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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8화 (9/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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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천마 - #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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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휘이잉-

옥상 문을 여는 순간 불어오는 거센 바람.

비 온 뒤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춥게 느껴질 정도로 시원했다.

천문석은 바람을 맞으며 옥탑방으로 들어가 머그잔을 들고나왔다.

바로 자기에는 너무 좋은 밤,

그리고 지난 한 달의 마무리를 지을 때였다.

천문석은 커피가 반쯤 남은 머그잔을 든 채, 옥상을 가로질러 난간으로 걸었다.

텅 빈 옥상.

옥상은 건물주의 깔끔한 성격대로 탈출용 안전 장비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천문석은 옥상 창고 옆, 시가지 방향 난간에 머그잔을 올려놨다.

이때 다시 한번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잉-

늦은 여름밤.

산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고,

몸에 남은 열을 단숨에 날려 버린다.

천문석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비가 그친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이 맑은 하늘에 커다란 달과 빛.

그리고 반짝이는 수많은 별이 끝없이 펼쳐졌다.

수많은 별은 검은 비단에 흩뿌려진 보석같이 빛나고 있었다.

20세기. 게이트 혁명 이전에는 하늘에 이렇게 별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보석 같은 별들이 가득한 하늘도 전생의 자신이 보던 하늘,

당장이라도 말을 걸 것 같았던 별들이 뿌려진 하늘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

하지만 조금만 고개를 숙이면 보인다.

난간 너머, 가리는 것 없이 탁 트인 시야.

시야 가득 펼쳐진 비가 갠 시가지의 모습.

하늘에서 빛나는 별 이상으로 화려한, 인공의 불빛이 빛나는 시가지에 펼쳐져 있다.

여러 색으로 빛나는 간판과 불빛들.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들과 거리의 사람들.

저 멀리 중심 시가지에 서 있는 고층 빌딩의 대형 전광판들까지.

게이트 안정화 지역다운 화려한 모습.

예측할 수 없는 던전과 균열 발생에서 안전한 이 지역은 밤인데도 대낮처럼 불이 밝혀져 있다.

혹시라도 불빛이 떠돌이 몬스터라도 끌어들이지 않을까 등화관제를 시행하는 지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다.

천문석은 하늘의 별과 지상의 별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 달 전 전생을 자각하기 전에는 당연한 듯 무덤덤하게 바라봤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전생을 자각한 천문석은 더는 무덤덤하게 이 모든 걸 바라볼 수 없었다.

하늘의 별이 사라진 만큼 밝혀진 지상의 별.

이것만큼 이 시대를 잘 표현하는 게 어디 있을까?

게이트가 열리고 몬스터가 나타났지만,

풍요로운 인간의 시대,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산업 혁명과 비견되는 게이트 혁명.

자연의 불빛이 사라지고 밝혀진 인공의 불빛은 자연주의자들의 심기를 거스르는 일이다.

하지만 전생 천마에게 이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늘의 불빛만큼 아름다운 인공의 불빛은.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한 풍요로운 이 시대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니까.

전생을 자각한 전생 천마이자 현생 알바는 문득 하늘을 봤다.

천의가 느껴지지 않는 하늘.

그러나 어쩐지 하늘이 온화하게 웃는 것만 같았다.

풍요로운 이 시대에 태어남에 감사하며,

천문석은 난간에 놓인 이미 식어버린 커피를 마셨다.

아주 먼 곳, 다른 대륙에서 자라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을 커피는 이미 식었음에도 어쩐지 가슴속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미 늦은 시간.

이제 할 일을 하고 내일을 위해 자야 했다.

천문석은 난간에 머그잔을 내려놓고 다리를 벌리고 중심을 낮췄다.

마보(馬步).

마보를 선 천문석은 마보에서 시작하는 마종권(馬宗拳)의 기수식을 펼쳤다.

스치듯 천천히 대지를 이동하는 발.

움켜쥐듯 허공을 잡는 손.

발은 무겁고,

손은 가볍게.

바위가 구르듯 무거운 하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경쾌한 상체.

진각을 밟지는 않는다.

폭발적인 힘을 뽑아내지도 않는다.

비의는 바위를 파고들어 천년을 자라나는 소나무와 같은 견실함!

바람에 흔들리나 부러지지 않는 갈대 같은 유연함!

그리하여 닿으려는 목표는 견실하고 유연한 육체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정력(定力)!

천문석은 마종권의 초식에 뜻을 담아 펼쳐내며 웃었다.

마도 18문은커녕 천하 108공의 근처에도 이름을 올리지 못할 무공, 마종권.

이 마종권이 지난 한 달의 마무리.

전생 천마의 기억에 남은 마지막 무공이었다.

마종권은 종마권(種馬拳)이라 비웃음당하고,

정력(定力)이 아닌 정력(精力)을 키우기 위한 방중술이라 천시당했다.

견실한 허벅지와 유연한 허리에서 터져 나오는 정력(精力)이라니!

