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3
부러진 검신을 선택한 천문석.
최후식은 천문석이 부러진 검신을 선택한 이유를 묻지 않았다.
헌터 개인의 장비와 기술, 능력은 비밀이다.
길드에 들어오고, 헌팅 팀을 꾸려도 자신의 능력을 모두 밝히는 경우는 드물다.
아이템을 주기로 약속했고,
천문석은 아이템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약속대로 선택한 아이템을 넘겨주면 될 뿐이다.
최후식은 안전 상자 안에서 작은 금속 상자를 꺼내 천문석에게 내밀었다.
"검품용 상자다. 여기에다가 고른 아이템 넣어라. 게이트 밖으로 빠져나갈 때는 검역이 철저하거든. 길드에서 검역 절차 처리해줄게."
"감사합니다."
천문석은 금속 상자에 도토리를 붓고,
그 속에 부러진 창천검을 넣었다.
"옵션 감정은 어떻게 할까? 길드에 마력 각성자 있는데, 감정도 해줄까?"
천문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감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이 검혼은 아이템이 아니다.
굳이 감정 할 필요는 없었다.
이때 금속 상자에 담긴 부러진 검신을 보던 한경석이 문득 말했다.
[검 만들어 줄까?]
처음 듣는 한경석의 정상적인 문장.
그러나 질문이 뜬금없어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었다.
"네? 검이요?"
천문석이 반문하자,
한경석은 선인장 화분을 불쑥 내밀었다.
눈에 익은 화분.
철수형 개업 축하 선물로 준비한 선인장 화분이다.
한경석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 이 화분 엄청 마음에 드는데.]
바로 감이 왔다!
"...부러진 검신으로 검을 만들어 줄 테니까, 그 선인장 화분 달라고요?"
[맞아!]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한경석.
헌터가 검을 만든다고?
반사적으로 최후식을 봤고,
최후식은 바로 설명했다.
"경석이가 좀 제정신이 아니긴 한데···. 실력은 믿을만하다. 경석이가 쓰는 단검들 전부 자기가 만든 거다. 헌터 중에 대장장이로는 최고야. 사실 무기를 직접 만들어 쓰는 헌터가 거의 없긴 하지만···."
천문석은 내심 잘됐다고 생각했다.
검혼을 품은 검 조각을 고른 이유.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면,
이세기의 검혼이 담긴 저 부러진 검신으로 검을 만들어야 했다.
"이 쇳조각 가능한 손상 주지 않고 검으로 만들 수 있을까요?"
[가능.]
한경석은 카멜레온 은신 망토 안으로 손을 넣어 검을 꺼냈다.
작은 검을 품은 큰 검.
검신의 중앙, 두 자루의 단검이 보인다.
[봐봐.]
천문석은 한경석이 넘겨준 검을 살폈다.
붉고 푸른 두 자루 단검이 검신에 묻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이어져 있다.
천문석이 이세기의 검혼으로 만들려고 생각한 검과 같은 모습이다.
이때 어이없어하는 최후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웬일이냐? 저 검은 나도 못 만지게 했잖아?"
[...이렇게 만듦?]
대답 없이 천문석을 보는 한경석.
천문석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생각한 그대로네요. 이렇게 만들어 주시면 되겠네요. 두께는 이것보다 좀 얇으면 좋겠는데···."
한경석은 품 안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내밀었다.
[그려줘.]
천문석은 메모지에 검을 그렸다.
검신 길이는 70cm.
폭은 손가락 세 개를 합한 정도.
검신은 전체적으로 곧은 직선이고,
날은 검신의 첨단에서 2/3 지점까지만 세운다.
그리고 검신 한 가운데,
이세기의 검혼을 품은 창천검 조각을 넣는다.
한경석은 천문석이 그린 메모지를 유심히 보더니 물었다.
[손잡이?]
"손잡이는 평범한 롱소드 형태로 만들어 주시면 됩니다. 무게 중심도 그렇게 잡아주시고요."
한경석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불쑥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는 순간,
신나게 손을 흔들며 외치는 한경석.
[선인장! 진짜로! 고마워!]
"저도 검 감사합니다."
"참. 희한한데 꽂힌다니까. 하-"
최후식은 어이없다는 듯 한경석을 보다가 웃었다.
"검 완성되면 광화문의 오리온 길드에 보관하고 있을 테니 찾으러 와라. 경석아. 검 얼마나 걸릴 것 같냐?"
[7일.]
최후식의 시선이 천문석에게 향했다.
“그럼 검역에 재료준비, 허가까지 넉넉하게···. 10일 후? 언제든 너 편할 때 오면 될 것 같다. 아, 그때 검치호 송곳니 정산금도 같이 주고······.”
최후식은 천문석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우리 할 이야기 있지? 진지한 이야기도 그때 하자. 기대해라. 정말 깜짝 놀랄 이야기일 테니까.”
천문석은 직감했다.
오리온 길드 채용과 관련된 이야기다!
“네. 기대하겠습니다.”
천문석도 웃으며 대답했다.
“이거 명함이라도 주고 싶은데. 지금 명함이 없어서···.”
