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32화 (33/1,336)

#032

균열의 빛이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

환하게 불이 밝혀진 이곳에 임시 천막이 쳐지고, 군용 장비가 설치되고 있었다.

바쁘게 움직여 장치를 설치하는 건,

한여름 7월인데도 두꺼운 야전 상의를 입은 군인들이었다.

휘이잉-

“으으으. 이거 날씨가 왜 이래.”

문득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야전 상의를 입은 군인들이 몸을 움츠릴 때.

일병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지휘 천막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으로 들어간 일병은 지휘관에게 경례하고 바로 보고했다.

"충성! 지금 균열에서 빠져나온 학생들을 구조했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야전 테이블에 놓인 학교 도면을 보던 이인임 대위가 고개를 번쩍 들고 다급히 물었다.

"피해는 어떤가? 학생 중에 사상자가 있나?"

"심각한 부상자 없이 전원 무사합니다! 학생들은 바로 병원으로 이송됐습니다. 그리고···."

학생들이 무사하다는 보고에 이인임 대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헬기로 학생들을 구조하는 중에 발생한 균열.

비상 상황 매뉴얼에 따라 구조작업을 뒤로 밀었는데, 균열 침식 현상이 시작되며 남아있던 십여 명의 학생들이 완전히 고립됐다.

사방에서 열리는 던전과 균열에 부족한 인력,

간신히 인원을 모아 긴급 구조대를 편성했지만···.

갑자기 시작된 엄청난 눈 폭풍에 구조 활동이 지연되고,

뒤이은 냉기 포자의 이상 행동으로 편성한 구조대를 투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립된 학교, 균열 침식지대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무사히 빠져나왔다니···.

그야말로 천운이 따랐다.

이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위. 그럼 이제 구조 작전은 끝난 거야? 균열 코어 회수 시작하나?"

말을 한 건 긴급 편성한 구조대에 속한 각성 헌터였다.

각성 헌터의 목소리에는 강한 열망이 담겨있었다.

침식이 진행 중인 균열에서 뽑아낼 수 있는 '균열 코어' 때문이었다.

이세계와 이어지는 틈 균열.

균열은 이세계의 마력으로 지구를 침식해 마경을 만들어낸다.

이게 가능한 건 침식을 시작한 균열에 마력을 제어해 방향성을 만들어내는 코어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균열 코어는 일반적인 마력 무구가 아닌,

게이트 안정화 장치, 나이트 아머(K.A.) 같은 전술 등급 이상의 마력 무구에 들어가는 재료다.

이제는 비교적 흔해진 마석과 달리 엄청난 가치를 가진 물건.

별 이득 없는 구조 임무에 차출돼 투덜거리던 헌터는 균열 코어를 회수할 생각에 복권이라도 당첨된 듯 상기된 얼굴이었다.

이인임 대위는 무뚝뚝한 어조로 대답했다.

"우선 확인부터 해야 합니다. 아직 학교 안에 남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인임 대위가 말한 순간, 뾰족한 외침이 들려왔다.

"당장! 폭격해야 해! 지금 당장! 학교에서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니까!"

공포에 질린 듯 벌벌 떨며 외치는 중년 여인.

팔과 머리에 붕대를 감고 몸 곳곳에 의료용 패치를 붙인 사람.

균열 외곽 정찰 중 주차장의 박살 난 자동차에서 구조한 대일 고등학교 이사장이었다.

이사장은 구조된 후 병원도 가지 않고,

지휘 막사로 올라와 지금까지 학교를 폭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코어부터 회수해야지! 대위! 우리 길드에 맡겨주면 바로 회수 시작하지!"

이사장의 폭격 주장에 깜짝 놀란 각성 헌터가 버럭 소리쳤다.

군에서 폭격을 하면 균열 코어에 대한 길드 지분이 대폭 깎이기 때문이다.

이사장은 헌터의 말이 끝나자마자 다시 소리쳤다.

"저기서 몬스터가 계속 나온다니까! 몬스터! 사람들이 다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주민 소개가 끝난 게 언젠데, 뭔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지금 당장 우리 길드가 들어간다니까!"

헌터와 이사장, 두 사람은 고성을 지르며 싸우기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이나 본 상황,

주위의 군인들도 두 사람을 말리지 않고 그냥 모른 척 외면했다.

이인임 대위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사장과 헌터 두 사람 모두 내보내고 싶었다.

그러나 서울이 뚫린 지금 각성 헌터들의 적극적 도움이 절실했고,

이사장은 국회의원의 압력이 들어온 상태였다.

몬스터 위기 경보 상황에서는 선 조치, 후 보고가 원칙이다.

당연히 지휘계통에 속하지도 않은 국회의원의 압력에 일선 지휘관이 흔들릴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인임 대위에게 걸려온 국회의원의 전화는 헌터 부대 내부의 암묵적인 절차를 지적하고 있었다.

