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9
천문석이 일기일원공의 무아지경에 빠져 있을 때.
장갑 버스는 열차 트레일러에서 내려져 게이트 거점 도시 신서울의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도로 주변으로 스쳐 지나가는 대형 커피 전문점과 헌터 관련 매장, 은행 지점, 대형 마트···.
신서울의 거리는 서울과 비슷한 듯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헌터 비율과 겉모습이었다.
일반인보다 헌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양한 인종의 헌터들은 창과 검, 강화 전투복과 갑옷으로 무장하고 거리를 걷고.
짐을 가득 실은 화물차와 장갑 SUV, 교통 버스, 자전거와 하얀 연기를 뿜는 마차가 뒤섞여 도로 위를 이동했다.
우와아-
환호성이 터지는 순간.
장갑 버스 곳곳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
"저기 좀 봐! 저 사람 갑옷 입고 있어!"
"던전에서 나온다는 아이템인가 봐!"
"생각보다 총을 든 사람이 별로 없는데?"
"마탄 가격이 비싸서 그런 건가?"
...
광화문 게이트의 높은 이용 비용과 긴 대기 순번 때문에,
면접자 중에 게이트 거점 도시 신서울에 직접 와 본 사람은 없었다.
이들은 창밖에 펼쳐진 신서울의 풍경에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이때 면접자 중 한 명이 문득 고개를 돌리다가 천문석을 봤다.
버스 뒤쪽 가장 구석진 자리.
좌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천문석.
천문석을 보는 순간,
면접자는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다리는 가부좌를 틀었고,
그 사이에 선인장 화분이 놓였다.
손은 자연스럽게 무릎 위에 있고,
반개한 눈은 그 어디도 보지 않는다.
버스에서 전해지는 진동에도 미동도 없는 몸.
이 미동 없는 몸 주위를 이질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마치 어딘가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을 사진으로 보는듯한 생경한 감각.
눈앞의 사람은 같은 버스 안이 아닌 다른 차원에 있는 것만 같았다.
면접자는 설명할 수 없는 이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
뭔가 아주 이상했다.
눈앞에 있는 천문석이라는 낙하산에게서 생전 느끼지 못한 이상한 감각이 전해지고 있었다.
면접자는 자신도 모르게 앉아있던 좌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저기요···."
면접자가 버스 통로로 한걸음 내디뎌 무아지경에 빠진 천문석에게 다가가려 할 때.
김 과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여기 좀 봐주세요! 저기 창밖, 도로를 달리는 자전거와 마차 보이시죠?"
'자전거에 마차라고?'
천문석에게 다가가려던 면접자가 의아한 눈으로 도로를 보자 들려오는 목소리.
“왜 저 사람들은 자전거와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닐까요?”
김 과장은 바로 대답했다.
“이곳 신서울 지역을 벗어나면, 마력 엔진이 아닌 석유 내연 기관 차량은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몇몇 면접자들이 무슨 말이 나올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일 때.
김 과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곳 신서울. 더욱 정확히는 광화문 게이트 안정화 권역을 벗어난 지역에서 석유는 정상 연소가 되지 않습니다. 화약 문제를 재금 중공에서 해결한 것처럼. 이 석유 연소 문제 해결을 위해서 여러 곳에서 노력 중이긴 한데···. 아직 가시적인 성과가 없습니다. 제가 왜 이 말을 하냐면···."
면접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어···?"
어느새 자신은 천문석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이 선인장 제겁니다."
"네?"
면접자는 천문석의 말을 듣는 순간 깨달았다.
따끔함이 느껴지는 손!
손이 선인장 가시에 찔려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선인장 가시에 찔린 면접자는 꾸벅 고개를 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내가 언제 저기까지 걸어간 거지? 선인장은 언제 건드린 거야?"
면접자는 자신의 행동에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이상하네···."
이때 천문석도 면접자를 보고 있었다.
첫 운기행공을 깨뜨릴 뻔한 사람.
그러나 천문석은 분노가 담기지 않은 담담한 눈으로 면접자를 바라봤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눈을 뜨는 순간 천문석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전생에서 무공을 수련하며 몇 번이나 겪었던 상황이다.
시련과 기회.
마장과 선연.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는 순간.
하늘이 내리는 시련, 마장(魔障).
하늘이 준비한 기회, 선연(善緣).
하늘은 항상 시련과 기회, 마장과 선연을 같이 준비한다.
저 면접자는 심법의 기틀을 쌓아 올리는 첫 운기행공.
가장 중요한 순간의 무아지경을 깨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천문석이 대공을 성취하는 걸 막으려 한 것이다.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내려 다리 사이를 봤다.
작은 선인장 화분.
그 행동을 저지한 것은 다리 사이에 놓인 이 작은 선인장 화분이었다.
조금 전 저 면접자는 하늘이 내리는 마장이었고,
자신의 다리에 놓인 이 작은 선인장 화분은 하늘이 준비한 선연이었다.
이 작은 선인장 화분이라는 선연으로.
가장 약한 순간을 노린 시련, 마장을 넘어섰다.
