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여정 끝에 태람의 파티는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은 거대하고 웅장한 검은 거성이 일행의 시야에 들어왔다.
위엄과 절제미가 느껴지는 견고한 외벽과 날카로움 속에 우아함을 머금고 있는 기둥. 가운데 위치한 성탑에는 화려한 세공 장식이 빠짐없이 배치되어 있었다. 마왕성은 그 자체로도 하나의 예술품이었다.
“멋지다. 만드는 데 얼마나 들었을까요? 비쌌겠다.”
태람에게서 감탄사와 함께 무심코 속내가 흘러나왔다.
“그런 한가할 소리를 할 때가 아니다. 태람.”
“우리 태람 님이 궁금해 하실 수도 있죠. 괜한 구박하지 마세요.”
“언제부터 태람이 너와 ‘우리’로 묶였지? 불쾌하군.”
“별걸 가지고 트집이시네요. 가만 보면 왕자님은 속이 참 좁은 것 같아요.”
“뭐라고? 다시 말해봐라.”
마왕성을 앞에 두고도 언제나와 같이 투닥투닥 다투기 시작한 세호와 프랑을 뒤로하고 태람은 앞으로 이동했다. 카이란과 아밀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도 드워프를 불러서 저런 큰 성을 만들어볼까? 걔들은 멋진 작품만 만들 수 있으면 좋아하니까 문제없을 거야.”
“그건 그분들의 말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왜?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그냥 내가 하라고 하면 해야지. 드래곤을 위해 일 할 수 있어서 자랑스러워할걸?”
천연덕스러운 카이란의 말에 아밀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카이란 님. 실망이에요. 안 그렇게 봤는데 악덕 고용주셨군요.”
옆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태람도 내심 카이란의 발언이 꽤 블랙 기업의 사장 같다고 생각했기에 아밀의 말에 공감했다.
“내가 나쁜 거야?”
“이제부터 알아가면 됩니다. 먼저 그동안 제대로 보수를 제공했는지부터….”
참된 고용주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 아밀과 경청하는 카이란을 보고 질린 태람은 다시 이동했다.
이 파티 이대로 괜찮은 걸까?
결국, 태람은 조용한 루시아스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다들 이야기할 게 많아 보이네요. 루시아스. 저희 그냥 먼저 가요.”
“그게 좋겠군.”
태람은 루시아스와 함께 마왕성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정말 크네요.”
양쪽에 돌로 만든 악마 석상이 자리한 거대한 아치 모양의 입구는 마치 고대의 신전을 떠올리게 했다.
“한참 더 걸어가야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어요.”
입구를 지나자 본성까지 이어지는 넓은 길이 나타났다.
“예전에는 이 주변에 제법 큰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그렇군요.”
향수의 잠긴 루시아스가 그만 과거를 언급했고, 태람은 애써 모른 척했다. 아무튼 가까이서 보니 성은 멀리서 본 것보다 더 컸다. 입을 벌리고 있는 태람의 옆에 어느새 뒤따라온 일행들이 한 마디씩 보탰다.
“진짜 크다! 이 정도면 안에 방도 많겠지? 태람이가 족히 천 명은 살 수 있겠는데?”
“태람 님은 작으니까 오백 명 정도는 더 들어갈 수 있겠네요.”
“아니, 태람은 생각보다 더 작다. 아마 이천 명은 들어가겠지.”
“태람 님이 이천 명? 분열수라니 신선하고 황홀해요.”
태람은 의문을 가졌다. 대체 저 네 사람은 왜 자신을 가지고 크기를 재는 걸까? 알 수 없었다.
“전 여기서 안 살 거예요! 그리고 왜 하필 제가 기준이죠?”
“그야 귀여우니까?”
“보기 좋으니까.”
“저는 태람 님 밖에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마왕성의 방은 삼천칠백 개니 최소 삼천 명 이상은 필요하겠군.”
가만히 있던 루시아스까지 합세하자 태람은 이 안건에 대해 손을 놔버렸다.
루시아스. 마왕 인증을 멈춰. 일반 사람이 그렇게 자세하게 마왕성의 방 갯수를 알 리가 없잖아. 맥 빠진다.
엔딩에 대해 아직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한 태람은 그저 심란하기만 했다.
*
어젯밤. 태람은 오랜만에 노랑이를 불렀다.
“노랑아. 나와 볼래?”
상냥한 태람의 음성에도 노랑이는 나올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노랑아. 뭐하니? 자니? 노랑아? 내 말 안 들리니? 야! 내 말 안 들리냐고! 아니다. 소리 질러서 미안해. 노랑아. 나와 볼래? 응?”
그 뒤로도 태람은 몇 번이나 노랑이를 불러봤지만, 응답은 없었다. 아무래도 노랑이는 크게 삐진 것 같았다.
하긴. 내가 그동안 노랑이를 너무 잊고 살긴 했어. 그렇지만 정말로 정신이 없었다고.
태람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시간이 없었다.
“저기요. 노랑 님. 부탁이니 나타나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그간 너무 매정했죠? 나오기만 하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태람이 한참을 어르고 달래니 뚱한 표정의 노랑이가 뿅하고 나타났다. 오동통한 볼이 여전히 귀여웠다.
[…뭐냐삑? 이제 나 같은 건 필요 없는 게 아니었냐삑?]
“전투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었어. 미안.”
[전투에는 참가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래서 무슨 일이냐삑?]
궁금한 게 많았지만 태람은 우선은 강제력에 관해 묻기로 했다. 어떻게 보면 태람과 세호는 이제까지 강제력 때문에 이리저리 휘둘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강제력이 내 소설을 재현하려는 이유가 뭐야? 금제 때문에 안 되면 할 수 없지만….”
[나도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금제가 풀렸다삑.]
금제가 풀렸다는 것은 태람이 생각하기에 상당한 희소식이었지만, 노랑이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너 표정이 왜 그래? 금제가 풀리면 좋은 거 아니야?”
[금제가 풀렸다는 것은 원작을 탈선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라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다삑.]
“탈선이라니? 많이 안 좋은 거야?”
[지금 너도 이 세계도 불안정해져서 위험한 상태다삑.]
“이 세계야 그렇다고 치고 나는 왜 위험해?”
[이제 원래 세계에 대해 기억나는 게 거의 없을 거다삑.]
“응. 그렇기는 하지….”
태람은 세호를 통해 잃어버린 것들을 들었다. 자신을 낳아주시고, 쭉 함께 생활해 왔던 부모님, 힘들 때마다 도와주었던 친구, 이제까지 배우고 쌓아온 모든 것들을 태람은 전부 잊었다.
태람이 생각하기에 가장 심각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는 자신이었다.
“이제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는 것밖에 기억이 안 나. 원작과 세호에 대한 기억이 내 전부야.”
[이 세계에서 기억이 가지는 의미는 매우 크다삑.]
“기억에 대체 어떤 힘이 있는데?”
[기억에는 존재력이 담겨있다삑.]
“존재력…. 카이란도 비슷한 말을 했었어.”
이어지는 노랑이의 말은 태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 세계는 갓 태어난 불안정한 세계로 안정적으로 세계를 유지 시키기 위한 대량의 존재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강제력은 이 세계의 기틀을 마련한 작가인 태람을 소설의 매개체로 불러냈다고 한다.
[페이지가 모두 채워지면 이 세계는 비로소 완성 된다삑.]
“만약 내가 실패한다면?”
[이 세계는 무너지고 말 거다삑.]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강제력 말이야. 혹시 형체가 있어?”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이 세계의 관리자 같은 존재다삑.]
“어쨌든 강제력은 이 세계만 유지할 수만 있다면 어떤 방법을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네.”
[그건 그렇지만….]
노랑이에게서 힌트를 얻은 태람은 방법을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 냈다. 실천 여부는 미지수였지만 말이다.
*
태람의 파티는 입구를 지나서 한참을 걷고서야 겨우 성의 안뜰에 도착했다. 본성까지는 아직도 꽤 남아있었다.
“말을 타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밀.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래도 이곳만 지나면 곧 본성이에요.”
