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비정규직 천마 - #002
────────────────
#002
피멍이 든 배에 얼음찜질 중인 천문석.
천문석 앞에는 장난감 인형처럼 연신 허리를 숙이는 죄인이 있었다.
죄인의 정체는 천문석을 들이박은 돌머리 꼬맹이.
꼬맹이의 허리가 숙여지는 순간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안! 뛰겠습니다!"
"정말! 잘못했습니다!"
...
꼬맹이는 눈물, 콧물이 가득한 얼굴로 두 손을 배 위에 올린 채 공손히 허리를 숙여 사죄했다.
한참 동안 허리를 숙이던 꼬맹이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작아졌다.
"잘못해에에···."
꼬맹이는 숙이던 허리를 멈추고 살며시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너! 제대로 사과 안 해!"
순간 아이 엄마의 사나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꼬맹이는 멈춘 허리를 깊이 숙이며 재빨리 외쳤다.
"해에엤습니다!!"
하하하-
천문석은 꼬맹이의 사과를 받으며 묘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뭐지? 이 기분은?’
꼬맹이의 사과를 받으며 뿌듯하고 흐뭇한 이 기분이라니!
전생의 적수, 천검 이세기를 이겼을 때 이상으로 가슴속에 충만한 기쁨이 차오른다.
천문석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며 꼬맹이를 노려보는 아이 엄마에게 말했다.
"사과는 이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이제 괜찮습니다."
천문석의 말에 매서운 눈으로 아이를 보던 아이 엄마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정말 병원 안 가셔도 되겠어요? 멍이 심해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 멍은 며칠 지나면 그냥 없어져요."
순간 허리를 숙여 사죄하던 꼬맹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럴 리 없어!"
"...뭐?"
"내 머리를 무시하지 마! 내 머리는 우리 삼촌이 인정한 돌머리란 말야!"
"..."
꼬맹이는 천문석의 배를 손가락질하며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알바! 너는 이제 곧! 아파서 엉엉 울면서! 데굴데굴! 구를 것이야!"
천문석이 어이없어하고 아이 엄마가 이마를 짚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살벌한 엉덩이 때리는 소리와 꼬맹이의 서러움 가득한 울음소리가 같이 울려 퍼졌다.
팡, 팡, 팡-
"으아아앙. 엉덩이 그만 때려! 차라리 머리! 머리를 때리란 말야!"
"이게! 어디서 잘했다고!"
파아앙, 팡, 팡-
엉엉 울면서 한참 동안 엉덩이를 맞은 꼬맹이는 엉거주춤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었다.
그리고 매서운 손길로 아이를 혼낸 아이 엄마는 천문석에게 연락처를 남기며 다시 한번 허리를 숙였다.
"꼭 병원 가시고. 꼭! 그 번호로 연락해주세요! 그리고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네. 하하."
폭풍처럼 전개되는 상황에 천문석은 헛웃음을 흘렸다.
키즈카페에서 일한 지 한 달.
아이들이 말썽을 부려도 엄마는 아이를 감싸고 피해자인 직원에게 한소리 하는 게 보통이었다.
이렇게 아이를 혼내면서 사과하는 엄마라니.
상식적이지만, 생각하지 못한 비현실적인 상황에 어쩐지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병원 꼭 가셔야 해요!"
아이 엄마는 다시 한번 당부하고 손을 들고 있는 아이를 일으켜 세웠다.
"...벌 끝난 겁니까? 이제 놀아도 되는 겁니까?"
아픈 엉덩이를 뒤로 빼고 엉거주춤 일어선 아이의 기대 섞인 질문.
그러나 엄마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 큰 잘못 했으니까. 한 달 동안 키즈카페 오는 건 금지야. 이제 집에 가자!"
경악으로 물든 아이의 얼굴.
다음 순간 꼬맹이는 자지러졌다.
"으아악! 안돼! 나 안 그럴게! 나 더 놀다 갈 거야! 알바! 아저씨! 언니! 형! 나 좀 구해줘!"
뒤로 누웠다가 깜짝 놀라 다시 앞으로 엎드린 꼬맹이.
아픈 엉덩이를 위로 향한 채 엎드린 꼬맹이는 발버둥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아이 엄마는 눈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입구 쪽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제임스!"