최후식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냥 오리온 길드로 전화해서 최후식, 한경석 아무나 찾아라. 누구냐고 물으면 경석이 친구라고 하고."
최후식이 말하는 순간,
불쑥 내밀어지는 맨손.
"친구. 반가워."
"어···. 너?"
최후식은 깜짝 놀랐다.
한경석이 얼굴을 가린 카멜레온 은신 망토를 벗고 맨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틀어 올려 단단히 묶은 머리카락 아래 단정한 얼굴.
암살검이라는 살벌한 칭호와 달리 화장기 하나 없는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얼굴을 드러낸 한경석은 어쩐지 천문석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내민 손끝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천문석은 한경석의 떨리는 손을 가볍게 잡고 말했다.
"반갑습니다. 친구."
후, 하-
후, 하-
한경석은 다급히 숨을 몰아쉬며 잡은 손을 몇 번 흔들더니,
재빨리 카멜레온 은신 망토로 얼굴을 가렸다.
[나도. 반가워.]
한경석의 변조된 목소리가 들려올 때,
음흉한 웃음소리도 같이 들려왔다.
흐흐흐-
최후식은 어쩐지 음흉한 아저씨처럼 웃으며,
천문석의 어깨에 팔을 걸치고 놀리듯이 말했다.
"우와 우리 경석이 이제 친구가 생겼네? 그것도 남자 친구가?"
그리고 천천히 펴지는 최후식의 손가락.
[...!]
최후식의 손가락은 천문석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으아악.]
순간 한경석은 번개같이 점멸로 붙어 최후식이 입을 막고 손을 끌어내렸다.
그러나 탱커 최후식의 음흉한 웃음은 멈추지 않았다.
푸흐흡-
흐흐흡-
이때 최후식의 통신기가 부르르 떨렸다.
한경석이 재빨리 떨어지고,
최후식은 통신기를 잡았다.
"최후식이다."
-이사님. 선발대 광산 입구 도착했습니다.
최후식은 웃음 띤 얼굴이 천문석에게 향했다.
"집에 갈 준비는 됐지?"
"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천문석이 당황하자,
한경석이 천문석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친구.]
"..."
그리고 3시간 후,
천문석과 한경석은 오리온 길드의 장갑 SUV를 타고 광화문 게이트를 통과했다.
---
광화문 게이트 지역의 동문으로 빠져나오는 오리온 길드의 장갑 SUV.
이 장갑 SUV에는 처음 재금 빌딩에 들어갔을 때 입었던 정장을 다시 입은 천문석과 검을 만들기 위해 돌아온 한경석이 타고 있었다.
천문석은 광화문 광장이 보이자 운전석을 향해 말했다.
"여기에 내려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김민철 과장이 재빨리 대답했지만,
천문석은 사양했다.
"아뇨. 아직. 지하철이랑 버스 있으니 괜찮습니다."
오늘 하루 게이트를 넘어가서 몬스터와 마수와 빡세게 굴렀더니,
인파로 북적이는 평화로운 광화문 광장을 걷고 싶었다.
김민철 과장은 대답 대신 천문석의 옆자리를 봤다.
"저, 어떻게···?"
[세워.]
은신 기능이 풀린 카멜레온 망토를 입은 한경석이 짧게 말했다.
끼이익-
즉시 장갑 SUV가 멈춰 서고, 천문석이 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그럼 나중에 다시 보러 오겠습니다. 한경석 헌터님."
[알았어. 친구.]
한경석은 대답하더니 차에서 내려서 천문석 옆에 섰다.
"..."
그리고 김민철 과장에게 말했다.
[가. 난 친구.]
한경석의 이해할 수 없는 말.
그러나 김민철 과장은 되묻지 않았다.
최후식 총괄이사가 24시간 불을 뿜는 활화산이라면,
암살검 한경석은 기폭장치가 맛이 간 폭탄이다.
이름 높은 암살검 눈에 들어보겠다고 한경석 주위에서 기웃거리다가 쥐어터진 헌터, 직원이 하나둘이 아니다.
암살검 한경석은 언제 무슨 이유로 터질지 알 수 없었다.
최대한 한경석 근처에는 가지 않는 게 최선이다.
"네. 그럼."
김민철은 힐끗 천문석을 보고 바로 차 문을 닫았다.
바로 길드 건물로 이동을 시작한 장갑 SUV.
그러나 차 안의 김민철은 한경석과 같이 걸어가는 천문석을 계속 보고 있었다.
천문석.
낮에는 신입 헌터 지원자였는데.
밤에는 암살검 한경석이 친구라 부르고,
최후식 총괄이사가 직접 챙기는 사람이 됐다.
김민철은 개미굴 광산에 남은 최후식 총괄이사의 지시사항이 문득 떠올랐다.
1. 운영팀 전체를 동원해 천문석에 대해 알아봐라.
2. 가용 가능한 모든 헌터를 개미굴 광산으로 보내라.
3. 태성과 금성 길드의 최근 3개월 동향에 대해 파악하라.
헌터일 외에는 신경 쓰지 않던 현장팀 최후식 총괄이사의 긴급 지시.