무심코 튀어나온 아밀의 말에 프랑이 재빨리 입단속을 했다. 혹시라도 태람이 미안해할까 봐 걱정이 된 프랑은 조심스럽게 태람의 눈치를 살폈다. 걱정이 무색하게 태람은 멍한 상태로 기계적으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아. 태람 님! 발밑을 조심하세요.”
발이 꼬여 넘어질 뻔한 태람을 프랑이 잡아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태람은 프랑에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프랑.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넘어지지 않아 다행이에요.”
“언제 전투가 벌어질지 모르니 내 옆에 있도록 해라.”
“네. 알았어요. 왕자님.”
태람이 세호 쪽으로 가려고 하자, 프랑이 태람의 팔을 붙잡았다.
“방어 마법을 걸기 쉽게 제 옆에 있는 게 어떨까요?”
“그런 거면 내가 제일 강하니까 내 옆에 있어.”
카이란까지 끼어들자 쟁탈전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이 보였다. 태람은 공처럼 여기저기 토스될 것을 상상하니 벌써부터 피곤해졌다.
“그냥 전투 스타일에 따라 배치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태람의 안전이다.”
아밀과 루시아스의 합리적인 제한이 태람을 구했다.
전위에는 근거리 공격에 강한 세호와 루시아스가, 후위에는 장거리 공격과 보조 마법에 능한 프랑과 카이란이, 다른 전투원에 비해 미숙한 아밀과 비전투원인 태람은 가장 안전한 중간에 배치되었다.
생각보다 순탄한 흐름에 모두가 긴장의 끈을 놓았을 때 이변이 일어났다.
안뜰을 벗어나기 직전, 마치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갑자기 땅이 흔들리더니 그와 함께 불길한 소리가 들렸다. 다음 순간 커다란 워프존이 나타났고, 안에서 수백 마리가 넘는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행에게 달려오는 몬스터들은 그 수가 수천은 되어 보였다. 그야말로 몬스터 대군이었다.
세호는 바로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앞은 우리가 맡겠다. 프랑! 태람에게 방어 마법을!”
세호의 외침에 그의 옆에 있던 루시아스도 조용히 검을 뽑았다.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가호가 깃들기를!”
프랑은 빠르게 주문을 외웠고, 곧이어 태람을 감싸는 보호막이 생겨났다.
“저는 최대한 뒤에 있을게요!”
평소와 같이 태람은 최대한 뒤로 빠지려 했다.
“조심하세요. 태람 님.”
“일단 주변을 정리해줄게!”
카이란이 만든 불꽃이 사방에 솟구치며 태람이 숨을 장소를 만들어냈다. 태람은 돌무더기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태람은 차분해지려고 노력하며 일행들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숫자는 조금 많지만, 그동안 물리쳐온 몬스터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태람의 기대에 응답하듯 평상시와 동일한 패턴으로 전투는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일행들이 하나 둘 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사태를 파악한 것은 카이란이었다.
“이상해! 몬스터들이 자꾸만 살아나! 언데드라고 해도 너무 빨라!”
프랑이 굳은 표정으로 카이란에게 동조했다.
“이 몬스터들은 일반적인 언데드가 아니에요. 제 정화가 전혀 통하지 않아요. 정화되지 않는 언데드라니 그런 게 있을 리 없는데….”
세호와 아밀도 몬스터를 베어내면서 의견을 냈다.
“검기는 통하지만 금방 다시 살아난다. 아니, 살아나는 게 아니야. 마치 시간을 돌린 것처럼 다시 생겨난다. 재생과는 달라.”
“왕자님 말씀이 맞아요! 저 몬스터들은 쓰러트리면 일정 시간 뒤에 다시 그 자리에서 나타나요. 아까와 똑같은 모습으로요!”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다. 마계에 이런 형태의 몬스터는 없었어.”
침묵을 지키던 루시아스까지 입을 열었다.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던 태람도 덩달아 불안해졌다. 그도 그럴 게 모두가 이 정도로 당황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몬스터들은 계속해서 리젠 되었고, 끝없이 일행들에게 달려들었다. 아무리 공격해도 몬스터의 수는 줄지 않았다. 무한의 굴레에 일행들은 지쳐갔다.
카이란이 강력한 원소 마법도, 세호의 검기도, 프랑이 특별한 신성 마법도, 루시아스의 마기도 소용이 없었다. 전에 없던 위기에 직면한 태람의 파티였다.
멀리서 전투를 지켜보는 태람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 갔다.
지금은 괜찮지만 아주 조금씩 전선이 밀리고 있었다. 이대로 소모전을 반복한다면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한 태람이었지만 선뜻 결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도망치면 페이지를 채울 수 없으니까. 어쨌든 마왕성 안으로 꼭 들어가야 했다.
초조해하는 태람의 눈앞에 익숙한 노란 덩어리가 나타났다.
[태람! 큰일이다삑!]
노랑이는 태람만큼이나 긴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람은 불길한 예감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일이야?”
[빨리 도망쳐라삑. 이레귤러다삑,]
“이레귤러?”
[저 몬스터들한테서 존재력의 잔재가 느껴진다삑.]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 봐.”
[누군가 몬스터들을 조종하고 있다삑. 저 몬스터들은 지울 수 없는 허상이지만 실제로 피해를 준다삑.]
태람은 순간 언젠가 세호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랐다.
- 누군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때는 말도 안 된다며 가볍게 넘겼던 태람이었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했다. 마왕성까지 가는 길이 이렇게 힘겨울 리가 없었다.
[짐작 가는 거라도 있냐삑?]
“어쩌면 내가 설정하지 않은 새로운 등장인물일지도 몰라.”
[일리가 있는 말이다삑. 이레귤러는 굴레를 벗어난 자를 뜻한다삑. 원작에 없는 등장인물이라면 강제력에 어느 정도 저항할 수 있을 거다삑.]
“그자를 찾아서 제압하면 저것들이 없어질까?”
[그럴 확률이 높다삑.]
“알려줘서 고마워. 일단 모두에게 말해야겠어.”
태람은 노랑이에게 얻은 정보를 전하기 위해 전투 중인 일행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그때, 몬스터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걸어 나왔다. 금세 일행의 코앞까지 온 그가 가볍게 손짓하자 거짓말처럼 몬스터들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쓸데없는 발악을 하는군.”
지나치게 창백한 얼굴을 제외하고는 인간과 흡사한 외견의 남자였다. 하지만 머리에 뻗어 있는 뿔과 검은 날개가 그가 인간이 아닌 이질적인 존재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태람은 새로운 등장인물이 마족이었다는 사실에 놀랐지만,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 납득이 되었다. 마족에 대한 설정은 유독 허술했기 때문이다.
-왕에게 버려진 일족. 멸족 위기에 놓여 있음.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몇 명이 남았는지 같은 정보 자체가 커다란 빈칸이었다. 이렇게 된 건 또 나 때문인가? 태람은 죄책감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버러지 같은 인간들. 너희는 이곳에 발을 들여서는 안 됐다.”
남자의 말에 카이란이 바로 반박했다. 그로서는 드물게 기분 나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인간 아닌데? 그리고 네 영혼은 정말 기분 나빠. 검고 금이 가 있어.”
나머지 일행들도 꽤 신랄한 반응을 내비쳤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기분 나쁜 놈이군.”
“왕자님과 의견이 일치하다니 재수 없지만 동감입니다.”
“저분은 친구가 없을 것 같네요.”
마족은 일행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루시아스만을 바라봤다. 그는 조심스럽게 루시아스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는 모르겠습니다. 왜 저자들과 함께 다니시는 겁니까?”
“소중한 동료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왕이시여. 지난 오백 년간 오직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당신이 마족의 부흥을 위해 돌아오실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미 왕이길 포기했다. 그렇게 불릴 자격은 없어.”
루시아스가 마족의 말에 수긍하자 아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루, 루시아스 님이 마왕이라니? 인외공이 두 명이었다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혼란스러워하는 아밀을 카이란과 세호가 진정시켰다.
“루시아스는 태람을 좋아하고 있을 뿐이야. 나쁜 의도는 없다고 했어.”