역시 인연이란 알 수 없었다.
미소지은 천문석은 문득 손아귀를 쥐었다.
틀어쥔 손아귀에 모이는 근육의 힘, 외력.
그리고 있는 듯 없는 듯 너무나 미약하고 작지만 분명 느껴지는 힘.
기경팔맥을 흐르는 내력!
천문석은 마침내 심법에 다시 입문했다.
그것도 전생의 심득을 담아 자신이 직접 창안한 일기일원공에 입문했다.
하나의 무공을 창안한 대종사.
이제 천문석은 일기일원공이라는 아무도 밟지 않은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해 나가야 했다.
일기일원공의 특성상, 마공처럼 빠르게 강해질 수는 없을 것이다.
오랜 세월 수많은 고수에 의해 다듬어져 완성된 무공과 달리 시행착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두근거림이 더 컸다.
이때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어쩌면 먼 미래, 일기일원공이 일기공과 일원공 둘로 나눠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일기일원공의 두 다리 일기공과 일원공.
두 심법의 상이한 내기의 움직임은 같은 뿌리를 둔 전혀 다른 심법처럼 보인다.
처음 일기일원공을 수련하면 서로 상생하는 게 아니라 서로 상극하는 것만 같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깊은 호수에 돌을 던져 탑을 쌓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성과.
내기는 쌓이지 않고 흩어져 사라지는 것 같고,
시동이 꺼지고 배터리마저 방전된 자동차를 밀듯 막막함만 느껴질 것이다.
그렇기에 일기공과 일원공 둘 중 하나의 심법만 익혀 빠르게 성장하려는 이들이 나올 것이다.
그러나 일기공과 일원공 하나만으로는 처음에는 빠른 성취를 얻어도 나중에는 한계에 막혀버린다.
아무리 잘 뛰어도,
한 발로 달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생각하는 순간 천문석의 머리에 해결책이 떠올랐다.
배터리를 연결해 시동을 걸어주듯,
일기일원공으로 경지에 이른 누군가가 다른 일기일원공의 시동을 걸어주면 된다.
시동이라니···!
현대인다운 생각에 천문석은 내심 웃었다.
문제는 시동을 걸기 위한 경지가 상상 이상으로 높고,
이 경지에 자신의 천강과 같은 심득이 담겨야 한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아니 어려운 일이다.
천문석은 먼 미래의 일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았다.
대대로 일기일원문의 제자들은 엄청난, 정말 엄청난 고생을 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후대에는 일기문, 일원문으로 둘로 나눠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문석은 걱정을 날려 버렸다.
미래의 일은 미래를 사는 사람이 해결해야 하는 법이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이 일기일원공은 자신이 만든 심법이기에 실전 초식이 없었다.
수련공, 동공은 당장 필요하지 않지만.
심법의 힘을 담아 상승 묘리를 풀어낼 초식을 만들어야 했다.
‘어떻게 할까?’
처음부터 하나하나 만들까?
아니면 다른 무공의 형을 빌려올까?
이때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무공이 있었다.
굉천수,
뜬금없이 벽력성을 터트린 무공.
마종권,
아주 오랫동안 수련한 무공.
굉천수와 마종권에서 이 선인장 화분과 같은 선연이 느껴졌다.
천문석은 바로 결정했다.
굉천수와 마종권.
허풍수와 종마권으로 초식을 만든다!
절세 신공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는 무공.
굉천수, 마종권.
그렇기에 더 마음에 들었다.
마종권의 투박함으로 내실을 다지고,
허풍수의 화려함을 밖으로 펼친다!
하하하-
---
지난 한 달여의 고민을 마침내 해결한 천문석.
천문석은 가벼워진 마음으로 창밖 신서울의 거리를 구경했다.
4, 5층? 비교적 건물의 높이가 낮다는 것 말고는 거리는 서울과 다른 게 없어 보였다.
그러나 곧 큰 차이를 알 수 있었다.
무기!
검과 창, 도끼와 방패 그리고 등에 멘 총까지.
헌터들이 무장 박스에 무기를 넣지 않고 직접 착용하고 다니고 있었다.
천문석은 이 순간 이세계에 왔다는 걸 실감했다.
이곳은 총기류를 영치하고 거리를 다닐 때 검, 칼, 도끼 같은 무기를 무장 박스에 넣고 다녀야 하는 한국이 아니었다.
무기를 들고 몬스터와 맞서 싸워야 하는 이세계였다.
천문석은 이곳도 무림과 다른 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가 무림인에서 몬스터로 바뀌었을 뿐.
방심하는 순간 목을 내놔야 하는 건 거친 무림과 다를 것이 없다.
이 순간 들려오는 환호성.
와아아-
"저기 좀 보세요!"
...
버스 안 곳곳에서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천문석의 마음이 천천히 가라앉았다.
그리고 20분 후.
신서울 도로를 달린 장갑 버스는 한 건물 앞 주차장에 멈춰섰다.
"오리온 길드가 신서울에 소유한 건물입니다. 이 안에서 헌터용 장비를 착용하겠습니다."
