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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천마 - #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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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2
2020년 현재.
첫 게이트가 열린 후 20년이 지났고,
세계최초로 서울 게이트가 안정화된 지도 15년이 지났다.
20년 동안 세계정세는 급변했고,
이건 동북아시아, 대한민국의 주변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북한은 사실상 무력화됐고,
중국은 여러 개로 갈라져 긴장 상태다.
일본은 게이트 자원 빈국이 되어, 막대한 사용료를 내면서 인접국 한국의 게이트를 빌려 쓰고,
멀리 북쪽 러시아는 날씨만 풀리면 난리인 몬스터에 여전히 골머리를 썩이고 있었다.
한반도 인근 동북아시아의 나라들은 각자의 사정에 바빠 한국을 신경 쓸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이렇게 동북아시아 주변국들의 위험도가 바닥을 친 지금,
대한민국에서 필요한 정규군의 숫자는 대폭 줄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여전히 징병제 국가였다.
예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적이 사람에서 몬스터가 됐다는 것과,
한국 군대가 일종의 실전 헌터 교육기관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실전을 겪는 군대에 예전처럼 병역자원을 막무가내로 밀어 넣을 수는 없는 법.
지금의 병무청은 약간의 문제만 있어도 어지간하면 면제를 때리고 있었다.
이미 한국인 남녀의 1차 징병 검사 면제 비율은 70%를 넘어섰고, 면제 비율은 매년 올라가고 있다.
예전이라면 면제라는 것에 환호했겠지만,
지금의 한국인 남녀 상당수는 어떻게든 입대를 하려 한다.
3차 징병 검사까지 재검을 신청하는 사람들도 매년 늘어나는 추세.
외국인이 한국군 자원입대 신청도 계속 높아지고,
여성의 사병 자원입대 법안까지 통과된 지 오래다.
이렇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게이트 안정화 이후,
군부대가 예산을 쓰기만 하는 소비집단에서 몬스터를 사냥해 마석과 부산물을 생산해내는 생산집단이 된 것이다.
예산을 쓰기만 하는 소비집단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생산집단의 차이는 컸다.
예전이라면 이 부가가치가 엉뚱한 사람들의 배를 불려 줬을 거다.
그러나 5년간의 게이트 전쟁.
이 참혹했던 전쟁이 모든 것을 바꿨다.
국토 남쪽 끝까지 밀려난 전선.
산업단지를 지키기 위해 낙동강 전선에서 치열하게 싸웠고,
호남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섬을 요새화한 채 인력을 갈아 넣었다.
직접 싸우고 이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사람들 모두가 유권자였다.
사람의 진짜 모습은 위기의 순간에 드러나는 법.
게이트 전쟁은 사회 여론을 이끌어가는 여론 주도자였던,
정치인, 평론가, 교수, 연예인들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됐다.
서울 게이트 안정화 후 치러진 총선의 투표율은 93%.
유서 깊은 두 정당은 완전히 쪼그라들었고,
입으로만 애국을 말하던 정치인의 대다수가 물갈이됐다.
그리고 게이트 전쟁에 참전했던 사람들이 대거 국회에 입성했다.
입으로 말만 하는 정치인이 아닌,
행동하고 피 흘리며 싸웠던 사람들이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변화는 당연한 것.
군대가 창출하는 부가가치 대부분이 일선에서 싸우는 사병들에게 돌아갔다.
현실화된 사병 급여와 복지혜택들.
초임 경찰 수준의 급여.
학비 감면, 임대주택 우선 공급, 교통 통신 등 공과금 감면 같은 혜택이 사병들에게 주어졌다.
여기에 더해 20년간 군대에 축적된 몬스터 사냥 노하우와 장비들로 군 생활 위험도는 뚝 떨어진 상태.
여전한 청년 실업 100만 명 시대.
1년 복무에 연장 복무 1년,
2년간의 군 생활은 한국의 젊은 남녀 모두에게 썩 괜찮은 선택지였다.
