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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7화 (8/1,336)

# 8

비정규직 천마 - #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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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툭-

소파에 누워있는 천문석의 손에 닿는 머그잔.

천문석은 머그잔을 내민 세연을 봤다.

“응?”

“얼른 받아.”

세연이 내민 머그잔에는 커피가 가득 담겨있었다.

천문석은 머그잔을 받으며 물었다.

"이건 웬 커피냐? 우리 집에 커피가 있었어?"

"오빠. 좀 저리로 비켜봐."

커피잔을 건네준 세연은 대답 없이 소파에 누운 천문석의 다리를 발로 툭툭 쳤다.

익숙한 상황.

천문석은 자연스럽게 소파에서 내려와 바닥에 깔린 러그 위에 앉았다.

"오빠가 아니라 삼촌! 그것보다 커피 어디서 났냐?"

"왜? 훔쳤을까 봐? 아까 집에서 가져온 거야."

쿠션을 품에 안은 채 익숙한 듯 소파에 모로 눕는 세연.

세연은 건성으로 대답하며 소파 틈으로 자연스레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소파 틈에서 나온 세연의 손에 들려있는 리모컨.

한 달 전 사라진 리모컨이 세연의 손에 들려있었다!

"어? 리모컨이 왜 거기 있어!? 아니! 그보다 넌 거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

천문석의 의심스러운 시선에 세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당연히 알지. 내가 여기다 넣어 놨으니까."

"야! 그걸 왜 거기다 넣어놔! 내가 리모컨을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분노한 천문석이 소리 지르자, 세연도 마주 소리쳤다.

"전에 방 꼴이 어땠어? 전에도 맨날 리모컨이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있었잖아! 찾지도 못했으면서! 그리고 이거 봐!"

세연은 들고 있는 리모컨을 뒤집어 보여줬다.

"..."

하얀 리모컨 뒤에 유성 매직으로 적힌 커다란 글자.

[류세연 리모컨]

[절대 이동 금지!]

세연은 리모컨으로 채널을 돌리며 말했다.

"기억 안 나? 삼촌 리모컨 잃어버려서. 이거 내가 우리 집에서 가져온 거잖아!"

"아···. 그랬지."

“그 건망증 어쩔 것임? 군대 가면 막 총도 잃어버리는 거 아냐?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그냥 내 밑에서 일하지그래?”

"..."

세연은 연이은 팩트 공격을 하면서 채널을 돌렸다.

그러자 텔레비전 채널이 11번을 넘어 쭉 올라갔다.

천문석은 깜짝 놀랐다.

"어? 이거 뭐야!? 우리 집에서 케이블 채널이 왜 나와?"

"왜 나오긴. 당연히 내가 분배기 달고. 유선방송 선을 따왔으니 나오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는 세연.

천문석은 감탄했다.

한 달 만에 집에 돌아온 녀석이 언제 이런 걸 다 했단 말인가?

"선은 언제 딴 거야? 그리고 선만 끌어온다고 케이블 방송이 나오는 게 아닌데···."

의아해진 천문석이 텔레비전을 살피자, 텔레비전 위에 전에는 없던 작은 기계, 셋톱박스가 보였다.

"너, 저 셋톱박스는 언제 달았냐? 혹시 케이블 방송 신청한 거야? 어? 그럴 리가 없는데···?"

세연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텔레비전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공짜야."

"뭐?"

"나한테 다 방법이 있지. 한 석 달 정도는 공짜로 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

천문석은 채널을 휙휙 돌리는 세연을 지긋이 봤다.

류세연.

18세, 고등학교 3학년.

퇴근 후 아버지처럼 소파에 누워 다리를 까닥이며 리모컨을 돌리는 모습은 능숙한 프로 백수였다.

그러나 류세연은 천재였다.

육체와 머리 모두.

어린 시절 중장거리 달리기 선수로 주니어 한국 기록을 세웠고,

국가 핵심 인재로 뽑혀 한 달 동안의 해외 체험 연수를 다녀왔다.

세연은 이미 몇 개나 되는 논문을 학술지에 발표했고,

대기업과 연구기관에서 스카우트 제안까지 받았다.

본인은 대학에 진학할 생각인 것 같았지만.

류세연은 도대체 왜 정규교육 과정을 밟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천재였다.

푸훕, 크킄크크-

순간 잠시 멈춘 채널의 아재 개그를 보며 웃음을 터트리는 세연.

세연은 전혀 천재 같지 않게 웃다가 휙, 휙 다시 채널을 돌렸다.

"..."

천문석은 소파에 누운 세연을 유심히 봤다.