김 과장은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건물을 소개하고, 면접자들을 건물 안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오리온 길드 건물에서 면접자들이 나왔을 때.
면접자 전원은 강화 전투복에 방검복, 방탄 헬멧과 안전 장갑, 안전 군화 같은 헌터용 장비 풀셋을 착용하고.
창, 검, 도끼 같은 냉병기로 완전 무장하고 있었다.
건물 앞 주차장.
완전 무장한 면접자들이 몸을 움직여 장비를 확인했다.
십여 명의 남녀 면접자 중에 어색한 움직임을 보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몇몇 사람은 군 출신인지 군용 무기술을 펼쳤고,
사설 학원에서 배운 것인지 창술, 도끼술을 펼치는 사람도 있었다.
천문석도 천천히 무기를 움직이며 생경한 강화 전투복에 적응하고 있었다.
손에 들린 무기는 박도(朴刀).
칼등을 따라 혈조가 파이고,
긴 손잡이 끝에 묵직한 원형의 고리가 달려있다.
직선으로 뻗어 나가다가 부드럽게 휜 검신은 대략 70cm.
단단히 가죽을 감은 손잡이는 양손으로 잡을 수 있는 30cm.
손에 걸리는 묵직함은 1.9kg 정도이고,
무게 중심은 뚝 잘려나간 검신 앞쪽이다.
묵직한 무게와 앞으로 쏠린 무게 중심은 베기의 위력을 극대화한다.
천문석은 천천히 박도를 움직이며 강화 전투복에 집중했다.
몸의 움직임에 따라 부드럽게 움직이다가,
정지하고 힘을 주는 순간 단단하게 경화돼는 강화 전투복!
강화 전투복은 손가락으로 천천히 누르자 부드럽게 들어가다가.
빠르게 손날로 내려치자 닿는 순간 딱딱하게 경화돼 충격을 막아냈다.
천문석은 오른손의 박도를 빙글 돌려 몸 뒤로 빼내며 가볍게 왼 주먹을 날렸다.
휘익, 팡-
날카로운 바람 가르는 소리와 충격파!
근육 움직임을 감지,
운동능력을 보조하는 강화 전투복의 위력이다.
그러나 움직임 사이사이 딜레이가 확연했다.
1초 이상!
일상에서는 짧지만.
전투 중에는 생사가 갈리기에 충분한 긴 시간이다.
천문석은 이 장비들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문득 장민 대표의 얼굴이 떠오른다.
오리온 길드에서 제공한 장비를 입어보니 장민 대표가 아무렇지도 않게 빌려줬던 장비 세트가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었는지 새삼 알 수 있었다.
강화 전투복 하나가 30억이 넘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이없어했는데.
이렇게 다른 강화 전투복을 입어보니 가격 이상의 차이가 있었다.
수준이 높아질수록 이 1초의 딜레이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된다.
30억으로 딜레이 1초를 찰나의 순간으로 줄일 수 있다면 오히려 싼 것이다.
수년에서 수십 년의 뼈를 깍는 고련으로도 이 딜레이를 줄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역시 물건값은 그냥 정해지지 않고,
비싼 건 비싼 값을 하는 법이었다.
이때 면접자들과 같은 헌터용 장비를 착용한 김 과장이 길드 건물에서 나왔다.
"모두 헌터용 장비 풀셋을 착용하셨죠? 혹시, 장비에 문제 있으신 분 계십니까?"
"문제없습니다!"
...
헌터용 장비 풀셋을 착용한 면접자들은 일제히 소리쳤다.
김 과장은 면접자들의 대답을 들은 후 말을 이었다.
"지금 입고 있으신 장비들은 여러분이 입사하시면, 오리온 길드에서 무료로 제공할 장비입니다."
와아아아-
순간 터져 나오는 환호성.
김 과장은 자신이 입은 강화 전투복을 가리키며 웃었다.
"이 강화 전투복. 시중 헌터 장비점에서 2억 원 정도 하는 물건입니다."
"2억!"
"이게 2억 원이라고요?"
깜짝 놀라는 면접자들 사이사이.
군 경력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여러분이 들고 계시는 검과 칼, 창 같은 냉병기들도 평균 가격 1억 원 이상인. 헌터 브랜드 제품들입니다."
"역시 오리온 길드···."
"대형 길드는 다르네요!"
"장비 대여료를 월급에서 까는 길드도 있다던데."
...
면접자들은 자신이 입은 장비를 만지며 감탄했고,
이들의 눈에 오리온 길드에 대한 호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이때 김 과장이 외쳤다.
"모두 장비 확인하셨으면 바로 탑승해주세요! 오리온 길드 현장 면접! 바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우렁찬 외침이 터지고,
면접자들은 밝은 얼굴로 장갑 버스로 뛰어올랐다.
완전 무장한 면접자들을 실은 장갑 버스는 바로 현장 면접 장소로 출발했다.
목적지는 신서울 동쪽 2시간 거리,
오리온 길드의 개미굴 광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