현재의 급여뿐 아니라,
미래의 헌터 커리어에 미칠 영향으로도.
'헌터 경력!'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천문석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렇다!
진짜 중요한 건 현재의 급여가 아닌 미래의 헌터 경력이었다.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면적대비 가장 많은 게이트가 열린 나라다.
당연히 한국군에는 온갖 종류의 몬스터와 싸우며 축적된 20년의 노하우가 있었다.
20년 동안 실전에서 검증된 대 몬스터 전술.
한국군에 입대하면 검증된 대 몬스터 전술, 헌터 노하우와 헌터 장비 사용법을 돈을 벌면서 익힐 수 있었다.
게다가 일반인이 헌터가 되려면 각성을 하거나 관련 직종 경력이 있어야 하는데···.
비각성 헌터의 경우 군 경력자를 우대하는 풍조가 짙었다.
가장 큰 이유는 '총'이다.
비각성 헌터가 사용하는 무기의 70% 이상이 여전히 ‘총’이다.
그리고 총은 사용이 간단한 만큼 안전사고 위험이 큰 무기다.
총을 다뤄보지 않은 면제자와 군대에서 2년 동안 총기류를 사용하고 실전을 경험한 사람을 비교하면, 당연히 군 경력자에게 마음이 기울어진다.
중소 헌터 길드들의 비각성 헌터 '신규' 채용은 특별한 인맥이 없는 한 경력자가 아니면 뚫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취업난이 여전한 지금.
손에 쥘 수 있는 막대한 목돈과 복지혜택,
고소득 헌터 업계에 들어갈 수 있는 경력에 인맥까지.
군대에서의 2년은 예전과 달리 괜찮은 선택이었다.
"..."
그런 선택지가 지금 사라진 것이다.
천문석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손에 들린 3차 징병 검사서를 다시 한번 봤다.
[면제.]
아무리 봐도 징병 검사서에 적힌 두 글자는 변함없다.
천문석의 새로운 인생 계획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너졌다.
"..."
천마라는 전생을 기억했을 때,
무공을 익히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때 이상의 충격이었다.
천문석은 아찔한 현기증에 자신도 모르게 주춤주춤 물러서다가 무의식적으로 하늘을 봤다.
자신의 앞날과는 다른,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여름 하늘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
그러나 좌절은 길지 않았다.
천문석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상황이 복잡할 때,
필요한 것은 적절한 질문이다.
자신에게 질문한다.
'이제 어떡하지?'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대학.
지금 천문석은 4년제 대학의 2학년을 마치고 입대 목적 휴학 중이다.
군 제대 후 경력직으로 헌터 업계로 갔으면 헌터업 활동 점수로 학점을 대체해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뀌었다.
이미 2년 휴학을 했기 때문에 나이 때문이라도 더는 휴학하기 힘들다.
내년에 복학해서 바로 졸업해야 하나?
그러나 졸업을 해도 문제다.
여전히 심각한 취업난. 안정적인 상근 정규직 취직은 쉽지 않았다.
공무원, 공기업 시험은 대학 입학과 동시에 준비하는 게 보통이고,
대기업 같은 경우는 필요 스펙을 채우는 게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천문석은 문과, 경영학 전공이다.
어지간한 수도권 4년제 대학을 졸업해도 문과생이 갈 수 있는 일자리는 한정적이다.
일반 회사에서도 경영학 출신보다 전문지식이 있는 이공계 출신을 선호한다.
헌터 업계에서도 문과 출신이라면 단기 일용직이나 사무직으로나 고용할 뿐, 현장 경력을 쌓기는 쉽지 않다.
"..."
생각을 이어갈수록 눈앞이 깜깜해진다.
이때 문득 류세연의 얼굴이 떠오른다.
류세연이 거만한 얼굴로 자신을 부려먹는 미래가!
이러다 정말 류세연의 밑에서 부하로 일하게 될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면제!'