“나도 보증하지. 저자는 믿을 수 있는 자다.”
“저 빼고 다 알고 계셨던 거예요? 대체 이게 무슨…. 프랑 님! 프랑 님도 놀라셨죠?”
동의를 구하는 아밀의 입을 프랑이 다물게 했다.
“아밀. 조용하고 말이나 들어봐요.”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이따가 꼭 이야기 해주세요.”
시끄러운 외야에도 불구하고 마족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절박하고, 애절한 눈빛은 마치 절절한 사랑 고백을 하는 사람 같았다.
“당신은 여전히 우리의 왕이십니다. 저자들과 함께하는 것도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그만. 너도 이미 알고 있지 않나?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아. 죽기 위해 돌아왔을 뿐이다.”
루시아스의 차가운 말이 마족의 말을 차갑게 잘라내었다. 멍하니 있던 태람은 루시아스가 꺼낸 죽음이란 단어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마족 역시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울먹거렸다.
“어째서…. 당신을 섬기는 게 제 유일한 소원이었습니다. 당신이 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미안하구나. 이름 모를 아이야. 내 운명은 저 아이에게 맡겼다.”
루시아스의 시선이 잠시간 태람에게 머물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제가 아는 당신은 뭐였던 거죠? 그래. 인간들이 전부 죽으면 당신도 정신을 차리겠죠.”
“글쎄. 난 인간이 아니라니까!”
카이란의 항의를 뒤로한 채 마족은 몬스터를 잔뜩 소환한 뒤에 사라져버렸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숫자의 몬스터들이 몰려왔다. 마치 자연재해 같았다.
“탁 트인 곳은 위험해요. 다들 일단 성안으로 들어가요! 최대한 몬스터와 대치하지 마세요. 저 마족을 잡아야 몬스터가 사라집니다! 무리하다가 다치면 안 돼요!”
태람의 필사적인 외침을 끝으로 일행은 전부 뿔뿔이 흩어져 버리고 말았다.
*
“이곳은 안전한 것 같군.”
태람을 들쳐업고 달리던 루시아스가 주변을 경계하며 태람을 적당한 자리에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루시아스.”
한숨을 돌린 태람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들반들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에 금하나 간 곳 없이 깨끗한 기둥들. 먼지 한 톨 없는 조각상까지. 성 내부는 상상한 것보다 잘 정돈되어 있었다. 아까 그 마족이 오랫동안 착실하게 관리해 온 것 같았다.
태람은 이 넓은 곳에서 홀로 루시아스를 기다렸을 마족을 생각하니 어쩐지 씁쓸해졌다. 아직도 절망과 실망이 뒤섞인 마족의 눈동자가 잔상처럼 어른거렸다. 자신이 창조했지만 그 어떤 설정도 부여받지 못해 이레귤러가 되어 버린 그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루시아스는 활기찬 평소와 달리 기운 없어 보이는 태람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인 걸까? 안 그래도 날이 갈수록 어두워지고, 말라가는 게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특히, 자신을 볼 때는 유독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다친 곳은 없나?”
루시아스는 태람에게 무슨 고민이라도 있는지를 묻고 싶었지만 다른 말을 꺼냈다. 실제로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걱정이 되기도 하였다.
“네. 덕분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는 아예 떨어져 버렸네요.”
태람은 루시아스의 시선을 피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부자연스러운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지만 루시아스는 애써 평소처럼 행동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태람이 바라는 것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라. 모두 무사하다.”
“진짜요?”
“그래. 위쪽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이쪽이다.”
루시아스는 익숙한 듯 계단 쪽으로 향했고, 태람이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을 쉼 없이 올랐다.
고요한 적막이 이어지는 통에 태람은 생각을 떨쳐버리려 했지만 도저히 떨쳐버릴 수 없었다. 차라리 세호랑 프랑이 싸우거나 카이란이 억지를 부리며 달려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왜 하필 마왕성에서 루시아스와 단둘이 있게 되었을까? 죄책감의 근원 중 하나인 루시아스와 그가 죽을지도 모르는 장소로 향한다.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이것 또한 강제력의 질 나쁜 장난이 아닐까? 태람은 괜히 강제력을 원망했다. 눈을 감았다 떠봐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계단을 오르던 태람은 얼마쯤 계단을 올랐을 즈음, 결국 앞서가는 루시아스의 소매를 붙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더는 기회가 없을 테니까.
“무슨 일이지?”
“아까 마족한테 말한 죽기 위해 돌아왔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의 의미다.”
“왜….”
태람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미약하게 떨리는 그의 눈동자는 슬픔에 잠겨있었다. 루시아스는 태람을 위로하듯 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간지러울 정도로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손짓에 태람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슬퍼하지 마라. 나는 그 사람을 만났던 이곳에서 전부 끝내고 싶을 뿐이야. 다른 이도 아닌 너의 손에서.”
“…왜 저예요?”
“그게 운명이니까. 너에게라면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어.”
희미하게 미소 짓는 루시아스를 보고 있자니 태람은 늘 꾸던 악몽이 떠올랐다. 맹목적인 그의 마음이 무거웠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태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대체 뭐라고. 루시아스에게 무엇 하나 해준 것이 없는데 그렇게 선뜻 희생을 선택할 수 있었던 걸까? 아직도 선택을 내리지 못한 자신과는 달리 그에게서는 어떠한 신념마저 느껴졌다.
“루시아스. 만약에 말이에요. 저를 향한 당신의 마음이 사실은 만들어진 것이라면 어떨 것 같아요? 전부 가짜라면…. 그래도 희생을 선택할 건가요?”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 희생이라 생각한 적은 없다. 소중한 사람과의 추억이 있는 이곳에서 마무리를 짓는 것이지.”
“소중한 사람이 당신을 떠난 것에도 강제적인 힘이 작용했다면요?”
“상관없다.”
그렇게 말하는 루시아스의 눈동자 속에는 오롯이 태람만을 비추어지고 있었다. 태람은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고 프랑을, 아무렇지도 않게 취하는 의연한 태도에 카이란을 떠올렸다.
“왜 당신들은 그렇게까지 저를 위하는 거죠?”
“…태람? 괜찮나? 안색이 좋지 않다.”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울컥하는 마음에 터져 나온 한 마디. 그 한마디가 태람이 필사적으로 지켜왔던 선을 무너트렸다. 마치 둑이 무너지듯 가파르게. 태람은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자신을 멈출 수 없었다.
“당신이 마왕이란 걸 알고 접근했어요.”
태람은 루시아스의 희생을, 프랑의 헌신을, 카이란의 호의를 가볍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정말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어차피 다들 소설 속의 인물이니까. 자신이 창조해낸 감정 아래 움직이는 것뿐이니까. 태람은 그들의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들은 태람과 같았다. 자신과 같은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울고, 웃고, 고민하고, 사랑을 했다. 자신과 무엇 하나 다를 바 없는 그런 존재들이었다.
이곳 역시 이미 또 하나의 세계였다. 소설책이 완성되든 말든 이미 만들어져 살아 숨 쉬는 세계였다.
“루시아스를 이용했어요. 미안해요. 미안해요.”
“괜찮다.”
루시아스의 한 마디에는 많은 것이 담겨있었다. 변함없이 자상한 루시아스의 눈빛에 태람은 이번에야말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 태람의 옆을 루시아스는 말없이 지켰다.
*
한편, 태람이 루시아스에게 구조되는 것을 확인한 프랑과 세호는 자신들도 각각 성을 향해 달렸다. 끈질기게 쫓아오는 몬스터들 때문에 성 안으로 들어와서도 전투는 계속되었고, 한참을 시달린 끝에 두 사람은 겨우 안전한 장소를 찾아 한숨을 돌렸다.
“탐지 마법을 써라. 프랑.”
껄끄러운 사이인 프랑과 함께 있는 게 힘들었던 세호는 프랑을 채근했다.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었다.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세호만큼, 아니 어쩌면 세호보다 더 이 상황이 불편했던 프랑은 신경질적으로 대답한 후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한시라도 빨리 태람을 만나고 싶었다.
