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70화 (71/1,336)

#070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골목길.

천문석은 장민이 챙겨준 쇼핑백을 들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아직 해가 지긴 이른 시간이라 주위는 환했다.

느긋하게 골목길을 걸어 언덕길로 들어서는 순간.

언덕길을 오르는 낯익은데 낯선 뒷모습이 보였다.

단정하게 하나로 올려 묶은 당고머리.

새하얀 새틴 셔츠,

검은색 H라인 스커트에 검은 구두.

어깨에는 벗은 자켓을 한 손으로 걸치고,

다른 손으로는 종량제 봉투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류세연?”

어쩐지 류세연이 생각나는 분위기인데···.

입은 옷과 머리는 면접 보러 가는 취준생 스타일이었다.

세연이가 아닌가?

잠시 고민하던 천문석은 그냥 한번 불러봤다.

"야! 류세연!"

천문석이 부른 순간 언덕길을 오르던 사람이 흠칫 놀라 멈췄다!

"...!"

감이 왔다.

류세연이다!

순간 잠시 멈춰섰던 류세연이 뒤도 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타다다다닥-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류세연을 따라 뛰어가며 외쳤다.

"야! 뭐야? 왜 도망가!"

"저 류세연 아니에요! 따라오지 마세요!"

"뭔 소리야? 목소리가 류세연인데?!"

"아니라니까!"

버럭 소리치고,

하이힐을 신은 채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류세연!

천문석은 완전히 감을 잡고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누가 하이힐을 신고 저렇게 달릴 수 있을까?

달리기 선출 류세연뿐이다!

타다다닥-

"야! 구두 신고 뛰지 마! 넘어지면 다쳐!"

천문석이 외쳤지만,

류세연은 아무 대답 없이 긴 다리로 땅을 박차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역시 선출다운 엄청난 속도!

며칠 전이라면 류세연을 따라잡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을 되찾고 생사팔문의 보법마저 일부 얻었다.

천문석은 소리도 없이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문득 고개를 돌리는 류세연.

순간 천문석은 세연의 목에 팔을 걸었다!

“잡았다!”

켁-

"뭐야! 언제 여기까지 왔어!? 어! 어!! 어!!!"

류세연이 놀라는 순간.

천문석도 깜짝 놀라 목에 감은 팔을 놓고 재빨리 떨어졌다.

처음 보는 얼굴!

차가운 인상의 미녀가 놀란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류세연?“

천문석은 혹시나 해 다시 한번 확인했다.

류세연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휙 돌리다 비명을 질렀다.

"으앗! 오빠!"

익숙치 않은 하이힐에 땅을 헛 밟고 비틀거리는 류세연.

천문석은 재빨리 류세연의 어깨를 잡아줬다.

"야, 조심해!"

"..."

균형을 잡는 순간,

류세연은 몸을 휙 돌려 얼굴을 감췄다.

"너, 지금 뭐 하냐?"

"..."

천문석이 다시 질문했지만,

류세연은 몸을 돌린 채 대답하지 않았다.

'이 녀석 뭐지?"

류세연이 초딩일때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을 같이 지냈는데,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너 무슨 일 있냐?"

"..."

그러나 여전히 대답 없는 류세연.

생경한 옷을 입고 화장까지 해서인가?

류세연에게서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천문석은 생각나는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휴대폰 고치는 데 오래 걸려서 그래?"

"..."

"공짜로 고쳐줬는데 괜찮아. 카레도 끓여놨잖아."

"...!"

류세연은 흠칫 놀라 부르르 몸을 떨었다.

뭐지?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

이때 얼굴을 감춘 류세연의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들려오는 흐느낌!

흐, 흐흑-

천문석은 당황해서 어깨를 잡은 팔을 놓았다.

“...너 우는 거야? 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천문석은 류세연의 얼굴을 보기 위해 움직였지만, 류세연은 계속 몸을 돌려 얼굴을 피했다.

그러나 천문석은 며칠 전과 달랐다.

류세연의 얼굴 앞,

허공에서 마주치는 두 손!

쾅-

아앗-!

굉천수의 우렛소리에 깜짝 놀란 순간,

천문석은 번개같이 움직여 류세연의 얼굴을 봤다.

"...!"

류세연은 울고 있지 않았다.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안간힘을 쓰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오빠···. 머리···. 괜찮아···.”

웃음을 참느라 간신히 말하는 류세연.

“멋있어···. 풉-”

“...”

