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3
"검치호!"
최후식은 검치호를 보는 순간 경악했다.
북쪽 설원에 사는 검치호가 왜 여기에?!
중급 마수, 검치호!
그것도 8미터가 넘는 대형 개체다!
검치호의 힘과 민첩성, 교활한 지능은 고블린, 랩터와는 비교도 안 된다.
게다가 지금 지원자들에게 지급한 장비로는 검치호의 칼날 송곳니를 막을 수 없다.
저놈이 지원자들에게 달려들어 휘저으면 대참사가 일어난다!
"한경석! 지원자들 모두 빼내라!"
최후식이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한경석은 이미 공터로 달려가고 있었다.
최후식도 공터를 향해 달리며 통신기를 잡았다.
"야! 이 새끼들아! 검치호 저거 뭐야! 외곽 정찰 제대로 안 해!!"
그리고 잇달아 떨어지는 명령.
"저압탄 고블린한테 모조리 쏟아부어!"
"바로 레이드용 마탄으로 교체하고, 바렛으로 검치호 견제해라!"
"경석이가 면접 보는 애들 빼내고!"
"내가 바로 검치호 잡는다!"
최후식의 명령이 끝나는 순간,
저압탄 일제 사격의 폭음이 울렸다.
탕, 탕, 타타탕-
면접자들과 싸우던 고블린 무리가 저압탄에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갑자기 고블린에게 쏟아지는 저압탄에 깜짝 놀란 면접자들.
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이 순간 들려오는 검치호의 포효!
크아아앙-
면접자들이 깜짝 놀라 포효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릴 때.
랩터를 산산조각낸 검치호가 깎아지른 바위를 밟고 공터로 뛰어내렸다.
8미터에 달하는 크기와 엄청난 무게!
그러나 이 거대한 검치호가 공터에 떨어지는 순간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어, 어?!”
면접자들은 돌처럼 굳어 갑자기 나타난 검치호를 바라봤다.
고블린과 싸우던 중에 갑자기 튀어나온 거대한 마수!
검치호는 긴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거대한 송곳니가 자라난 머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데굴데굴 구르는 고블린 무리.
돌처럼 굳어 한곳에 뭉쳐있는 인간들.
둘 사이를 천천히 오가는 검치호의 시선.
고양이과 동물 특유의 잔혹한 장난기가 검치호의 노란 눈에 서릴 때.
최후식은 다급히 통신기에 외쳤다.
"전원 고블린 사격 중지! 우선 지원자들부터 빼낸다! 검치호 견제해!"
이 순간.
검치호가 달렸다.
목표는 지원자들!
휙-
잔상이 보이는듯한 엄청난 속도!
쾅, 쾅, 콰쾅-
마탄의 폭음이 연이어 울리고,
섬뜩한 녹색빛이 검치호에게 쏟아졌다.
그러나 검치호는 지그재그로 땅을 박차고 달려 마탄을 피했다.
푹, 푹, 푹-
대부분의 마탄이 땅에 박히고,
몇 발의 마탄이 검치호를 때렸다.
하지만 검치호의 엄청난 속도에 탄환이 미끄러지고.
몬스터의 투사체 반발력에 저압탄은 육체에 닿지도 못한 채 투두둑- 땅으로 떨어졌다.
이세계에서 몇 배는 강해지는 몬스터의 반발력에 급하게 쏜 마탄이 제대로 먹히지 않고 있었다.
"야! 바렛! 바렛으로 대형 마탄! 쏟아부어!"
최후식은 통신기로 외치며 달리는 속도를 더 높였다.
바렛으로 갈기는 대형 마탄이라도 게이트 너머 이곳에서는 저 정도 마수에게 치명상을 줄 수는 없다.
자신이 검치호를 잡고 반발력을 깎아내야 했다.
그러나 최후식은 탱커 스타일.
장거리 이동 속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검치호는 순식간에 지원자 무리에 접근하고 있었다.
"아! 시바!"
최후식이 분통을 터트렸을 때.
누군가 돌진하는 검치호 앞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한 자루 박도를 앞세워 직선으로 달리는 사람!
최후식은 한눈에 알아봤다.
천문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 각성자가 마수에게 달려들다니!
최후식은 반사적으로 고함을 질러 검치호의 어그로를 끌었다.