“주신 리안이여. 저희에게 올바른 이정표를!”
위층으로 이어지는 기다란 빛의 길이 생겼다. 세호와 프랑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주변을 경계하며 빛의 길을 따라 걸었다. 서로 나란히 걷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서 죽을 것 같았지만, 그것만 빼면 그럭저럭 순조로운 진행이었다.
그러다 빛무리가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프랑은 내키지 않았지만 입을 열었다.
“오른쪽이 태람 님 같아요.”
“왼쪽이 좋겠군.”
세호가 바로 반대 의견을 냈다. 프랑은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세호가 앞길을 방해하기까지 하니 신경이 더욱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탐지 마법을 쓴 건 저예요.”
“기를 감지하는 능력은 내가 더 우수하다. 왼쪽이 태람이야.”
“마법을 쓰는 제가 자연의 마나를 더 잘 느낄 수 있지 않겠어요? 이건 상식이죠.”
“아니, 이곳은 마계다. 검사인 나에게 더 유리한 환경이야.”
“저는 그냥 마법사가 아닌 신성 마법을 쓰는 전투 신관입니다.”
“내 쪽이 더 강해.”
프랑은 당장이라도 세호에게 공격 마법을 퍼부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임이 분명했다.
차라리 따로 다니는 게 나을까? 하지만 그랬다간 태람 님이 나중에 알고 실망하실지도 몰라. 태람 님은 왕자와 내가 사이좋게 지내길 바라시니까. 잠시 흔들렸던 프랑은 결국 태람을 생각하며 한 번은 참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왼쪽으로 가요.”
세호는 프랑의 양보로 큰 마찰 없이 왼쪽 길로 이동하게 되어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검을 뽑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원래 이렇게 감정적인 편이 아닌데 이상하게 프랑을 상대하다 보면 울컥하게 되었다. 태람을 상대할 때의 가벼운 투덕거림과는 질이 달랐다.
세호는 프랑이 싫었다. 단순한 질투와는 결이 달랐다. 카이란도 있고, 루시아스도 있는데 유독 프랑만이 특별히 거슬렸다. 프랑은 선배를 소중하게 여기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때때로 선배를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를 채웠다. 그의 그런 이기적인 점을 볼 때마다 자꾸만 경계심이 자라났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세계에도 그렇게 정이 붙지 않았다. 하지만 선배는 이 세계를 사랑한다. 세호도 태람의 마음이 연애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라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마음이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선배는 프랑을 아끼니까. 나와 프랑이 싸우는 걸 불편해 해. 세호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프랑의 말을 긍정했다.
“알았다.”
세호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걷기만 했다. 그러나 워낙 넓은 성인지라 걸어도 걸어도 제자리걸음을 하는 것 같았다. 프랑은 갈수록 표정이 썩어들어 갔다. 세호의 표정 역시 썩 좋지만은 않았다. 답답함은 결국 짜증으로 표출되었다.
“태람 님은커녕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네요. 역시 오른쪽으로 갔어야 했어요.”
“조잘조잘 시끄럽군. 말 할 시간에 걸어라.”
“왕자님과 떨어진 것 자체가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네요. 태람 님과 함께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애초에 네 탐지 마법이 더 정확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다.”
“지금 제 탓을 하시는 거예요?”
세호와 프랑이 옥신각신 말다툼을 벌이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굉음이 울리더니 성이 크게 흔들렸다.
“위쪽이다!”
“말 안 해도 알아요!”
두 사람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달렸다.
*
틈만 생기는 티격태격거리는 세호와 프랑보다는 상황이 나았지만, 카이란과 아밀 쪽도 삐걱거리는 건 똑같았다.
“저런 하급 몬스터를 상대로 숨어 다니는 신세라니 마음에 안 들어.”
몰려오는 몬스터를 피해 급하게 어떤 방 안으로 들어온 카이란이 아밀에게 투덜거렸다.
“특수한 몬스터니까 어쩔 수 없죠.”
“아 진짜! 답답해! 언제까지 이렇게 살금살금 다녀야 하는 건데?”
“그래도 꽤 많이 올라왔잖아요. 그리고 숨는 게 아니라 나중을 위한 전략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밀은 심통을 부리고 있는 카이란을 열심히 어르고 달랬다. 아밀은 간간이 들이닥치는 몬스터와의 전투도 힘든 데 카이란의 불만까지 받아줘야 하니 조금 힘들었다. 파티원들을 완벽히 조율하는 태람의 대단함을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조금만 있으면 태람 님과 합류 할 수 있을 거예요. 힘내요. 우리.”
“이렇게 거북이 마냥 기어가는데 어느 세월에? 화끈하게 팍팍 이동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없을까?”
카이란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없애지는 못해도 어딘가 한 곳에 가둬두는 건 괜찮을 것 같은데….”
“아, 카이란 님! 저 좋은 생각이 났어요.”
“뭔데?”
“가능하다면 말인데요. 아예 바닥을 푹 꺼지게 하면 어떨까요?”
“바닥을 통째로 날리자는 거지?”
“네! 지금 저희가 있는 방이 꽤 크잖아요. 이곳으로 몬스터를 몰아서 밑으로 떨어트리는 거죠!”
“그거 괜찮은데?”
언뜻 무모해 보이는 계획이었지만 평소에도 자주 페어로 전투에 임했던 두 사람은 손발이 척척 맞았다.
“카이란 님! 제가 망을 보고 있을게요!”
“응! 금방 할게. 폭발 마법에 증폭 마법을 섞어볼게!”
카이란은 바닥에 주저앉아 커다란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마법진과는 달리 무척이나 복잡해 보이는 마법진이었으나 카이란의 손놀림은 빠르고 능숙했다. 옆에서 지켜보는 아밀은 저도 모르게 감탄이 새어나왔다.
“우와. 카이란 님은 정말 인간이 아닌 것 같아요!”
“나 인간 아니잖아. 드래곤.”
“아하하…. 그랬죠. 새삼스럽지만 저희 파티는 정말 화려하네요. 차기 국왕 후보인 키릭 왕자님에 리안교의 최연소 대신관이신 프랑 님. 그리고 드래곤이자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인 카이란 님까지!”
“루시아스는 왜 빼? 걔는 마왕이잖아.”
“그, 그렇죠. 사실 아직 실감이 안나요. 차분하고 배려심 깊으신 루시아스 님이 마왕이라니….”
“인간들한테 마왕 이미지가 좋진 않지.”
“부정할 수 없네요. 어릴 때부터 마족은 피를 갈구하는 파괴와 쾌락의 종족이라고 듣고 자랐거든요. 그런 마족의 왕인 마왕은 더 무시무시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재미있네. 사실은 반대잖아. 마족은 합리적인 종족이거든. 반면에 인간은 탐욕스럽고 만족할 줄 모르지.”
“그, 그렇군요.”
아밀은 어쩐지 카이란과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인간이 더 좋아. 재미있잖아. 수명도 짧으면서 늘 대단한 걸 만들어내지. 영혼도 다양한 빛을 내는 게 예쁘잖아.”
“그러면 인간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건 누군가요?”
다시 활기를 찾은 아밀이 카이란에게 들이댔다.
“어? 그야 당연히…. 아! 다 그렸다.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일단 다녀와.”
“네. 그럼 저는 몬스터를 몰고 올게요.”
아밀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방을 나서려고 일어났다.
“잠깐만. 방어막 하나 걸어줄게. 그리고 이것도 가져가. 화염 스크롤이야. 넉넉히 줄 테니까 막 써도 돼.”
카이란은 아밀에게 스크롤을 건네주고서, 가볍게 손을 튕겼다. 그러자 아밀의 주위에 황금빛 막이 생겼다.
“네! 감사합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간 아밀은 화염 스크롤을 곳곳에 뿌렸다. 덕분에 구석에 위치한 몬스터까지 모조리 위층으로 끌고 올 수 있었다. 유도되지 않는 몬스터들은 치고 빠지는 식으로 직접 공격해 원하는 곳으로 몰아넣었다.
그렇게 카이란이 있는 방까지 몬스터 군단을 끌고 온 아밀이 외쳤다.
