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차기 국왕감으로 유력하게 거론되는 3왕자 키릭 루 페르시안이 후계자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선언하자 룬베르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처음에는 왕자를 칭송했던 각계각층은 물론 제국민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지만, 당사자의 의지가 워낙 확고해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태람과 세호가 의외라고 생각했던 건 국왕의 반응이었다. 가장 반대가 심할 거로 생각했었는데 국왕은 오히려 세호가 무사히 후계자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도록 도움까지 주었다. 그의 태도가 신경 쓰였던 세호는 기회를 봐서 슬쩍 그의 진심을 물어보았고,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네가 어렸을 때부터 이런 날이 올 거라고 마음의 준비를 해두었다. 너는 이곳에 속해 있지만, 이곳에 속하지 않은, 언젠가는 떠나버릴 것 같은 이질감이 있는 아이였다. 텅 비어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지. 네가 나에게 뭔가를 부탁한 건 처음이다. 그러니 네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구나. 이것 또한 주신 리안의 뜻이겠지.’
국왕은 키릭 왕자가 태람을 만나고 비로소 온기를 가지게 되었다고, 그래서 기쁘다고 덧붙였다. 그 말을 태람에게 전하는 세호의 표정은 어딘지 복잡해 보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국왕 역시 그의 부모님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가는 와중 작은 문제는 남아 있었다.
‘신관에게 반해 신전에 귀의했다.’, ‘드래곤과 결혼했다.’, ‘마계에 살림을 차렸다.’, ‘이웃 나라의 수작으로 세뇌당했다.’ 등등 키릭 왕자에 대한 온갖 해괴한 소문이 무성했다. 그중에는 태람과 연관된 것도 있었다.
바로 ‘왕자가 용사에게 홀려 다른 차원으로 떠날 예정이다.’라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자유의 몸이 되어 왕자의 직무에서 해방된 세호가 늘 태람의 옆에만 붙어 있으니 소문은 힘을 얻었다. 덕분에 태람은 요즘 어딜 가나 따라붙는 시선에 시달리고 있었다.
*
결국, 태람은 오늘도 밖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세호와 함께 자신의 방에서 노닥거리는 것을 선택했다.
“생각할수록 아쉬워.”
넓은 침대 위를 이리저리 뒹굴뒹굴하던 태람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옆에 누워있던 세호가 그런 태람의 볼을 괜히 쿡쿡 찌르며 말했다.
“뭐가요?”
“다들 보고 싶어지면 어쩌지? 돌아가는 건 다행이지만 벌써 쓸쓸해.”
“그렇다고 여기 남을 수도 없잖아요.”
“그건 그렇지…. 그래도 아쉽단 말이야.”
아무리 불러도 이제 노랑이는 태람과 세호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책 또한 더는 소환되지 않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강렬한 예감. 두 사람은 원래 세계로 돌아갈 날이 머지않았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느꼈던 감각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야. 기억을 담긴 빛의 공을 받았을 때처럼 느낌이 와.”
“저도 당장이라도 어디론가 끌려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남았을까? 당장 내일은 아닌 것 같지만 위태위태하다.”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건 저뿐입니까? 만약 시간이 그대로 흐르고 있다면 저희는 둘 다 퇴학입니다.”
“학교가 문제가 아니잖아. 실종 신고가 나왔을걸?”
“그러니 사태가 더 심각하게 되기 전에 빨리 돌아가야죠.”
“매정한 놈. 아직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 했단 말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보내지 말걸. 나는 돌아가는 건 더 나중일 줄 알았어.”
긴 여정으로 오래 자리를 비웠던 터라 프랑은 신전으로, 카이란은 자신의 레어로 일단 돌아갔다. 가기 싫어서 버티는 두 사람을 태람이 어르고 달래서 겨우 내보낸 게 벌써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아밀은 시종장으로 승진해서 근무처를 옮겼다. 인수인계로 바쁜지 도통 볼 수 없었다.
“눈물 콧물 질질 짜며 헤어진 게 고작 한 주도 안 됐습니다. 아직도 부족하십니까?”
겉으로는 담담하게 말하는 세호였지만, 그 역시 쓸쓸한 눈빛을 숨길 수는 없었다. 원수 같은 존재지만 프랑도 카이란도 일단은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 한참 부족해.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모두와 다시는 못 만나는 거잖아.”
“그건 그렇죠.”
“많이 그리울 거야. 프랑도, 카이란도, 아밀도. 이 세계의 모든 것이.”
“선배….”
침울해하는 태람을 위로하듯 세호가 그의 머리를 살포시 쓰다듬었다. 이대로라면 돌아가도 태람은 한동안은 계속 우울해할 것 같았다. 세호는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금발에 보석 안인 너와도 이별이네…. 백금발에 자수정이라니 흔치 않은 조합인데….”
이어지는 태람의 말에 세호는 기가 막혔다. 잠시라도 태람을 안타깝게 여겼던 자신이 바보 같아졌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정말이지…. 걱정해서 손해 봤습니다.”
“우리 세호. 형아를 많이 걱정했구나.”
“가끔은 정말로 선배를 한 대 때려주고 싶습니다.”
“네가 때리면 살인 미수라니까.”
바로 반박할 줄 알았던 세호가 웬일인지 조용했다. 태람이 이상해서 뭐라도 말을 하려던 찰나, 세호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소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는 그렇게 키릭 왕자가 좋습니까?”
“응?”
“그야 저처럼 딱딱하고, 재미없는 사람보다는 이렇게 밝고 화사한 사람이 선배한테는 더 어울리긴 합니다.”
“또또 심각해지네. 미간에 주름 좀 풀어.”
태람은 세호의 미간을 꾹꾹 눌렀다.
“잊은 것 같아 말하지만 키릭 왕자는 귀축 속성이잖아. 나는 강압적인 사람은 싫어. 섬세하고 다정한 사람이 좋더라.”
돌려 말하는 태람의 고백에도 세호는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태람은 여전히 삽질만 하는 세호가 답답했다. 전투가 끝나고 룬베르로 돌아왔을 때, 태람은 세호가 바로 고백을 해줄 거로 생각했었다. 그야 고백이라고 확정이 난 건 아니지만 그렇게 애절한 표정으로 모든 전투가 끝나면 말하겠다 하면 그것은 고백밖에 없었다.
좀처럼 분위기가 안 잡혀서 그런가? 생각해보면 너무 늘어진 모습만 보여주긴 했지? 태람은 괜히 침대에서 일어나 잔뜩 기대하며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태람의 기대와 달리 세호는 룬베르로 돌아오고 나서 점점 고백할 용기를 잃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지내는 태람을 보면서 세호는 그가 예전에 자신에게 한 고백이 아득한 과거로 느껴졌다.
그때의 선배는 많이 불안정했지. 어쩌면 누구라도 좋으니 기댈 사람이 필요했던 걸지도 몰라. 나는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고. 이미 마음을 정리한 것 같은데 이제 와서 고백했다가 차이면 평범한 선후배 관계도 깨지겠지? 마음을 숨기는 게 좋을지도 몰라.