머리가 빡빡이가 된 걸 깜빡하고 있던 천문석은 굳어졌고.

류세연은 입을 가린 채, 전신을 부들부들 떨면서 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

"흐흡, 흐흐흑, 흡-"

천문석은 해탈한 듯 말했다.

“야. 그냥 웃어. 나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괜히 참지 마.”

“나···. 참는 거···. 아냐···. 흡- 아무렇지도···. 않아···. 흐흑-”

“아무렇지도 않기는!!”

천문석은 버럭 소리치다가 류세연의 손에 들린 종량제 봉투를 봤다.

봉투 밖으로 드러난 낯익은 형체!

"어? 너 그 봉투?!"

순간 반응이 왔다.

류세연은 종량제 봉투를 손에 든 쟈켓으로 감추고 재빨리 앞으로 걸어갔다.

"...빨리 가자."

류세연은 어느새 웃음기마저 사라진 채 당황하고 있었다!

천문석은 완전히 감을 잡았다!

“야! 너 그 종량제 봉투 뭐야?”

“응···?”

류세연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걷는 속도를 올렸다.

다다다닥-

거의 뛰어가듯이 걷는 류세연.

천문석은 류세연을 바짝 따라 걸으며 물었다.

"그 봉투 뭐냐니까?"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너 쟈켓속에 숨긴 그 봉투 말야!"

천문석은 단숨에 접근해 쟈켓속에 숨긴 봉투를 낚아챘다.

"앗! 안돼!"

놀라는 류세연을 등으로 막고,

종량제 봉투를 여는 순간!

예상한 그것이 보였다.

잘 손질된 오징어!

"...!"

천문석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냉장고에 있던 야채 카레.

종량제 봉투 속 잘 손질된 오징어.

카레와 오징어.

따로따로면 맛있는 음식이지만,

이게 합쳐지면 끔찍한 혼종이 태어난다.

오래전 류세연이 한번 만든 후,

영원히 봉인시킨 그 음식!

오징어 카레!

분노한 천문석은 류세연을 노려 봤다.

"너···! 내가 그거 다시는 만들지 말라고 했지! 다시 만들면 딱밤 맞기로 약속했지?"

류세연은 어설프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징어 카레 맛있어."

천문석은 선고했다.

"피고 류세연에게 딱밤 3대를 선고한다!"

휴대폰 늦게 고친 건 괜찮지만,

오징어 카레는 참을 수 없었다!

천문석은 전법륜인 딱밤을 때렸다!

딱, 딱, 딱-!

앗, 읏, 억-!

...

---

"그래서 그 옷은 뭐야? 너 어디 갔다 온 거야?"

천문석은 저녁을 만들면서 류세연에게 물었다.

어느새 녹색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누운 류세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다.

"선보고 왔어."

"뭐···?"

깜짝 놀라는 천문석에게 손으로 V자를 그리는 류세연.

"용역 제공자와 용역 구매자의 선. 면접 보고 왔어."

"면접?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취직하게? 대학은 어떻게 하고?"

"대학 면접."

"..."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힌 천문석.

천문석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이없는 녀석. 딱 대라! 딱밤 열대만 더 맞자."

순간 류세연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천문석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 뭐야? 뭐 하는 거야!?"

당황하는 천문석에게 얼굴을 바짝 붙이는 류세연.

웃음기 하나 없는 차가운 얼굴의 류세연.

화장을 지우지 않은 생경한 얼굴이 다가오자,

천문석은 굳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코끝이 맞닿을 듯한 거리에 얼굴이 멈추고,

돌연 류세연의 눈썹 끝이 올라갔다.

"이거 봐!"

류세연은 자신의 이마를 가리키며 외쳤다.

"이걸 보면서도! 딱밤을 더 때리겠다는 말이 나와!?"

류세연의 새하얀 이마 한가운데는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

오징어 카레는 용서할 수 없지만,

빨갛게 부푼 이마를 보니 좀 미안하긴 했다.

내가 너무 심했던 건가?

아무리 10%도 안 되는 힘이고 예전에 딱밤 맞기로 약속했어도···.

천문석이 생각에 잠기자.

바로 앞에서 천문석을 보던 류세연이 빙그레 웃었다.

"지금 미안했지? 미안하면 내 부탁 하나 들어줘."

"무슨 부탁인데?"

"우리 학교 날아갔잖아?"

그렇다.

류세연이 다니던 고등학교는 균열이 사라지면서 거기에 휩쓸려 같이 사라졌다.

