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람의 파티는 룬베르로 돌아왔다. 일행의 계획은 천천히 준비해서 조용히 마계로 떠나는 것이었지만, 얼떨결에 얻게 된 유명세가 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일행 중 가장 유명해진 사람은 어이없게도 태람이었다.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를 물리쳐 수많은 실종자를 냈었던 환상 결계를 파괴한 일과 여러 마을에 지속해서 피해를 준 신에라 산맥의 사나운 드래곤을 퇴치한 일이 전부 그의 공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마왕을 잡으러 마계에 간다는 것까지 알려지자 태람의 인기는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거기에 태람이 파티란 파티는 죄다 참석하며 존재감을 피력하니 그의 위상은 끝도 없이 높아져만 갔다.
정작 당사자는 지옥을 맛보고 있었다.
오늘도 국왕이 주최하는 소규모 파티에 참석한 태람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앞에 있는 음식을 깨작거렸다. 처음에는 고급스러워 좋았던 파티 음식도 하도 먹으니 질렸고, 사람을 상대하는 것도 이제는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방에 들어가 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태람에게는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주요 사건 중 하나를 클리어 해야 했다.
원작의 메인수는 마계로 가기 전 우연히 참석한 파티에서 마지막 동료를 만난다.
자신을 죽여 줄 용사를 찾아 헤매는 마왕 루시아스. 그는 새로운 용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고 제국에 발을 들였다. 원작의 메인수는 바로 그를 만나지만 그를 만난 파티가 어떤 파티였는지 기억해내지 못한 태람은 결국 발품을 팔게 되었다.
오늘로 스물여덟 번째 파티. 태람은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루시아스야. 제발 나와 줘. 파티도 한두 번이어야 재미있지. 가챠 게임도 아닌데 너무 극악의 확률이잖아.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님! 주신 리안님! 제발 루시아스를 만나게 해주세요! 그리고 사람들이 덜 몰려오길….
그러나 태람을 발견한 국왕이 사람을 구름처럼 몰고 오며 그의 소망은 산산이 깨지고 말았다.
“오! 그대도 와 주었구려.”
“제국의 태양을 뵙습니다.”
태람이 짧게 인사를 마치자 연회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였다. 태람은 자신을 향한 찬사와 선망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연회는 잘 즐기고 있는지 모르겠군.”
“예. 폐하. 분에 넘칠 정도로 즐기고 있습니다.”
“마계에는 언제 출발을 할 예정인가?”
“늦어도 이번 달 안에는…. 준비가 끝나는 대로 출발할 것입니다.”
“조촐한 출정식이라도 열어야 하는 데 말이지. 그대에게는 거는 기대가 크다. 지난번 활약은 훌륭했네.”
태람은 벌써 수십 번이나 반복했던 말을 다시 입에 담았다.
“황송합니다. 저보다는 동료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요. 저는 정말로 한 일이 없습니다.”
“겸손하기까지 하다니 그대는 진정 용사의 귀감이오.”
태람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정말로 한 게 없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럼 편하게 있다 가게.”
국왕이 떠나자 태람에게 다가갈 기회를 엿보고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었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은밀하게 유혹하는 아름다운 영애,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며 접근하는 잘생긴 영식, 심지어는 결혼 적령기의 자녀를 둔 부인들까지 나섰다. 개중에는 순수하게 호승심을 가지고 대련을 신청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태람은 어느 쪽도 달갑지 않았다.
일행과 함께였다면 쉽게 다가오지 못했겠지만, 태람은 루시아스와의 만남을 위해 세호와 함께 사전에 프랑과 카이란을 차단해 두었다. 때문에 모든 것을 혼자 감내해야만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세호는 데려올 걸 그랬나? 태람은 후회했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었다.
“태람 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런데 자리 좀 비켜주시죠. 영애.”
“어느 가문의 영식인지 몰라도 초면에 너무 무례한 거 아닌가요?”
“태람 님은 고귀하신 분. 당신 같은 가벼운 여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뭐라고요? 정말 기분 나쁜 영식이군요. 먹다 버린 감자 같이 생긴 게.”
태람은 자신을 두고 다투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려니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저 사람들과 엮여 봤자 귀찮고 피곤해질 게 뻔했다.
“태람 님! 괜찮으시다면 저와 짧은 담소라도!”