하-

그러나 정사마의 모든 무인이 마종권을 방중술이라 비하해도.

마종권은 무공이었다.

별다른 심법이 없는 초식뿐이어도.

그 초식에 무인의 '마음'이 실리면, '영맥'이 호응해 기가 모여드는 무공!

전생의 천마는 이 사실을 직접 증명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마종문의 개파조사 이상으로 완벽하게 펼쳐지는 마종권에도 천지에서 모여드는 기는 단 한 줌도 없다.

지난 한 달과 같았다.

천문석은 전생을 자각한 지난 한 달,

기억에 남아있는 모든 무공을 하나하나 펼쳤다.

그러나 천지의 기는 무공에 감응하지 않았고.

천문석은 무공을 익힐 수 없었다.

단 하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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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다시 한번 일어나는 의심.

내 기억, 전생은 진실인가?

모든 게 실감 나는 망상은 아닐까?

그러나 천문석이 의심하는 순간, 느껴지는 감각.

꿈틀-

전신에 뻗은 천강의 흔적이 맥동하고.

불과 얼음!

너무나 선명한,

상반된 느낌이 전신을 달린다.

마치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는듯한 천강흔.

천문석은 웃었다.

천강흔을 느끼고 천마라는 전생을 사실로 받아들인 후 했던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21세기는 헌터의 시대.

-'게이트'를 넘어 이세계의 자원을 찾는다.

-'던전'의 보스를 잡아 아이템이라 불리는 보물을 얻는다.

-'균열'의 이상 현상을 해결해 코어와 막대한 보상금을 챙긴다.

-그리고 몬스터를 잡아 마석과 부산물을 수확한다.

모두 헌터가 하는 일이고,

이런 헌터는 둘로 나뉜다.

이능력이 없는 비각성 헌터.

이능력이 있는 각성 헌터.

각성 헌터야말로 헌터계의 성골이자 귀족이었다.

게이트 사태 이후 나타난 초인, 각성 헌터.

게이트를 안정화 시킨 1세대 각성 헌터 이래, 각성 헌터야말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이들은 어느 날 문득 각성자가 되고, '각성몽'을 겪은 후 이능력을 가지게 된다.

각성 헌터들이 얻게 되는 이능력은 다양했고,

그중에는 천문석이 기억하는 전생의 무공과 똑같은 것들도 있었다.

그 형태뿐만 아니라 명칭까지!

헌터 그중에서도 각성 헌터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두의 관심사.

당연히 23세 청년 천문석도 보고들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그렇기에 전생을 각성한 후,

천문석은 바로 인생계획을 수정했었다.

원래대로라면 입대해서 차근차근 헌터 업계의 인맥을 쌓아 건실한 소규모 헌터 길드에 비각성 헌터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전생을 자각한 순간 계획의 근간 자체가 변했다.

전생의 기억 속에 있는 수많은 무공!

그중 한 무공을 배워 각성 헌터가 되면 인생이 변한다!

면제율 70%를 넘긴 지가 오래인 군대는 어지간하면 면제지만,

각성 헌터가 되면 1년간의 의무 복무 기간이 생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군대야말로 게이트 자원 강국, 한국 헌터 산업의 핵심.

게이트 사태 이후 20년 동안 군대에 쌓인 노하우,

거미줄처럼 이어진 헌터 업계 인맥을 얻기 위해서라도 군대에 가는 건 괜찮은 일이었다.

당장 한국군은 외국인들도 입대하려고 하는 곳 아닌가?

게다가 각성 헌터는 최소 부사관에서 시작이니 인맥을 쌓기에 더욱 좋았다.

이렇게 각성 헌터로 1년간의 의무 복무를 끝내고, 군대에서 얻은 인맥으로 대형 길드를 골라가면 된다.

헌터 지망생 1000만 명 시대.

'헌터 업계는 이미 레드 오션이다.'

'신입 헌터가 자리 잡는 비율이 1/3도 안 된다.'

'월 200도 못 버는 궁핍한 비정규직 헌터가 널렸다.'

이런 암울한 이야기가 많지만, 모두 비각성 헌터의 이야기일 뿐이다.

각성 헌터의 소모품 비용은 비각성 헌터의 1/10 이하고, 압도적인 신체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각성 헌터 한 명의 수입이 보통의 비각성 헌터 한팀의 수입과 맞먹는다.

당연히 이능력을 가진 각성 헌터의 수요는 끊임없었고.

'각성 + 군 인맥' 이라면 대형 길드도 프리패스 입단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청년 헌터가 있는 금성 길드에서 스카우트 제안이 올 수도 있었다.

이렇게 대형 길드에 들어가면 앞날은 탄탄대로로 열린다.

게이트가 열린 지 이미 20년.

