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파아아앙-
소리를 삼키는 거센 바람!
콰르르릉-
빛을 지우는 엄청난 잿가루!
순간적으로 청각과 시각이 사라진다.
천문석은 등 뒤에서 충격파가 쏟아진 순간,
한경석을 몸으로 가려 보호한 채 앞으로 몸을 던졌다.
몸을 웅크리고 손에서 발끝까지 몸 가장자리를 타고 구른다.
퍼스슥, 깡-
콰지직, 까앙-
데굴데굴 구르는 몸에 깔려 부서지는 잿가루와 단단한 숯!
정신없이 구르던 천문석은 타다만 나무둥치에 걸려 공중으로 튕겨 올라갔다.
파아앙-
거센 바람에 함께 구르던 한경석이 떨어져 나가려 할 때,
천문석은 온 힘을 다해 한경석을 잡아당겼다.
퍼억-
전신을 때리는 한경석의 작은 몸.
순간 천문석은 뚝- 땅으로 떨어져 타다만 나무 둥치에 허리가 찍혔다.
컥-
충돌 순간 허리 부위가 경화된 강화 전투복,
그러나 허리를 때리는 충격에 정신이 번쩍 든다.
...왜 자꾸 허리야!
분통을 터트린 것도 잠시,
천문석은 장갑으로 방탄 헬멧 바이저에 가득한 검은 잿가루부터 닦아냈다.
그러나 시계가 살아나지 않는다.
엄청난 잿가루 폭풍!
빛은 미약하고, 시야도 거의 없다.
다행히 호흡기는 강화 전투복의 마스크 덕분에 무사하다.
천문석은 손에 잡힌 사람을 확인했다.
카멜레온 은신 망토로 전신을 틈 하나 없이 가린 한경석.
한경석은 여전히 기절했으나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이 손에서 전해졌다.
천문석은 재빨리 한경석을 어깨에 들쳐메고 몸을 일으켰다.
우드득-
허리에서 시작해 전신을 달리는 통증!
으으윽-
절로 신음이 터진다.
천문석은 통증을 무시하고 주위를 살폈다.
갑자기 밤이 된 듯 빛이 사라진 천지에 몰아치는 검은 잿가루 폭풍!
시계가 거의 죽어 지형지물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천문석은 최후식이 있던 곳으로 우선 달렸다.
잠시 후 미약한 빛이 보이고 시야가 점차 살아났다.
"최후식 이사님!"
“최후식 헌터님!!”
천문석은 크게 외쳤다.
휘이이잉-
그러나 여전히 미친듯이 몰아치는 바람에 소리는 순식간에 먹혀 버린다.
이대로는 바로 앞에 있어도 찾기 힘들었다.
멈춰선 천문석은 최후식을 마지막으로 본 장소로 기감을 집중했다.
두근-
순간 일기일원공의 기감에 잡히는 너무나 미약한 생명력!
천문석은 다급히 생명력이 느껴지는 장소로 달려갔다.
거센 바람을 뚫고 20여 미터,
천문석은 최후식을 찾을 수 있었다.
손잡이만 남은 방패를 하늘로 들어 올린 채,
검은 잿가루 폭풍 속에 우뚝 서 있는 최후식.
방검복은 어딘가로 사라졌고,
미약한 마력광을 뿌리는 강화 전투복은 검은 잿가루로 뒤덮였다.
그리고 검은 잿가루 위로 줄줄 흘러내리는 붉은 피.
너무나 미약한 생명력,
지금 최후식은 살아있는 게 신기한 상태였다.
두근-
순간 기감에 잡히는 거대한 생명력!
천문석의 시선이 생명력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저 멀리 휘몰아치는 검은 잿가루 폭풍 속,
땅에 처박힌 채 꿈틀거리는 거대한 실루엣.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강철 와이번!
천문석은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깨달았다.
활강 공격하는 강철 와이번!
이 거대한 마수의 육체에 실린 엄청난 운동 에너지는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건 무조건 피해야 하는 공격이다.
그러나 최후식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와이번을 도발해 자신에게 공격을 집중시키고,
활강하는 와이번의 공격을 방패로 흘려 와이번을 처박아 버리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치명상을 입은 최후식.
"..."
왜 그랬는지,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었다.
지금 살아있는 자신과 한경석이 그 이유니까.