“저런 생기다 만 영식의 말 따위 들을 필요 없습니다!”
인기 있는 게 피곤하다는 생각을 품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태람이 다 포기하고 오늘은 이대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로브를 깊이 뒤집어쓴 남자가 나타났다.
“시끄럽다. 그가 곤란해하고 있어.”
남자의 낮은 저음이 연회장을 울렸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위압감에 태람에게 다가오려고 서로를 견제하던 사람들은 전부 얼음이 된 듯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경직된 공기를 가르고 남자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고요한 연회장에는 그의 발소리만 들렸다. 어느새 태람의 발치까지 다가온 남자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태람에게 물었다.
“괜찮나?”
“네. 감사합니다….”
멍하니 대답한 태람은 남자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관만 봐도 그가 무척 잘생겼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정도로 잘생긴 남자는 흔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루시아스가 맞는 것 같지? 드디어 파티 지옥이 막을 내리는 건가?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앞구르기 하면서 봐도 남자는 루시아스가 분명했다. 태람은 소리치고 싶어지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당신은?”
모르는 척 정체를 물어보는 태람의 질문에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태람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 어쩌지? 막아야 하나? 원작도 이랬었나? 루시아스가 맞겠지?
당황한 태람이 남자의 행동을 막을지 말지를 고민하는 찰나, 머리카락에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 닿았다.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남자는 계속해서 태람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고, 태람은 남자의 손길을 의식하면서 열심히 그를 관찰했다. 손 크다. 마족이라도 체온은 따뜻하네.
남자는 얌전히 자신에게 머리카락을 내주는 태람을 보더니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막지 않는 건가? 왜지?”
“그냥요….”
“내가 그대를 노리는 적이었으면 어쩌려고?”
“당신이 나쁜 사람 같지 않아요.”
“무르군.”
“그럴지도요.”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먼저 침묵을 깬 건 태람이었다. 그로서는 남자가 루시아스라는 심증을 확신으로 굳히고 싶었다.
“얼굴을 보여주시면 안 될까요?”
“그대가 원한다면….”
태람의 요청에 남자는 아무런 망설임 없이 로브를 벗었다.
로브 속에 감춰져 있던 긴 흑발이 흘러내렸다. 강물처럼 풍성하게 펼쳐지는 머리카락. 거기에 조각상같이 뚜렷한 이목구비와 깊이를 알 수 없는 흑 안. 남자는 태람이 그렇게나 애타게 기다렸던 마왕 루시아스였다.
태람은 상상했던 거보다 더 뛰어난 루시아스의 조형미에 감탄했다. 잘난 동료들과 지내며 둔해진 미적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다.”
“그럴 때는 먼저 이름을 밝히는 게 예의래요.”
“루시아스.”
“루시아스…. 어딘지 그리운 이름이네요.”
태람은 원작에서 메인수가 말했던 대사를 그대로 읊었다. 그러자 루시아스의 눈동자가 작은 돌멩이가 던져진 호수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그립다고?”
루시아스의 눈빛이 점검 깊어지며 무미건조했던 그의 얼굴에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이상한 말을 했네요. 미안해요. 갑자기 떠오른 말이었어요.”
“…전혀 이상하지 않아.”
루시아스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탁하기만 했던 검은 눈동자가 달이 뜬 밤하늘처럼 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했던 태람도 가슴이 아려지는 처연한 미소였다. 그들을 주시하고 있던 주변 사람들도 헉하고 숨을 삼켰다.
“기묘한 감각이군.”
루시아스의 작은 중얼거림에는 그리움이 담겨 있었다.
아득히 먼 옛날 루시아스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때에는 그것이 사랑인 줄 몰랐었다.
문득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그 사람의 빈 자리를 깨달았을 때, 루시아스는 처참하게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그 뒤로는 자신을 죽여줄 용사를 찾아 헤매는 무의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오늘 파티 역시 새로운 용사가 나타났다는 소문에 참석하게 되었다.
태람을 본 순간 루시아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끌림에 사로잡혔고, 충동에 몸을 맡겼다. 실로 오랜만에 느낀 집착이었다. 너는 누구지? 아니, 누구라도 상관없다.
루시아스는 이 모든 게 운명이라고 여겼다.
“…그대의 이름을 알고 싶다.”
재차 묻는 루시아스를 보며 태람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가는 건가?”