두 사람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다. 땅꿀을 파는 세호의 상태도 모른 채 태람은 분위기를 잡는답시고 폭탄 발언을 터트렸다.
“그러고 보니 너 모든 전투가 끝나고 해준다는 말은 언제 할 건데?”
“그건….”
우물거리던 세호가 또 입을 다물었다.
“여기는 우리밖에 없잖아. 편하게 말해도 돼. 나는 준비가 됐어.”
“더 할 말은 없습니다.”
태람은 괴로워 보이는 세호의 얼굴을 보고 드디어 상황을 파악했다.
저 바보가 또 땅을 파고 있구나. 그래도 저 모습이 귀여워 보이는 시점에서 나는 망한 거겠지. 솔직히 어느 부분에서 오해가 생긴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세호와 나는 완전 다르니까 할 수 없지.
태람은 세호의 고백을 들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기로 했다. 고백을 두 번이나 해야 한다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이러다 관계가 흐지부지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나는 사소한 거 하나하나 다 따지고 들고, 유연성이 없는 네가 답답해. 가끔은 정말 화가 날 때도 있어. 그래도 나는 네가 좋아. 너는 어떤데?”
초콜릿처럼 달콤한 태람의 말. 세호는 자신이 제대로 들은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태람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믿을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나 차이는 거야?”
꽃처럼 화사했던 태람의 얼굴이 확 찌푸려졌다.
“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자신만만하던 태람은 세호의 사과에 크게 동요하고 말았다. 흑역사를 갱신해야 하는 위기에 처한 태람은 어쩐지 억울해졌다. 고백을 두 번이나 하고 차이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지레짐작한 것이 쪽팔리기도 했다.
“야. 너 이제 나가.”
태람의 축객령. 싸늘해진 태람의 목소리에 덩달아 당황한 세호는 눈을 질끈 감고 툭 하고 고백을 뱉어냈다. 어차피 어느 쪽으로 굴러가도 선후배 관계는 끝이었다.
“저도, 저도 좋아합니다! 선배를 전부터 좋아했어요.”
“너…. 그럼 대체 사과는 왜 했어?”
“사과한 건 항상 먼저 말하게 해서 미안해서 그랬습니다.”
태람은 차일뻔하다가 잘 된 것은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화가 났다.
“오해할 뻔했잖아. 사람 간 떨어지게. 애초에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말하려고 했는데 멋대로 오해하신 건 선배입니다. 그러는 선배는 성질이 너무 급해요. 좀 더 제대로 준비된 상태에 말했다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내 탓이다?”
“…그게 아니라! 아니, 이런 순간까지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그건 그러네. 그러니까 너랑 나랑 서로 좋, 좋아하는 거 맞지?”
“그, 그렇죠.”
퍼뜩 부끄러워진 두 사람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건 태람이었다.
“미안한데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어?”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불안한 표정 짓지 말라니까. 나 너 좋아해. 믿어라. 좀!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이 있어.”
태람은 세호와 마음이 통한 것을 알게 된 순간, 프랑과 카이란을 떠올렸다. 안 그래도 원래 세계로 떠나기 전에 관계의 매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세호 덕분의 마침내 결심이 섰다.
“프랑과 카이란 때문입니까?”
세호도 어렴풋이 태람의 고민을 알 수 있었다. 자신보다 더 이 세계를 그들을 소중히 여겼던 태람이다. 그들의 마음을 못 본 척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
“…괜찮습니다. 기다릴게요.”
“응. 이해해줘서 고마워.”
태람은 세호가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줘서 한결 편해졌다. 벌써 예전에 자신의 손에서 벗어난 세계. 그리고 등장인물들이었다. 그래도 태람은 여전히 프랑과 카이란에게 마음이 갔다.
따지고 보면 내가 부모 같은 거긴 하니까. 아니, 그런데 왜 한 명이 더 있었던 것 같지? 아밀은 아닌데. 정말 이상하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태람은 자꾸만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세호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긴 태람을 의아하게 쳐다봤다.
“…선배?”
“아. 미안.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그래.”
“뭐가 말입니까?”
“생각해 보면 이상하기도 하고. 우리 다 같이 조금씩 기억을 희생해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던 거잖아.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너도, 나도 다들 너무 멀쩡해. 그런데 한 편으로는 아주 큰 걸 잃어버린 것도 같고? 아무튼 정말 이대로 끝나도 괜찮은 건가? 싶기도 하네.”
“그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어서 그래요.”
“그럴지도.”
“일단 오늘은 주무세요.”
세호가 태람을 다시 침대에 눕혔다.
“잘 자요. 태람 형.”
그렇게 말한 세호는 태람에 이마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전부 마무리되면 그때는 입에 키스하게 해주세요.”
빠른 속도로 할 말을 마친 세호는 태람의 대답을 듣지 않고 그대로 방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된 태람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었다.
*
얼마 후, 태람은 프랑이 왕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접했다. 태람은 프랑이 당연히 바로 자신을 찾아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그는 머리카락 한 올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나한테 미안해서 그런가?”
태람은 신전으로 떠날 때 어딘지 어두워 보이던 프랑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때는 자신과 떨어지는 게 아쉬워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또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기다리다 지친 태람은 결국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프랑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내버려 두었지만 이러다간 아무런 이야기도 못 하고 헤어질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분명 후회하겠지. 분명 프랑은 나에 대한 죄책감을 떠안고 있을 거야. 이러다 내가 사라지면 최악의 경우 나쁜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그건 절대 안 돼.
태람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프랑의 방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방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태람은 금세 프랑의 방 앞에 도착했다.
“프랑. 있어요?”
태람이 방문을 두드리자 잠시 후 요란한 소리와 함께 프랑이 방에서 튀어나왔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그의 옷매무새가 흐트러져있었다.
“태람 님…. 무슨 일이세요?”
프랑은 태람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바닥을 보며 말했다. 태람은 그런 프랑의 모습을 보고 억지로 찾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저녁은 먹었어요?”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더 말라 보이는 프랑이 태람은 걱정이 되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평소보다 눈 밑이 어두웠다.
“아니요….”
프랑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잔뜩 풀 죽은 그를 보니 태람은 정말로 속상했다.
“들어가도 되죠?”
“네, 네! 들어오세요.”
프랑의 방은 여전히 깔끔하고 정갈했으나 어딘지 어수선했다. 태람은 묘한 기시감이 들어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구석에 놓인 커다란 짐 가방이 눈에 걸렸다. 최소한 짐만 꺼내둔 것이 마치 당장이라도 떠날 것 사람 같았다.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태람은 프랑의 제안에 침대에 적당히 걸터앉았다. 그러자 프랑은 의자를 끌고 와 태람의 앞에 앉았다. 가까이에 의자를 붙인 것치고는 그는 불편해하며 태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손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못하는 거로 보아선 심리적으로 상당히 불안해 보였다.
“프랑. 저한테 뭐 할 말 없어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프랑에게 태람이 재차 말했다.
“이대로 제 얼굴도 안 보고 다시 떠날 생각이었나요?”
서운함이 가득 담긴 태람의 목소리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프랑은 몇 차례에 걸쳐 입을 우물거리다 겨우 말을 꺼냈다.
