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8
[이번 역은 잠실. 잠실입니다.]
“여기서 내리면 돼.”
“알았어.”
천문석은 류세연을 따라 백화점이 있는 잠실역에서 내리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알바로 자주 갔던 백화점.
하지만 손님으로 가는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사려는 물건이 노트북이다.
류세연의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은 노트북.
건물 청소와 보수 공사에서 오늘 하루 열심히 일하는 대가로 류세연은 노트북을 제시한 것이다!
하루 일당이 노트북!
그것도 백화점에서 비싸게 파는 노트북이라니!
천문석은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며 뒤를 봤다.
뒤따라 에스컬레이터에 올라선 류세연.
류세연은 정말 오랜만에 녹색 추리닝을 입지 않고,
슬림한 청바지에 흰 티, 검은 모자를 눌러쓴 제 나이 또래 모습이었다.
천문석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야. 너 진짜 괜찮냐?"
류세연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괜찮아. 어차피 가족 카드 포인트 소멸하기 전에 쓰는 건데. 뭐."
"아니. 포인트가 얼마나 쌓였으면 포인트로 노트북을 사냐···."
"우리 엄마 알잖아? 제주도에서 명품백이라도 모으나 보지···."
"..."
천문석은 류세연의 어쩐지 쓸쓸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아차 했다.
서울이 뚫리는 초유의 사태에도 세연의 부모님은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말은 류세연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부모님과 전화통화는 했는지 물어볼까 했지만,
세연의 쓸쓸한 목소리를 들으니 대답이 짐작돼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
이때 문득 세연이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달리 쓸쓸한 얼굴에 생겨난 힘없는 미소.
검은 모자 아래로 늘어진 머리카락이 애처롭게 흔들린다.
세연은 눈을 내리깔고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괜찮아···."
"..."
"그런데 나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쓸쓸한 목소리로 묻는 세연.
무엇이든 들어줘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천문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오빠라고 부르겠다는 건 빼고 말해라."
"...쳇."
혀를 차며 들켰다는 듯 장난스럽게 웃는 류세연.
류세연은 어느새 평소처럼 생글거리는 얼굴로 돌아와 물었다.
"그런데. 왜? '삼촌'이라고 부르라는 거야? 좀 이상하지 않아? 나이 차가 겨우 5살인데?"
"응. 아니야. 하나도 안 이상해. 5살 이상 차이 나면, 당연히 삼촌인 거야."
"어···?"
이때 세연이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검지로 머리를 짚는 류세연.
머릿속 새겨진 기억을 되짚는 행동이다.
잠시 후 세연은 외쳤다.
"학교!"
"뭔 소리야. 야, 발 보고 내려."
천문석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리며 말하자,
뒤따라 다급히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린 세연이 말을 쏟아냈다.
"학교에서! 1, 2학년 여자애들이 오빠라는 건 냅뒀잖아! 남자애들이 형이라고 부른 것도 냅두고! 게네들이랑은 나보다 나이 차가 더 나잖아!!"
아차!
이런 젠장! 방심했었다!
"뭐야! 그동안 나만 차별한 거야?! 이유가 뭐야!?"
류세연은 화난 얼굴로 사납게 말을 쏟아냈다.
"뭔 소리야?"
천문석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재빨리 지하철역 계단에서 벗어나 광장으로 걸어갔다.
파바바박-
경보선수처럼 빠르게 걷는 천문석.
"거기서! 이야기하고 가라니까! 야!"
류세연은 이제 소리까지 지르며 쫓아왔고,
천문석은 빠르게 걸으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할까?
류세연은 순간 기억 능력자다. 한번 보고 들은 건 머릿속에 새겨지고, 언제든 눈으로 보듯 기억해낼 수 있다.
-그냥 묵살하고 딱밤을 때려 버릴까?
그러나 화난 얼굴이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걸 보니, 그동안 알게 모르게 쌓인 서러움이 폭발한 상황이다.
지금 딱밤을 날리면 역효과만 날 것 같았다.
-사실대로 모두 말할까?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얼굴.
"..."
천문석은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최선의 선택지가 없다면 차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천문석은 전법륜인을 짚어 최대 위력 딱밤을 날리기 위해 준비했다.
이걸 제대로 맞으면 세연이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한동안 멍해질 거다.
그사이 얼렁뚱땅 넘기면 된다.
그러나 이런 진지한 상황에 딱밤을 날리는 건,
당장의 추위를 피하겠다고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는 격이다.
이런 건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분명 류세연은 엄청나게 화를 내고 아주 오랫동안 말도 안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잠깐! 거기서라니까!"
그리고 달려온 류세연이 손이 등에서 느껴질 때.
'미안하다.'
천문석이 마음속으로 류세연에게 사과하고 몸을 돌려 딱밤을 날리려는 순간!
구원의 외침이 들려왔다.
"특급 헌터가 왔다!"
---
"알바! 오랜만!"
백화점 앞 광장.
새것처럼 반짝이는 세발자전거를 탄 돌머리 꼬맹이가 소매로 이마의 땀을 쓱 닦아내며 말했다.