태람은 루시아스의 무표정 아래 감춰진 아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는 특별한 행동 없이 눈빛 하나로 태람을 흔들었다. 동정심과 약간의 죄책감이 태람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다.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사랑하는 사람의 흔적을 눈앞에 두고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루시아스에게 그런 과거를 부여한 사람은 나고. 그냥 조금만 더 있을까? …아니야. 떠나야 해. 원작의 흐름대로 마무리 지어야지.
태람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메인수는 루시아스와의 첫 만남에서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리를 뜬다. 이것은 절대로 지켜져야 할 규칙이었다.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예요. 운명처럼요.”
말을 마친 태람은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운명. 운명이라…. 그대가 나의 운명인가.”
남겨진 루시아스는 운명이라는 단어를 아주 소중하게 몇 번이나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긴 복도를 지나 겨우 정원으로 빠져나온 태람은 긴장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루시아스 아주 슬퍼 보였어. 그래도 드디어 모든 등장인물이 나온 건가? 정말로 엔딩이 다가오고 있구나. 전부 끝나면 세호와 함께 돌아갈 수 있겠지?
태람은 안도감과 함께 묘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왜인지 프랑과 카이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옷이 더러워집니다.”
태람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세호가 있었다.
“이세호? 여긴 어떻게….”
“선배는 알기 쉬우니까요. 빨리 일어나기나 하세요.”
퉁명스러운 말투와는 달리 세호는 자상한 손길로 태람을 일으켜 세운 뒤 세심하게 몸에 붙은 먼지 등을 털어줬다.
“…고마워.”
“오늘도 거의 식사를 못 하셨죠?”
“그렇긴 한데.”
“따라와요.”
세호는 잘 가꾸어진 화단 앞으로 태람을 이끌었다.
“이게 다 뭐야?”
“파티 음식에 질렸다고 투덜대시길래 준비해봤습니다.”
화단 앞에는 우아한 식탁보가 깔린 원형 테이블이 설치되어 있었다. 대여섯 명 정도는 넉넉하게 앉을 수 있을 만큼 큰 테이블 위에는 투박하고 엉성한 모양의 주먹밥이 산처럼 잔뜩 올려져 있었다.
“설마 네가 만든 거야?”
모양도 엉망이고 크기도 제각각인 주먹밥들은 하필이면 화려한 그릇 안에 들어있어 허접함이 더 도드라졌다.
“생긴 건 별로지만 먹을 만할 겁니다.”
말을 마친 세호는 쑥스러운지 태람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태람은 생각지도 못한 이벤트에 어안이 벙벙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세호의 수제 요리라니. 개처럼 싸우던 시절을 떠올리니 엄청난 발전이었다. 솔직히 조금 감동을 받았다.
“싫으시면 치우겠습니다.”
“아니야! 먹어! 먹는다고.”
상을 치우려는 세호를 막아선 태람이 재빨리 주먹밥 한 개를 집어 들었다.
“잘 먹을게.”
한 입 베어 무니 고소한 쌀의 풍미와 함께 매콤하면서도 짭조름한 볶은 고기의 맛이 느껴졌다. 세호의 요리 실력은 처참한 수준이었지만 품질 좋은 고기를 아낌없이 넣은 덕분이었다.
“…맛있어.”
만약 세호의 주먹밥이 맛이 없었다고 해도 태람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행복한 얼굴로 주먹밥을 먹는 태람을 보고 세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만들었으니까 원하는 만큼 드세요. 그리고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책 봤어?”
“네. 선배치고는 완벽했어요.”
“치고는 빼라. 그런데 정말 잘한 게 맞나 싶어.”
태람이 입으로 가져가던 주먹밥을 잠시 내려놨다.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습니까?”
“루시아스를 이용하고 있잖아. 마음이 편하진 않아.”
“원작대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에요.”
“그게 문제인 거야. 내가 루시아스의 과거를 설정하지 않았더라면 루시아스는 안타까운 이별을 겪지 않아도 되었겠지.”
태람은 마지막에 보았던 루시아스의 애처로운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선배는 이런 일이 생길 거란 사실을 알았습니까?”
“당연히 아니지.”
“선배 탓이 아닙니다. 그리고 설정이 없었어도 루시아스가 끝까지 그 사람과 잘 되었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그건 알아. 그래도….”
“그렇게 그가 신경 쓰입니까?”