인명 피해가 없는 게 천운인 큰 사건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조기 졸업하고, 바로 대학에 들어가려고."

"그게 되냐? 너 수능도 안 봤잖아?"

천문석의 의문에 류세연은 짧게 대답했다.

"돼."

"..."

"1학년 때도 조기 졸업 권유가 왔었어. 하여튼 오늘 대학 면접 보고 왔어. 나 합격하면 대학 입학식 때 같이 가줘."

류세연의 졸업식, 입학식에 같이 가는 건 천문석에게 익숙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때는 먼저 직장으로 돌아간 아빠를 대신에 천문석이 류세연과 같이 짜장면을 먹었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는 아예 천문석 혼자 참석했었다.

“...”

류세연은 당연히 부모님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혹시나 의기소침해 있을까 봐 유심히 얼굴을 살폈지만.

세연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뭐야? 무슨 생각하기에 표정이 그리 심각해?"

오히려 심각한 천문석의 얼굴을 놀리는 류세연.

"됐고. 밥 다 돼 가니까. 얼른 가서 얼굴 씻고 와라."

"안돼. 이거 장민 언니가 소개해 준 뷰티샵에서! 2시간 동안 받은 화장이란 말야! 내일까지 이대로 있을 거야."

순간 뇌리를 타고 흐르는 전율!

꼬맹이 집에서 나올 때 장민 대표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다음에는 꼭 세연이랑 같이 오세요. 그리고 집에 가면 깜짝 놀라실 거에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하던 장민 대표!

"너···. 장민 대표님이랑 연락 계속했냐?"

"당연하지. 나 장민 언니 트친이야."

휴대폰을 흔들며 말하는 류세연.

"트친?"

"트위터 친구. 장민 언니 장난 아냐. 비공개 트위터인데. 엄청 유명한 사람도 장민 언니 트위터 팔로워하고 있어. 이게 장민 언니 트위터."

불쑥 얼굴 앞으로 다가오는 휴대폰.

류세연의 휴대폰 화면에는 장민 대표의 트위터가 떠 있었다.

화면을 스크롤 해서 한 트윗에서 멈추는 류세연.

"이거 제일 인기 있는 영상이야."

류세연은 영상을 재생했다.

그러자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급 헌터는 광을 낸다!"

바닥에 쪼그려 앉은 특급 헌터 꼬맹이가,

왁스 걸레로 나무 바닥을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다.

"얍, 얍, 이야얍!"

쓰윽, 쓱, 쓱, 쓱-

순식간에 반짝반짝 광택이 생기는 낯익은 나무 바닥.

오늘 방문했던 타워 팰리스 71층 꼬맹이 집의 거실이다.

꼬맹이는 열심히 왁스 걸레로 나무 바닥에 광택을 내고,

눈에 익은 계약서 종이를 가져와 뒷면에 'ㅡ' 선 하나를 받았다.

“특급 헌터는 심부름을 완수했다!”

세상을 다 가진 듯 환하게 웃는 특급 헌터 꼬맹이.

...

영상에는 '씩씩하다, 멋지다, 훌륭하다'라는 멘션이 잔뜩 달려 있었다.

그러나 이 영상 속 진실을 아는 천문석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이때 들려오는 류세연의 목소리.

"오늘 장민 언니네 갔다 왔지? 특급 헌터는 잘 있어?"

천문석은 사실대로 대답했다.

"특급 헌터, 고기 먹고 울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고기 먹고 울었다고?"

"그런 게 있어. 요리 끝나가니까. 상 펴고 반찬 놔라."

류세연은 의아한 얼굴로 상을 펴고 반찬을 놨다.

천문석은 상 위에 오늘의 요리를 놓았다.

오늘 저녁은 야채 카레와 오징어 볶음.

그리고 특이하게 생긴 고등어구이였다.

"..."

류세연은 고등어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카레는 내가 했고, 오징어는 내가 사 온 건데···. 이건 뭐야? 고등어? 이 고등어 머리에 돌기가 있네? 가시도 있고. 이건 무슨 고등어야?"

류세연 말대로 장민 대표가 챙겨준 고등어는 머리에는 돌기가 몸에는 뾰족한 가시가 있었다.

처음 보는 특이하게 생긴 고등어였다.

그러나 이 고등어에는 특이한 형태 이상의 슬픈 사연이 있었다.

천문석은 류세연에게 대답했다.

"이 고등어. 특급 헌터의 눈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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