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장민 대표, 꼬맹이와 헤어진 후.
천문석과 류세연은 백화점으로 다시 들어갔다.
목적지는 백화점 7층의 노트북 매장.
노트북 매장에 들어선 류세연은 쓱 주위를 둘러보더니 진열된 노트북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 노트북. 최고 사양으로 주세요."
점원은 노트북 상자를 꺼내며 말했다.
"이 노트북 라인 중 최고 사양입니다. 가격대가 좀 있는 모델인데 학생분이 쓰실 거라면···."
"아뇨. 그걸로 살게요."
류세연은 시계를 한번 보더니 바로 결정했다.
"결제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고객님?"
"이 카드 포인트로 일시불 결제해주세요."
점원의 말에 류세연은 검은색 카드를 내밀었고, 카드를 받은 점원은 난감한 표정이 됐다.
"고객님. 카드 포인트로는 전액 결제가 안 되시는데..."
천문석이 앞으로 나서며 지갑을 꺼냈다.
지금이 장민에게 받은 백만 원권 백화점 상품권을 쓸 때였다.
이때 류세연이 내민 카드 색을 본 매장 매니저가 재빨리 다가와 점원에게서 카드를 건네받았다.
"제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VIP 고객님. 전액 포인트 결제 맞으시죠?"
"네. 그렇게 해주시고 포인트 모자라면 차액은 일시불 결제해주세요."
포스기에 카드가 들어가고,
매니저는 영수증과 카드를 류세연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5,175,000원 전액 포인트로 일시불 결제됐습니다. 고객님."
류세연은 능숙하게 카드와 영수증을 받더니 천문석에게 말했다.
"오빠 뭐해?"
멍한 표정의 천문석.
"..."
"오빠. 노트북 들어."
"어, 그래."
천문석은 백화점 상품권을 꺼내려던 지갑을 주머니에 다시 넣고,
점원이 건네주는 5,175,000원짜리 노트북 상자를 두 손으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수고하세요. 오빠 빨리 가자. 우리 오늘 할 거 많아."
"..."
어쩐지 급해 보이는 류세연과 노트북 상자를 든 천문석은 점원의 인사를 받으며 매장에서 나왔다.
"이거 타고 위로 올라가야 해."
"..."
천문석은 류세연을 따라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갔다.
넋이 나간 듯 멍한 천문석.
천문석은 문득 고개를 들어 앞에 선 류세연을 봤다.
류세연은 휴대폰으로 바쁘게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방금 전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500만 원짜리 노트북 상자를 들고 있으니,
눈앞의 류세연에게서 눈부신 후광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집안이 부자인 건 알고 있었지만,
대체 뭘 사면 카드 포인트가 500만 원이 넘게 쌓인단 말인가!?
이때 휴대폰을 보던 류세연이 문득 고개를 들더니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표창장이랑 포상금이랑 뭐가 좋아?"
"뭐?"
의아해하는 천문석에게 류세연이 휴대폰을 흔들며 설명했다.
"이번 사태 정부 포상금 말야. 헌터부에서 키즈카페하고 학교까지 행적 확인 끝났다고 연락 왔어. 그런데 표창장 대상자가 너무 많다는데? 그래서 표창장 포기하고 포상금으로 받으면 2배로 지급한다는데. 어떻게 할까?"
그렇다면 당연히 포상금이다!
천문석은 멍한 중에도 재빨리 판단을 끝내고 대답했다.
"당연히 포상금이지."
류세연은 어째선지 눈을 반짝이더니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바로 연락할게!"
류세연은 휴대폰에 문자를 입력한 후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다 끝났다!”
홀가분한 듯 기지개를 켜며 만족스럽게 웃는 류세연.
"그럼 삼촌이 사주는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볼까?"
"나 부자다. 비싼 거로 먹어라."
류세연은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아니. 여기 오면 꼭 먹고 싶었던 거 있어. 위로 좀 올라가면 있어."
천문석과 류세연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도착한 층은 야시장처럼 꾸며진 행사장이었다.
류세연에게 이끌린 천문석은 야시장을 구경나온 관광객처럼 여러 매대에서 음식을 사 먹었다.
"4,000원은 너무 비싸. 저기는 500원 싸던데 저기서 사줘."