“카이란 님! 지금이에요!”
“응! 맡겨둬!”
카이란은 마법진에 손을 올리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 잠시 후 마법진이 빛나더니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의 힘은 중심부를 시작으로 강한 영향을 미쳤다. 후드득 소리와 함께 방 전체가 붕괴하며 아래로 내려앉기 시작했다.
“카, 카이란 님! 저, 저희도 떨어지는데요!”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몬스터들과 함께 카이란과 아밀도 밑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이런. 구멍만 뚫으려고 했는데 아예 전체가 날아가 버렸네. 조금 강했나?”
“조금이 아니라 많이요! 어, 어쩌죠?”
“그래비티!”
카이란은 물체가 떨어지는 속도를 늦추는 마법을 사용했다. 덕분에 추락하는 속도는 줄었으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다, 다른 마법은 없나요? 부유 마법이라던가?”
“미안. 부유 계통은 마나가 꽤 들어가서.”
“그런….”
“왕자한테 포션 좀 받아둘 걸 그랬나 봐. 사실 내가 최근에 좀 무리를 했거든. 방금 전 일도 그렇고 마나를 너무 많이 썼다.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
“네? 그 전에 저희가 납작쿵이 되어 버릴 것 같은데요?”
“음, 이 정도 높이면 아프긴 하겠지만 괜찮을 것 같아.”
“카이란 님은 조금 아프고 말겠지만 저는 그 이상일 것 같은데요! 그, 근데 최근에 왜요? 몬스터도 안 나와서 괜찮았을 텐데?”
“대충 이틀 전인가? 태람이랑 야식 먹으러 갔지. 코른으로.”
“코른이요? 그렇게 멀리 이동이 가능하다니 드래곤은 대단하네요.”
“내 레어 주변이기도 했고, 자주 가봤던 곳은 이동 수식 계산하기도 쉬워.”
“그나저나 태람 님과 카이란 님의 데이트라니 저도 봤어야 했는데 아쉽네요. 태람 님은 귀여우셨나요?”
“응! 내가 태람한테 리본을 달아줬는데 엄청 사랑스러웠어!”
“리본! 세상에 리본을 단 태람 님이라니! 다음 생에는 꼭 봤으면 좋겠네요….”
바닥이 점점 가까워지자 아밀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가호를!”
떨어지는 두 사람을 구해준 것은 프랑이었다. 아밀과 카이란의 몸은 빛에 감싸여 천천히 위로 떠올랐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두 분 다 정말 큰일 날 뻔했잖아요.”
프랑이 먼지투성이가 된 카이란과 아밀의 몸을 털어주며 물었다. 아무리 카이란이라도 이번만큼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민망해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몰이사냥? 몬스터들을 밑으로 보내줬어.”
카이란의 말에 프랑과 세호는 카이란이 마법진으로 뚫은 구멍 아래를 내려다봤다. 폭발에 휩쓸린 몬스터들이 돌무더기에 깔려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상당히 많은 수가 말려 들었네요. 이 정도면 앞으로 수월하겠어요.”
“성과는 인정하지만 아밀이 다칠 뻔했다. 아밀은 너와 달라.”
“그건 반성할게.”
세호의 따끔한 질책에 아밀이 카이란을 변호했다.
“결과적으로는 무사하니까요. 그나저나 왕자님과 프랑님이 같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해맑은 아밀의 말에 세호와 프랑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서 태람 님이나 찾죠.”
“그게 좋겠군.”
*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계단에도 끝은 있었고, 태람과 루시아스는 성의 꼭대기 층에서 일행과 합류할 수 있었다.
“태람 님! 무사하셨군요. 정말 걱정했어요!”
태람을 발견한 프랑이 멀리서 한달음에 달려왔다. 앞뒤 재지 않고 우다다 달려오는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았다. 강아지 담당은 카이란이란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태람은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휘청거리는 두 다리는 이미 서 있을 힘조차 잃은 지 오래였다.
“태람 님,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리세요? 혹시 어디 다치셨나요?
태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프랑은 힘들어하는 태람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조금 지쳤을 뿐이에요.”
이렇게 된 건 자업자득이었다. 실컷 울고 난 뒤 민망해진 태람은 루시아스의 도움을 거절하고, 괜히 성큼성큼 앞서 나가며 무리를 했던 것이다.
”제가 치유해드릴게요!”
“적당한 곳에서 잠시 쉬고 가는 게 좋겠군.”
어느새 다가온 세호의 제안으로 일행은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기로 하고 적당한 방에 들어갔다.
“네 사람은 다 같이 있었어요?”
프랑에게 치유를 받아 쌩쌩해진 태람이 모두를 둘러보며 묻자 세호의 가방을 뒤져서 꺼낸 포션을 꿀꺽꿀꺽 마시던 카이란이 대답했다.
“아니. 나는 아밀이랑 있었고, 왕자랑 프랑은 나중에 만났어.”
“위험한 일은 안 했죠?”
찔리는 게 있는 카이란은 움찔했고, 태람의 시선을 슬쩍 피한 채 우물쭈물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뒤에서 아티팩트와 포션 등을 정리하고 있던 아밀은 쩔쩔매는 카이란의 모습을 보더니 대신 변명해줬다.
“조금 위험할 뻔했지만 카이란 님이 대단한 마법을 써서 몬스터들을 전부 처리했어요!”
“몬스터들을 처리했다고요? 대체 어떻게?”
태람이 감탄하는 기색을 보이자 금세 기운을 차린 카이란이 자랑하듯 말했다.
“몬스터들을 한곳으로 모아서 밑으로 떨어트렸어. 언제 기어 나올지는 모르지만, 시간은 벌었지. 나 잘했지?”
카이란이 눈을 반짝이며 칭찬을 바라는 듯이 다가와 태람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태람은 그런 카이란의 머리를 그가 바라는 대로 세심하게 쓰다듬어 주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고 있던 태람은 문득 의문이 생겼다.
“잠깐만요. 카이란이 아밀과 다녔다면….”
자동적으로 세호는 프랑과 다녔다는 이야기가 되었다. 태람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탄인데? 한바탕 하지 않았을까? 태람은 슬쩍 시선을 돌려 난간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세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뭐지?”
태람의 시선을 느낀 세호가 태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태람이 보기에 그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정말 안 싸웠나? 프랑이 일방적으로 당했다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확인은 해봐야겠다. 태람은 자신에게 기대있는 카이란을 잠시 옆으로 치운 채 프랑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세요? 태람 님,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으신가요?”
마침 루시아스의 치유를 마친 프랑이 태람을 반갑게 맞이했다.
“아니…. 그냥 프랑은 어디 다친 곳은 없는지 걱정되서 와봤어요.”
사실 세호랑 프랑이 정말 안 싸웠는지를 확인하러 온 태람이었지만, 혹시라도 다치지 않았을까 걱정한 것도 사실이니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저는 멀쩡해요. 중간에 독선적인 왕자님 때문에 잠시 길을 헤매긴 했지만 수월하게 올 수 있었어요.”
“그렇다니 다행이긴 한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기뻐하는 게 보이는 밝은 프랑의 미소에 태람 또한 멋쩍게 웃음을 흘렸다.
그래. 세호도 프랑도 애도 아닌데 내가 너무 과민반응을 보였나 봐. 여전히 다투긴 하지만 이제는 정말 둘이 사이가 좋아졌나 봐.
세호나 프랑이 알았으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며 태람은 그제서야 마음 편히 휴식을 취했다.
*
“그동안 말씀을 못 드렸지만, 저를 도와주는 정령 같은 존재가 있어요. 노랗고 작은 새인데 제 눈에만 보이는 것 같아요. 그동안 저에게 이 세계의 정보를 알려준 고마운 친구인데 아무튼 정령에 말에 따르면 저희가 상대해야 할 마족은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평소의 전투보다 더 신경을 쓰는 게 좋겠어요. 다들 다치지 마세요. 절대로.”