“그건…. 사실은 태람 님을 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볼 면목이 없었어요. 생각하면 할수록 제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요. 무슨 말을 드려야 할지 알 수 없어서….”
프랑은 마치 신에게 속죄하듯 두 손을 꼭 모으고 있었다. 태람은 미세하게 떨고 있는 프랑이 안쓰러워 그의 두 손을 꼭 잡아주었다.
“프랑. 힘들면 무리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태람 님….”
작고 부드러운 태람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 프랑은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다른 한편으로는 죄책감이 증폭되었다. 프랑의 귀에는 아직도 꿈에서 벗어나고 싶어 울부짖는 태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저는 당신에게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여전히 상냥하네요. 이런 호의를 제가 받아도 괜찮을까요?
혼란스러워하는 프랑을 본 태람은 그가 조금이라도 말하기 쉽도록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프랑한테 사과할 게 있어요.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이 세계는, 제가 쓴 소설이었어요. 깊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써 내려갔죠. 그래서 빈틈이 많았고, 정하지 않은 부분이 멋대로 채워져 버렸어요. 저 때문에 프랑이 고아가 되어버렸어요.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서 미안해요.”
“그건 태람 님 탓이 아닌데….”
“그리고 저는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 프랑에게 자극적인 설정을 붙였어요. 극단적인 성향 때문에 혼란스러웠을 것 같아요.”
자상하기만 캐릭터는 밋밋하니까 ‘얀데레’라는 과격한 성향을 붙였다. 프랑은 결코 그걸 원하지 않았겠지.
프랑은 슬퍼 보이는 태람을 어떻게든 위로해주고 싶었다. 조금 전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프랑은 봇물이 터지듯 말을 내뱉었다.
“사과하지 마세요. 잘못한 건 전부 저인데 왜 태람 님이 괴로워해야 하죠? 태람 님이 설정한 성향이 무엇이든 제 모든 행동은 저의 선택이었어요. 그리고 가족 일로는 죄책감 가지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때도 말씀드리긴 했지만 괴롭기만 한 건 아니었어요. 저한테도 저를 위해주는 가족 같은 사람들이 있었어요. 제가 그걸 몰랐을 뿐이었죠. 태람 님은 그걸 알게 해주셨어요. 오히려 저에게는 은인이에요. 무엇보다 태람 님이 글을 쓰지 않았다면 저도 이 세계도 존재하지 않았겠죠.”
태람은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해주는 프랑의 상냥함에 좋았다. 때론 조금 아니, 상당히 과격해질 때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그것 역시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 맛있는 남자는 빈말로도 잘 썼다고는 할 수 없는 글이었다. 날려 버린 설정과 삐걱거리는 서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멋지게 자라준 프랑이 대견했다.
“이렇게 엉망인 소설 속에서 고생이 많았어요. 프랑은 대단해요. 악몽은 분명 괴로웠지만, 그건 제가 실제로 그렇게 느낀 죄책감이 형상화된 것이었으니까요. 프랑의 탓만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프랑은 조금 더 솔직해져도 좋을 것 같아요. 자신을 숨기지 말아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격려의 말에 프랑은 한동안 말을 이을 수 없었다. 프랑은 설령 태람이 작가가 아니었어도 좋아하게 됐을 거라 확신했다.
왜 당신은 언제나 제가 가장 듣고 싶은 말을 해주는 걸까요? 저를 예쁘다고 해준 건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나를 드러내도 괜찮다고 말해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었어요. 포기하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지네요. 솔직해져도 된다면, 욕심을 내도 된다면 제 마음이라도 전하고 싶어요.
프랑은 처음으로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보았다.
“저한테 이런 말 할 자격은 없겠지만 좋아해요. 태람 님. 이런 말을 해서 정말로 미안해요.”
말을 마친 프랑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이 울상이었다. 태람은 울먹이는 그의 등을 천천히 다독여 주었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에 자격 같은 건 필요 없어요.”
프랑은 가장 고생해서 만든 캐릭터로 태람에게 큰 의미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자신이 만든 캐릭터가 그대로 현실로 구현되었다는 게 신기했다. 나중에는 자신의 안일한 설정이 프랑의 인생을 망쳤다는 죄책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내 오만이겠지. 이제 프랑은 더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아니니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나와 똑같은 동등한 인간이야. 그러니까 나도 제대로 마주해야겠지. 어쩌면 내 대답이 프랑이 울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위로해줘야지.
“저도 프랑이 좋아요. 하지만 제 마음은 프랑의 마음과 같은 무게가 아닐 거예요.”
“…알고 있어요. 그저 말하고 싶었어요. 기분 나쁘지 않으시다니 그것만으로도 다행이죠. 저는 한 사람만 담을 수 있는 이기적인 사람이니까요. 저 같은 태람 님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그렇지 않아요! 솔직히 기분은 좋았어요. 이렇게나 예쁜 사람이 좋아한다는 데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요? 그리고 제 생각에 프랑은 한 사람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저는 그런 프랑이라서 좋아요.”
“태람 님!”
프랑이 태람을 와락 끌어안았다. 잠시 움찔했던 태람도 그를 살짝 끌어안아 주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프랑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의 다정한 손길에 프랑은 마침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말아요. 언제나 저를 치유해 줘서 고마웠어요. 프랑과 보낸 날들은 참 행복했어요. 원래 세계에 가서도 잊지 않을게요.”
갑작스러운 태람의 작별 인사에 순간 프랑의 몸이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태람 님. 떠나시나요?”
“음…. 노랑이가. 그러니까 이 세계의 관리자가 말했어요. 이제 이곳은 안정화 되었다고요. 저도 곧 원래 세계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아요. 지금도 느껴져요. 당장은 아니지만 그렇게 많이 남지는 않았네요.”
프랑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충격을 받았다. 차마 태람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잠시 그를 피해 다니긴 했지만, 영원히 이별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믿기지 않는 사실에 프랑은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태람 님이 떠나시면 저는 어쩌죠? 친구로라도 좋으니까 곁에 있고 싶었어요. 당신이 없다면 저는 이제 살아갈 수 없어요.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가지 마세요.”
“저도 많이 서운해요. 그래도 프랑이 건강하게 지내는 걸 보면 저도 위안을 받을 것 같은데….”
프랑의 귀에는 이미 태람의 위로도 달램도 들리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피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많은 시간을 보냈어야 했어요. 저는 안 되나 봐요. 이렇게 된 이상 이대로 태람 님을 어디론가 감금해서….”
태람은 생각한 것보다 더 불안해하는 프랑을 보니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마지막 말은 살짝 무섭기도 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진정해요. 프랑. 제 말 좀 들어봐요.”
태람은 손가락으로 프랑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주며 최대한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렇게 힘들면 이번에는 프랑이 저를 찾아오세요.”
“…찾아간다고요? 태람 님을?”
“그래요. 평생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곳에 온 것도 기적 같은 일이었잖아요. 프랑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저도 프랑이 옆에 있으면 더 즐거울 것 같아요.”
바로 전에까지만 해도 시들시들했던 프랑이 의욕에 불타올랐다.
“제가 있으면 즐거워요?”
