콰아앙-
쿵, 쿵, 쿵-
오크 무리와 마수 해일은 격돌해 서로를 으스러트렸다.
박살 나 사방으로 날아가는 육체!
폭발하듯 쏟아지는 피!
꿰에에엑, 쿵-
돌진하는 멧돼지 마수가 오크를 들이받고.
크아아악-
오크가 함성을 지르며 미친듯이 몽둥이를 내려친다.
발톱을 세워 떨어지는 마수들과
사방에서 밀려오는 오크의 방패 벽!
크르르륵-
쿵, 쿵, 쿵-
늪지 트롤의 거대한 기둥 같은 팔이 휘둘러지고,
방패째로 피떡이 되어 으스러진 오크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순간 터져 나오는 엄청난 함성!
와우우우우-
거대한 도끼를 쌍수로 든 오크가 말 그대로 마수를 갈아버리며 늪지 트롤에게 돌진했다.
오크의 돌진 경로를 따라 폭발하는 간헐천처럼 치솟는 피보라!
피보라를 휘감은 피의 폭풍이 전진하고 있다.
순간 전신을 달리는 전율이 느껴졌다!
천문석은 홀린 듯이 돌진하는 오크를 봤다.
오크는 거대한 하얀 도끼,
뼈를 갈아내 만든 뼈 도끼를 들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거야···?"
천문석이 자신도 모르게 말한 순간,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왔다.
"이런 미친! 오러?"
"오크가 왜 오러를!?"
"이런 젠장. 한국이 기회의 땅이라고!?"
"입 닥치고 달려! 새끼들아! 잡히면 끝장난다!"
그렇다.
저 뼈 도끼에는 오러가 실려 있었다.
어이없게도 저 오크는 마스터의 경지에 달한 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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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오러가 오크의 몬스터 오러라니.
천문석은 어이없어하며 오크를 자세히 살폈다.
오크는 완전한 마스터,
절정의 경지는 아니었다.
오러, 강기가 끊임없이 흐르지는 않는다.
메마른 하천처럼.
뚝, 뚝- 끊겨 제대로 이어지지 않는 오러.
저 오크는 마스터의 벽에 반쯤 몸을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신체 재구성이 조금씩 일어나는 경지.
일반적인 오크보다 움직임이 몇 배나 빠르고 여기에 오크의 종족 특성이 더해졌다.
폭발하는 투지!
자잘한 공격을 몸으로 흘리며 마수 무리를 폭풍처럼 꿰뚫는 마스터 급 오크!
오크의 강렬한 투지가 경지 이상의 힘을 끌어내고 있었다.
천문석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렸다.
저 오크가 거점 마을에 흘러 들어갔다가는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다!
다행히 최악의 상황은 면한 것이다.
이때 늪지 트롤과 마스터 오크가 격돌했다.
크르르륵-
와우우우우-
쉐에에엑-
오크의 오러가 담긴 뼈 도끼가 늪지 트롤의 팔로 떨어져 내린다.
순간 빳빳이 일어나는 늪지 트롤의 녹색 털!
파바바밧-
녹색 털과 뼈 도끼가 격돌하는 순간 녹색 연기가 자욱하게 솟구쳤다!
파아아앙-
그리고 들려오는 폭음!
까아앙, 깡-
강철과 강철이 맞부딪히는 듯한 폭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깡, 깡, 까아앙-
녹색 연기 속 마스터 오크와 늪지 트롤이 격렬하게 싸웠다.
그리고 그 주위 마수와 수백 오크의 격전이 이어졌다.
이순간 천문석은 눈치챘다.
"이거···. 기회잖아!"
여전히 마수 해일은 하늘 고래를 따라 달리지만,
오크 무리와 싸우며 그 기세가 확 죽었다!
게다가 마수 무리를 이끌고 달리던 강적 늪지 트롤은 마스터 오크에게 발이 묶였다!
기회였다!
도망칠 기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