500만 원짜리 노트북을 한 방에 지르고 500원을 아끼는 류세연이었다.
이런 류세연과 함께 떡볶이와 맛탕, 닭꼬치와 슬러시, 솜사탕을 먹으며 식품관 안을 걷는 천문석.
천문석은 점차 활기가 돌아왔다.
힘찬 발걸음!
활기 가득한 몸!
별처럼 반짝이는 눈!
그리고 입가에 걸린 감출 수 없는 웃음까지.
흐흐흐-
천문석은 손에 들린 노트북 상자를 볼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렇게 천문석과 류세연은 음식을 사 먹고, 백화점 매장을 구경하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하며 한참 동안을 걸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천문석은 깨달았다.
"어···?"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
채광창에서 쏟아지는 빛이 느껴졌다!
여름의 강렬한 햇빛을 맞으며,
천문석은 깨달았다.
"왜 여기 있는 거야?"
분명 백화점 안을 걷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놀이공원 안이었다!
게다가 지금 자신은 류세연과 함께 어트랙션 앞에 줄을 서 있었다.
문득 손목에서 느껴지는 감각!
어느새 손목에는 자유이용권 플라스틱 팔찌가 채워져 있었고,
이 손을 류세연이 잡고 있었다.
"...!"
뭐지? 여우에게 홀리기라도 한 건가?!
"세연아!"
천문석이 다급히 류세연을 부르는 순간.
"자. 이제 들어가시면 됩니다!"
어트랙션 관리인이 차단기를 올리며 말했다.
와아아아-
교복 입은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우르르 움직이자.
"우리도! 빨리 가자!"
손을 잡아끄는 류세연에게 이끌린 천문석은 얼떨결에 바이킹을 탔다.
그리고 해가 완전히 지고 놀이공원 안에 전등이 환하게 밝혀질 때까지.
천문석은 놀수록 생생해지는 류세연과 쉴 새 없이 어트랙션을 타야 했다.
5시간 동안!
---
류세연은 팔을 쭉 뻗은 채 허리를 좌우로 비틀어 스트레칭했다.
"으- 재밌었다."
탄성을 지르며 스트레칭을 계속하다가 문득 아쉬운 듯이 하는 말.
"...좀 아쉽긴 하다. 그렇지? 우리 좀 더 타다 갈까?"
천문석은 어이가 없었다.
"야! 인간적으로 5시간 동안! 쉬지 않고 탔는데! 이게 아쉬우면 안 되지!"
"흐흐흐- 그런가? 뭐 그럼 오늘은 이 정도로 할까?"
분노하는 천문석과 웃으며 즐거워하는 류세연.
류세연은 고민이 해결된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고,
이런 모습을 보며 천문석도 결국 허탈하게 웃었다.
하-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
천문석과 류세연은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놀이공원에서 빠져나가며 천문석은 문득 생각했다.
이렇게 먼 곳까지 놀러 나온 건 류세연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이었다.
"..."
그러고 보니 류세연이 초등학생일 때 이 놀이공원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자신은 알바에 치이던 고등학생이었다.
어느 휴일, 알바하던 가게 사장님이 준 놀이공원 입장권으로 초등학생 류세연과 이곳 놀이공원에 놀러 왔었다.
입장권만 가져서 어트랙션을 타지는 못했지만 즐거운 하루였다.
고등학생 천문석과 초등학생 류세연 두 사람은 솜사탕 하나를 나눠 먹으며,
바이킹, 아틀란티스, 혜성 특급 같은 어트랙션과 놀이공원 안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엄마 아빠의 손을 잡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발간 얼굴로 웃으며 귓속말하는 연인들.
환호하며 우르르 몰려다니는 학생들.
...
웃음, 기쁨, 즐거움은 전염성이 강하다.
우울한 초딩 류세연은 주위에 가득한 즐거워하는 사람들에게 금세 전염됐다.
환한 얼굴, 신이 난 목소리로 바이킹, 아틀란티스를 타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서 이야기하던.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집에 혜성 특급을 설치하겠다던 초등학생 류세연의 얼굴이 기억난다.
집에 가기 싫다던 초딩 류세연에게 다음에는 자유 이용권을 사서 놀러 오자고 약속했었는데···.