“물론이죠.”
“태람 님. 저 반드시 해낼게요. 카이란 님의 심장을 뽑아서라도….”
프랑의 무시무시한 발언을 태람이 다급히 잘라냈다.
“그건 안 돼요! 프랑이 저희 세계로 온다면 좋겠지만, 그게 다른 사람을 아니, 다른 생물을 해쳐서 이룬 것이라면 의미가 없어요. 그런 제멋대로인 프랑 보고 싶지 않아요.”
“네. 그럴게요. 최대한 합법적인 일만 할게요. 저 꼭 태람 님을 찾아갈 거에요!”
프랑이 말하는 합법이란 게 영 불안한 태람이었으나 그래도 생기발랄해진 프랑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적어도 범죄는 저지르지 않겠지. 아마?
“기대할게요. 만약 프랑이 오면 제가 맛있는 걸 사드릴게요. 이곳에는 없는 장소에도 가봐요.”
“네! 저는 태람 님과 함께하면 뭐든지 좋아요!”
태람은 그날 밤 내내 프랑과 소소한 약속을 수없이 나누었다.
*
다시 며칠 뒤.
“저도 가고 싶어요! 진짜 얌전히 있을게요.”
“오늘은 안 돼요. 카이란이랑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하지만…. 태람 님이 언제 가실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태람은 팔을 꼭 잡고 매달리는 프랑을 곤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는 걸 밝힌 이후 프랑은 적어도 남은 시간이라도 함께 있게 해달라며 태람이 어디를 가나 찰싹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볼일은 언제 끝나냐며 달달 볶는 세호도 겨우 떼어 놓고 온 참이었다. 태람은 울먹이는 프랑의 손을 매정하게 떼어냈다.
“놔 주세요. 프랑. 부탁이에요.”
“…네. 알겠어요.”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의 프랑이었지만 결국에는 태람의 말을 따랐다.
“내일은 꼭 저랑 있어 주세요.”
“그럴게요.”
태람은 축 처진 프랑의 뒷모습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우선은 카이란을 만나는 게 먼저였다. 부디 오늘은 카이란과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랐다.
자신의 레어를 정리하고 프랑보다 조금 늦게 왕국에 돌아온 카이란은 프랑 못지않게 태람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같이 있는 시간에 비해 진지한 이야기를 할 시간은 좀처럼 만들 수가 없었다. 카이란이 태람이 원래 세계의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면 자꾸만 화제 돌리거나 자리를 피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꼭 말해야지. 강하게 다짐을 한 태람은 카이란의 방으로 향했다.
“카이란. 미안해요. 조금 늦었죠?”
카이란의 방은 여전히 정신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수상한 물건들이 늘어나 있었다. 기분 탓인지 벽에 그려진 마법진들이 심상치 않았다. 마력을 느낄 수 없는 태람이 보기에도 어쩐지 흉흉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어서 와! 태람! 오늘도 정말 귀엽다.”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방안을 둘러보던 태람을 카이란이 해맑은 미소로 반겼다. 태람은 그런 카이란을 보고 속으로 귀여운 건 너라고 생각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괜찮으니까 이쪽으로 와. 마침 준비가 끝났어.”
“준비요?”
“와보면 알아.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네. 아직 안 먹었어요. 우악!”
카이란은 태람의 손을 덥석 잡으며 그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이게 대체?”
태람이 카이란에게 잡혀간 곳은 카이란의 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이 깨끗하게 정리된 곳이었다. 중앙에는 새하얀 식탁보가 깔린 커다란 식탁이 있었고, 그 위에는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창고를 정리했어. 요리도 너를 위해 특별히 내가 만들었어! 서 있지만 말고 여기 앉아.”
그렇게 말하며 카이란은 태람을 위해 의자를 빼 주었다. 태람은 얼떨떨했지만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대로 의자에 앉았다.
“카이란이 직접요?”
“응! 아밀도 도와줬으니까 걱정하지 마. 맛은 보장해.”
태람은 미심쩍은 눈으로 요리를 관찰했다. 버터로 구웠는지 고소한 향이 나는 두툼한 스테이크. 상큼한 과일 드레싱이 뿌려진 신선한 샐러드. 카이란의 요리는 심플하면서도 든든한 최상의 조합이었다.
냄새는 이상 없지만, 저 스테이크가 수상해. 높은 확률로 몬스터 고기일 것 같은데…. 거기다가 도와준 게 아밀이야. 더 의심이 가는데? 태람의 눈이 불신으로 물들었다.
“그렇게 의심하지 마. 몬스터 고기 아니야.”
태람의 의심을 읽은 카이란이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미안해요. 카이란이 하도 몬스터 고기를 좋아하니까 그만.”
“태람이 싫어하는 건 하고 싶지 않아. 나로서는 맛있는 몬스터 요리를 즐기지 못하는 네가 불쌍할 정도야.”
“하하….”
그 즐거움 평생 몰라도 되는데. 태람은 대답하지 않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아무튼 식기 전에 빨리 먹자.”
카이란은 기대를 잔뜩 담은 눈으로 태람을 바라보았다.
“먹을 테니까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지 마세요.”
“아! 잠깐만 기다려. 내가 썰어줄게.”
카이란은 태람의 접시를 자기 앞으로 가져와 한입 크기로 열심히 썰었다. 그리고는 소스를 듬뿍 바른 고기 한 점을 태람의 입 앞으로 가져다 대었다.
“입 벌려 봐. 아 해!”
“제, 제가 먹을게요.”
“꼭 먹여주고 싶은데…. 빨리 나 손 아파. 빨리. 응?”
카이란의 애교에 태람은 마음이 흔들렸다. 이제는 태람도 카이란이 자신이 카이란의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고 이용한다는 걸 알았다. 저게 또 얼굴을 써먹네. 알면서도 속는 내가 바보지만.
“아, 알았어요. 아….”
태람이 마지못해 입을 벌리자 카이란에 그 안에 고기 한 점을 쏙 넣어줬다.
“어때? 맛있지?”
스테이크는 참 부드러웠다. 씹으면 씹을수록 입안 가득히 배어 나오는 육즙에서는 풍부한 감칠맛이 났고, 고소한 버터는 스테이크의 풍미를 살리며 맛을 끌어 올렸다. 태람은 정신없이 고기에 집중했다.
“맛있어요! 이제는 제가 직접 먹을게요.”
태람이 야무지게 고기를 쿡쿡 집어 먹는 모습을 보고 카이란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접시가 거의 비워졌을 때였다.
“태람. 이거 사실은 오크 고기다.”
카이란은 평소와 같이 웃으며 가볍게 양심 고백을 했다. 그 충격적인 내용에 태람은 들고 있는 포크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네? 이게 오크 고기라고요? 정말요? 자, 장난이죠?”
“속여서 미안해. 그래도 맛있었지.”
“정말 오크 고기?”
“응. 진짜야. 그거 오크 고기야.”
태람은 순간 사고 회로가 멈췄다. 이렇게 맛있는 빛깔에 육즙이 넘치는 고기가 오크였다니! 아까 한 말은 전부 연기였어? 이 잔망스러운 용용이! 맛있어서 더 분하다.
