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41화 (42/1,336)

#041

집으로 돌아오는 2호선 지하철.

류세연은 운 좋게 지하철 좌석에 앉아 있었다.

몬스터 위기 상황이 끝나고 첫 휴일, 늦은 저녁 시간대.

백화점과 놀이공원이 같이 있는 2호선 잠실역을 지나온 지하철 안에는 사람들이 반쯤 차 있었다.

류세연은 주위를 둘러봤다.

서울에 내려진 몬스터 위기 경보,

안전지대 서울에 생겨난 던전과 균열은 큰 사건이었다.

그러나 일상을 위협하는 큰 사건이 바로 며칠 전에 있었지만.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손을 잡고 장난치며 웃는 연인들,

휴일 출근을 했는지 피곤해 보이는 직장인.

온종일 놀다가 잠든 아이를 챙기는 아빠, 엄마.

동물 귀가 달린 모자를 쓴 채 웃고 있는 교복 입은 학생들.

구형 군복을 입고 무장 박스를 짊어진 남자와 검은 로브를 걸쳐 강화 전투복을 가린 헌터.

그리고 들려오는 군화 소리.

쿵, 쿵, 쿵-

"잠시만 지나가겠습니다."

완전 무장한 3인 1조 헌터 부대 군인들이 객차 중앙을 지나가자,

사람들이 좌우로 갈라져 길을 열었다.

헌터 부대 군인들은 검은 로브를 걸친 헌터에게 다가가 헌터 라이센스를 확인하고 경례를 한 후 다시 걸어갔다.

1급 몬스터 위기 경보는 해제됐지만,

헌터 부대는 여전히 지하철 객차 안까지 순찰하고 있었다.

이미 지하철 선로 수색은 끝났지만,

혹시나 놓쳤을지도 모를 몬스터를 경계하고 있었다.

이렇게 완전 무장한 헌터 부대 군인들이 지나가도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장한 헌터 부대 군인은 몬스터라는 위험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이 시대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류세연은 군인들이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걸 보고 시선을 위로 돌렸다.

천문석.

삼촌···. 아니 옥탑방 오빠가 바로 앞에 있었다.

몇 개의 쇼핑백과 노트북 상자를 양손에 들고 서 있는 천문석.

천문석은 어둠뿐인 창밖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시선은 앞을 향한 직선.

대나무처럼 바르게 펴진 몸은 미동도 없다.

류세연은 물끄러미 천문석을 봤다.

배우들처럼 잘생긴 것도 육체계열 헌터들처럼 시선을 잡아끄는 건장한 몸도 아니다.

평범한 얼굴,

평범한 체형.

그러나 옥탑방 오빠가 있는 이 주위만 다른 공간인 듯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오빠의 이 담담한 얼굴을 오랫동안 보고 있으면.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화산을 보는 듯 조마조마해지고,

위험한 맹수 앞에 선 듯 등줄기로 전율이 흐르며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포식자의 눈치를 살피는 피식자처럼 위축되어 힐끔힐끔 훔쳐보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눈이라도 마주치면.

이 검은 눈 속에서 들끓는 무언가에 압도당해 홀린 듯 바라본다.

류세연은 아주 오랫동안 함께해 이제는 익숙해진 천문석의 담담한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때 문득 느껴지는 시선.

눈을 돌려보니 지하철 곳곳에서 이쪽을 힐끔거리는 여자들이 보였다.

고개를 갸웃하며 힐끔거리다가,

문득 깜짝 놀라서 휙 고개를 돌리고.

어느 순간 홀린 듯 뚫어지게 응시하는 시선들.

천문석과 같이 다닐 때면 여러 번 봐서 익숙한 일이다.

류세연은 문득 고개를 들어 천문석의 담담한 표정을 봤다.

'막상 오빠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말야.'

이 순간 류세연은 가슴속에서,

웃음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 무표정하고 담담한 얼굴 속에 얼마나 많은 표정이 있는지 자신만 알고 있었다.

웃음, 기쁨, 환희, 분노, 좌절, 고통, 의심, 난처함, 어이없음···.

