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9
백화점 13층 VIP 라운지.
강화 유리로 덮여 밖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곳에는 드문드문 10개도 되지 않는 테이블만 놓여있었다.
장민은 텅 빈 라운지를 지나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대화를 나누면 되겠네요. 음료 어떤 거로 드시겠어요? 여기는 딸기 요거트 스무디가 괜찮던데?"
천문석과 류세연, 꼬맹이가 의자에 앉으며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딸기 요거트 스무디로 먹을게요!”
장민은 웃으며 종업원에게 말했다.
"딸기 요거트 스무디 네 잔 가져다주세요."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종업원이 멀어지자 장민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알바씨?"
"네?"
"위탁하신 그 마석 상태가 특이하더군요."
"혹시 깨진 것 때문에 가격이 많이 깎였나요?"
천문석의 우려에 장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소매업자들이 마석을 구매할 때는 파손 정도로 가격을 깎는데···. 정제 방법에 따라서 파손 여부는 큰 상관이 없는 경우도 있어요."
장민의 말에서 마석의 파손 정도는 문제가 아니라는 뉘앙스가 풍겼다.
"그럼 뭐가 특이한 거죠?"
"처음 위탁한 마석을 감정한 감정사는 마력 각성자가 탈세 목적으로 무자료 개인 정제를 하던 마석이 아닌가 의심하더군요. 겉모습은 마수의 마석인데 마석에 남아있어야 할 마수의 사념이 깨끗이 지워졌다고요."
천문석은 장민이 하는 말을 바로 알아들었다.
전법륜인 딱밤으로 마석의 갈망을 깨뜨렸을 때,
마석의 갈망이 백곰의 사념이 아닌가 의심했는데··· 사실이었다.
천문석이 갈망의 정체를 확인하고 내심 고개를 끄덕일 때,
어느새 종업원이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다가왔다.
"주문하신 딸기 요거트 스무디 나왔습니다."
"저한테 주세요."
장민은 스무디를 받아 하나하나 빨대를 꽂아 류세연과 천문석, 돌머리 꼬맹이 앞에 놓아줬다.
“감사합니다.”
“언니. 고마워요.”
"특급 헌터는 감사합니다!"
쪼르르르륵-
꼬맹이가 빨대로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빨아 먹을 때, 장민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무자료 탈세 마석이 아닌지 의심한 감정사가 여러 가지 테스트를 했는데···. 결론만 말씀드리면. 정상 마석이라고 결론이 났어요."
"그러면···?"
장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상거래가 가능해요. 그런데 마석 감정사 본인이 그 마석을 연구목적으로 구매하고 싶다고 연락을 했어요."
장민은 명함 케이스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펜으로 숫자를 적고 뒤집어 천문석에게 밀었다.
"마석 감정사가 제시한 금액입니다."
명함을 뒤집자 이름 아래 쓰인 숫자가 보였다.
장강 유통
대표 장민
[2,000]
이천만 원!
생각 이상의 거액이었다.
그러나 마석 거래가 처음인 천문석은 이게 적정 가격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천문석은 장민에게 직설적으로 물었다.
"제가 마석 거래는 처음이라, 조언을 구해도 될까요?"
장민은 바로 대답했다.
"사실 위탁한 마석 자체의 가치만 따지면 소매 가격으로 200~800 정도 될 거에요. 그런데 이 사념이 지워진 방식이 특이하다고 하네요. 아예 사념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는데···."
장민은 테이블을 톡 한번 두들기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제가 보기에 마석 감정사는 이 마석을 연구해서 마석 정제 효율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으려는 것 같네요. 마석 정제 효율 개선은 규모가 큰 프로젝트에요. 단 1%만 정제 효율을 개선해도 막대한 이익을 얻을 수 있어요."
장민은 말을 끝내고 천문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생각할 시간을 주는듯한 모습.
천문석은 장민의 말에서 감을 잡았다.
백곰 마석 자체의 소매 거래 가격은 200~800만 원.
가격 편차가 큰 것은 마석에 금이 간 것을 이유로 가격을 후려치는 소매상이 있을 거라는 뜻.
그리고 장민 대표가 아닌 자신이 팔 때 받을 수 있는 가격을 말하는 것이리라.
2,000이라는 숫자는 연구목적 그리고 일개 헌터가 아닌 장강 유통 대표가 판다는 것까지 프리미엄이 두 번 붙은 가격이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생각난다.
가장 처음 든 생각.
마석의 사념을 지운 방식을 특허화해서 마석 정제 효율을 올리는 방법을 개발하면 어떨까?
그러나 마석의 사념을 지운 방법은 자기도 완전히 이해하고 있는 방법이 아니었다.
전생의 스승님께 배운 수인.
이건 새가 나는 법을 알고, 아이가 숨 쉬는 법을 아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자연스럽게 알고 행하게 된 것이었다.
이걸로 뭘 개발하고 그런 거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내가 직접 마석을 정제해서 판매하면 어떨까?
하지만 이건 더 말이 안 된다.