“…너무해요. 카이란. 믿었는데…. 아니라고 했잖아요.”
“삐졌어?”
“…몰라요.”
태람은 웃고 있는 카이란을 피해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한 번만 봐줘. 이제 몬스터 고기를 먹을 일은 없잖아.”
의미심장한 카이란의 말에 태람은 저도 모르게 그를 쳐다봤다.
“네?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마지막이니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요리를 먹여주고 싶었어.”
미루어 두었던 화제를 카이란이 먼저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태람은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공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침묵을 깬 건 카이란이었다.
“언제 떠나?”
“카이란….”
평소와 달리 무척이나 어른스러운 카이란의 미소에 태람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괜찮으니까 말해 줘.”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가까워요. 그게 느껴져요.”
“역시 그랬구나. 나한테도 느껴졌거든.”
태람은 자신을 배려해서 조금도 티를 내지 않았던 카이란이 고마웠고, 많이 미안했다. 보답해 줄 수 없는 마음 역시도.
“전부 알고 있었군요.”
“응. 사실은 네가 가지 말았으면 좋겠어.”
“그건….”
“안 된다는 거 알아. 나쁜 생각도 했었어. 그래도 보내주는 게 정답이겠지? 네가 가면 많이 외롭고, 슬프겠지만 그만큼 네가 소중하니까.”
씁쓸하게 웃던 카이란은 자신의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매일 매일 태람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졌다. 괜찮은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지만, 그가 가면 아마 나는 무너지겠지. 아주 긴 잠에 빠지는 것도 좋을지도 몰라.
정체를 밝힐 때마다 사실은 상처를 입었다. 나는 그들에게 아무런 위해를 끼칠 생각이 없었는데도 그들은 늘 나를 의심했다. 정체를 밝히고 나서도 변하지 않은 사람은 태람 뿐이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가장 자연스럽게 나로 있을 수 있었다.
카이란은 태람을 붙잡고 싶어지는 충동을 애써 억눌렀다.
“피 나겠다. 입술 깨물지 마세요.”
태람이 카이란의 입술에 살포시 손을 얹었다. 상처를 보듬는 태람의 손길에 카이란의 마음이 울렁거렸다.
“태람…. 여기 남을 수는 없는 거지?”
“…네. 저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요. 거기에는 가족도 있고, 쌓아온 것들도 있으니까요. 애초에 이곳에 남을 방법도 모르지만요. 그렇다고 카이란이나 이 세계가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니에요.”
카이란은 태람의 감정을 읽어버리고 말았다. 이번만큼은 읽고 싶지 않았으나 워낙 강렬한 감정이었기에 저절로 볼 수밖에 없었다. 태람의 마음속에 자리한 한 사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동료였기에 카이란은 그냥 눈을 돌렸다.
그리고는 이뤄질 수 없는 소원인 걸 알면서도 입에 담아 보았다. 소원을 들어주는 대마법사가 정작 자기 소원은 이루지 못 하네. 한심해. 그래도 아무 시도도 안 하고 끝내면 미련이 남을 테니까.
“태람. 나랑 결혼할래? 그러면 여기 남을 수 있잖아. 나는 돈도 많고, 엄청 강해. 평생 너를 지켜줄 수 있어.”
처음 만난 날과 똑같은 카이란의 고백에 태람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같은 말이었지만 그날보다 더 무거웠다. 와닿는 게 전혀 달랐다.
태람은 카이란의 마음을 가벼운 것이라 치부했었다. 그저 귀엽고 편하게만 여겼다. 처음에는 마냥 아이 같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카이란은 속이 참 깊었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곤란해하면 깊이 파고들려 하지 않았다. 그의 그런 배려와 올곧은 눈동자에 얼마나 많은 기운을 얻었고, 위안을 받았던가. 그러니까 제대로 답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카이란. 저는 왕자님이…. 아니, 이세호를 좋아해요.”
“응….”
“그래도 카이란은 저에게 특별해요. 세호와는 다르지만 다른 형태로 좋아해요. 이대로 원래 세계에 돌아가면 계속 생각날 것 같아요. 아마 평생 잊을 수 없겠죠?”
“그 말은 어쨌든 나한테 호감은 있다는 거지?”
“그, 그렇죠?”
아쉬움으로 출렁이던 카이란의 눈동자에 의욕이 깃들었다.
“그럼 나도 너를 따라갈래!”
“…따라온다니? 설마?”
“안 그래도 프랑이 차원 이동 마법을 배우고 싶다고 하더라. 나도 그거 같이 연구할래. 기다려 줄 거지?”
태람은 카이란과 프랑이라면 정말로 해낼 것 같았다.
“그래요. 기다릴게요.”
“용생은 기니까 걱정하지 마.”
“저는 인간인데요?”
“음…. 아주 많이 많이 노력할게.”
“그래요.”
*
그 뒤로도 태람은 바쁜 나날을 보냈다.
아밀을 만나 소문에 대해 해명하고, 프랑이나 카이란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을 같이 가기도 했다. 세호는 볼일이 끝나고도 여전히 두 사람에게 붙잡힌 태람을 보고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마지막이라 양보한 것 같았다.
여름의 끝자락, 룬베르에 추위가 찾아올 때쯤 태람은 세호와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
다행히 원래 세계의 시간은 전혀 흐르지 않았고, 태람은 긴 여정의 여독을 풀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학교생활을 이어갔다.
달라진 게 있다면 세호와의 관계였다. 세호는 프랑과 카이란에게 빼앗겼던 시간을 되돌려받고 싶은 사람처럼 태람의 옆자리를 굳건하게 지켰다. 태람과 수강 과목을 똑같이 맞추고, 태람이 참가하는 학과 행사나 동아리 활동에도 죄다 참여했다.
태람만 보면 인격이 변한 듯 살갑게 대하는 세호를 본 민아와 동아리 사람들은 처음에는 경악했으나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자 다들 익숙해졌다.
“뭘 그렇게 열심히 적고 있습니까?”
휴강으로 애매하게 붕 뜬 시간 덕에 동아리 방에 들린 태람의 옆에는 어김없이 세호가 있었다.
“차기작 구상 중이야.”
“한동안 쉰다고 하지 않았어요?”
“자꾸 떠오르는 게 있어서. 아니, 근데 너는 할 일 없어? 같이 있는 건 좋은데 정도가 심하잖아. 저번에 어떤 선배는 나보다 네 약점이라도 잡았냐고 묻더라.”
“지금 저한테 선배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카이란만큼 자연스러운 세호의 플러팅에 태람은 입만 뻐끔할 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얼굴이 붉어지면서 귀까지 빨개진 태람에게 세호는 태연하게 물었다.
“그보다 어떤 이야기인데요?”
그런 세호에 질려버린 태람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자포자기한 느낌으로 말했다.
“맛있는 남자의 차기작을 한 번 써보려고. 책이 없어져서 신작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소설 맛있는 남자는 태람과 세호의 세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인터넷상 서지정보도 삭제되었고, 가지고 있던 실물 책도 전부 없어졌다. 혹시 몰라 태람은 민아에게 확인을 해봤으나 그녀 역시 아무것도 기억해내지 못했다.