균열이 열린 고등학교의 재단 이사장에게 코어 회수 작전에 대한 동의를 구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지적.

국회 헌터위원회 소속 국회의원은 가능한 한 민간의 동의를 구해 부드럽게 움직이려는 헌터 부대의 생리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결국, 대일 고등학교 균열 봉쇄 책임을 맡은 이인임 대위는,

각성 헌터와 학교 이사장이라는 두 명의 혹을 달고 움직이게 됐다.

이인임 대위는 고성이 오가는 상황에 넋이 나간 일병에게 턱짓했다.

"다른 정보는? 학생들만 나온 건가? 인솔한 다른 선생님은 없고? 혹시 학교 안에 남아서 구조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일병은 상관의 질문에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아직 침식지대 안에 남은 사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학생들을 인솔해 균열을 빠져나오신 선생님. 그러니까 교장 선생님께서 직접 이곳으로 올라오고 계십니다!"

"뭐? 교장 선생님이라고? 아니 교장이시면 나이가···."

학생들을 데리고 침식지대를 뚫은 교사가 교장이란 말에 이인임 대위가 어이없어할 때.

고성을 내지르던 이사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줌마 뭐야? 갑자기 왜 그래?"

헌터는 말싸움하다 갑자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이사장을 보고 의아해했다.

이사장은 헌터는 보지도 않고 창백한 얼굴로 다급하게 외쳤다.

"대위···. 나 병원으로! 병원 좀! 보내줘요!"

"네···?"

이사장의 뜬금없는 요청에 이인임 대위가 반문할 때,

파아앙-

천막이 찢어질 듯 열리고 벼락같은 외침이 터졌다.

"너! 이사장! 이 새끼! 그 병원 내가 보내준다!"

모두의 시선이 천막 입구로 향했다.

고함을 지르며 천막 안으로 들어온 건,

작은 키와 작은 몸의 나이 들어 보이는 여자였다.

여자는 얼음 덩어리가 가득 붙은 점퍼를 입었고, 머리카락이 얼어붙어 있었다.

극랭지에서 방금 빠져나온 듯한 모습으로 이사장을 노려보는 여자.

"으으으···. 교장 선···."

이사장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떠는 순간.

"우선 맞고 시작하자!"

날듯이 달려온 여자의 주먹이 이사장의 배에 꽂혔다.

퍼억-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장난감처럼 날아가는 이사장!

이사장은 뒤에 서 있던 헌터와 뒤엉켜 바닥을 굴렀다.

"으으윽- 이건 또 뭐야!?"

갑자기 날아온 이사장과 함께 구른 헌터가 신음을 흘릴 때.

여자는 성큼성큼 걸어 바닥에 쓰러진 이사장에게 다가갔다.

이 순간 갑작스러운 상황에 굳었던 군인들이 움직였다.

"멈추세요!"

"거기 멈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

군인들이 재빨리 달려들어 여자를 저지하려 했다.

으아악-

그러나 너덧 명의 건장한 군인이 매달렸는데도 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전진했다.

각성자!

이제야 여자의 정체를 깨달은 군인들이 경악해서 총구를 겨누며 외쳤다.

"사선 확인!"

"멈춰요!"

"사선 확인!"

"거기 당장 서세요!"

...

이인임 대위가 다급하게 부하들을 제지했다.

"멈춰! 총구 내려! 모두 물러서!"

지휘관의 명령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

여자를 저지하려던 군인들은 즉시 뒤로 빠지고, 총을 겨누던 군인들도 총구를 내렸다.

이때 이사장과 같이 바닥을 구른 각성 헌터가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할머니는 또 뭐야!? 이게 무슨 행패야!"

이인임 대위는 각성 헌터를 제지하려 했다.

"잠깐···."

그러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움직였다.

앞만 보고 스쳐 지나가며, 아무렇지도 않게 각성 헌터의 멱살을 잡아채 내리누른다.

하-

멱살을 잡힌 각성 헌터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는 순간.

건장한 각성 헌터의 몸이 땅으로 꿇려졌다.

"어···? 꺽-"

몇 배나 차이 나는 체격의 여자에게 잡혀 꿀려진 각성 헌터.

마치 아이가 어른을 잡아 내리누른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땅에 꿇려진 헌터는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새파랗게 질렸다.

각성 헌터는 거대 괴수에게 멱이 잡힌 듯 팔다리를 부르르 떨며 단숨에 무력화됐다.

여자는 한 손으로 헌터를 짓누르며 몸을 숙였다.

그리고 이사장과 눈을 마주한 채 분노가 이글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혼자 도망갔냐?"

으아악-

이사장은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외쳤다.

"대위! 이 미친 여자를 끌어내요! 지금 당장! 끌어내요! 빨리!"

"..."