아무렇게나 틀어 올려 연필을 꽂은 머리카락,

색이 바래다 못해 변한 녹색 추리닝.

소파와 하나가 된 듯 편안한 포즈.

까닥까닥 두 손가락으로 제 몸처럼 능숙하게 리모컨을 조정하며,

발을 쭉 뻗어 선풍기 방향을 돌린다.

"야! 발로 하지 말고! 일어나서 손으로 움직여!"

천문석이 외쳤지만,

세연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대답한다.

"난 발이 손이야."

"..."

도저히 천재로는 보이지 않는,

백수처럼 늘어진 모습이다.

그러나 세연은 손재주도 좋았다.

오늘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유선 케이블을 분배기에 물려 따고,

건물 세입자들의 요구에 따라 전등을 교체하고, 도어락을 새로 달고, 수도배관도 직접 수리한다.

작년에는 문석과 같이 시멘트 몰탈로 어린이집의 깨진 계단을 보수하고, 화장실 타일을 새로 깔고, 외벽 청소를 한 적도 있었다.

이런 기술이라니!

세연은 여고생이 아니라 능숙한 현장인력 같았다.

천문석은 어쩐지 가슴이 뿌듯해지는 것만 같았다.

세연의 피지컬과 머리는 부모님에게 물려받은 것이지만,

기술들은 수많은 알바에서 자신이 습득해 세연에게 가르친 거다.

문득 처음 만났을 때의 류세연이 기억난다.

류세연, 일에 바쁜 부모님을 기다리며 혼자 놀던 우울해 보이던 꼬마.

옥탑방으로 슬그머니 찾아와 자신의 눈치를 보던 우울했던 꼬마는 이제 뭐든지 혼자서도 척척 해내는 훌륭한 우리 동네 기술자가 됐다.

류세연에게 이런 기술들을 가르친 장본인, 천문석은 가슴이 뿌듯했다.

'내가 이 아이를! 이렇게 훌륭하게 키웠다!'라고 동네 곳곳에 자랑하고 싶었다.

그래서 천문석은 자랑스러움을 담아 말했다.

"넌. 꼭 대학은 공대로 가라."

순간 세연은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공대 여신, 류세연이 보고 싶은가 봐?"

우에엑-

순간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반응.

팡-

천문석은 자신에게 날아온 쿠션을 잡아 세연에게 다시 던져 줬다.

세연은 능숙하게 쿠션을 다시 받아 품에 안으며 채널을 고정했다.

"...어?"

천문석은 순간 세연을 보며 물었다.

"이걸 보려고?"

"조용!"

세연은 이미 초집중 상태로 텔레비전에 몰입하고 있었다.

채널이 맞춰진 곳은 케이블 예능 방송.

연애 예능 '러브 시그널'이 시작하고 있었다.

호호호-

피부에 두드러기가 올라올 것 같은 가식적인 웃음과 함께.

20대 젊은 남녀 10명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애 예능이 시작됐다.

“...”

---

천문석은 23세의 대학생, 20대 청년이다.

어설프나 풋풋하고,

그렇기에 싱그러운 청춘.

그러나 중학생 때부터 계속된 알바 그리고 빠듯한 생활은 천문석의 감성을 메마르게 했다.

거기에 더해 천문석이 자각한 전생은 피와 죽음으로 점철된 흉흉하기 그지없는 마도 지존 천마.

당연히 천문석에게 어설프나 풋풋하고 싱그러운 청춘의 감성 같은 건 없었다.

'러브 시그널'을 시청하는 한 시간 동안.

천문석은 20대 남녀의 밀당과 연애 이야기에 손발이 오그라들고,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체험을 해야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오래 보면 그를 이해하게 된다고 했던가?

어느 순간부터 천문석은 텔레비전 속 만들어진 이야기에 몰입했다.

그러자 마음 또한 육체를 따라갔다.

연기자들의 걱정 없이 즐거워하는 웃음,

아무것도 아닌 일에 감정이 북받쳐 우는 모습.

공감하기 힘든 상황들에 어느새 천문석은 공감하고 있었다.

한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보이는 엇갈린 감정선에 가슴이 간질거리고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때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기도 했다.

그래서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 러브 시그널이 끝났을 때, 천문석은 웃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문득 드는 생각에 천문석은 재빨리 웃음을 지우고 하품을 하며 세연에게 말했다.

"하아- 넌 뭘 이런 걸 보냐? 지루해서 혼났네."

"..."

그러나 들려오지 않는 대답.

소파에 누운 류세연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언제나처럼.

"...자냐?"

예전처럼 한번 물은 후, 자연스럽게 세연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서 원래 있던 소파 틈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오래된 담요를 둘둘 덮은 류세연을 번쩍 들었다.