"이야! 너 정말 반갑다!"
천문석은 돌머리 꼬맹이의 검은 손을 잡고 악수하며 외쳤다.
정말 반가웠다!
생각지도 못하게 등장한 꼬맹이 덕분에 얼렁뚱땅 이 상황을 넘어갈 수 있게 됐다!
꼬맹이는 의젓하게 악수하더니 검은손으로 당황한 얼굴의 류세연을 가리켰다.
"이 누나는 누구야? 앙꼬 예쁜데. 이 누나는 조금이네. 알바가 아는 사람이야?"
꼬맹이의 문맥이 맞지 않는 말.
그러나 천문석은 알아서 해석해서 대답했다.
"이쪽 앙꼬보다 덜 예쁜 누나는 류세연이야."
천문석은 류세연을 꼬맹이한테 소개했다.
"...안녕. 누나는 류세연이라고 해. 앙꼬라고···?"
"앙꼬는 내 친구. 난 특급 헌터야. 만나서 반가워."
"..."
꼬맹이는 전혀 개인 식별이 되지 않는 인사를 했고,
류세연은 의아한 눈으로 천문석을 봤다.
마치 특급 헌터라는 이 꼬맹이는 누구냐는 듯한 시선.
보통 이럴 때 이름을 말하지만,
천문석은 아직도 돌머리 꼬맹이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
"..."
설명하려면 길었기에 천문석은 그냥 말을 돌렸다.
"얘 특급 헌터 맞아. 그냥 그렇게 부르면 돼. 그런데 너 여긴 웬일이냐? 경호원은?"
꼬맹이는 뒤쪽을 향해 아무렇게나 손을 흔들었다.
손이 흔들리는 방향,
멀찌감치 서서 이곳을 주시하는 낯익은 경호원이 보였다.
제임스였다.
“제임스랑 놀러 온 거야?”
천문석이 묻자, 꼬맹이는 타고 있는 어린이용 세발자전거를 탁탁 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히히히히히-
"이 자전거 사러 왔어! 이거 봐! 바퀴가 세 개야! 세 개 맞지? 보이지!?"
바퀴 개수를 몇 번이나 강조하는 꼬맹이.
"바퀴가 세 개라고? 그게 왜?"
꼬맹이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설명했다.
"알바 알지? 내 자동차. 바퀴 네 개짜리인데 도마뱀 때문에 부서졌잖아? 그래서 새로 사려는데! 장민이 한번 부서트려서 이번에는 바퀴 네 개짜리가 아니라 그 아래 단계로 사야 한다고 그랬거든. 그것도 두 단계나 아래!"
"..."
"그래서 잘못했으면, 바퀴 두 개짜리 자전거를 탈뻔했어!"
휴우-
꼬맹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아주 열심히 장민한테 설명해서. 바퀴 세 개짜리로 합의했어."
“...열심히 설득해서. 두발자전거가 아니라 세발자전거를 사게 됐다는 거야?”
“맞아!”
꼬맹이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
천문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악마 같았던 돌머리 꼬맹이는 이번에도 엄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이때 천문석과 꼬맹이의 이해할 수 없는 대화를 듣고 있던 류세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두 개, 세 개? 그게 중요한 건가···. 그럼 엄마가 이 자전거 사준 거야? 와! 정말 좋겠다! 누나도 부러운데!"
"..."
세연의 말에 꼬맹이는 충격받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뜨더니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외쳤다.
"짠돌이 장민이 이런 거 사줄 리가 없잖아! 이건! 내가 산 거야!"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
류세연이 의아한 눈으로 꼬맹이를 보며 물었다.
"이 자전거. 네가 샀다고?"
꼬맹이는 주머니에서 여러 번 접힌 종이를 꺼내서 내밀었다.
"이거 뭐냐?"
"매매 계약서."
커다란 종이에 크레파스로 삐뚤빼뚤 적힌 계약서는 단 한 줄이었다.
[자전거값으로 심부름 백萬번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줄의 문장 아래 찍혀있는 어린아이 손도장 두 개.
천문석은 돌머리 꼬맹이의 손을 다시 봤다.
꼬맹이의 양손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꼬맹이와 악수한 자신의 손도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 꼬맹이 녀석이!'
아니 그보다···.
꼬맹이가 쓴 듯 삐뚤빼뚤한 글자 중 ‘萬’이라는 글자만 세련된 필체로 적혀 있었다.
마치 어른이 쓴 것처럼 말이다···.
백萬번이라고?
“너···. 이 계약서 쓸 때 심부름 몇 번 하기로 했냐?”
천문석의 물음에 꼬맹이는 검은 양손을 펼치더니 열 번 쥐었다 폈다 했다.
“내가 엄청 열심히 설득해서! 이만큼 하기로 했어!”
자랑스레 외치는 꼬맹이.
“...”
천문석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백번과 백萬번···.
꼬맹이는 사기계약을 당했다.
그것도 엄마한테···.
심부름 백만 번이라니···.
7개월 동안 고등어만 먹고 있는 꼬맹이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다가오고 있었다.
