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천문석이 건물주의 꿈을 꾸며 잠든 새벽.
은은한 빛에 휩싸인 동공에 바람이 불어왔다.
휘잉-
바람이 부는 순간.
동공의 중앙, 높은 단 위쪽 허공에서 섬광과 함께 들려오는 작은 울음소리.
키긱, 킥-
가물가물 미약한 빛의 날개를 가진 작은 동물이 빙글빙글 허공을 날아 높은 단 중앙에 착지했다.
착지 순간 사라지는 미약한 빛의 날개.
작은 동물의 정체는 빛나는 황금색 줄무늬를 가진 어린 새끼 다람쥐였다.
새끼 다람쥐는 양팔로 도토리 네댓 개를 꼭 쥐고 있었다.
킥, 키킥-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 주위를 둘러보는 새끼 다람쥐.
새끼 다람쥐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이상을 찾지 못하자 달리기 시작했다.
사방에 쌓인 도토리 무더기 사이를 신나게 달리는 새끼 다람쥐.
새끼 다람쥐는 기뻐하고 있었다.
힘이 점점 사라져 걱정했는데,
마침내 집에 갈 차비와 가지고 갈 도토리를 모두 모았다!
오래전 어떤 마법사에게 소환된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 일족의 새끼 다람쥐.
케페니안 차원의 황금 다람쥐 일족은 합리적인 대가를 받고 싸워주는 용병 일족이다.
소환된 새끼 다람쥐는 계약대로 바로 전투에 뛰어들었고,
케페니안 차원에서 전해지는 힘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했다.
그리고 대금을 받으러 가니.
어이없게도 자신을 소환한 마법사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킥!"
새끼 다람쥐는 자신도 모르게 분노한 울음소리를 냈다.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는 일이다.
대가도 준비하지 않고 소환 후 도망쳐 버리다니!
바로 쫓아가서 강제로 채무 이행을 하려 했으나,
마법사는 거대한 새에게 잡혀 엄청난 속도로 멀어졌다.
"..."
마법사 레어를 샅샅이 뒤졌으나,
이미 소환 흔적까지 깨끗이 지운 상태.
결국, 소환자가 도망친 케페니안 새끼 다람쥐는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가 됐다.
가끔가다가 이런 먹고 째는 소환자가 있다고 들었지만,
첫 임무부터 이렇게 될 줄 새끼 다람쥐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부터 새끼 다람쥐는 엄청난 고생을 했다.
소환자가 제대로 계약 마무리를 하지 않아서 고향 차원으로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다.
집으로 돌아갈 소환 술식도 사라졌고,
고향 차원에서 전해주는 힘을 받는 순간 엄청난 부채도 발생했다.
이대로 돌아갔다가는 엄청난 빚에 숲에서 쫓겨나 어둡고 축축한 늪지나 땅굴에서 평생 빚을 갚으며 살게 생겼다.
방법은 하나였다.
돌아가서 빚을 갚을 열매들을 마련하고,
고향 차원으로 이어진 문을 열어줄 마법사도 찾아야 했다.
문을 열어줄 마법사는 금방 찾았다.
하지만 찾아낸 지하세계 마법사가 원하는 비용이 엄청났다.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 일족을 등쳐먹는,
돈벌레 같은 지하세계의 마법사 놈들!
다행히 도망친 마법사가 마법 재료를 모아오기 위해 만든 유령 개미들이 남아있었다.
새끼 다람쥐는 이 유령 개미들을 모조리 부하로 삼았다.
어렵지는 않았다.
새끼 다람쥐는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고,
케페니안 일족은 유령, 골렘, 악마···. 무엇이든 엄청 아프게 깨물어줄 수 있었으니까.
순식간에 새끼 다람쥐의 부하가 된 겁쟁이 유령 개미들은 오랫동안 온갖 물건들을 사방에서 모아 왔다.
대부분 별 가치 없는 물건들이지만,
가끔은 깜짝 놀랄 만큼 가치 있는 물건들도 있었다.
이렇게 유령 개미가 열심히 차비를 버는 동안.
새끼 다람쥐는 열심히 숲을 누비며 나무열매를 모았다.
그러다 발견한 열매!