“설마 프랑이나 카이란이 메인공인 건 아니죠? 가상이라고 해도 선배가 그놈들을 다루는 건 싫습니다.”
“그런 거 아니니까 눈에 힘 풀어. 이제 두 사람은 실제 인물이나 마찬가지인데 어떻게 쓰냐.”
“그럼 다행이지만….”
“일단 메인공은 마왕이고, 흑요석처럼 새까만 눈동자에 길고 찰랑거리는 흑발이라는 외견 설정이야. 말수가 적고, 차분한데 섬세한 편이라 다른 사람을 잘 챙겨. 속성은 굳이 따지면 다정공? 아니면 헌신공?”
“묘하게 구체적이네요. 혹시 주변에 있는 사람을 모델로 한 건 아니겠죠?”
“아니라니까! 나는 그런 거 싫어해.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에 머물러야지. 어쨌든 너는 제발 이런 가상의 인물까지 질투하지 마.”
태람은 손이 가는 대로 쓴 이야기를 세호에게 말해줬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실의에 빠진 마왕이 있었다. 마왕은 죽고 싶었지만 어떤 방법을 써도 죽을 수 없었다. 맛있는 음식, 화려한 의복, 진귀한 보석, 아름다운 미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는 늘 외로웠다. 그 무엇도 그의 괴로움을 지워주지는 못했다. 결국, 마왕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마계를 떠났다. 고통스러운 삶을 끝내줄 용사를 찾아서.
그러던 어느 날, 마왕의 앞에 밝고, 사랑스러운 소년이 나타났다. 그 소년은 마왕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용사였다. 마왕은 소년에게 자신에게 죽음을 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소년은 그런 마왕의 청을 거절하고, 대신 동료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마왕은 점점 소년이 좋아졌고, 그의 제안대로 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여행 도중 마왕과 소년의 일행은 큰 위기를 맞이했다. 소년을 통해 사랑을 알게 된 마왕은 자신을 희생해서 모두를 구해냈다. 하지만 소년을 포함에 모든 사람이 마왕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대충 이런 이야기야.”
“형답지 않게 슬픈 결말이네요.”
“그러게. 그런데 고칠 생각이 안 들어.”
“저는 결말 부분만 조금 손봤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큰 틀은 그대로 놓고, ‘오직 소년만은 마왕을 기억했다.’ 이런 건 어떨까요?”
“네가 웬일이야? 그렇게 희망적인 결말을!”
“그냥요. 어쩐지 그러고 싶습니다.”
“응! 네 말대로 결말만 바꾸는 게 좋을 것 같아.”
태람은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그렇게 웃으십니까?”
태람은 유해진 세호의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씩 자신을 닮아가는 세호가 사랑스러웠다.
“그냥 좋아서. 조언 고마워.”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다고요.”
말랑말랑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흘렀지만, 평화는 채 10분을 가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전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개연성은 어디다 팔아 드셨습니까?”
태람이 쓴 글을 읽던 세호가 날카로운 한마디를 던졌다.
“아. 진짜! 네가 편집자야? 아니면 평론가야?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단순한 감상만 달라고!”
“이렇게 설정 구멍이 뻔히 보이는데 어떡합니까?”
두 사람이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방으로 들어왔다.
“닭털 날릴 땐 언제고 또 싸우네. 나는 너희가 변한 건지 아닌지 모르겠다. 질리지도 않나 봐.”
“민아야! 내 말 좀 들어봐. 네가 캐릭터 밸런스 좋다고 칭찬했던 차기작 말이야. 세호 저놈이 별로래.”
말하다 보니 울분이 올라온 태람이 씩씩거리자 민아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별로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게 아니라 이 부분만 고치면 더 나은 글이 될 것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웃기지 마. 네가 말한 거 다 고치려면 1화를 다 들어내야 하거든! 그건 새로 쓰라는 거잖아!”
“조금씩 고치는 게 다인데 오버하지 마시죠. 그리고 민아 선배한테서 떨어지세요. 불편해하시잖아요!”
“아니, 난 괜찮은데? 우리 태람이는 말랑말랑해서 좋아.”
“나도. 민아가 제일 좋아.”
태람이 민아를 꼭 끌어안자 세호는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민아와 태람은 그런 세호를 보고 짓궂게 웃었다.
세호는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태람은 재빨리 민아에게서 떨어졌다. 쟤 또 삐졌네. 저번에는 일주일 갔었는데 빨리 풀어 줘야겠다.
“민아야. 세호로 그만 놀아.”
“남자친구라고 챙기기는. 어차피 나 곧 수업이야. 가지고 갈 게 있어서 잠깐 들렸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
책장을 뒤적거리던 민아는 유유히 동아리 방을 떠났다. 그녀가 방에서 나가자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너무 놀렸나? 태람은 세호의 기분을 어떻게 풀어줄까 고민했다.
그러다 문득 부드러워 보이는 세호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태람은 조심스럽게 세호의 머리카락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세호는 잠시 움찔했지만 태람이 손길을 막지 않았다.
태람은 한참을 세호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세호의 기분이 어느 정도 누그러졌다고 판단한 태람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애교를 부렸다.
“아까는 장난이었던 거 알지? 응?”
태람은 세호의 얼굴을 양손으로 붙잡고 그의 입술에 살짝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러자 자물쇠처럼 굳게 닫혀 있었던 세호의 입이 열렸다.
“장난이라도 신경 쓰입니다. 민아 선배가 제일 좋습니까?”
“네가 더 좋아. 아주 많이.”
“저도 좋아합니다. 태람 형.”
세호가 태람을 끌어당겨 꽉 안았다. 그리고 두 입술이 다시 맞닿았다.
태람은 따뜻하고 촉촉한 감촉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충동에 몸을 맡기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세호의 입술을 탐했다. 세호도 그런 태람에게 호응하며 더 깊이 그의 숨결을 먹어치웠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손을 찾아 깍지를 낀 채였다.
아까와는 달리 달콤한 침묵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태람이 갑자기 집요하게 파고드는 세호의 얼굴을 밀어냈다. 한참 집중하고 있던 세호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태람에게 투정을 부렸다.
“왜요?”
“수업 가야지. 빨리 떨어져 봐.”
태람을 더 세게 끌어안은 세호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야! 이세호.”
“그냥 수업 빠지면 안 될까요?”
“안 돼! 나도 이제 졸업해야지. 안 그래도 군대 때문에 늦었는데.”
“저랑 같이 졸업하면 되잖아요.”
“개소리하지 마. 너는 군대 안 가냐?”
“저는 대학원 갈 겁니다.”
”잘났다. 그래. 빨리 떨어져. 자꾸 이러면 일주일간 키스 금지다.”
“…알겠습니다. 가면 되잖아요.”
“착하다. 빨리 가자.”
태람이 시무룩해진 세호를 달랠 생각으로 손을 꼭 잡으며 속삭였다.
“수업 끝나면 너희 집으로 갈게.”
세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
아무것도 없는 이질적인 공간.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 그곳에는 노랗고 작은 새와 남자가 무언가를 지켜 보고 있었다.