“...”
천문석은 측은한 얼굴로 꼬맹이를 봤다.
이제는 이 꼬맹이가 악마가 아니라 불쌍한 중생으로 보였다.
이때 천문석의 시야에 멀리서 다가오는 검은색 대형 SUV 세 대가 보였다.
눈에 익은 장갑 SUV는 속도를 줄이더니, 광장 가장자리에서 멈춰 섰다.
끼이익-
멈춰선 세 대의 대형 SUV 앞차와 뒤차에서 검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낀 경호원들이 내렸다.
천문석은 경호원 중 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제임스.
멀리서 꼬맹이를 주시하던 제임스는 어느새 멈춰선 SUV 앞에 있었다.
제임스는 마이크로 무언가를 말하면서 가운데 정차한 SUV 문을 열었다.
그리고 열린 문에서 낯익은 사람이 내렸다.
장민이었다.
새하얀 바지 정장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장민이 성큼성큼 걸어오며 옆에서 걷는 제임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 순간 장민의 손에 놓이는 물티슈 상자.
천문석 앞에 도착한 장민은 물티슈를 뽑아 내밀며 웃었다.
"알바씨. 여기서 다시 보네요? 우리 인연이 참 깊네요. 우선 손을 닦으세요."
천문석은 손을 닦으며 류세연과 장민을 서로에게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장 대표님. 이쪽은 류세연, 제 조카 같은 아이입니다. 세연아 이쪽은 장민 대표님. 여기 특급 헌터 어머니셔."
"류세연, 류세연···. 어쩐지 귀에 익은 이름이군요?"
"저도 장민이라는 이름하고, 대표님 얼굴이 기억나네요."
류세연과 장민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다가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아! 그 류세연! 국가 핵심 인재로 지정돼 해외연수를 다녀온 고등학생 맞죠?"
장민의 말을 들은 류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연수 떠나기 전에 만났던 그분이시죠? 장강 유통 대표님?"
"맞아요. 정말 반갑네요!"
"다시 봬서 반갑습니다. 장민 대표님."
"대표님은. 그냥 언니라고 해요."
"그래도 될까요? 장민 언니···?"
"으- 언니란 말 너무 좋다!"
"저도 그냥 세연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럴까···? 세연아-"
"네- 장민 언니."
"캬- 너무 좋다!"
"저도 좋아요. 흐-"
...
소녀같이 웃으며 좋아하는 장민과 류세연.
장민과 류세연은 순식간에 친해져서,
십 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화했다.
천문석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없는 꼬맹이가 나타나고 뒤이어 장민 대표까지 나타나자,
류세연은 어느새 화를 냈던 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어떻게 이번에도 잘 넘긴 것 같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천문석은 물티슈로 손을 닦은 후 꼬맹이에게 물었다.
"너도 손 닦을래?"
"왜?"
"..."
뭐지? 왜? 내 말문이 막히는 거지?
천문석이 생경한 기분을 느낄 때,
류세연과 대화하던 장민이 고개를 돌렸다.
"아! 위탁하신 마석 감정이 끝났어요.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 거 같네요."
"세연아. 괜찮겠지?"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고,
천문석과 류세연, 장민과 꼬맹이 그리고 제임스와 여자 경호원 한 명이 같이 백화점으로 이동했다.
장민이 가까워지자 백화점 1층, 정문에서 대기하던 직원이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괜찮은 자리가 있을까요?"
"VIP 라운지로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장민과 일행은 백화점 직원의 안내를 받아, VIP 라운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장민과 세연이 자매처럼 붙은 채 앞에서 걸었고,
제임스와 여자 경호원이 좌우를 지키며 움직였다.
그리고 천문석은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돌리는 꼬맹이랑 같이 이동했다.
헉, 헉-
끼익, 끼이익-
꼬맹이는 헉헉거리며 잘나가지도 않는 세발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았다.
"너 안 힘드냐? 왜 그걸 타고 움직여?"
천문석의 물음에 꼬맹이는 바로 대답했다.
"전혀. 하나도 안 힘들어. 특급 헌터가 이 정도로 힘들리가 없잖아? 그리고 특급 헌터쯤 되면 어디를 가든 자가용으로 다녀야 하는 거래."
땀을 뻘뻘 흘리는 꼬맹이는 엄청 힘들어 보였다.
그리고 어디든 자가용으로 다녀야 한다고?
누가 그런 말을 했냐고 물으려는 순간,
힐끗 꼬맹이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장민.
세연과 나란히 걷고 있는 장민이 고개를 돌려 반짝이는 눈으로 꼬맹이를 보고 있었다.
천문석과 눈이 마주친 장민은 입가에 손가락을 올리고 눈을 찡긋했다.
대답을 듣지 않아도,
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헉, 헉-
끼익, 끼이익-
꼬맹이에게 이 세발자전거는 손오공의 긴고아나 마찬가지였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꼬맹이의 행동반경을 줄이는 일종의 족쇄.
"..."
천문석은 자신이 족쇄를 찬지도 모르는 불쌍한 꼬맹이를 슬쩍 밀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