"빨리! 끌어내라니까! 내 뒤에 누가 있는지 알지!"

"..."

이인임 대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 부대를 이끌며 온갖 상황을 겪은 이인임은 돌아가는 사정을 단숨에 파악했다.

극랭지에서 방금 나온 듯한 선생님이 학생들을 인솔해 균열 침식지대에서 빠져나온 교장 선생님이다.

병원도 가지 않고 학교에 폭격을 종용하던 이사장.

침식이 진행 중인 학교에서 학생들을 데리고 나온 교장.

교장 선생은 각성자였고,

이사장을 만나자마자 분노를 터트리고 있었다.

이인임 대위의 시선이 겁에 질린 이사장에게 향했다.

이런 경우 열이면 열.

저 학교에 폭격으로라도 지워버리고 싶은 구린 구석이 있는 것이다.

학교에 무슨 이권이 걸려 있을까 싶지만,

위기 상황 시 안전지대로 설정되는 학교 같은 중요 거점은 막대한 예산이 쏟아져 들어간다.

게이트가 열린 후 안전이야말로 국가의 1순위 목적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중요한 안전 예산이라도 관리자가 마음만 먹으면 빼돌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쉰 이인임 대위는 난장판이 된 천막을 걸어 분노한 교장 선생님 뒤로 다가갔다.

"모두 제 위치를 지켜라."

이인임 대위는 부하들을 진정시키며,

기절한 헌터의 멱살을 잡은 교장의 손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이세영 선생님. 저 선생님 제자 이인임입니다. 이 손 놓아주세요. 이 헌터 죽겠습니다."

---

상황은 빠르게 정리됐다.

정신을 차린 각성 헌터는 자신을 기절시킨 이세영 교장에게 오히려 고개 숙여 사과했다.

"제가 몰라뵙고 실례를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헌터의 위계질서는 힘과 경력.

머리가 하얗게 센 이세영 교장이 각성 헌터,

그것도 자신을 간단히 꿇릴 정도의 강자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각성 헌터는 동료들과 함께 천막 가장자리로 물러섰다.

그러나 헌터와 달리 이사장은 계속 소리 지르고 있었다.

"대위! 뭐해요! 폭행 현행범입니다! 당장 체포해요! 지금 누가 오고 있는지 모르나요!"

이인임 대위는 못 들은 척 야전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고,

이세영 교장과 류세연도 이사장을 한번 노려보고 야전 테이블을 봤다.

지금 중요한 건 이사장이 아니었다.

천문석.

미끼가 되어 학교에 남았던 천문석이 중요했다.

야전 테이블 위에 놓인 학교 도면을 바라보는 세 사람.

이세영 교장은 도면에 칠해진 빗금을 가리키며 이인임 대위에게 물었다.

"균열 확장이 멈췄고 눈 폭풍도 이제 그쳤잖아? 왜 구조대를 투입하지 않는 거야?"

"그게 냉기 포자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고?"

이인임 대위는 도면의 빗금 안을 짚으며 말했다.

"지금 엄청난 수의 냉기 포자가 뭉쳐서 거대한 구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빗금 안을 짚은 손을 빙글빙글 움직이는 이인임 대위.

"이 냉기 포자 구름이 군집 생명체처럼 균열지대 안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냉기 포자가 균열지대 밖으로 흩어질 위험이 있어서 구조대를 투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

“지휘부에서는 구조대 투입을 멈추고 분석결과를 기다리란 연락이 온 상태입니다. 그래서···.”

말없이 듣고만 있던 이세영 교장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이세영 교장은 고개를 돌려 천막이 걷힌 곳 학교 방향을 내려다봤다.

학교에서 하늘로 솟아오른 균열의 푸른 빛이 선명하다.

서울이 뚫린 몬스터 위기 상황으로 가뜩이나 인력이 부족한 지금.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수십 명의 부대원과 민간 헌터의 위험을 감수할까?

문득 머릿속에 비정한 해결책이 떠오른다.

‘폭격으로 균열 침식지대를 지워 버리고, 코어를 회수한다.’

이세영 교장은 문득 고개를 들어 이인임 대위를 봤다.

"혹시 상부에서 마력 각성자를 보내겠다는 이야기는 없었나?"

이세계의 힘, 마력과 감응하는 마력 각성자는 각성자 중에서도 가장 희귀한 각성자들이다.

냉기 포자 같은 총화기가 통하지 않는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마력 각성자가 필수였다.

아니 제대로 된 상황 파악을 위해서라도 마력 각성자를 이곳에 보내야 했다.

"..."

옛 은사와 눈이 마주친 이인임 대위는 말없이 살짝 고개만 저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직감한 이세영 교장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지휘부에서는 초저온의 냉기 폭탄으로 침식지대의 냉기 포자를 재우고, 균열 코어를 회수하는 걸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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