천문석은 더 생각하지 않고 최후식에게 다가갔다.
"...천문석이냐?"
눈이 보이지 않는지 기척을 듣고 묻는 최후식.
"맞습니다."
어딘가로 날아간 최후식의 투구 바이저 안, 검은 잿가루로 뒤덮인 눈이 보였다.
천문석은 수통의 물을 부으며 말했다.
"눈 씻어 내겠습니다."
쏟아지는 물에 최후식은 눈을 몇 번 깜빡이더니 힘없이 웃었다.
"하···. 시바···. 장님 된 줄 알고 엄청 쫄았네···. 경석이는?"
"기절했지만 멀쩡합니다. 바로 옮기겠습니다. 조금만 버티세요."
천문석이 최후식을 들려고 하자 던져지는 무언가.
툭-
"통신기다. 저건 검치호 송곳니고."
최후식은 통신기를 멀리 떨어진 강화 천으로 둘둘 묶인 검치호 송곳니 위로 던졌다.
그리고 허리벨트의 잡낭을 가리켰다.
"저거 챙기고 이 잡낭도 챙겨라···. 여기에 상급 포션 있다."
상급 포션!
천문석은 재빨리 잡낭을 열고 상급 포션을 꺼냈다.
상급 포션으로 치료를 하려 하자, 고개를 젓는 최후식.
"그 포션 지금 나한테 쓰면 포션 쇼크 와서 기절한다···. 그건 경석이한테 쓰고. 너도 광산 들어간 다음에 써라. 포션 쇼크 온다···."
최후식은 손을 움직여 하얀 바위 언덕 한곳을 가리켰다.
"저기에 개미굴 광산 입구가 있다···. 바로 달려라. 저 통신기 가져가면 문 열린다···."
최후식은 문득 천문석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형이 존나 멋지게 와이번 처박는 거 봤지? 경석이 깨어나면 꼭 말해줘라···. 최후식은 강철 와이번의 활강 공격을 정면에서 막은. 진짜 쩔어주는 탱커였다고···."
“...”
"그리고 경석이한테 하루에 한 번은 꼭 외출하라고도 전해주고···."
툭-
최후식은 힘없이 웃더니 천문석의 어깨를 주먹으로 쳤다.
너무나 미약한 힘.
최후식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피가 줄줄 흐르는 몸을 천천히 돌렸다.
그리고 와이번이 처박힌 장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먼저 가라. 난 저놈 처리하고 갈게···.”
최후식의 담담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천문석은 최후식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뭐를 해야 할지도.
천문석은 잡낭에서 상급 포션을 꺼내 최후식의 입안으로 흘려 넣고 눈코입 위를 천으로 둘렀다.
"야? 뭐야···. 뭐 하는 거야? 포션 쇼크 온다니까."
당황한 최후식.
그러나 천문석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천문석은 한경석에게도 상급 포션을 먹인 후, 최후식을 어깨에 걸쳤다.
어깨를 적시는 최후식의 피는 당장이라도 화상을 입을 듯 뜨거웠다.
"야. 말들어. 둘 다 업고 못 빠져나가···. 와이번 저놈 곧 회복한다···."
천문석은 양어깨에 최후식과 한경석을 걸쳐 메고 일어섰다.
으드득-
전신을 옥죄는 엄청난 무게!
그러나 이 무게는 익숙한 무게이기도 했다.
천문석은 걸음을 뗐다.
쿵-
전신을 짓누르는 무게에 당장이라도 꺾일듯한 다리.
그러나 언제나 첫걸음이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다.
쿵-
다시 한 걸음을 걷고.
쿵, 쿵-
또다시 한 걸음을 걸으면.
몸은 앞으로 나아간다.
그 무엇이 어깨를 짓눌러도.
멈추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나아간다.
쿵, 쿵, 쿵-
느린 걸음이 이어지자,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는 점점 가벼워진다.
움직임에 관성이 붙자,
강화 전투복의 운동능력 보조 기능이 점점 살아났다.
그러나 어깨에 실린 무게는 여전히 전신을 옥죄어 온다.
밧줄로 꽁꽁 묶어서 당기는 것처럼,
전신이 짓눌리는 고통은 점점 심해진다.
그러나 천문석은 아주 오래전부터 참는 건 자신 있었다.