으아아악-
엄청난 고함에 대기가 북처럼 진동할 때,
검치호의 고개가 슬쩍 최후식에게로 움직였다.
그러나 늦었다.
이미 검치호와 천문석은 충돌하고 있었다!
1톤이 넘는 검치호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천문석!
최후식의 얼굴이 일그러질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탱커의 상상을 초월하는 동체 시력.
그런 최후식의 시야에서 순간적으로 천문석이 사라졌다.
그리고 검치호가 땅을 굴렀다!
쿠르르릉-
무엇인가에 걸려 넘어진 것처럼 데굴데굴 땅을 굴러 처박히는 검치호!
쾅-
다음 순간.
핏-
물결치듯 공기가 일그러지고,
땅에 처박힌 검치호의 등 위에서 나타나는 실루엣!
검치호의 등으로 쿠크리 단검이 떨어졌다.
한경석!
카멜레온 은신 망토를 입고 점멸을 사용한 한경석이 검치호의 등위에 서서 공격하고 있었다.
쾅, 파지직-
쿠크리 단검이 검치호의 육체에 닿자,
푸른 반발 섬광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쾅, 파지직-
콰앙, 파지직-
한경석은 계속 쿠크리 단검을 내려쳐 마수의 반발력을 깎아냈다.
마탄 사격이 먹히게 하기 위한 공격이지만,
이미 정신을 차린 검치호는 미친 듯이 몸부림을 쳤다.
검치호의 요동이 너무 심해 등 위에서 제대로 자세를 잡지 못하는 한경석.
한경석의 쿠크리 단검은 반발력에 제대로 박히지 않고,
채찍처럼 붕붕 휘둘러지는 꼬리에 지금 당장이라도 맞아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한경석은 의표를 찌르는 암살자 스타일.
몸을 드러낸 상태에서의 1대1 대결에서는 밀릴 수밖에 없었다.
이때 검치호를 향해 돌진하는 사람이 있었다.
양손으로 박도를 잡고 단숨에 뛰어들어가는 천문석!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검치호를 굴린 천문석이 다시 한번 돌진하고 있었다.
검치호 꼬리가 귀찮은 듯 수평으로 휘둘러질 때.
천문석은 바람에 눕는 갈대처럼 휘청 몸을 숙여 꼬리를 피하고 단숨에 뛰어들어갔다.
순간 검치호 꼬리는 철퇴처럼 빙글 회전해 수직으로 내려꽂힌다!
휘잉-
방검복과 강화 전투복째로 육체가 으스러질 강력한 꼬리 치기!
이 순간 천문석은 파르르 진동하는 박도를 빙글빙글 2바퀴 돌리더니.
머리로 떨어지는 꼬리를 향해 수평으로 긋는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검치호의 꼬리치기!
수평으로 그어지는 천문석의 횡 베기!
상성 상 불리한 공격,
게다가 천문석은 각성자도 아니다.
언덕을 달려내려 가던 최후식이 고함을 질렀다.
"야! 안 먹혀! 피해! 반발장···!"
파스스슥-
외침과 동시에 푸른 반발 섬광이 터졌다.
그리고 튕겨 나가는 천문석!
천문석이 부웅- 뒤로 튕겨 나갈 때,
기다란 무언가가 툭 끊어져 하늘을 날았다.
“어?”
순간 얼빠진 표정이 된 최후식.
하늘을 나는 기다란 무언가는,
푸른 반발 섬광이 미쳐 사라지지 않은.
검치호 꼬리였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
크아아아아-
꼬리가 끊어진 검치호의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엄청난 울부짖음이 터졌다.
검치호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천문석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가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깔아뭉개질 것 같은 이 순간.
핏-
한경석이 바닥을 구르던 천문석을 낚아채 점멸로 빠져나왔다.
“...!”
최후식은 경악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금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비 각성자가 마수의 반발력을 뚫고 일격에 꼬리를 끊었다고!?
이 순간 검치호의 육체에 붉은빛이 쏘아지고,
공터를 둘러싼 바위 언덕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사선 확인!!"
---
"사선 확인!!!"
바위 언덕 위에서 외침이 들려오고 3초 후!
꼬리가 떨어져 나간 고통에 데굴데굴 구르는 검치호에게 마탄이 쏘아졌다.
