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9
천문석이 석(石).
돌멩이란 이름으로 불리던 전생의 어린 시절.
어린 천문석은 산속의 버려진 사당에서 살았다.
커다란 도시 옆에 있지만,
길도 없는 험한 산속에 있어 아무도 찾지 않던 버려진 사당.
이 사당에는 천문석 말고도 아이들이 잔뜩 있었다.
5살에서 12살까지 다양한 연령대,
서로 다른 출신지의 아이들.
천지를 떠돌던 아이들이 도시로 흘러들어왔다가 도시에서도 밀려나면,
천문석이 아이들을 이곳 산속 버려진 사당으로 데려오곤 했다.
나이가 제일 많은 천문석이 큰 형, 큰 오빠가 되어 아이들을 돌봤다.
보통 이런 경우 힘겹고 고통스럽게 사는 게 보통이지만, 생각보다 생활 환경은 좋았다.
전생의 천문석.
어린 시절에도 생활력이 남달랐던 천문석 덕분이었다.
산속 평지를 개간해 무와 배추를 심고.
산에 덫을 놓아 작은 동물을 하천에 통발을 놓아 물고기를 잡았다.
산속을 누비며 약초를 캐고 나무열매를 모으고.
지천에 널린 도토리를 모아 커다란 솥으로 끓여 묵을 만들었다.
이가 나간 도끼로 나무를 하고 꼬맹이들은 삭정이를 주워 모아들였다.
이렇게 모은 약초와 장작은 지게에 실어 도시의 약초 상과 객잔에 팔았다.
그리고 산속 사당은 겉은 허름했지만.
안쪽 벽은 짚과 진흙으로 단단히 보수했고 바닥도 나무로 마루를 만들고 두툼한 거적을 몇 겹으로 깔아 냉기를 막았다.
나무 열매와 도토리묵,
밭에서 캐낸 커다란 무와 물고기, 작은 동물을 넣고 끓인 죽.
그리고 가끔은 쌀밥까지.
풍족하지는 않지만,
천문석과 아이들은 나름 즐겁게 살았다.
이렇게 사당에서 함께 살던 아이들은 인연이 닿아 가게의 점원으로 운이 좋으면 부잣집 하인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이렇게 아이들이 떠날 때면 천문석은 잔치를 열었다.
아껴둔 쌀로 솥 가득 하얀 쌀밥을 짓고, 고기를 듬뿍 넣은 고깃국을 끓인다.
그리고 선물로 주는 새 옷 한 벌과 아이들의 축하.
머쓱하게 웃으며 새 옷을 입고 축하를 받으며 떠나가는 아이들.
가끔 새로운 아이가 오고,
다시 가끔 아이들이 떠나간다.
이렇게 떠나는 아이 중 몇몇은 무림인의 눈에 띄어 무림 문파에 제자로 들어가기도 했다.
천문석은 아이들이 무림인이 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천문석 다음으로 오랫동안 사당에서 살던 아이가 무림의 거대 문파에 들어간 후.
몇몇 아이들은 무림인 눈에 띄어 보겠다고 도시의 거리를 기웃거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를 기웃거리던 아이 하나가 희소식을 가지고 달려왔다.
마종문에서 신분에 상관없이 대대적으로 제자를 모집한다는 소식!
“마종문? 거기 종마문 아냐?!”
몇몇 아이들은 얼굴을 찌푸리고 싫은 기색을 내비쳤다.
그러나 천문석은 마종문의 가능성을 한눈에 알아봤다.
강호에서는 백안시당하는 마종문.
그렇기에 오히려 좋았다.
마종문은 완전한 강호 문파가 아니기에 강호의 은원에서 한 발 빗겨 나 있었다.
문도들을 관찰한 결과도 아주 좋았다.
보통 마흔이 넘어서도 혼자 사는 무림인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나는 마종문 문도들.
마종문의 문도들은 특이하게도 적어도 3명 이상의 자녀를 두고,
북적북적한 대가족을 이뤄 화목하게 잘 먹고 잘살고 있었다.
어린 천문석은 승부수를 띄울 때란 걸 직감했다.
그래서 마종문 입문 시험 벽보가 붙자마자.
천문석은 산속 사당에서 같이 지내던 아이들 모두와 함께 마종문 입문 시험을 준비했다.
마종문의 입문 시험은 간단했다.
건강한 하체와 근성 확인.
마보 오래 서기였다.
천문석과 아이들은 정말 열심히 마보 서기를 수련했고.
여러 일이 있었지만, 전원 마종문 입문 시험을 통과했다.
마종문 입문!
강호에서 백안시당한다지만,
아이들에게는 생전 처음 가져보는 소속이었다.