모두다 어느 정도 회복 판단한 태람은 동료들을 모두 한자리에 모아 놓고 마족에 관해 설명했다. 처음에는 담담했으나 마지막 말은 어쩐지 울먹임이 섞여 있었다. 아밀과 카이란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렸고, 태람의 고민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세호와 루시아스는 착잡한 눈빛이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은 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희가 많이 걱정되시나 보네요. 걱정하지 마세요. 태람 님. 이제 곧 끝나잖아요.”
프랑의 말은 언뜻 보면 태람을 위로하는 듯 보였지만 어딘지 싸늘했다. 불행하게도 그것을 느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맞아. 전부 끝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왕궁으로 돌아가면 제가 만찬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카이란과 아밀이 동조했다.
“태람. 내가 너를 반드시 지켜주겠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왕자를 연기하는 세호. 태람은 세호의 모습을 한참 동안 멍하니 바라봤다.
“왜 그럽니까? 선배.”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태람에게 다가간 세호가 작게 속삭였다.
“아니 그냥. 끝이 가까이 오니까 괜히 심란하네.”
“괜찮을 겁니다. 루시아스도 협력해준다고 했으니까요.”
“루시아스가 그런 말을 했구나.”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게 끝나면 들어주세요.”
“그래. 모든 게 끝나면.”
태람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번 전투가 끝나면 계속 미뤄왔던 선택을 해야만 했다. 고민하고 또 고민해도 결론은 단 두 가지뿐이었다. 루시아스의 희생, 아니면….
“감사합니다. 다들 고마워요. 이제 갈까요?”
일행은 마족의 기척이 느껴지는 커다란 방에 문을 열었다.
*
방에 들어서자마자 황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옥좌에 앉은 마족이 일행을 맞이했다. 지금까지 일행이 들린 마왕성의 그 어떤 방보다 깨끗했으며 최소 몇십 배나 넓은 방이었다.
태람은 아마 이곳이 원래 루시아스가 머물던 곳이 아닐까 추측했다. 슬쩍 루시아스를 보니 그의 눈동자 안에는 그리움이 차올랐다.
“결국, 여기까지 오셨군요. 몬스터의 손에 죽는 게 행복했다고 생각하게 해드리죠.”
마족은 옥좌에서 내려오면서 뭔가를 시험하듯 몇 번 검을 휘둘렀다. 가벼운 그의 몸짓에 바닥에 길고 깊은 균열이 생겨났다.
“갑자기 엄청나게 강해졌네. 저게 태람이 말한 힘인가?”
“기운을 보면 그린 드래곤보다 더 강한 것 같네요. 아니 어쩌면….”
카이란의 말에 동의한 프랑은 뒷말을 끝까지 잇지 않고, 말을 아꼈다.
“아밀. 너는 끼어들지 말고 태람을 지켜라.”
“알겠습니다.”
아밀이 태람을 데리고 뒤편으로 숨자 전투가 시작되었다.
세호와 루시아스가 검기를 두른 칼을 내질렀다. 마족은 두 사람의 검을 간단하게 막더니 모두의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졌다.
“어디지?”
“오른쪽이다!”
루시아스가 당황한 세호를 대신해서 마족의 검을 막았다.
“미안하군.”
정신을 차린 세호는 단단히 고쳐 잡은 검에 검기를 둘렀다.
“인간주제에!”
마족이 세호와 루시아스를 향해 다시 검을 휘둘렀다. 강한 힘을 담은 칼들이 부딪치며 굉음이 울렸다. 2대 1의 공방이었지만 마족은 밀리지 않았다.
“프랑! 뭐하고 있어!”
응전 중인 세호가 버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저도 하고 있다고요!”
“둘 다 조금만 버텨! 내가 큰 거 한방 먹여줄 테니까!”
카이란이 지팡이를 잡고 긴 주문을 외우고 있었고, 프랑은 옆에서 그의 컨트롤을 보조했다.
“왕자! 루시아스! 비켜!”
강력한 마법이 준비가 완료되자 카이란이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세호와 루시아스가 재빠르게 비켜섰다. 다음 순간,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염구가 마치 브레스같이 빠르게 마족 쪽으로 작렬했다.
“큭! 이딴 잔재주를!”
마족은 겨우 마법을 흘려보내고, 급하게 반격했다. 마족은 네 사람을 향해 검기를 방사형으로 뿌렸지만, 프랑의 방어막이 타이밍 좋게 펼쳐졌다.
“오래 버틸 수는 없어요! 방어막은 곧 깨집니다. 뒤는 각자 알아서 피해요!”
프랑의 말이 끝나는 것과 거의 비슷하게 방어막이 깨졌다. 네 사람은 각자의 방법으로 마족을 공격했다.
“왕자! 포션은?”
“아밀에게 있다!”
카이란은 워낙 강력한 마법을 사용한 탓인지 마족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아밀과 태람이 있는 곳까지 와 포션으로 마나를 보충하려 했다. 아밀과 태람은 열심히 포션 뚜껑을 열어 카이란에게 전달했다.
“조심해요.”
“걱정 마. 아직은 여유! 프랑 것도 가져갈게.”
불안한 태람을 귀여운 미소로 안심시킨 카이란은 프랑의 몫의 포션을 챙겨서 다시 전투로 복귀했다.
“프랑! 받아!”
“감사합니다! 잠시만 보조를 부탁합니다!”
“알았어!”
세호와 루시아스에게 보조 마법을 걸고 있던 프랑은 카이란과 교대를 하고 급하게 포션을 마시기 시작했다. 프랑이 열심히 보조 마법을 걸어줬음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여기저기 잔 상처를 입고 있었다. 흉흉한 기운이 담긴 검기들이 허공을 찢고 갈랐다. 한 대라도 맞으면 치명타가 될 게 분명했다.
“아. 어떡해.”
“괘, 괜찮을 거에요. 태람 님. 저희 쪽이 수도 많고요.”
“그래요.”
네 사람의 전투를 지켜보는 태람은 당장이라도 눈을 감고 싶었다. 그나마 아밀이 옆에 있었기에 조금은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헬 파이어!”
카이란의 외침에 화산 지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마그마 덩어리가 나타났다. 그의 마법이 지나간 자리는 검게 그을려 있었다. 아까 전보다 훨씬 큰 폭발에 마족도 꽤 타격을 입은 것 같았다. 마족에게 공격이 닿은 것을 확인한 카이란이 소리쳤다.
“지금이야!”
마족이 잠시 주춤한 사이 세호가 마치 섬광처럼 엄청난 속도로 그의 품을 파고들어 가슴을 베어냈다.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뚝뚝 떨어졌다.
“으아악!”
이어서 루시아스가 괴로워하는 마족에게 검을 휘둘렀다. 살기가 담겨있어 위험한 기운을 가득 담고 있었지만, 그의 검은 아름다운 곡선을 그렸다. 다음 순간, 툭하고 신체의 일부가 떨어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족은 이제까지 중 가장 처참한 비명을 지르며 잘려나간 팔 부분을 감싸 쥔 채 뒤로 물러났다.
“우리를 버린 당신이 어떻게!”
깊은 분노가 서려 있는 마족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그는 남은 한쪽 팔로 검은 들고 루시아스에게 사납게 달려들었다. 두 사람만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워낙 빠른 공방이었던 터라 세호는 섣불리 다가가지 못하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잔뜩 흥분한 마족에 비해 루시아스는 차분히 그의 공격을 받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균형이 깨졌다. 꽤나 힘을 다해 가한 마족의 일격을 루시아스가 피했고, 공격이 빗나가버려 잠시 비틀거리는 마족을 향해 루시아스가 검을 찔러 넣었다.
“이대로 밀어붙인다.”
옆에서 상황 지켜보던 세호가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그러자 마족의 몸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쓰러진 마족은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마왕…. 마왕님. 당신이라면 저에게 이름을 지어….”
마족은 끝내 마지막 말을 맺지 못하고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마족이었던 회색의 부연 재는 아주 미약한 바람에도 힘없이 흩어져 버렸다. 이미 그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전투에 임했던 네 사람도 뒤에서 조마조마하며 뒤에서 지켜보던 태람과 아밀도 한동안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걱정한 것에 비하면 마족은 빠르게 퇴장했고, 일행은 무사했다. 하지만 태람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끝내 남기지 못한 마족의 마지막 말이 계속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의미는 확실하게 전달되었다.