[완전하진 않지만 너를 기억하고 있군. 과연 가능성의 파편을 품은 아이다.]
“전부 잊는 게 좋을 텐데.”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스였지만 사실은 태람이 자신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제는 사라진 심장의 고동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강제력의 말에 루시아스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태람도 나머지 동료들도 모두 제자리를 찾아갔다. 이상적인 상태를 깨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옆에 자신이 없다는 건 분명 서운한 일이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으로 인해 그들이 행복을 되찾았다는 만족감이 더 컸다.
“나는 지금이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아.”
[너는 참 이상한 생물이다. 이제는 그것조차 초월해버렸지만.]
그날, 마왕성에서 루시아스는 태람과 동료들이 행복을 간절히 바랐다. 강제력은 루시아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고, 루시아스는 강제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결과, 모두의 기억은 무사했지만, 루시아스는 강제력과 같은 하나의 개념이 되어버렸다. 그는 두 개의 세계를 유지하는 개념으로서, 관리자로서만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새로운 기원이 나를 부르고 있다.]
“그래. 다녀와라. 나는 두 세계를 지켜보고 있겠다.”
작은 새가 공간을 갈라 그 속으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루시아스는 일을 시작했다. 두 세계 순리대로 흘러갈 수 있도록 조율하는 업무였다. 그러다 지칠 때는 태람을 내려다보았다. 오직 그것만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루시아스는 계속해서 태람의 앞날을 지켜봤다.
아주 오랫동안. 태람의 마지막까지.
*
몇 달 뒤 대학 강의실. 태람은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오늘은 프랑과 카이란이 이쪽 세계로 넘어온다고 예고한 날이었다.
일주일 전, 태람의 핸드폰에 알 수 없는 번호로 음성메시지가 도착했다. 처음에는 스팸인 줄 대충 넘겨버린 태람 이었으나 이틀 내내 하루에도 몇십 번씩 집요하게 오는 통에 결국 호기심을 못 참고 음성메시지를 눌러봤다.
음성메시지는 프랑과 카이란이 보낸 차원을 넘는 메시지였다. 제한이 있었는지 채 1분도 되지 않는 짧은 내용이지만 중요한 것은 전부 들어있었다.
간단한 안부와 예전에 사냥했던 그린 드래곤의 심장을 매개체로 차원 이동 마법식을 완성했다는 것과 곧 그쪽 세계에 갈 것이고, 도착 날짜가 이쪽 세계의 기준으로 오늘이라는 것, 태람의 기척을 찾는 걸 최우선으로 설정했기에 가까운 곳에 떨어질 확률이 높다는 것 등 이었다.
태람은 새삼스럽게 두 사람의 집념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프랑과 카이란이 바로 학교로 찾아올 확률은 낮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태람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봤다. 그런 태람을 지켜보고 있는 세호는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하십니까?”
“두 사람이 온다는 데 진정할 수 있겠어? 잘 찾아올까? 마법은 안전한 거겠지? 거기 옷차림 그대로면 수상한 사람 취급받는 거 아니야? 그러다 경찰서에 끌려가면 어쩌지? 사복을 준비해 둘 걸 그랬나?”
“이럴 거면 수업은 왜 나왔습니까? 정신 사나우니까 다리 좀 떨지 마세요.”
“학점이 위험해서.”
“어련하시겠어요.”
흐물흐물 풀어진 요즘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날 선 표정의 세호였다. 태람은 이러면 안 되는 줄 알았지만 그런 세호가 무척 신선했다. 점점 놀릴 맛이 사라지고 있는 그를 오랜만에 가지고 놀 찬스였다.
“뭐야. 너 지금 질투해?”
“네, 합니다. 애인한테 벌레가 들러붙는 걸 좋아할 사람도 있습니까?”
당황해서 얼굴을 붉히거나 우물거리며 아무 말도 못할 줄 알았던 세호가 저리도 뻔뻔하게 나오니 오히려 놀리려던 태람만 민망해졌다.
“너, 너는 부끄럽지도 않냐? 그리고 프랑이랑 카이란이 왜 벌레야. 그렇게 예쁘고 귀여운 벌레가 어디 있어.”
태람의 얼굴이 붉어지든 말든 세호는 낯빛 하나 변하지 않고 남사스러운 말을 이어갔다.
“형은 그 두 사람을 너무 좋아합니다. 저는 그게 너무 싫어요. 제 입장에서는 정신적인 바람입니다.”
이렇게 되니 불리해진 건 태람 쪽이었다. 태람은 떠듬떠듬 변명을 늘어놓았다.
“바, 바람? 아니…. 프랑이랑 카이란은 동생 같다고 해야 하나? 말하자면 나한테는 자식 같은 존재야. 너도 그렇게 생각해주면 안 돼?”
태람의 말에 세호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졌다. 부모보다 나이가 많은 자식이 어디 있겠으며, 애초에 일반적인 자식은 부모를 그런 쪽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부모를 탐하는 자식이 어디 있습니까?”
“왜 없어! ‘크면 아빠랑 결혼할 거야.’ 같은 말을 하는 어린아이도 있잖아.”
“누누이 말하지만, 그 둘은 연상입니다.”
“그 세계는 막 태어난 세계잖아. 아마 너랑 내가 들어간 순간 움직이기 시작했겠지? 그 두 사람이 처음 본 게 나라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 각인 효과 같은 거지. 그러니까 이곳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면 달라지지 않을까?”
“형같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사람은 또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대충 있어 보이는 말로 얼버무리려 해도 안 통합니다. 두 사람이 오면 확실히 선을 그어주세요. 형은 애인이 있는 남자니까요.”
“아, 알았어. 조심할게.”
거침없이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세호의 앞에서 태람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우와. 나 3D는 하나도 관심 없었는데 너네는 보기 좋다.”
“미, 민아야? 언제부터 보고 있었어.”
태람이 뒤를 돌아보니 반짝이는 눈동자로 자신과 세호를 지켜보고 있는 민아가 있었다. 언젠가의 아밀을 연상시키는 그 눈빛에 태람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도 같은 수업이잖아. 그래도 두 사람의 사랑의 속삭임은 잘 안 들렸으니까 걱정 마세요. 그런데 세호는 왜 저렇게 삐져있어?”
“민아 선배와는 상관없습니다.”
“이세호. 요즘 정말 서운하다. 너 자꾸 그러면 태람이한테 확 잘생긴 남자를 소개해 줄 거야.”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농담 아닌데? 저번에 태람이가 잘생겼다고 했던 모델 친구가 있는데….”
“민아 선배!”
태람은 투덕거리는 민아와 세호를 뒤로한 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였다. 민트색과 빨간색. 알록달록 익숙한 머리 두 개가 태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때마침, 수업이 끝났고, 태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강의실을 박차고 나갔다.
“나 먼저 갈게!”
“자, 잠깐만요. 태람 형! 가방은요.”
태람은 자신을 부르는 세호를 뒤로 한 채 계단을 급하게 내려왔다.
건물을 빠져나오자마자 태람을 찾아 교정을 서성거리고 있던 프랑이 무서운 속도로 태람에게 달려들었다.