이 세계에는 엄청 맛있는 나무 열매가 있었다.
도토리!
새끼 다람쥐는 도토리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먹을 때마다 행복해지는 이 씁쓸한 맛이라니!
이 도토리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빚을 갚고도 순식간에 엄청난 부자가 된다!
가장 높은 나무를 통째로 사고,
번쩍번쩍 빛나는 황금 갑옷과 무기도 살 수 있다.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의 존재의의는 격의 상승.
어쩌면 일꾼의 격을 단숨에 뛰어넘어 전사, 사제의 격에 달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꿈에만 그리던 최고의 격.
숲을 통째로 소유하고 놀고먹는,
숲 주인의 격에 달할 수도 있었다!
새끼 다람쥐는 그날부터 보물이 가득한 도토리 숲을 철저히 지켰다.
멧돼지, 까마귀, 어치, 늑대, 호랑이···.
자신의 보물 도토리를 하나라도 먹는 놈들은 모조리 엄청 아프게 깨물어 쫓아냈다.
이렇게 도토리 숲을 차지한 새끼 다람쥐는 열심히 도토리를 날랐고,
나른 도토리에 열심히 힘을 불어넣어 고향으로 가져갈 보물로 만들었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목표를 모두 채웠다!
킥-
신나게 달리던 새끼 다람쥐가 우뚝 멈춰섰다.
순간 다람쥐가 잡고 있던 도토리들이 뚝 떨어졌다.
도르르륵-
땅을 굴러 무너진 무더기 앞에서 멈추는 도토리.
자신이 모아둔 도토리 무더기가 무너져 있었다!
깜짝 놀란 새끼 다람쥐는 재빨리 무너진 도토리 무더기를 살폈고 순식간에 계산을 끝냈다.
도토리 143개가 사라졌다!
킥, 키킥-
새끼 다람쥐는 분노했다.
143개의 도토리는 새끼 다람쥐가 모은 전체 도토리에 비하면 티끌 같은 양이다.
그러나 사라진 도토리는 고향에 가져가서 가장 높은 나무를 사려고 특별히 힘을 불어넣은 보물 도토리들이다!
'어떻게 찾은 거지?'
새끼 다람쥐는 주위를 살폈다.
곳곳에 도토리 무더기를 만들어서 보물 도토리를 숨겼는데?
그런데 다른 도토리는 건들지도 않고 보물 도토리만 챙겨갔다!
새끼 다람쥐는 분노했다.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 일족은 자기 것을 훔친 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가끔 잊어버리기는 하지만···.
분노한 새끼 다람쥐는 동공을 달려 펄쩍 날아올랐다.
미약한 빛의 날개가 생겨나고,
동공 중앙으로 단숨에 날아오른 순간.
새끼 다람쥐의 전신에 그려진 황금색 줄무늬가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키이익, 키익-
황금빛 덩어리가 된 새끼 다람쥐가 동공을 빙글빙글 날며 우는 순간.
빛나는 동공에 수많은 유령개미가 나타났다.
키익, 키킥-
새끼 다람쥐가 울부짖을 때마다,
유령개미들은 두려움에 땅에 몸을 숙이고 더듬이를 세운 채 파르르 떨었다.
휘이잉-
새끼 다람쥐는 낮게 날며 유령개미들의 더듬이를 훑었다.
순간 새끼 다람쥐에게 쏟아져 들어오는 이미지.
빛으로 휩싸인 생물이 보였다!
자신을 불렀던 마법사와 비슷하게 생긴 생물.
인간이다!
한 인간이 유령개미에게 잡혀 와 보물로 바쳐졌다.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는 깨달았다.
내 보물 도토리를 가져간 건 저 인간이다!
키이이익-
새끼 다람쥐는 크게 울부짖더니.
번쩍-
섬광과 함께 동공에서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개미굴 광산 주위 숲을 수색하는 헌터들 머리 위에 나타났다.
미약한 빛의 날개로 빙글빙글 하늘을 날며 숲속의 헌터들을 살피는 새끼 다람쥐.
숲속에는 수많은 헌터들이 있었다.
"정말 여기에 강철 와이번이 나타났다고?"