아이 엄마의 손짓에 나타난 검은 양복의 남자.
경호원으로 보이는 건장한 남자는 자지러지는 꼬맹이를 번쩍 들어 어깨에 걸쳤다.
꼬맹이는 경호원의 어깨에 걸쳐진 상태로도 여전히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소리쳤다.
"야! 내려! 내리라니까! 삼촌한테 이른다! 진짜로 이를 거야! 삼촌! 어딨어!"
그러나 제임스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꼬맹이들 걸친 채 입구로 걸어갔다.
천문석은 멀어지는 악마 같은 돌머리 꼬맹이에게 혀를 쏙 내밀어 작별인사를 했다.
"메롱- 잘 가라 꼬맹이! 한 달 후에 보자!"
으아악-
돌머리 꼬맹이는 괴성을 지르고 발광하며 키즈카페에서 퇴출당했다.
하하하-
앞으로 한 달간은 돌머리 꼬맹이와 안녕이다!
전생에 마인 놈들을 두들겨 팼을 때 이러했을까?
천문석은 속이 뻥 뚫리는듯한 상쾌함을 담아 다시 한번 통쾌하게 웃었다.
하하하하-
톡, 톡-
이때 다리를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
"응?"
천문석은 고개를 내렸다.
금발을 땋아올려 고정한 화려한 인형같이 생긴 여자아이.
여자아이는 막대 사탕을 쪽쪽 빨면서 천문석의 다리를 두들기고 있었다.
"왜 그러니 꼬마야?"
"잘했어요. 대장이 없으니까 쟤가 나댔거든요."
"뭐?"
맥락 없는 말에 천문석이 의아해할 때 여자아이가 쪽쪽 빨아먹던 막대 사탕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뭐니?"
"잘했다고요."
먹던 막대 사탕을 흔들며 다시 한번 칭찬하는 아이.
“...”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키즈카페에서 일한 지 한 달. 천문석은 그동안의 경험으로 지금 이 아이가 뭘 원하는지 바로 깨달았다.
천문석은 몸을 숙여 아이와 눈을 맞추고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는 사탕을 별로 안 좋아해요. 맛있는 사탕은 꼬마 숙녀가 먹어요. 알았죠?"
말이 끝나는 순간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고 울음기 가득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아으아-
천문석은 깨달았다. 선물을 거절하면 이 아이는 운다! 게다가 어느새 주위에 모여들어 자신과 아이를 보는 꼬맹이들.
한 아이가 울면 그 울음이 다른 아이에게로 퍼져나가는 건 순식간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난장판이 재현되겠지.
천문석은 아이가 내민 먹던 막대 사탕을 재빨리 입에 물고 어쩐지 먹먹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사탕이···. 정말···. 맛있네···. 고맙다···."
히히히히-
천문석이 막대사탕을 먹자, 울먹이던 아이는 어느새 너무나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그지래요!"
"...뭐?"
"먹던 걸 먹다니! 오빠는 그지래요!"
"...야! 너가! 준거잖아! 네가! 먹으라며!"
천문석이 억울함에 소리쳤으나, 그 외침은 사방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순식간에 묻혀 버렸다.
"그지래요!"
"그지래요!"
...
어느새 천문석 주위에 모여든 아이들은 일제히 소리치고 있었다.
아이들의 신난 목소리가 합창이 되어 키즈카페 전체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천문석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먹던 과자, 초콜릿, 음료수, 어린이 젤리, 탄성볼, 나무 블록, 신발을 내밀었다.
그리고 뒤섞여 들려오는 광기 어린 외침들.
"불쌍해!"
"잘했어요!"
"선물이에요!"
"엄청 맛있어요!"
...
"그지래요!"
“먹어요!”
"그지래요!"
“먹어요!”
...
"..."
천문석은 깨달았다. 돌머리 꼬맹이 하나 집으로 보냈다고 끝날 일이 아니었다.
눈앞에 가득한 악마 같은 꼬맹이 놈들!
악마들이 신나서 뛰노는 이곳.
여기는 지옥이다.
여전히!
---
키즈카페 입구.
김철수는 핼쑥해진 얼굴로 광란의 도가니가 된 키즈카페 안을 살폈다.
"그지래요!"