“태람 님!”
반가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프랑은 태람이 뭐라고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를 번쩍 안아 올렸다. 하교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로 집중되었다. 태람은 그나마 프랑이 이쪽 세계의 옷을 입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베이지색 가디건에 청바지를 입은 프랑은 신관이 아닌 제 나이 또래의 학생으로 보였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태람 님! 분홍색 머리도 너무 귀엽고, 잘 어울리세요.”
“고마워요. 프랑도 잘 어울려요. 그런데 일단 저 좀 내려줄래요? 부끄러운데….”
“싫어요!”
생각지도 못한 프랑의 단호한 거절에 태람은 눈이 동그래졌다.
“프랑?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는다면서요.”
“태람 님이 저한테 솔직해지라고 했잖아요. 그걸 실천 중이에요.”
태람은 점점 몰리는 사람들 때문에 부끄러워진 나머지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내일 아침쯤엔 학교 익명 사이트에 다양한 목격담이 올라올 게 뻔했다.
“그럼 지금 당장 저희 집에 놀러 온다고 약속하시면 내려 드릴게요.”
“네? 벌써 집도 샀어요?”
“네! 이곳에 도착한 건 몇 시간 전인데 이것저것 처리하느라 늦어졌어요. 아. 이곳에서도 마법을 쓸 수 있더라고요. 마나가 희박해서 강력한 마법은 쓰기 어렵지만요. 다행이죠?”
태람은 어떤 처리인지를 알고 싶다가도 알고 싶지 않았다.
“…불법은 아니죠?”
“음, 가벼운 세뇌는 사용했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진 않았어요. 돈은 제가 대신관을 하면서 모은 보석들이랑 카이란이 레어를 털어 와서 넉넉해요.”
세뇌라는 무서운 단어를 들었지만, 태람은 적어도 도둑질을 한 건 아니니 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에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교환학생 수속도 마쳤으니까 내일부터 같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겠네요.”
“어. 그렇구나. 대단하네요. 그런 건 대체 어떻게 알았어요?”
“그건 비밀이에요.”
태람은 프랑의 행동력에 혀를 둘렀다. 자세한 건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 세계의 학교라니 기대되네요. 무엇보다 태람 님이 함께라서 좋아요. 이제부터는 늘 곁에 있을게요.”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태람을 가방까지 챙겨 급하게 뒤따라 온 세호가 프랑의 품에서 태람을 빼앗아 와 땅에 고이 내려놓았다.
“당신도 있었군요. 음침한 머리색이 참 잘 어울리시네요.”
“그쪽도 여전히 흐리멍덩하고 애매한 머리색이라 어울립니다.”
“아직 완전히 언어 호환이 되지는 않았지만 좋은 뜻은 아닌 것 같네요. 지금 싸우자는 건가요?”
“언어만이 아니라 상식도 부족한 것 같군요.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게 어렵지 않을까요? 이 세계는 힘의 논리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무식하긴.”
“뭐라고요!”
태람은 이쪽 세계에서도 여전히 다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지만, 어딘지 그리운 느낌이 드는 광경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태람! 나도 있어.”
“카이란. 반가워요.”
“응! 나도. 오랜만이니까 내 머리를 좀 쓰다듬어 줄래? 태람의 손길이 그리웠어.”
어느새 다가온 카이란이 고개를 숙여 태람의 가슴팍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태람은 예전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랜만에 만져보는 보슬보슬한 감촉이 참 부드러웠다.
“카이란은 가족들과 헤어지는 게 외롭지는 않았어요?”
“응! 괜찮아. 어차피 형도 엄마 아빠도 잠자는 걸 더 좋아하니까. 그것보다 나 세 사람의 레어도 다 털어왔다! 우리 이제 부자야. 태람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태람은 프랑이 했던 털었다의 의미를 알아 버리고 말았다.
“그것참…. 대단하네요.”
“얼굴이 왜 그래? 기쁘지 않아?”
“기뻐요. 기쁜데…. 그건 범죄잖아요.”
“어차피 다들 신경 안 쓸 텐데….”
“직접 물어보진 않았잖아요. 그렇죠?”
“세 사람 다 동면에 들어갔으니 할 수 없잖아.”
“카이란. 나중에라도 돌려놓을 수 있어요? 이미 충분할 것 같아요.”
“그래도 형은 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했었어.”
“카이란은 형님이 좋아요? 제가 좋아요?”
“당연히 태람이 더 좋지.”
“그러면 제 말 들어 줄거죠?”
“…매개체를 충전하면 되긴 하는데 이곳은 마나 농도가 너무 옅어. 최소한 석 달은 걸릴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
“네.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전부 돌려놓았으면 좋겠어요.”
“…알았어. 충전되는 대로 돌려놓을게.”
“꼭 원래대로 되돌려놓기에요? 알았죠?”
“응! 그래도 이제 너랑 계속 함께 있을 수 있어서 좋다.”
행복해하는 카이란의 모습을 보니 태람은 괘씸했던 기분이 풀어져 버렸다.
“…카이란은 정말 못 말려요.”
“네가 매일 매일 우리 집에 놀러 왔으면 좋겠다. 아예 같이 살면 안 되나?”
“당연히 안되죠. 그래도 자주 놀러 갈게요.”
한껏 침울해진 카이란을 달래며 곤란해하는 태람을 세호가 등 뒤에서 끌어안았다.
“선배는 절대로 넘기지 않을 겁니다.”
“치사해….”
“아무리 떼를 써도 안되는 건 안 됩니다.”
안 그래도 난장판인 상황에서, 뒤따라 온 프랑이 끼어들었다.
“태람 님! 두 사람은 내버려 두고 저랑 같이 가요.”
“어…. 그게….”
프랑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고 나를 어디론가 이끌었다.
*
다소 소란스럽지만 즐거운 재회의 시간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태람과 나란히 밤거리를 걷던 세호가 진지한 얼굴로 태람에게 제안했다.
“태람 형. 오늘도 저희 집에서 자고 가요.”
“앙큼한 세호야. 오늘은 형이 너무 힘들다. 진짜 힘들어.”
장난스럽게 말하는 태람이었지만, 오늘은 진짜로 피곤했다.
“저 오늘 많이 참은 거 알죠?”
적당히 넘어가려고 했던 태람이었지만 질투의 화신이 된 세호 앞에서는 택도 없었다.
“정말 너무해요. 온종일 다른 남자를 안고, 쓰다듬고.”
“그건 너무 반가워서 그랬지. 그리고 쓰다듬는 거 정도는 괜찮지 않아?”
“어느 쪽이든 저는 싫습니다. 저만 형을 만지고 싶어요.”
귀까지 붉어져 중얼거리는 세호를 본 태람은 반칙이라고 생각했다.
“그거 일부러 그러는 거지?”
“네? 갑자기 무슨 뜻입니까?”
“이래서 잘생긴 놈들은…. 알았어. 오늘도 너희 집으로 갈게.”
“네! 좋습니다!”
설렘으로 가득 찬 세호의 미소는 향긋한 꽃내음을 머금고 있었다. 그걸 보는 태람의 얼굴에도 어느새 같은 미소가 걸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