마침내 의지할 곳이 생긴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마종문에 입문하러 간 그 날.
처음 사당에 도착했을 때처럼,
어린 천문석은 산속 사당에 홀로 있었다.
북적거리던 아이들이 모두 사라졌지만,
쓸쓸함이 아닌 즐거운 미소가 그려진다.
천지를 떠돌던 아이들은 의지할 곳을 찾아 자기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결말이다.
그렇기에 어린 천문석은 너무나 홀가분하게 떠나갈 수 있었다.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
"지금 갈 거냐?"
"넵!"
어린 천문석은 스승님의 질문에 크게 대답하고,
아무것도 없이 빈몸으로 스승님을 따라 서쪽으로 떠나갔다.
어린 천문석은 재산이라 할만한 것들은 모조리 사당에 남겨뒀다.
커다란 솥, 지게, 수레, 장작, 그릇, 도끼···.
이런 세간은 뒤이어 이곳을 찾을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에게 그랬듯이 말이다.
---
한참 동안 꿈속 전생의 어린 자신을 보던 천문석은 생각했다.
'뭔 꿈이 이렇게 생생해?'
하늘의 저울이 자신에게 보여주는 꿈인가?
천문석은 전생의 꿈을 보면서 어이없어하면서도 즐거워했다.
이미 잊었다고 생각한 동생 같던 아이들.
그러나 아이들을 보는 순간 그 이름과 성격, 희망과 꿈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전생과 현생.
생사를 넘어 끝없이 이어지는 기억들.
빙그레 웃던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앞을 봤다.
어느새 꿈속 풍경은 도시의 대로.
중 같지 않았던 중,
허름한 승복을 입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길게 기른 전생의 스승님이 보였다.
그리고 전생의 어린 자신이 스승님을 따라 씩씩하게 도시의 대로를 걸어가고 있었다.
하-
천문석은 꿈속의 어린 자신을 보며 한숨지었다.
앞으로 하게 될 개고생도 모르고 저렇게 씩씩하게 걸어가다니!
당장이라도 어린 자신을 번쩍 들어 마종문 입문식에 던져 놓고 싶었다.
‘야! 너 지금! 호랑이굴! 마도 18문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거야! 당장 멈춰!’
이렇게 크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과거의 일.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건 꿈속의 기억일 뿐이다.
에휴-
천문석이 한숨을 내쉬었을 때.
문득 느껴지는 시선.
천문석이 몸을 돌리자,
과거의 자신도 몸을 돌렸다.
"왜 그러냐?"
스승님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순간.
"누가 보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요. 형님 어서 가죠!"
과거의 자신은 씩씩하게 대답했고,
스승님에게 전법륜인 딱밤을 맞았다.
따악-
"으악!"
"형님이 아니라 스승님!"
머리를 부여잡고 멀어지는 과거의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천문석은 봤다.
멀리 높게 솟은 기와지붕 위,
재빨리 몸을 숨기는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한참이 지나 살며시 몸을 일으킨 작은 그림자.
작은 그림자는 무복을 입고 검을 든 소년이었다.
소년은 멀어지는 어린 천문석,
돌멩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천문석은 소년을 알아보고 웃었다.
"너 그때 보고 있었던 거냐?"
오래전 창천문에 입문한 후,
단 한 번도 산속 사당을 찾아오지 않았던 소년.
소년을 좋아하고 따르던 아이들은 그것에 크게 서운해했다.
그러나 천문석은 알고 있었다.
한겨울.
쌀 두 가마와 두툼한 거적,
잘 마른 장작 몇 짐과 지게, 새 도끼 한 자루.
이른 봄.
보리 세 가마와 큼지막한 솥.
커다란 항아리와 튼튼한 수레.
그리고 사탕이 가득 담긴 주머니.
하늘님이 내려줬다고 아이들이 좋아하던 물건들은.
모두 소년이 몰래 놓고 간 거였다.
천문석은 크게 한걸음 걸어,
단숨에 꿈속 거리를 지나 지붕에 올라섰다.
천문석은 눈앞 소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전생의 어린 시절에 봤던 소년의 얼굴.
생을 넘어 오래된 기억 속 얼굴이지만,
천문석은 한 번에 소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자신만 살던 사당에 처음 찾아와 누구보다 오랫동안 같이 살았던 소년.
그 무재가 우연히 눈에 띄어 명문 거파 창천문에 입문하고,
약관이 되기도 전에 일류를 넘어 절정에 도전해 창천문주의 양자가 된다.
그리고 10년.
강호의 신성 후기지수를 넘어 천하 10절에 이름을 올리는 절대 고수가 된 소년.