수많은 표정을 자신만 봤고,

수많은 감정을 자신만 같이 겪었다.

간질거리는 가슴속,

크게 부풀어 오른 웃음이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큽-

"야. 뭐야? 갑자기 왜 이상하게 웃어?"

핀잔 주는 오빠 같은 말투,

그러나 너무나 근사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

"삼촌. 학교에 구하러 온 거 고마워."

류세연은 늦은 감사 인사를 했고,

천문석의 얼굴에는 어이없어하는 표정이 생겨났다.

툭-

천문석은 류세연의 어깨를 치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다.

"됐어. 뭘 그런 거로 감사 인사야."

"..."

류세연은 빙그레 미소지으며,

천문석의 평소대로 담담한 얼굴을 바라봤다.

담담한 표정 속에 담긴 깊은 마음이 보슬비처럼 마음을 적신다.

오빠는 기억하고 있을까?

이 놀이공원에 오는 건 두 번째라는걸···.

오래전 약속한 대로,

오늘 자유 이용권을 사서 다시 이 놀이공원에 왔다는 걸···.

그동안 약속을 까맣게 잊은 듯한 모습에,

자신이 얼마나 분해했었는지를···.

류세연은 어쩐지 얄미워져 한참 동안 천문석을 노려봤다.

그러자 잠시 후 의심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 혹시!? 카드 몰래 가져온 거야? 이거 장물인 거야?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해라."

천문석은 노트북 상자를 앞으로 내밀며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류세연은 내심 웃음을 삼키며 대답하고, 자신이 사준 노트북 상자를 봤다.

노트북.

자신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

노트북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받은 오빠는.

휴일에 이불 속에서 빈둥거리다가 끌려 나와 건물 청소와 보수작업을 했다.

그리고 백화점에 와서 노트북을 사고, 놀이공원에서 5시간이 넘도록 어트랙션을 탔다.

처음 귀찮아하던 모습과 달리 열심히 일하고, 어느새 즐거운 얼굴이 되어 같이 어트랙션을 타고 놀았다.

나이를 먹으면 사람은 달라지는 걸까?

류세연은 문득 천문석의 얼굴을 찬찬히 다시 봤다.

초등학생, 그때 여기에 왔을 때는 신기한 놀이공원과 어트랙션만 눈에 보이고 옆에선 사람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은 신기한 놀이공원보다 동행한 사람의 얼굴을 더 많이 봤다.

오래전 놀이공원에 다시 오자는 약속을 지킨 건 덤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놀이공원이 아니어도 좋았다.

오늘은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오빠와 아주 오랜만에 같이 놀 수 있었던 즐거운 휴일이었다.

엄마가 쌓아준 카드 포인트에 고마울 정도로 즐거운 하루였다.

류세연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이때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음흉한 웃음.

크크큽-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온 음흉한 웃음에 류세연이 깜짝 놀랄 때.

천문석은 더 크게 놀랐다.

“얘가 왜 이래? 어?”

“야! 너 왜 갑자기 웃어?”

“이거 감이 이상한데···?”

“너 솔직히 말해라. 사고 친 거 있지?!”

“지금 말하면 딱밤 열대로 봐준다!”

“빨리 사실대로 말해라!”

“나 지금 촉이 왔다!”

“엄청 큰 사고치고 땀을 뻘뻘 흘리며 수습했던 그때! 그때랑 비슷한 촉이 왔어!!”

천문석은 류세연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

지하철에서 내려 언덕길을 올라 도착한 건물 앞 현관.

"야. 받아라."

천문석은 류세연에게 추리닝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주고 계단을 오르려다가,

우편함에 들어있는 편지를 발견했다.

"어? 웬 편지야?"

"뭐야? 삼촌 편지 왔어? 어디서 온 거야? 누가 편지 보낼 사람 있었어? 내가 대신 봐줄까?"

“내가 글도 모르는 꼬맹이냐? 뭘 대신 봐줘.”

천문석은 달라붙는 류세연을 밀어내고 편지 봉투를 살폈다.

발신인에 적힌 이름은.