가슴에도 안 오던 꼬맹이는 어느새 훌쩍 자랐지만, 여전히 깃털처럼 가벼웠다.

문득 시계를 보니 이미 시간은 밤 10시 50분.

보통 직장인들의 퇴근 시간을 한참 지난 늦은 시간이지만,

류세연의 바쁜 부모님들은 오늘도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아니면, 이미 잠들었거나···.

세연을 어깨에 들쳐멘 천문석은 옥상 문을 열고 바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계단 앞에 보이는 문.

옥상 아래 5층에는 집이 하나밖에 없다.

5층 전체를 모두 쓰는 이 집이 세연의 집이다.

현관 도어락 번호는 이미 알고 있다.

천문석은 능숙하게 도어락을 열고 성큼 집 안으로 들어가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아주머니. 저 문석입니다. 세연이 데려왔어요!"

대답 소리는 없었다.

현관 중문을 지나자 등이 켜지며 보이는 탁 트인 공간.

하얀 대리석이 깔린 바닥과 벽, 넓은 거실이 나타났다.

거실 가운데에는 두툼한 카펫이 깔려있고 벽에는 커다란 가죽 소파가 놓여있다.

그리고 가죽 소파 맞은편에는 자신의 오래된 텔레비전이 10개는 들어갈 법한 커다란 텔레비전이 있었다.

자신의 옥탑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좋은 집이었다.

그러나 넓은 집 안에는 오랫동안 사람이 없던 집 특유의 적막감과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각자의 일에 바쁜 세연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세연이 한국에 돌아오는 오늘도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어쩌면 오늘이 세연이 연수에서 돌아오는 날이란 걸 잊은 걸 수도 있었다.

문득 거실 한쪽, 아무렇게나 놓인 여행용 가방과 깨끗한 거실과 어울리지 않은 오래된 텐트가 보였다.

"짐도 풀지 않고 나왔던 거냐?"

천문석은 어이없어하는 눈으로 잠든 세연을 봤다.

집에 도착한 세연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이 녀석은 집에 오자마자, 녹색 추리닝으로 갈아입고 공원 그네에서 자신을 기다렸을 거다.

예전처럼.

세연이 초등학생일 때 자주 봤던 모습을 기억하며 천문석은 잠든 세연에게 말했다.

"초딩이냐?"

천문석은 거실 한쪽 오래된 텐트로 성큼성큼 걸어가 안에 세연을 눕혔다.

어렸을 적부터 큰 집을 무서워하던 세연에게 이 텐트는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텐트 안에 눕혀지자, 세연은 새우처럼 몸을 웅크리고 부르르 한번 떨었다.

이미 한 여름이지만 비가 와서인지 쌀쌀했다.

'방에서 이불을 가져올까?'

잠시 고민했지만, 아직 어린애라도 방이라는 사적 공간에 들어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주위를 둘러보자, 거실 구석 선반에 놓인 두툼한 담요가 보였다.

천문석이 선반으로 걸어가 담요를 꺼내자, 같이 딸려 나와 떨어지는 게 있었다.

툭-

한 바퀴 데굴 굴러 자신을 보는 곰 인형.

솜씨 없는 누군가가 직접 만든 듯 삐뚤빼뚤한 팔다리와 짝짝이인 눈코입.

여러 종류의 자투리 천을 덧대 만든, 오래되어 색이 바랜 곰 인형은 띠꺼워하는 표정으로 천문석을 보고 있었다.

"넌 예전 그대로구나."

피식 웃은 천문석은 오래됐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곰 인형과 담요를 들었다.

그리고 텐트로 돌아와 세연의 품 안에 곰 인형을 넣어 줬다.

으응-

잠결에 소리를 내며 예전처럼 인형을 꼬옥 안는 세연.

세연의 조르기를 당한 곰 인형의 띠꺼워 하는 표정이 일그러져 비웃는 표정으로 변했다.

천문석은 세연이 덮고 있던 자신의 오래된 담요를 빼내고 새 담요를 덮어줬다.

그리고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새하얀 대리석과 값비싼 가구가 놓인 커다란 거실.

모든 게 화려하고 새것인 이곳, 이질적인 것들이 눈에 박혔다.

오래된 텐트.

색바랜 녹색 추리닝.

비웃는 표정의 곰 인형.

천문석은 잠시 깊게 잠든 세연을 보다가 몸을 돌리며 생각했다.

입영통지서가 나오면 입대하기 전에 세연에게 새 추리닝을 사줘야겠다.

자신이 입던 녹색 추리닝은 이제 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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