아주 오랜만에 다시 만났지만,
소년이 들고 있는 창천검에서 익숙함이 느껴진다.
수없이 겨뤄 기억에 새겨진.
소년의 검혼(劍魂)!
천문석은 한눈에 알아봤다.
전생의 호적수이자 친구.
소년은 천검(天劍) 이세기였다.
“...풉-”
순간 천문석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그 머리 뭐야!?"
크하하하-
미친 듯 웃는 천문석.
천검 이세기,
소년의 머리는 빡빡이가 되어있었다!
천문석은 깨달았다.
이세기 이 녀석.
아이들이 울까 봐 나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파르스름한 머리를 보니,
해충구제를 위해 머리를 빡빡 밀어 못 나타난 거다!
"너 그때! 빡빡이였구나!?"
캬카카캬-
천문석은 꿈속인 것도 잊고 크게 웃었다.
천검 이세기!
천하십절중 검절(劍絶) 이세기는 검보다 그 용봉(龍鳳) 같은 외모가 더 유명했다.
그런 이세기, 후일 무림 맹주가 되는 천하의 이세기가 어렸을 때는 빡빡이였다니!
"아 미치겠네! 카캬카-"
이게 꿈만 아니라면 당장이라도 저 모습을 그려서 소지하고 싶었다.
전생의 자신이 천마가 된 후 이세기를 다시 만났을 때, 잘난 척하는 이세기한테 그 그림을 보여줘야 하는데!
“하- 너무나 아쉽구나!”
천문석이 아쉬움의 탄성을 터트릴 때,
이세기의 시선이 웃고 있는 천문석에게 향했다.
꿈속임에도 정확히 천문석을 바라보는 이세기.
"어?"
천문석이 움찔 놀라는 순간.
이세기는 창천검으로 천문석의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투둑, 투두둑-
순간 우수수 떨어지는 머리카락!
"어, 어! 어!?"
천문석이 꿈속인 것도 잊고 당황하는 순간,
이세기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빡빡이 친구!"
---
흐어어억-!
천문석은 야전 침대에서 튕기듯이 벌떡 일어났다.
"야! 괜찮아?"
[님. 괜찮음?]
최후식과 은신 망토를 입은 한경석이 다급히 묻는다.
우뚝 일어선 천문석은 정신없이 몸을 살폈다.
손발은 모두 멀쩡하고,
찢어질 것 같던 통증도 사라졌다.
격전을 거친 후 일기일원공은 오히려 불어난 상태,
훔쳐낸 전생의 경지 생사팔문의 보법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일부가 남아있다.
"...뭐? 이게 왜 남아있어?!"
자신도 모르게 외치는 순간,
다시 한번 들려오는 걱정스러운 목소리.
"야. 나 좀 봐라. 너 괜찮냐?!"
[상급 포션 더 줄까?]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최후식과 한경석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
천문석은 깨달았다.
모든 건 꿈이었다!
너무나 커다란 충격에 순간적으로 꿈이란 걸 잊었다.
하, 하하-
천문석은 안도감에 허탈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끔찍한 악몽을 꿔서···."
[악몽?]
변조된 한경석의 목소리.
"그냥 개꿈이에요. 빡빡이가 되는 개꿈···."
하, 하하-
천문석이 다시금 웃을 때,
최후식의 얼굴이 심각하게 변했다.
"..."
[...]
고개를 돌려 서로를 보는 최후식과 한경석.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천문석의 시선이 최후식과 한경석을 오갈 때.
최후식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너 잠깐. 거기 앉아봐라. 이야기할 게 있는데···."
순간 한경석이 천문석에게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이거. 보셈.]
"네? 거울요?"
반문하는 순간,
한경석이 든 거울이 얼굴로 움직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
"...어?"
거울에 비친 머리에는 머리카락이 없었다.
천문석은 깨달았다.
이런 미친!
하늘의 저울은 전생의 경지를 훔쳐낸 인과로, 천문석의 머리카락을 가져갔다!
희미하게 남은 생사팔문의 보법,
이건 계산을 마치고 남은 거스름돈이었다!
아니! 하늘의 인과가 원래 맥락 없고 뜬금없긴 하지만···.
왜 머리카락을 가져가!!??
아니 이유보다 결과가 중요하다.
빡빡이?!
내가 빡빡이라고!?
20대에 빡빡이라고??!!
엄청난 정신적 고통에 천문석은 비틀거리다가 야전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순간 한경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노노.]
"네?"
천문석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방법이 있나요? 혹시 머리에 포션을 바르면!"
한경석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가발. 가능.]
"야, 이 새끼야!!"
순간 진심으로 분노한 최후식의 손바닥이 한경석의 뒤통수를 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