마족은 단지 자신의 이름은 원했다. 어떻게 보면 소박하고 작은 소원이었다. 그는 루시아스를 원망했지만 사실 잘못한 사람은 자신이라고 태람은 생각했다. 이 장소에 있는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태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루시아스가 아닌 자신은 지어주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차츰 기력을 회복한 동료들은 꽃향기에 이끌리는 꿀벌처럼 하나둘씩 태람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편한 장소는 태람의 곁이였다. 비록 비전투원이긴 했어도 태람은 이 파티의 정신적인 리더이자 정신적 지주였다.
정작 당사자인 태람은 아직도 얼이 빠져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너무 많은 생각들로 인해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다. 마족에 대한 안타까움을 어느 정도 떨쳐낸 태람은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직면했다.
이제 어쩌지? 루시아스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어.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페이지를 채울 수 없고, 이 세계는 무너지겠지. 내가 돌아가면 프랑이나 카이란은 많이 슬퍼할 거야. 그렇다고 그 방법을 쓰면 이번에는 세호가 마음에 걸리는데….
태람이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눈앞에서 둔탁한 소리를 내며 루시아스가 쓰러졌다.
“루시아스!”
태람은 바닥에 쓰러진 루시아스에게 달려가 그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그의 가슴에 깊은 검상이 새겨져 있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과다 출혈로 죽을 것이 분명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상처가 너무 깊어. 시간이 없다.”
루시아스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그러진 그의 입가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 말하지 마세요!”
“그대에게는 잔인할 수 있지만….”
루시아스는 태람에 손에 작은 단검을 쥐여주었다. 차가운 검의 촉감. 태람은 직감했다. 루시아스는 자신을 위해 이런 짓을 벌인 거라고. 일부로 마족의 공격을 허용한 것이라고. 아마 마지막 대치에서 입은 상처 같았다.
“일부러 당한 거죠? 제가, 제가 선택을 하지 않으니까….”
“어차피 끝을 낼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슬퍼하지 마세요. 태람 님.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은총을!”
하지만 루시아스의 상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프랑은 반복해서 치유 능력을 썼으나 소용이 없었다.
“틀렸어요. 전혀 치유가 들지 않아요.”
고개를 젓는 프랑을 보고 태람은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설마 이레귤러에게 얻은 상처라서 치유되지 않는 걸까? 이대로 루시아스는 죽는 거야?
태람은 아까 전부 쏟아냈다고 생각했던 눈물이 또다시 나올 것만 같았다.
“나도 해볼게. 힐링, 힐링, 힐링!”
“저는 포션을 부어볼게요!”
카이란과 아밀이 나섰으나 아무 방법도 통하지 않았다. 세호는 주저앉은 태람을 위로하듯 옆에서 그의 등을 토닥거렸다.
의미 없는 치료행위는 계속되었고, 일행의 분위기는 점점 무거워졌다. 그때 프랑이 고개를 숙인 태람에게 다가갔다.
“태람 님, 루시아스를 구할 방법이 정말 없을까요? 정령을 불러 보면 어때요?”
“정령?”
“아까 분명 이레귤러라고 하셨었죠? 이질적인 능력이라면 태람 님께서도 가지고 계신 게 있잖아요.”
“저는….”
“태람 님이 이곳에 남는다면 전부 해결될 거예요. 기억도 나지 않은 원래 세계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요?”
태람은 대체 어떻게 프랑이 기억에 대해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루시아스가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두 번째 방법은 있었다.
“방법이 있어요. 확실하지는 않지만.”
태람은 이대로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고 해도 후회할 것 같았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창백해지는 루시아스의 얼굴을 보니 결심이 섰다.
계속 생각했었다. 내가 가진 기억, 존재력이라고 했나? 그걸 전부 사용한다면 이 세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과정에서 설령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다고 해도 모두가 무사하다면 그렇게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지도 몰라.
마침내 결심이 선 태람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모든 고민을 해소한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편안해 보였다.
“노랑아. 나와 봐.”
[매번 필요할 때만 부르고 서운하다삑.]
태람의 눈앞에 뚱한 표정의 노랑이가 나타났다. 태람은 어쩐지 처음 이 세계에 왔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노랑이를 보고 많이 놀랐었는데 지금은 그저 귀엽기만 했다.
“마지막이니까 봐 주라.”
[그, 그게 무슨 소리냐삑.]
평소와 달리 차분한 태람의 표정에 노랑이는 당황했다.
“강제력을, 이 세계의 관리자를 불러 줘.”
[그,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다삑.]
“이미 결심했어. 나, 루시아스도 이 세계도 살릴 거야.”
[안 된다삑. 이제 조금이면 다 끝나는데 왜 그러냐삑.]
“알아. 아는데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아.”
[태람…. 안 된다삑!]
”이미 정했어. 내 남은 기억을, 존재력을 전부 줄 테니까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줘!”
태람이 말을 마치자 노랑이의 분위기가 변하며 그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에 태람과 세호의 책이 소환되었다. 두 책은 저절로 펼쳐지더니 서로를 마주 보며 강렬한 빛을 뿜어냈다. 성스러운 빛무리가 태람을 감쌌다. 태람은 몸이 붕 떠오르는 것을 감각을 느꼈다. 정신을 차려보니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
[그대의 기원, 잘 알았다.]
노랑이였던 생물은 무미건조한 말투에 한없이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도저히 좀 전까지 울먹이며 파닥거리던 생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태람은 어쩐지 존댓말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당신이 존재력인가요?”
[그렇다. 나와 이 세계는 소망이 모여서 탄생했다. 어딘가 있을 거라는 작은 믿음이 모여 생명력을 불어넣었지. 그대, 가능성의 파편을 품은 아이야. 이 세계를 되살리고자 하는가?]
“루시아스를, 이 세계를 구해줘요. 아! 그리고 세호도 원래 세계로 돌려주세요.”
[좋다. 그대에게 남아있는 기억과 이 세계에서 쌓은 새로운 기억을 합친다면 새로운 세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대가 친애하는 아이도 원래 세계로 보내주마. 대신 너는 이 영원히 이 세계에 묶여 자아를 상실한 인형이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은 것이냐?]
“괜찮아요. 그래도 좋아.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이지만 모두와의 여행은 즐거웠고, 이 세계가 저한테도 소중해졌으니까.”
태람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 그런데 기억을 드리는 거요. 아픈 건 아니죠?”
[걱정하지 말거라. 너는 그저 빛으로 돌아갈 뿐이다.]
인형이라…. 예전에 봤던 카이란의 환상 속의 나처럼 로봇 태람이 되는 걸까? 그러고 보니 세호가 전투가 끝나고 한다는 말은 뭐였을까? 태람은 점점 의식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빛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
태람이 빛에 감싸여 강제력과 거래를 진행하고 있을 때, 밑에서는 세호가 필사적으로 태람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태람 선배! 안 돼!”
왕자의 가면이 완전히 떨어졌지만, 이제와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세호는 태람을 부르며 공중에 검기를 날렸다. 아무 효과가 없었던 걸 알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루시아스의 희생에 세호도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태람과 함께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태람과 함께 루시아스의 마지막을 끝까지 지켜보는 일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려는 순간이었다.
프랑에 부추김에 태람이 마음을 바꾸고 말았다.
“젠장!”
세호가 좀 더 강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주신 리안이여. 적을 속박할 빛을 내리소서!”
프랑이 세호를 마법으로 속박했다.
“놔!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
“방해하지 마세요. 태람 님은 꿈속에서 늘 저희에게 미안해했어요. 이렇게 하는 게 태람 님을 위한….”
세호는 이어지는 프랑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어차피 전부 개같은 소리였다.
꿈이라면 선배가 시달렸던 악몽의 원인이 프랑이었다는 소리야?
세호는 프랑의 마법에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
“너 때문에 선배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아?”
“태람 님은 스스로 이곳에 남길 원했어요.”