마력 각성자가 되지 않는 이상,
혼자서 사념을 지우고 마석을 정제할 수는 없었다.
마석 정제는 대규모 설비를 갖춘 대기업과 각성자 중에서도 희귀한 마력 각성자만 가능하다.
몇몇 마력 각성자들이 무자료 마석 정제로 세금을 회피하고 엄청난 이익을 거뒀다가 탈세범으로 뉴스에 등장하곤 했다.
그러나 이건 자신과 상관없는 남의 일이었다.
지금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냥 마석을 파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을 낸 천문석은 바로 대답했다.
"이 정도 가격이면 충분합니다. 팔아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장민은 천문석을 묘한 눈으로 보며 대답했다.
"네. 그럼 마석은 그 가격으로 팔도록 할게요."
"수수료는 제하시고 입금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천문석의 말에 장민은 웃으며 대답했다.
"첫 거래니. 앞으로의 성공적인 파트너쉽을 기원하는 의미로 이번 거래는 수수료 없이 해드리도록 할게요."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인다.
"아. 판매 대금은 장비 '계약금'으로 걸어둘까요? 제임스가 말하던데, 정글도 마음에 드셨다면서요?"
장민의 얼굴에 떠오른 장난스러운 미소.
"네. 하하···."
천문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장비를 반납하며 제임스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정글도와 강화 해머, 강화 전투복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장비를 회수하는 제임스에게 이런 장비는 얼마 정도 하냐고 물었었다.
제임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었다.
"텐."
"10만 달러?!"
잠시 놀랐지만,
성능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싼 가격이었다.
이것이 현대적인 생산 공정의 힘인 건가?
돈을 벌면 하나 살까?
천문석이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을 때.
제임스는 다시 말했다.
"10억 원."
"...이거 다해서 10억 원은 아니겠지?"
헛된 희망이 담긴 천문석의 질문에,
제임스는 상자 안에 담긴 장비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대답했다.
"감쇄 방검복 10억."
"강화 전투복 31억."
"헌팅 장갑 2.5억."
"안전 군화 3.2억."
...
그리고 제임스의 손이 정글도에서 멈췄다.
"이 정글도는···."
제임스는 휴대폰을 꺼내 잠시 검색을 하더니 천문석에게 휴대폰 화면을 보여줬다.
"대량 생산품이 아니라 정확한 가격이 안 잡혀 있다. 이거랑 가격이 비슷할 거야."
휴대폰 화면에는 푸른 섬광이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검을 든 사람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검 아래 적힌 숫자.
[$5,000,000]
"..."
어이없게도 천문석이 류세연을 구하러 갈 때 들고 간 정글도 하나만 55억!
장비 가격 총합은 100억 원을 훌쩍 넘겼다!
처음 든 생각은 어이없음이었다.
'아니 장민 대표는 뭘 보고 나한테 이걸 그냥 빌려준 거야?'
그리고 다음 순간 천문석은 깨달았다.
"어?!"
이 장비들을 입고 늑대, 백곰 마수와 격전을 벌였다.
강화 패드 수십 장이 깨지고, 방검복과 전투복 곳곳에 전투 흔적이 남았다.
그리고 무기인 정글도와 강화 해머도 거칠게 사용했다.
눈에 띄게 장비가 파손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사용한 장비 모두 보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 정도 가격대 장비의 보수 비용이 낮을 리 없었다.
천문석은 바로 제임스에게 물었다.
"보수 비용···."
제임스는 손을 들어 천문석의 말을 끊었다.
"장민 대표님이 혹시 그걸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라고 하셨다."
제임스가 전한 장민의 말은 짧았다.
'좋은 친구를 사귀게 돼 기쁘군요.'
"..."
잠시 말문이 막혔던 천문석은 감탄했다.
100억의 넘는 장비를 담보도 없이 빌려주고,
막대한 수리비용이 들 텐데도 남긴 건.
'좋은 친구를 사귀어 기쁘다.'라는 짧은 말뿐.
천문석은 장민 대표의 배포에 다시 한번 놀랐다.
그리고 각성 헌터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을 벌려고 헌터일을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 장비의 가격은 서울에 건물을 사도 돈이 남을 정도로 고가다.
아니? 이런 비싼 장비까지 사용하면서 왜 헌터를 계속하는 거지?
이건 흡사 출퇴근을 편하게 하려고 직장까지 지하철을 뚫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지하철을 뚫을 돈이면 평생 출근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다.
천문석은 목적과 과정이 뒤바뀐듯한 모습에 어이없어했었다.
...
이때 상념에 빠진 천문석을 깨우는 장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약금을 걸어 놓으시겠어요? W.S. 에서 마력 무구를 하나 더 내놓으려는 것 같은데···. 원하신다면 제가 선점을 해둘게요. 친구 특전으로 무이자 초장기 할부도 가능하답니다."
나긋한 어조로 진지하게 말하는 장민.
그러나 장민의 두 눈은 악의 없는 짓궂음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천문석은 가격이 얼마냐고 묻지도 않았다.