"그렇다니까! 저기 나무 갈아버린 거 봤잖아?"
"여기서 검치호 무리도 나타났다더라."
"이야. 완전 대박인데!"
...
자신이 찾는 인간이 아닌 걸 확인한 새끼 다람쥐는 바람을 타고 높이 날아올라 다른 사람을 향해 움직였다.
휘이잉-
분노한 케페니안 황금 다람쥐는 주위에 보이는 헌터들을 한 명 한 명 확인해 자신의 도토리를 가져간 인간을 찾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거치적거리는 몬스터와 마수가 보이면 분노한 새끼 다람쥐는 엄청 아프게 깨물었다.
크아아아-
쿵, 쿵-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엄청난 고통에 숲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는 몬스터와 마수들!
새끼 다람쥐는 쉬지 않고 하늘을 날며 사람들을 확인했다.
143개의 보물 도토리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고향에 돌아가 가장 높은 나무.
내 집을 살,
내 보물 도토리니까!
---
흠칫-
천문석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벌떡 일어났다.
땀으로 흥건한 몸,
기억나지 않은 꿈!
꿈속 천문석은 무시무시한 무언가로 인해 공포에 질렸었다.
물리적인 공포는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공포였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사채를 쓴 듯한 공포!
“어?”
순간 천문석은 깨달았다.
방안이 환한데···.
분위기가 아침과는 달랐다.
천문석은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5시!
"뭐!? 몇 시간을 잔 거야!"
깜짝 놀란 천문석은 침대에서 바로 일어났다.
아무리 전날에 힘들어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천문석은 재빨리 휴대폰을 켰다.
철수 형에게 연락부터 해야 한다.
부르르르르를-
휴대폰은 진동하며 쉴 새 없이 부재중 문자와 통화를 표시하고 있었다.
하나하나 확인할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부재중 문자와 통화기록.
천문석은 바로 연락처로 들어가 철수 형에게 전화했다.
띠리-
한번 송신음이 울린 순간 김철수는 전화를 받았다.
[야! 너 어디야? 전화가 왜 이리 안 돼! 로비까지 왔다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분노한 철수형의 외침이 한동안 이어졌다.
"..."
한참이 지나 철수형이 진정했을 때,
천문석은 말했다.
"철수형.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천문석의 목소리에서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김철수가 다급히 물었다.
[너 혹시 사고라도 났냐? 지금 병원이야?]
"...아뇨. 그게 아니라. 사실은···."
그러나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어제 하루 일어난 일들이 많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뿐만이 아니다.
철수 형에게 묻고 싶은 것도 하나둘이 아니었다.
-철수형이 오리온 길드 채용에 자신을 꽂아 넣은 게 맞는지.
-자신의 이름으로 나왔던 게이트 임시 출입증의 정체.
-철수형의 정체가 정말로 재벌 3세인지.
...
"철수형. 그냥 만나서 이야기할게요. 재금 빌딩에 사무실 있는 거는 맞아요? 13층에 올라갔더니 오리온 길드밖에 없던데···?"
김철수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13층 맞는데. 내 사무실이 찾기가 좀 힘들어.]
"그럼 이번에는 광화문 광장 내리자마자 연락할 테니까. 재금 빌딩 1층 로비에서 만나죠."
[그래 그게 좋겠다. 그런데 전화는 왜 안 한 거야? 사무실 못 찾겠으면 전화하라고 편지에 적었잖아?]
의아한 듯 묻는 김철수.
"철수형. 편지에 전화번호를 안 적었···."
천문석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철수가 다시 물었다.
[너, 내 번호 모르냐?]
"제가 계좌번호랑 044-202-7999는 외워도 다른 전화번호는 안 외웁니다."
[044-···. 그 번호는 뭐냐? 어쩐지 익숙한 번호인데···?]
"고용 노동부 당직실 번호요."
[아···.]
탄성 후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
철수형과 같이 알바 전선에서 구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천문석은 보지 않아도 철수형의 행동이 짐작됐다.
철수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고 있을 것이다.
"철수형. 그럼 언제 만나요? 오늘은 늦었고 내일 찾아가요?"
천문석은 잠시 기다리다가 질문했다.