[김철수].

철수형이 보낸 편지였다.

“어? 철수형이 웬 편지야?”

"김철수면 삼촌이랑 같이 알바하던 그 오빠? ...나이랑 호칭이랑 안 맞잖아! 이상하잖아! 진짜 계속 이럴 거야···?!"

“시끄럽다. 훠이- 저리 떨어져.”

천문석은 분통을 터트리는 류세연에게서 등을 돌리고 편지를 뜯었다.

///

미친놈아!

2020년 대한민국에서 일주일 넘게 통화가 안 되다니!

이거 실화냐!?

20대가 휴대폰없이 일주일 사는 게 가능한 거였냐?!

내가 처음 쓰는 편지가 남자 놈한테 쓰는 거라니!!

이런 어이없는 녀석!!

어쨌든 이 편지 받으면 적어둔 주소하고 약도 보고 바로 찾아와라.

새 일 세팅 거의 끝났고,

이번에는 사무실도 얻었다.

너 오면 바로 일 시작할 수 있다.

편지 보면 지체 없이 바로 와라.

엄청난 성공이 우리를 기다린다!

-추신.

키즈카페 알바는 내 실수였다.

이번에는 그런 일 아니니까 바로 와라.

와서 보면 깜짝 놀랄 거다.

혹시 사무실 찾기 힘들면 전화하고.

김철수.

///

천문석은 편지를 보는 순간 깨달았다.

"휴대폰!"

세연이가 휴대폰을 고쳐주겠다고 열흘 전에 가져갔는데!

채널이 100개가 넘게 나오는 텔레비전에 빠져 깜빡하고 있었다!

"야! 내 휴대폰···."

천문석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편지를 훔쳐보던 류세연이 외쳤다.

"거의 다 고쳤어! 나중에 가져다줄게! 나 먼저 간다!"

"야! 뛰지 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세연은 번개같이 계단을 뛰어올라 사라졌다.

천문석은 계단을 오르며 생각했다.

철수형이 새로운 일을 시작할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하긴 오래 쉬었으니, 이제 다시 일할 때가 됐다.

하지만 천문석은 이번에는 철수형과 같이 일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장대한 건물주 프로젝트의 첫걸음.

헌터 자격증을 받기 위해서는 2년의 관련 업종 경력을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 백화점에서 면접용 정장도 사지 않았던가?

이제 헌터업 구인·구직 게시판을 확인하고 신입 헌터 면접을 보러 다녀야 한다.

그러나 철수 형에게는 그동안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천문석은 일은 같이하지 않아도 철수형 사무실로 직접 찾아가서 축하해줄 생각이었다.

"...사무실을 얻었다고?"

계단을 오르던 천문석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에 든 편지를 다시 봤다.

"철수형 이번에는 본격적이네. 사무실 위치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 76번지. 재금 빌딩 13층···."

이 순간 계단을 오르던 천문석은 우뚝 멈춰섰다.

"...광화문이라고!?"

경악한 천문석은 편지에 적힌 주소와 그려진 약도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광화문 76번지 재금 빌딩 13층, 김철수 사무실.]

"...!"

철수형은 광화문 게이트 바로 앞!

우리나라에서 임대료가 가장 비싼 곳에 사무실을 얻었다!

"철수형! 진짜 재벌이었던 거야?!"

천문석은 철수형에 대한 호감도 게이지가 MAX로 올라가는 걸 느꼈다.

동시에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

///

몸이 힘들었던 알바 전선.

몸과 마음이 같이 힘들었던 키즈카페!

모두 철수형과 함께했다.

몬스터 위기 상황도 같이 넘겼고.

철수형이 기차를 창문 떨어뜨려 자신을 구해주기도 했다!

철수형은 전우다!

전우와 같이 일하는 건 당연한 일!

무슨 일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철수형이 ‘광화문’에 사무실까지 얻었는데!

당연히 도와야 한다!

///

이 순간 헌터 경력을 쌓기 위해 신입 헌터 면접을 보러 다니겠다는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천문석은 결심했다.

내일 당장 철수형을 찾아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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