"아니요! 그냥 현금으로 받겠습니다!"
천문석은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고,
장민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네요. 다음번에는 꼭 저희 장강 유통에서 장비를 구매해 주시면 좋겠네요. 좋은 친구와의 거래는 언제나 즐거우니까요."
“그건 십 년이 지나도 힘들 것 같습니다.”
천문석의 솔직한 대답에,
장민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럼 다음에 또 마석을 구하시면 꼭 팔아주세요. 좋은 가격과 신뢰로 모시도록 할게요.”
“...네. 감사합니다.”
장민은 손을 내밀어 천문석과 악수를 하며 다시 한번 장난스럽게 말했다.
“뭘요. 제가 더 감사하죠. 고객님.”
"..."
천문석은 장민의 감사를 받기가 민망했다.
한 자루 500만 달러가 넘는 정글도,
한 세트 100억 원이 훌쩍 넘는 헌터용 장비 풀세트를 거래하는 장민 대표다.
몇백억짜리 거래를 하는 장민 대표에게 2000만 원짜리 마석 한 개 거래는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도 장민은 감사 표시를 하면서 앞으로 좋은 거래를 이어가자고 말하고 있었다.
천문석은 장난스러운 말 속에 담긴 장민 대표의 진심 어린 호의를 느낄수 있었다.
좋은 인연은 평생 단 한 번 맺기도 쉽지 않은 법.
이번 서울 사태에서 얻은 가장 큰 보상은 장민 대표를 알게 된 것 그 자체였다.
이렇게 천문석이 감흥이 젖어있을 때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큭, 큽큽···."
테이블에 앉아서도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던 류세연이 웃음을 삼키고 있었다.
"...?"
천문석의 의아한 시선을 느낀 류세연이 손가락으로 꼬맹이를 가리켰다.
쪼르르륵-
꼬맹이는 열심히 빨대로 딸기 요거트 스무디를 빨아 먹고 있었다.
지금까지 계속.
“어···?”
자신 앞에 놓여있던 손도 안 댄 스무디가 사라졌다!
천문석은 순식간에 범인을 알아냈다.
꼬맹이 앞에 놓인 빈 컵!
지금 꼬맹이가 먹고 있는 건 천문석의 딸기 요거트 스무디였다!
어이없어하는 천문석에게 류세연이 싱글거리며 말했다.
"특급 헌터가 먹고 싶어해서. 내가 줬어."
"특급 헌터는 알바에게 감사한다!"
돌머리 꼬맹이는 씩씩하게 대답했고,
천문석은 허탈하게 웃었다.
장민 대표는 빙그레 미소지었고,
류세연은 제대로 한 건 한 악당처럼 웃었다.
크크크-
그리고 장민과 꼬맹이 두 사람과 헤어지는 자리.
천문석은 장민 대표의 정식초대를 받았다.
시간과 장소는 3일 뒤 장민 대표의 자택.
초대 목적은 위탁 판매한 마석과 랩터 두 마리의 판매 대금 수령.
그리고 장민 대표의 감사 인사였다.
천문석은 처음에는 대금을 통장으로 받으려 했다.
집까지 방문해 감사 인사를 받기에는 장민에게 받은 호의가 너무 컸다.
그러나 꼬맹이가 눈물마저 글썽이며 꼭 와야 한다고 몇 번이나 부탁해서,
천문석은 장민의 초대에 응하게 됐다.
"세연이도 오면 좋을 텐데. 일이 있다니 아쉽네."
장민의 아쉬움이 담긴 말에 류세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언니. 우리는 나중에 따로 봐요."
"그럴까? 그럼 언제 만날지 지금 정하자."
...
장민과 류세연이 대화할 때,
다시 한번 들려오는 간절한 목소리.
"알바! 꼭 와야 해. 알았지!"
"알았어. 꼭 갈게."
천문석의 대답을 들은 꼬맹이가 대화 중인 장민을 흘낏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알바. 난 고기 엄청 좋아."
"..."
"알바. 나 고기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
꼬맹이의 두 눈은 열망으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 눈을 보는 순간 천문석은 완전히 감을 잡았다.
7개월째 고등어를 먹고 있는 꼬맹이가 너무나 원하는 것을!
"알았어! 나만 믿어!"
천문석의 장담에 얼굴이 환해진 꼬맹이.
꼬맹이는 세발자전거를 타고 멀어지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 검은 손을 흔들며 외쳤다.
"알바! 특급 헌터는 알바를 믿어!"
"걱정하지마! 나만 믿어!"
"3일 뒤야! 절대 잊으면 안 돼!"
"알았어! 절대 안 잊을게!"
"특급 헌터가 선물도 준비할게! 꼭, 꼭! 와야 해!"
"나도 선물 가져갈게! 그때 보자!"
...
천문석은 크게 외치며 멀어지는 꼬맹이에게 한참 동안 손을 흔들어줬다.
"쟤랑 친한가 보네?"
류세연의 질문에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친하지. 선물을 사갈 만큼. 엄청 친하지···."
천문석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