[아냐. 아무래도 며칠 기다려야겠다.]
"네?"
[넌 모르겠지만, 지금 게이트 너머 신서울이 난리다.]
"난리라니 그건 또 무슨···?"
어젯밤 신서울에서 넘어올 때만 해도 별문제가 없었는데?
김철수는 바로 설명했다.
[게이트 너머 신서울 인근 지역에 엄청난 마수들이 나타났나 봐!]
"네···?"
[검치호 무리에 무슨 특별한 와이번. 그리고 평소 보기 힘든 대형 몬스터와 마수···. 그리고 정체불명의 이상한 몬스터가 나타났다던데···.]
"특별한 와이번이면···. 강철 와이번요?"
[맞아! 강철 와이번! 지금 이곳 광화문 일대 헌터 길드들이 비상이 걸렸어. 움직이는 로또가 떴다고. 지금 대형 몬스터에 마수, 강철 와이번 사냥한다고 대공포에 그물, 마력 각성자 섭외하고 난리야!]
"..."
[그리고 그것보다 정체불명의 이상한 몬스터가 나타났다는데···. 이게 엄청나!]
"정체불명의 이상한 몬스터라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마수와 대형 몬스터를 모조리 끝장내서. 지금 숲속에 무력화된 마수와 몬스터가 널려있데. 지금 헌터들이 그거 줍겠다고 모조리 몰려가고 있다.]
천문석은 이야기를 들어도 머릿속에 상황이 그려지지 않았다.
"...몬스터 세력 다툼 그런 건가요?"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는데. 정체불명의 몬스터가 다른 몬스터를 무력화만 시키고 마석도 안 뽑아간 데. 그래서 지금 하급 헌터들까지 난리야. 숲속에 금덩어리가 떨어진 격이라고,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란 거지. 하여튼 그것 때문에 내가 신청한 헌터업 안전교육 일정도 밀렸어.]
"..."
어쩐지 숲속에 강한 놈이 있을 것 같더라니···.
자신의 예감대로 엄청 강한 녀석이 있었다.
천문석은 문득 아쉬움을 느꼈다.
몬스터를 무력화시키는 정체불명의 몬스터라니···.
내가 거기 있었어야 했는데!
마석의 위치도 확인할 수 있으니 잽싸게 마석만 뽑아내며 이동하면 순식간에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다!
하루만 개미굴 광산에서 늦게 떠났어도 대박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는데···.
역시 인생은 타이밍이다.
이때 들려오는 철수형의 목소리.
[야, 야! 듣고 있냐?]
"네. 듣고 있어요. 철수형. 그럼 언제 봐요?"
[한 2, 3일 정도 지나면 안전교육은 다시 시작할 거 같던데. 모레쯤 내가 다시 연락할게.]
"알았어요."
[너 전화기 꼭 가지고 다녀라.]
"철수형. 지금 형 번호 메모지에 적고 있습니다. 이제 두 번 다시 이럴 일은 없습니다. 그럼 모레 전화할게요."
천문석은 전화를 끊고 철수형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탁상 달력에 붙였다.
"...어?"
탁상 달력 위 내일 날짜에 쳐진 동그라미가 보였다.
"이게 내일이었네?"
천문석은 탁상 달력을 들고,
동그라미 아래 적힌 메모를 읽었다.
[꼬맹이 방문.]
[선물을 절대 잊지 말 것!!!!]
메모를 읽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느낌표가 '!!!!' 네 개나 붙어 있다!
흐흐흐-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신선칸을 꽉 채우는 네모난 상자.
돌머리 꼬맹이에게 가져다줄 선물 상자가 보인다.
[안동 간 고등어 선물 상자!]
카캬캬-
순간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졌다.
마침내 그 날이 왔다.
바로 내일!
특급 헌터 꼬맹이를 만나러 간다.
꼬맹이에게 줄 선물,
안동 간 고등어 상자를 가지고!
입꼬리가 올라가고,
심장이 두근두근 빠르게 뛴다.
어째서일까?
이 선물을 받는 꼬맹이 얼굴을 상상하는 순간.
검치호와 싸우던 그때보다,
더 두근거리고 더 기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