신생 길드는 매달 수십 개씩 생겨나지만,

1세대 헌터이래 수십 년 동안 바닥을 다진 대형 길드의 기득권은 탄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1세대 헌터들 대부분은 서울 게이트와 해외의 게이트들을 안정화하는 과정에서 사망했지만,

몬스터에 밀리던 인류를 구원한 영웅들에게 세계는 최고의 예우를 보였다.

각국의 최고 훈장이 서훈되고,

그 해의 노벨 평화상은 서울 게이트를 닫은 1세대 헌터들이 공동 수여됐다.

지금 한국의 대형 길드 상당수가 그때 살아남은 1세대 헌터, 사망한 헌터의 후손들이 만들었다.

그런 만큼 들어갈 수만 있다면 당연히 대형 길드였다.

그러나 천문석은 대형 길드에 들어가서도 아등바등 열심히 살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적당한 돈.

게이트 안정화 권역에 적당한 크기의 건물을 살 정도의 돈만 모으면.

천문석은 바로 은퇴할 생각이었다.

30대에 은퇴한.

불로소득으로 먹고사는 건물주.

이거야말로 천문석이 바라는 꿈이었다.

놀고먹는 삶이라니!

최고다!

전생을 각성한 그 날밤.

천문석은 순식간에 새로운 인생계획을 세우고, 지금처럼 텅 빈 옥상에 섰었다.

계획의 첫걸음, 무공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전생의 모든 기억을 떠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기억하지 못한 내용 중에는 마도 18문의 지존공, 천마신공도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상관없는 게 아니라 천마신공은 기억나지 않아서 좋았다.

그 끝이 파멸뿐인 마공을 익혀서 무엇한단 말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자잘한 무공들!

이것만으로도 각성 헌터가 되어 먹고 살기에는 충분했다.

하하하!

생각만으로도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전생을 기억한 그 날,

그때의 천문석은 그렇게 미래에 대한 행복한 계획으로 자신만만했다.

그러나 계획이 어그러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계획의 첫걸음에서 생겼다.

상승 무공의 기틀인 심법.

심법을 움직일 수 없었다.

천문석은 심법을 돌릴 마중물이자 불씨, 단 한 모금의 진기를 모을 수가 없었다.

이유는 금세 파악됐다.

천지간에서 느껴지는 기는 전생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전생과 다르게 현생에는 기의 흐름이자 원천, 영맥이 없었다.

'심법'이란 기의 바다에 띄워진 '배'다.

이 배는 불어오는 바람과 흘러가는 해류를 타고, 영육에 새겨진 기경팔맥을 나아간다.

'심법'이란 이름의 '배'가 나아가기 위해선.

바람을 불게 만들고 바다가 흐르게 만드는 힘, '영맥'이 필요했다.

그러나 현생에는 영맥이 없었다.

바람은 불어오지 않고, 바다는 흘러가지 않는다.

현생의 기는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얼어붙은 바다였다.

얼어붙은 바다에 갇힌 배, '심법'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심법’에 실린 마음에 감응하여 기를 움직여줄 ‘영맥’이 없기 때문이었다.

영맥이 없다는 걸 깨달은 천문석은 기억 속 모든 심법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결과는 모두 실패.

천문석은 아주 약간, 단 한 방울의 진기도 모을 수가 없었다.

생각도 못 한 사태에 어이없어하던 그때.

천문석은 우연히 각성 헌터를 직접 보고 느꼈다.

각성 헌터와 이어진 영맥!

각성 헌터의 이능력은 영맥에 근원 했다!

순간 천문석에게 벼락같은 깨달음이 왔다.

현생에서 기를 쌓을 방법이 있었다!

1. 각성 헌터는 영맥과 이어졌다.

2. 영맥은 각성하면 뚫린다.

3. 즉, 각성하면 심법을 익힐 수 있다!

"...시바."

지금 생각해도 말문이 턱하고 막히는 골 때리는 상황이었다.

각성 헌터가 되려고 심법을 익히려는 건데,

심법을 익히려면 각성 헌터가 돼야 한다니!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모순적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천문석은 어린 시절부터 길이 보이는 한 포기를 모르는 남자였다.

영맥이 있기는 하다는 걸 알게 된 후,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다.

고양이와 강아지, 나무.

동식물을 이용한 차기(借氣).

하천과 강, 산과 바위.

자연지물을 이용한 격기(激氣).

생명의 근원.

선천지기(先天之氣)까지!

온갖 방법을 써보고, 매일 밤 기억에 남은 모든 무공과 좌도방문의 기술을 써봤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도 영맥은 감응하지 않는다.

단 한 호흡의 진기,

심법의 마중물이 되어줄 단 한 방울의 기는 모이지 않았다.

각성 헌터의 영맥을 제외하면 지구에는 단 한 조각의 영맥,

동네 뒷산에 흐르는 흐릿한 실개천 같은 미약한 영맥조차 없었다.

결국, 한 달이 지난 오늘 밤.

마지막 무공,

마종권에 이르기까지.

천문석은 무공을 익히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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