이 모든 게 면제판정 때문이다!
천문석은 문득 든 생각에 손을 내려다봤다.
손에 들린 3차 징병 검사 통지서.
1, 2차 징병 검사에서는 [심리 검사 - 부적합]으로 면제가 떴었다.
심리 검사에서 부적합이 뜬 이유는 어린 시절 부모님의 실종 때문이었다.
실종 자체보다,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사망신고를 하지 않은 천문석의 심리 상태를 불안하게 본 게 컸다.
그러나 이번 3차 징병 검사에서 천문석은 심리 검사 통과를 확신했다.
부모님 실종 후 만났던 사회복지사 아주머니.
자기 일처럼 천문석을 도와주던 사회복지사 아주머니를 징병 검사장에서 다시 만났기 때문이었다.
사회복지사 아주머니는 오래도록 사회복지사로 일한 경험을 살려 징병 자원에 대한 심리 검사를 맡고 있었다.
징병 검사장에서 만난 사회복지사 아주머니는 한눈에 천문석을 알아봤다.
천문석은 이제 정부 보조금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고,
사회복지사는 스스로 살아가는 천문석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심리 검사 용지에 적기 시작했다.
-언제나 긍정적인 성격으로 어려움을 스스로 헤쳐 나간다.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제대로 판단해 바로 행동한다.
...
보여주려는 듯 눈앞에서 적어 내려가는 평가.
그동안은 심리 검사 부적합이 떠서 계속 면제판정이 나왔었다.
다른 항목의 평균 점수가 8점대인 이상,
심리 검사 점수가 평균만 돼도 입대는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아니! 도대체 왜! 면제가 뜬 거야?!'
천문석은 징병 검사 서류를 빠르게 훑어봤다.
[심리 검사 - 10/10]
심리 검사 항목은 생각 이상의 고득점인 만점.
서류를 훑던 천문석의 눈이 한곳에서 멈췄다.
[신체 검사 - 실전 부적합]
어이없게도 1, 2차 징병 검사에서 9점이던 신체검사에서 부적합이 떴다!
바로 서류를 샅샅이 뒤졌지만, 상세 설명은 없었다.
천문석은 바로 인터넷 병무청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홈페이지에 자신의 생년월일과 이름을 넣고 본인 확인을 하는 순간.
화면 중앙에 떠오른 커다란 두 글자.
[면제]
천문석은 면제 아래,
상세 설명 항목을 클릭했다.
그러자 팝업창이 떠오르고,
경쾌한 음악과 함께 영상이 재생됐다.
///
행복!
병무청 홍보대사 핑크솔저! 슬기입니다!
입대 신청을 해주신 [천문석]님!
이런 어떡해요!
[천문석]님은 면제네요~.
[천문석]님!
군대는 면제지만,
사회와 우리 핑크솔저는 여전히 [천문석]님을!
필요로 하고 있답니다~.
오늘도 힘내서 화이팅~!
그리고 우리 핑크솔저!
많이, 많이!
사랑해주세요~
이상 병무청 홍보대사,
핑크솔저 슬기였습니다~.
행복!
///
팝업 영상에서는 군복을 입은 10대 아이돌이 나타나 장난스럽게 경례를 하며 천문석의 염장을 질렀다.
"아니. 이게 아니라! 왜 면제인지 상세 설명이 필요하다고!"
천문석은 병무청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져 상세 설명 버튼이 보일 때마다 클릭했다.
그러나 상세 설명을 누를 때마다 병무청 홍보대사, 핑크솔저 멤버들의 영상이 재생됐다.
/
행복!
...
/
"이런 미친놈들······."
비슷한 영상을 서른 번쯤 봤을 때.
천문석은 알게 됐다.
핑크솔저가 5명으로 이뤄진 걸그룹이며,
멤버들 이름이 슬기, 시아, 웬디, 에린, 레인이라는걸.
천문석은 머리를 잡고 괴로워했다.
"상세 설명은 도대체 어딨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