배고픔, 추위, 기쁨, 고통, 웃음, 울음, 이별···.
그 무엇이든.
단 한 가지,
친구와 동료를 잃는 걸 제외하면.
천문석은 그 무엇이라도 참을 수 있었다.
쿵, 쿵, 쿵-
점점 발걸음이 빨라질 때.
문득 발 앞에 보이는 물건.
검치호 송곳니와 통신기.
천문석은 땅에 떨어진 검치호 송곳니 묶음과 통신기를 발로 차올려 잡았다.
통신기를 잡낭에 넣고 최후식에게 검치호 송곳니를 묶은 천을 쥐여줬다.
"이사님. 이거 놓치시면 안 됩니다. 저 정산 꼭 받아야 합니다. 건물주가 꿈이거든요."
“...뭐? 하-”
최후식은 어이없다는 듯 반문하더니 헛웃음을 터트렸고,
천문석은 잿가루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휘이잉-
쿵, 쿵, 쿵-
그리고 한참 동안 잿가루 폭풍 속을 걸었을 때.
문득 들려오는 최후식의 힘 빠진 웃음과 목소리.
"하···. 너 내가 아는 형님이랑 비슷하다···."
천문석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 형님 잘생기셨나 보네요?”
“...”
드립을 치기위해 대답을 기다렸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최후식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어깨로 전해지는 최후식과 한경석의 맥박도 점점 느려지고 있다.
천문석은 깨달았다.
두 사람 모두 포션 쇼크로 기절했다.
---
휘이잉-
천지에 휘몰아치는 검은 잿가루 폭풍.
천문석은 양어깨에 포션 쇼크로 기절한 두 사람을 짊어진 채 폭풍 속을 이동하고 있었다.
강화 전투복의 보조를 받아도 엄청난 부하가 몸에 실린다.
그러나 무엇이든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천문석은 점점 빠르게 이동했고,
어느새 검은 땅을 빠져나와 숲과 검은 땅의 경계에 도착했다.
빛을 가리던 검은 잿가루가 확 줄어들고 어느새 살아난 시야.
왼쪽은 거대한 나무가 솟은 숲.
오른쪽은 검은 숯과 재가 가득한 검은 땅.
천문석은 뒤를 보지 않은 채 앞만 보고 숲과 검은 땅의 경계를 달렸다.
최후식이 가리켰던 목적지, 바위 언덕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최후식 헌터님? 한경석 헌터님?"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 봤지만,
최후식과 한경석 둘 다 대답이 없었다.
둘 다 포션 쇼크로 기절한 상태.
기적의 내, 외상 치료제 포션.
그러나 포션은 만능이 아니다.
개인차가 있지만, 포션 복용 후 짧으면 10분에서 길면 24시간 이상 포션 쇼크로 정신을 잃는다.
천문석은 허리에 맨 최후식의 잡낭을 슬쩍 봤다.
이 안에 문을 열 수 있다는 통신기를 넣어놨다.
그러나 최후식이 가리킨 바위 언덕에 문으로 보이는 구조물은 없었다.
풀이나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는 아무것도 없는 새하얀 바위뿐이다.
‘저기에 정말 문이 있는 건가?’
문득 의문이 들었지만,
어차피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하늘을 나는 와이번이 적이다.
광산 말고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계획한 대로,
최선을 다해 달릴 뿐.
이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쿵-
그리고 뒤이어 들려오는 전신이 저리 저릿해지는 피어!
끼이이익-
순간 하늘이 어두워지고,
몰아치는 바람이 몇 배는 강해진다.
파아아앙-
거센 바람에 실려 온 잿가루가 등을 때리고,
숲의 낙엽 위로 후두둑 쏟아졌다.
천문석은 직감했다.
강철 와이번!
땅에 처박혔던 와이번이 다시 날아올랐다.
그러나 이미 각오한 상황.
저 와이번을 상대할 계획도 이미 세워뒀다.
천문석의 시선이 빠르게 주위를 훑는다.
거대한 나무가 솟은 숲.
단단한 숯이 가득한 검은 땅.
눈앞에 보이는 하얀 바위 언덕.
그리고 한 줌의 일기일원공과 마음의 결심.
무대는 마련됐고,
배우도 준비를 끝냈다.
자신과 와이번.