쾅, 콰아앙-
총이 아닌 대포를 쏘는 듯한 폭음!
대물 저격총, 바렛으로 쏘아낸 대형 마탄의 폭음이다.
이건 먹혔다!
검치호의 푸른 반발장을 뚫는 대형 마탄의 붉은 마력광!
파스슥-
크아아앙-
검치호의 반발력이 투사체의 힘을 깎아냈지만,
대형 마탄에 실린 충격량과 열기가 마수의 육체를 때렸다!
푸른 반발장과 마탄의 붉은 마력이 맞부딪쳐 폭발하는 매 순간.
검치호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앙-
쾅, 쾅, 콰아앙-
바위 언덕 위,
두 정의 바렛으로 쏘아대는 대형 마탄 순차 사격!
검치호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대형 마탄의 충격량과 털을 태우는 열기에 전의를 잃고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러나 발당 100만 원이 넘는 대형 마탄이지만,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 이세계였다.
대형 마탄은 이세계에서 몇 배나 강해진 검치호의 반발장을 완전히 꿰뚫어 치명타를 주지는 못했다.
몬스터의 육체에 가까워질수록 반발장은 급격하게 강해져,
그 육체 내부에 이르면 투사체의 마력이 거의 통하지 않는 절대 영역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 바렛 사격은 시간 벌기일 뿐.
마수의 반발장을 완전히 깎아내고 마무리를 지으려면 직접 붙어야 한다.
으아악-
최후식은 악을 쓰며 날 듯이 언덕을 뛰어 내려갔고.
천문석을 빼낸 한경석은 지원자를 모두 모아 언덕을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순식간에 가까워지는 한경석과 지원자들.
최후식은 가까워지는 한경석에게 소리쳐 명령했다.
"한경석! 지원자 전원. 장갑 버스로 우선 빼낸다! 목적지 신서울! 바로 달린다! 7, 8팀 전원은 지원자 호위로 붙인다. 지원자 인계 후 경석이 너는 내 뒤로 바로 붙어라! 저놈 우리가 끝낸다!"
[알았음!]
최후식은 한경석과 지원자들을 스쳐 지나가며 천문석을 훑어봤다.
엄청난 일을 해낸 천문석.
그러나 천문석은 첨단이 부러진 박도 조각을 들고 난감한 표정으로 달리고 있었다.
달리는 모습을 보니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최후식이 내심 안도할 때,
얼핏 들려오는 천문석의 걱정스러운 목소리.
"...이거 얼마···? 혹시 붙일 수는···."
최후식은 천문석을 다시 봤다.
중형 마수, 검치호를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굴리고.
반발장을 뚫고 꼬리를 일격에 잘라놓고는.
지금 무기 부러진 걸 걱정한다고?
하-
최후식은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어디든 마찬가지다.
대기업이든 헌터 업계든,
좆같은 새끼들은 어디든 있다.
호의를 권리로 생각하는 좆같은 새끼들.
어째선지 저 걱정스러운 목소리,
난감한 표정을 보는 순간.
검치호의 꼬리를 끊었을 때보다 더 마음이 움직인다.
최후식은 천문석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 순간 최후식은 결심했다.
어떤 조건을 제시해서라도 천문석을 오리온 길드로 끌어드리기로!
"너! 내가 기억했다!"
최후식은 뛰어가는 천문석에게 크게 외치고 검치호를 향해 돌진했다.
---
"너! 내가 기억했다!"
갑자기 버럭 소리치더니 빠르게 멀어지는 오리온 길드 총괄이사.
"..."
천문석의 얼굴이 검게 죽었다.
기억한다니!
무기가 부러진 건 사고일 뿐인데?!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대형 길드가 뭐 이리 쪼잔해!?
이때 같이 달리는 사람들에게서 들려오는 소곤거리는 목소리.
"와- 저 아저씨 어떡해요? 집행부 총괄이사님이 저 아저씨를 기억한대요···."
"...몇억짜리 무기값 물어주게 생겼네···."
"쯧쯧쯧. 그러게, 조심 좀 하시지···."
...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두워지는 천문석의 얼굴.
이때 카멜레온 은신 망토를 입은 한경석이 천문석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걱정. 노노.]
순간 환해지는 천문석의 얼굴.
"네? 그러면···."
[할부. 가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