김민철 과장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오리온 길드 집행부에서 관리업무에 가장 빠삭한 건 어이없게도 현장팀 총괄이사 겸 탱커 최후식이다.
최후식이 장난스럽게 외치는 초창기 길드 구호.
'피바람을 불러일으키자.'
이건 온라인 게임 속 NPC의 대사였다.
어이없게도 헌터 길드, 오리온 길드의 모체는 온라인 게임 길드였다.
최후식 총괄이사가 온라인 게임 길드였던 오리온 길드를 대형 헌터 길드로 탈바꿈시켰다.
그렇기에 최후식 총괄이사는 길드장 다음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 최후식 총괄이사가 사무팀에 긴급 지시를 했다.
일반인으로 보이는 천문석에 대해 알아보라는 뜬금없는 지시.
그리고 태성과 금성 길드의 동향 파악 지시.
10대 길드 중에도 압도적인 상위권 길드의 동향을 파악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이제 오리온 길드는 비상이다.
개미굴 광산에 처박힐 현장팀 헌터뿐만 아니라,
길드의 사무팀 관리 인력까지 모조리 구르게 생겼다.
“하···.”
김민철 과장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어질지 모를 철야의 예감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천문석은 문득 시계를 봤다.
지금 시간은 밤 11시.
그러나 광화문 광장은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불이 밝혀진 성채 빌딩이 가로등처럼 우뚝 서 있고,
광화문 광장 주위 점포는 한 곳도 문을 닫은 곳이 없었다.
점포와 거리, 광장까지.
낮보다 밤인 지금 헌터들이 더 많았다.
이렇게 수많은 헌터들 사이를 걷고 있으니,
잇따른 격전으로 곤두섰던 신경이 점차 가라앉았다.
날카로운 예기를 뿌리는 검이 검집으로 돌아가는 듯한 감각.
어쩌면 다른 헌터들도 천문석과 비슷한 이유로 인파로 북적이는 광화문 광장으로 모이는지도 몰랐다.
천문석은 문득 주위를 둘러봤다.
엄청난 수의 헌터들로 복잡한 광화문 광장.
그러나 천문석은 아주 편하게 광장을 걷고 있었다.
천문석 주위 3미터 안으로는 헌터들이 들어오지 않았다.
문득 덩치 큰 외국인 헌터가 정면에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대로 걷다가는 서로 어깨가 부딪힐 것 같은 상황.
그러나 외국인 헌터 옆에선 헌터가 다급히 귓속말한다.
순간 하얗게 표정이 질리는 외국인 헌터.
외국인 헌터는 재빨리 몸을 돌려 자신을 피했다.
아니 자신을 피한 게 아니었다.
천문석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휘리릭-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하는 단검!
은신이 해제된 반짝이는 카멜레온 망토를 입은 한경석.
한경석은 한 손에는 선인장 화분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단검을 돌리고 있었다.
이때 주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암살검···!
-은신 망토···.
-오리온 길드···.
...새로 사귀게 된 친구는 상당한 유명인이었다.
이때 한경석의 손 위에서 회전하던 단검이 멈췄다.
한경석은 천문석을 향해 단검 손잡이를 내밀었다.
[이거. 줄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거 무장 박스에 안 넣어도 되나요?"
[날 없음. 소지 가능.]
천문석은 한경석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었다.
날이 없는 단검이면 도검류 소지 허가가 필요 없고 무장 박스에 넣을 필요도 없다는 말.
그러나 저 날 없는 단검을 빙글빙글 돌리는 사람은 그냥 헌터도 아닌 암살검이다.
저 정도 실력자면 날이 없어도 단검 자체의 예기를 뽑아낼 수 있다.
주위 헌터들도 날 없는 단검이 아닌 중화기를 들고 있는 사람을 보듯 멀찌감치 피해가고 있었다.
이렇게 편하게 광화문 광장을 지나 도착한 버스 정류장.
한경석은 버스를 기다리는 천문석 옆에 한참 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문득 눈이 마주치자,
천문석 앞으로 불쑥 무언가를 다시 내미는 한경석.
이번 건 커다란 쿠크리 단검이었다.
[이거. 줄까?]
한경석은 몸으로 쿠크리 단검을 가린 채 말했다.
"괜찮습니다. 뭘 그렇게 주려고 해요."
천문석은 웃으며 쿠크리 단검을 슬쩍 밀어 사양했다.
"검 만들어 주기로 한 거로 충분합니다."
[선인장! 엄청 좋은 건데!]
쿠크리 단검을 회수한 한경석은 두 손으로 잡은 선인장 화분을 보여주면서 말했다.
한경석은 철수형 개업 축하 선물로 준비한 만세 선인장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선인장 값으로 계속 뭔가를 더 주려고 했다.
천문석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나중에 그 선인장 많이 자라면 증식시켜서 나눠 주세요."
깜짝 놀라 굳어지는 한경석.
[...]
한경석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비장하게 말했다.
[알았어! 해낼게!]
이때 버스가 도착했다.
273번.
집까지 가는 버스다.
"그럼 나중에 오겠습니다."
[잘 가.]
천문석이 탄 버스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한경석은 한참 동안 정류장에서 손을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