두 등장인물이 무대에 올라 극의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천문석은 심상 공간의 기경팔맥에 집중했다.
일기일원공.
일천한 내력의 일기일원공을 운공해 기감을 퍼트린다.
천지에 휘몰아치는 잿가루 너머,
너무나 분명한 와이번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천문석은 와이번의 존재감을 느낀 순간.
달리는 속도를 오히려 늦췄다.
숲과 검은 땅을 오가며 달리는 천문석.
바스락-
바짝 마른 낙엽이 바스러지고.
파스슥-
땅에 흩어진 숯과 검은 재가 으스러진다.
휘이이잉, 휘잉-
등 뒤에서 몰려오는 잿가루 폭풍이 점점 강해지고,
바람 소리가 거세지는 어느 순간.
일기일원공이 전하는 강렬한 기감!
수천, 수만의 격전을 헤쳐나온 직감이 말한다.
지금이다!
와이번의 포효가 들리기도 전에 천문석은 숲으로 달려 들어갔다.
끼이이익-
파아아앙-
뒤늦게 들려오는 와이번의 포효와 전신을 짓누르는 풍압!
그러나 어느새 천문석은 거대한 나무를 등지고 달렸고,
천문석을 노리고 활강하던 와이번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나무에 처박혔다.
콰지직, 콰아앙-
부러질 듯 요동치는 나무.
끈적한 이끼가 폭발하듯 흩날리고,
바짝 마른 낙엽과 박살 난 나뭇조각이 비 오듯 쏟아질 때.
천문석은 바로 검은 땅으로 뛰어나갔다.
콰아앙-
천문석이 움직인 직후,
폭풍처럼 쏟아진 나뭇조각이 숲을 갈아엎었다.
힐끗, 뒤를 확인하니.
나무에 처박힌 와이번은 이제야 몸을 일으키는 중.
와이번은 전신에 끈적한 이끼를 뒤집어쓴 채,
몸 곳곳에 바짝 마른 낙엽과 검은 숯가루를 붙이고 있었다.
됐다! 먹힌다!
천문석은 내심 환호하며 계속 달렸다.
그리고 바위 언덕으로 들어갈 때까지 세 번.
천문석은 숲의 거대한 나무를 방패 삼아 와이번의 공격을 완벽히 피해냈다.
끼이이익-
콰아아앙-
와이번은 거대한 나무에 처박혔고.
숯과 검은 잿가루를 갈아엎으며 검은 땅 위로 나뒹굴었다.
일기일원공으로 몇 수 앞을 보면서 도망친 천문석 때문이었다.
끼이익-
콰아아앙-
그리고 와이번의 네 번째 공격을 피한 순간.
천문석은 아무런 장애물 없이 텅 빈 바위 언덕으로 달려나갔다!
두 사람을 업고 달리는 지금 체력이 빠르게 소진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나무를 방패 삼아 숲에서 달리면서 버틸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광산 입구를 찾아 들어가야 했다.
쿵, 쿵, 쿵-
단단한 바위를 밟는 매 순간,
다리를 때리는 묵직한 충격.
강화 전투복이 아니었으면,
진작에 발목이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충격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문득 생각한 순간.
부르르-
통신기가 들어있는 잡낭이 떨었다.
"...!"
그리고 저 멀리 아무것도 없는 바위 언덕에 푸른 빛이 떠올랐다.
거대한 푸른 원이 그려지고,
원안에 천천히 생겨나는 직사각형의 문.
마치 마법으로 만들어낸 문 같은 외형!
천문석은 보는 순간 직감했다.
개미굴 광산 입구!
최후식 헌터가 말한,
개미굴 광산 입구가 저기다!
거리는 불과 200여 미터.
지금 속도면 60초,
단지 60초면 저 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
문제는.
도착하려면 60초는 걸린다는 것이다.
휘이이잉-
후드드득-
장애물 없이 텅 빈 언덕에 거센 바람이 몰아치고,
하얀 바위 위로 검은 숯가루가 비처럼 쏟아졌다.
그리고···.
끼이이이익-
저릿저릿한 피어가 섞인 포효가 들리고.
콰아아아앙-
공기를 찢어발기는 폭음이 터지는 순간.
파아아앙-
와이번이 다시 나타났다!
천문석은 직감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생과 사.
삶과 죽음이 갈릴 승부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