어쩌다 보니 오늘 자신도 모르게 그 약속을 지키게 됐다.
천문석은 문득 옆에서 걷고 있는 류세연을 봤다.
검은 모자를 눌러썼음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멈추는 아름다운 얼굴.
평소 밖에서는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하고, 차갑던 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 환한 미소에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끌린다.
그러나 류세연은 이 시선들을 못 느끼는 것처럼 웃음 띤 얼굴로 자신을 보며 쉴 새 없이 이야기했다.
"...혜성 특급 재밌지 않았어? 그래도 내가 타 보니까 아틀란티스랑 신밧드의 모험이 더 재밌는 거 같아···."
"..."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긴 시간이 지나 초등학생 꼬맹이는 훌쩍 자랐지만.
그 환한 얼굴, 신이 난 목소리는 여전히 그 안에 남아있었다.
그때의 약속은 이미 까맣게 잊은듯하지만.
정말 오랜만의 휴일,
이런 하루도 나쁘지는 않았다.
---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백화점에 다시 들린 천문석은 백화점 상품권으로 류세연에게 추리닝 두 벌을 사줬다.
"이제 녹색 추리닝은 버리고 그거 입어라."
"그렇게 헤프게 물건 버리고 그러면 건물주 못 된다."
류세연은 추리닝이 들어있는 쇼핑백을 신나게 빙글빙글 돌리면서도 훈계하듯 말했다.
"야. 녹색 추리닝은 이제 갈 때가 됐어! 지금 몇 년째 입는 거야? 걔도 얼마나 힘들겠냐? 집에 가면 당장 버려라. 의류 수거함에도 넣지 말고! 바로 쓰레기봉투에 넣어! 의류 수거하시는 분이 쓰레기 버렸다고 화내신다!"
류세연의 어이없는 주장을 반박하며,
천문석은 신사 정장 이월상품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여긴 왜? 정장 사려고? 면접 보려고? 내가 한 벌 사줄게. 정장 살 거면 여기 말고 다른 매장으로 가자."
류세연은 말을 쏟아내며 천문석의 팔을 잡아끌었다.
천문석은 류세연의 손을 풀어내며 말했다.
"됐어. 상품권 있어. 그리고 내가 볼 면접에서는 이 정도가 딱 좋아."
"나 카드 포인트 아직 많이 남았는데···."
천문석은 대답 없이 정장을 골랐다.
류세연에게 뭔가를 더 받을 생각은 없었다.
노트북은 기존 노트북이 오래돼 갈 때가 됐고,
자신보다 옥탑방에 놀러 온 류세연이 더 많이 쓰기에 받은 것이다.
아무리 주는 사람이 부담되지 않아도 값비싼 선물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이게 괜찮은 거 같아!"
어느새 류세연은 적극적으로 행거에 걸린 양복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천문석은 류세연이 행사장에서 골라준 여름 양복과 넥타이, 구두, 와이셔츠까지 면접 정장 일체를 한꺼번에 사들였다.
이걸로 면접용 의상은 완성.
이제 선물 받은 백화점 상품권은 20만 원이 남았다.
이걸로는 따로 살 게 있었다.
"지하철역 가기 전에, 지하 1층 들렀다가 가자."
천문석은 백화점 지하 1층 식품관의 한 매장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왜?"
"장민 대표님 집에 초대받았잖아. 빈손으로 가면 예의가 아니지."
"이걸 사가려고?"
류세연은 천문석이 들어가는 매장 간판을 가리켰다.
[명품 안동 간 고등어]
"장민 언니가 안동 간 고등어를 좋아 한데?"
"아니. 장민 대표님 말고, 고등어 엄청 좋아하는 꼬맹이가 있어."
"고등어를 좋아한다고?"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좋아하는지 7달 동안 매일 고등어만 먹은 꼬맹이가 한 명 있어. 걔 줄 선물이야. 킄-”
천문석은 선물을 받은 꼬맹이 모습을 상상하는 순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킄큽크크-
알고 있다.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다.
그러나···.
이 선물을 받았을 때,
꼬맹이가 지을 표정을 상상하면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크크큽-
악당처럼 웃은 천문석은 매장을 몇 군데 더 들린 후 류세연과 지하철을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