“먹어요!”
"그지래요!"
“먹어요!”
...
신나서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은 광기 어린 원시 축제의 부족원들 같았다.
그리고 빙글빙글 노래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중심.
그곳에는 썩어가는 얼굴의 후배 천문석이 있었다.
"저···. 이거 무슨 일이죠?"
철수의 물음에 데스크 직원이 웃음기 가득한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점장님 오셨어요? 아이들이 부점장님을 너무 좋아하네요.”
그리고 뒤를 잇는 다른 직원의 대답.
“맞아요. 문석 학생, 아니 부점장님이 일하고부터 일이 정말 편해졌어요.”
직원들의 뜬금없는 대답을 듣는 순간 철수의 촉이 움직였다.
부점장 문석과 교대해주기 위해 온 자신.
"그지래요!"
“먹어요!”
...
광기마저 느껴지는 외침 한가운데, 문석은 꼬맹이들이 내미는 온갖 것들을 먹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저거 신발 아냐?"
어떤 아이가 내민 신발을 먹는 척하는 문석이를 보는 순간, 촉이 왔다.
문석이가 있는 저곳에 잠시 후 자신이 있을 거라는 강한 촉이!
'미안하다. 문석아···.'
고통받는 문석에게 마음속으로 사죄한 철수가 은근슬쩍 뒷걸음칠 때, 토해내듯 다급한 외침이 연이어 들려왔다.
"점장님!"
"철수형!"
"으아아!"
"드디어!"
"왔구나!"
"..."
"얘들아! 이제는 이 아저씨! 점장 형이! 놀아줄 거야!"
천문석은 부점장이라고 적힌 검은색 앞치마를 철수에게 집어 던지고, 달려드는 꼬맹이들을 피해 도망치듯 키즈카페에서 탈출했다.
---
흐아아-
키즈카페에서 탈출한 천문석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뜨거운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하-
절로 나오는 탄성!
역시 삶이란 상대적인 것!
지옥에서 탈출한 천문석에게는 여름의 습기 가득한, 후덥지근한 공기마저 천상의 은총 같았다.
"으어어. 문석아···."
이때 머리 위 멀리서 들려오는 철수형의 비명.
천문석은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들려오는 소리를 지우고, 뒤돌아보지 않고 집을 향해 걸었다.
키즈카페가 있는 건물에서 자신의 자취방까지는 다섯 정거장 정도 거리.
보통은 멀다고 느낄 거리였지만 어린 시절부터 이 동네에서 살아온 천문석에게는 적당히 걸어 다닐만한 거리였다.
천문석은 집으로 걸어가며 지난 한 달을 생각했다.
한 달 전.
천문석이 입대를 위해 휴학 후, 3차 징병검사를 마쳤을 때.
때마침 대학 선배 철수형이 키즈카페 알바를 소개해줬다.
하아-
생각과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새어 나오는 한숨.
첫 출근 날 아이들의 인파에 압도된 자신에게 철수형은 말했었다.
"이야! 오늘 아이들이 엄청 많은데? 이런 날은 처음인걸! 하, 하, 하."
그때 철수형의 어색한 웃음과 구라를 간파하고 바로 그만뒀어야 했는데···.
갑자기 일어난 사건으로 어어, 하다 보니 벌써 한 달. 지금까지 키즈카페 알바를 하고 있다.
예상치 못하게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한 달 전 갑자기 일어난 그 사건도 키즈카페 알바처럼 예상을 한참 벗어난 일이었다.
23세 천문석 인생의 전환점이 될 것 같았던 사건.
천문석은 한 달 전 그 날을 떠올렸다.
첫날의 키즈카페 알바를 끝내고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온 그 날 밤.
별다른 계기 없이 문득.
천문석은 어젯밤 꿈을 기억해내듯 전생을 기억했다.
순간 한 달 전 일을 떠올리는 천문석의 입가에 웃음이 그려졌다.
천문석의 입가에 그려진 웃음은 정말 어이없는 일을 봤을 때 지을법한 허탈한 미소였다.
한 달 전 문득 떠오른 전생의 기억.
전생의 기억 곳곳이 잊어버린 꿈처럼 흐릿했지만, 자신의 정체성만은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전생의 천문석은 천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