그렇게 말하는 프랑도 자신이 없는지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선배가 정말 선배야? 너는 그걸로 괜찮아?”
프랑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해 봐.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 이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선배가 모든 기억을 잃는다는 건 확실해. 그러면 더는 선배가 아니게 된단 말이야!”
“사실 저도 이제는 모르겠어요. 태람 님이 눈을 뜨면 이곳에 영원히 남는데 이상하게 기쁘지 않네요.”
어느새 프랑의 마법은 풀려있었다. 세호는 주저 없이 프랑에게 달려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찔릴 줄 알았는데 주먹으로 끝이네요. 역시 물러요.”
프랑을 한 대 더 패주려던 세호가 힘없이 손을 내렸다.
“네가 아니었어도 어쩌면 선배는 저런 선택을 했을지도 몰라.”
사실 세호도 알고 있었다. 태람은 원래 정이 많은 사람이니까. 그는 자신이 창조한 이 세계를 사랑했다.
“내가 네 입장이었다면 나라고 달랐을까?”
무엇보다 세호는 자신도 프랑과 같은 집착을 보였을 거라 생각했다. 이런 일을 벌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없었다. 어쨌든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허탈해진 세호는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람 선배…. 태람 형…. 저는 어쩌면 좋습니까?”
*
절망에 빠진 왕자. 아니, 세호라고 했었나? 프랑은 체념이 담긴 그의 얼굴을 보니 정말로 끝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내가 알던 태람 님이 사라져간다.”
태람은 감정이 풍부해서 지켜보고 있으면 질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작은 일에도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미소가 예쁜 사람이었다. 자신의 사소한 변화도 알아채고, 괜찮냐고 물어주는 상냥한 사람이었다.
그런 주제에 힘든 일이 있을 때는 혼자서 떠안고 마는 사람이었다. 아무나 할 수 없는 희생을 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참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기에 좋아했었다.
프랑은 어째서인지 아플 정도로 요동치는 심장에 가슴을 부여잡았다. 위를 올려다보니 태람은 아직도 빛에 휩싸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어째서인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았다. 모든 게 답답했다. 자신이 진정으로 바란 것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왜 이런 순간에 깨달아 버린 걸까요?”
고개를 숙이고 있던 프랑의 눈동자에 강한 의지가 보였다. 아직 늦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모든 것을 되돌리고 싶었다.
“주신 리안이시여. 아니 누구라도 좋으니까 태람 님을 구할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때였다. 프랑의 눈앞에 노란 새가 나타났다. 프랑은 태람이 말했던 정령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대의 기원 잘 알았다.]
“당신은 태람이 말했던 정령인가요?”
[나는 이 세계를 유지하려는 힘. 네가 말한 정령은 아니다.]
“아무래도 좋아요. 당신은 태람 님을 구할 방법을 아는 거죠? 그걸 위해서라면 뭐라도 하겠어요.”
[흥미로운 아이구나. 너는 세계를 구성하는 한 축이면서 가능성의 파편을 품은 아이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프랑은 잘은 모르겠지만 가능성의 파편을 품은 아이가 태람을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와중에도 그와 인연으로 묶여있다니 기쁘다고 생각해 버렸다.
“저는 정말 구제불능이네요. 그래도 이런 저라도 괜찮다면 태람 님을 도울 수 있을까요?”
[너의 모든 기억을 내놓는다면 가능한 일이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너라는 존재의 소멸을 뜻한다.]
“그렇게 해주세요.”
프랑에게서는 그 어떤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태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좋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프랑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미련이 있다면 오직 하나 태람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안 돼! 내가 프랑과 대가를 나눌게! 프랑이 없어져 버리면 같이 놀 사람이 없잖아. 무엇보다 태람이 슬퍼할 거야.”
프랑의 앞을 카이란이 막아섰다.
“태람이 원했기도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많이 후회하고 있어. 그 잘못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렇게 할래.”
“카이란 님….”
프랑의 눈동자가 물기로 촉촉하게 젖었다. 그러나 감동도 잠시 그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섰다. 세호였다.
“저도 동참하겠습니다. 당신이 사라지면 복수를 할 수 없으니까요.”
프랑은 눈물이 쏙 들어가는 걸 느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는 충만함이 가득 찼다. 카이란도 세호도 각자의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태람이겠지만 어쨌든 자신을 구해줬다. 태람이 말해줬던 단어가 떠올랐다.
이런 게 친구일까? 프랑은 어쩐지 방금 자신이 한 생각이 너무 부끄러워졌던 터라 괜히 세호에게 틱틱거렸다.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네요.”
“피차일반입니다.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배를 위해서입니다. 저 역시 선배가 슬퍼하는 모습은 더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제가 당신보다 나이가 많아요.”
“어른 대접 받고 싶으면 아침 독이나 때려치우던가….”
“어차피 죽지도 않으면서.”
“선배만 아니었으면 당신은 벌써 예전에 제 손에 죽었습니다.”
“누가 순순히 죽어줄 줄 아세요?”
“잘은 모르겠지만 둘이 엄청나게 친해졌네? 태람이 돌아오면 좋아하겠다.”
카이란까지 난입해 세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잠시 생각에 잠겼던 강제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가진 존재력을 합산한 결과가 나왔다. 듣겠는가?]
세 사람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세호. 너는 이곳에서의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의 맺은 모든 관계가 사라지겠지.]
“선배와의 관계도 말입니까?”
[그렇다. 처음으로 돌아간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세호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이곳에서의 기억을 잃는다는 소리는 앙숙이던 옛날로 돌아간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되면 기껏 통한 마음도 쓸모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나는 선배를 계속 좋아해 왔으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지금처럼 가까워질 수 있을 거야.
“상관없습니다.”
세호는 불안함을 억누르며 강제력에게 대답했다.
[카이란. 너는 일만 년분의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네가 아는 그 누구도 너를 기억하지 못하게 되리라.]
“가족들도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네? 아쉽지만 괜찮아. 그만큼의 가치가 있으니까.”
의연한 카이란을 보고 세호와 프랑은 처음으로 그가 어른으로 느껴졌다.
[프랑. 너는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잃게 될 것이다. 신성력도, 신관과의 추억도 사라질 것이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프랑은 문득 자신을 돌봐줬던 신관의 자상한 미소를 떠올렸다.
태람 님. 저에게도 가족과 같은 존재가 있었네요.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좋았네요. 그랬다면 당신도 저에게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텐데….
“괜찮아요.”
프랑은 아쉬움을 숨기고 강제력에게 대답했다.
[좋다. 너희들에게 나눠받은 존재력으로 세계를 재구성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가능성의 파편을 품은 아이의 기억은 이미 나누어져 버렸어.]
강제력이 날갯짓하자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 없는 게이트가 생겼다.
[되찾는 것은 너희가 직접 해야 할 것이다.]
세 사람은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들어갔다.
*
루시아스는 눈을 뜨자마자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입었던 상처가 전부 치료되어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 행복한 표정으로 바닥에 잠들어 있는 아밀 뿐이었다.
“이게 대체….”
혼란스러워하는 루시아스에게 노란 새가 날아왔다. 루시아스는 작은 몸에서 느껴지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에 자신도 모르게 긴장했다. 한창 마왕으로 활동할 때도 느껴본 적 없는 위압감이었다.
“너는 누구지?”
[나는 이 세계 유지하려는 힘. 가능성의 파편을 품은 아이는 나를 이 세계의 관리자라고 부르더군.]
“관리자? 다른 동료들은 어디 있지?”
[네가 태람이라고 부르는 아이의 기억을 찾으러 떠났다. 그 아이는 너와 이 세계를 위해 희생하기를 결정했었다.]
“그래. 태람다운 선택이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건가?”
[그건 그대의 선택에 달려있다. 그대가 품은 강한 기원을 말해 봐라. 나 역시 그것에 이끌려 왔으니….]
“여행은 즐거웠다. 길고 지루한 삶에서 두 번째로 느낀 행복이었어. 그러니까 그들도 행복하길 바란다.”
루시아스는 이제까지 중 가장 밝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