“그야 당연히 신경 쓰이지. 내가 창조한 애들이니까.”
세호의 눈썹이 꿈틀했다. 태람이 소설 속 인물들에게 작가로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자꾸만 생겨나는 부정적인 마음을 컨트롤하기 어려웠다.
“루시아스한테도 프랑처럼 전부 허락할 겁니까?”
“…그게 무슨 뜻이야?”
“프랑과 키스한 것처럼 루시아스한테도 쉽게 몸을 내줄 거냐고 물었습니다.”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세호의 말이 태람의 신경을 건드렸다. 매일 매일 책을 꼼꼼히 체크하는 세호가 그날 일을 모를 리는 없었다. 태람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마음이 따라가지 못했다. 자연히 고운 말투는 나오지 않았다. 프랑과 있었던 일을 세호가 알았다는 게 어쩐지 싫었다.
“너 그거 책에서 봤지? 꼭 그런 부분까지 봐야 해?”
“그럼 안 봅니까? 진행 상황 확인을 위해서라도 봐야 했어요.”
“애초에 허락한 건 아니었어. 순식간에 당한 걸 어떡해. 고작 뺨이었고….”
“뺨에 하든 코에 하든 그게 중요합니까? 여지를 주니까 당한 거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제가 그렇게 프랑이 위험하다고 말했잖아요. 그리고 상관있습니다!”
“어떻게 상관있는지 이유나 들어보자.”
“그건….”
“또 불리하면 입 다물지.”
“저는….”
“말하지 않으면 나는 몰라.”
세호가 우물쭈물하다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태람의 배에서 번개가 쳤다.
“아….”
배고프다고 요동치는 배의 몸부림은 계속되었고, 태람은 민망함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전의를 상실한 세호였다.
“하아…. 밥이나 마저 먹어요.”
민망함이 가시지 않은 태람은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주먹밥을 입안에 욱여넣었다. 세호의 마지막 말이 조금 신경이 쓰였으나 주먹밥과 함께 우걱우걱 씹어 삼켜 버렸다.
“천천히 드세요. 체하시겠어요.”
태람의 눈앞에 불쑥 물이 채워진 컵이 내밀어졌다. 고개를 드니 프랑이 서 있었다.
“프랑?”
“나도 있어!”
프랑의 뒤에 있던 카이란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의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그게 뭐예요?”
“샌드위치에요. 배고프실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나는 과일이랑 과자!”
“하지만 왕자님한테 선수를 빼앗겼네요.”
“뭐야? 그럼 태람이랑 같이 못 먹어?”
태람은 아쉬워하는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괜찮다면 두 사람도 같이 먹어요.”
“태람만 좋다면 상관없다.”
“왕자님의 허락은 필요 없답니다.”
“다 같이 먹는 거 난 좋아!”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이 바구니를 열었다. 안에는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신선한 야채와 햄과 치즈가 끼워진 샌드위치. 바삭한 베이컨이 위에 뿌려진 감자튀김. 초콜릿이 박혀 있는 머핀까지. 맛이 없을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태람! 이 머핀 꼭 먹어 봐. 내가 다른 마을까지 가서 사온 거야. 진짜 맛있어.”
“네, 식사를 마치고 후식으로 먹고 먹을게요.”
“응! 꼭이야.”
“샌드위치부터 드세요. 태람 님.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혹시 이 샌드위치는 프랑이 만든 거예요?”
“네.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든 건 처음이라 부끄럽네요.”
딱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샌드위치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맛있어요. 꼭 가게에서 파는 것 같아요.”
“과찬이세요. 태람 님은 요리 잘하는 사람이 좋으세요?”
“네! 당연하죠.”
“저 더 열심히 요리를 배울게요.”
“기대할게요. 프랑.”
어느새 조용해진 카이란이 신경 쓰였던 태람은 옆을 보았다. 카이란은 빠른 속도로 야무지게 음식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태람도 옆에 앉아 전투적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못생겼는데 짭조름해서 맛있어! 이건 무슨 요리야? 누가 만들었어?”
한참 밥만 먹던 카이란이 세호가 만든 주먹밥을 가리키며 감탄했다. 그러자 태람이 매끄럽게 설명했다. 이제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돌발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된 태람이었다.
“주먹밥이라는 건데 제가 왕자님한테 알려드렸어요.”
“그래? 왕자도 제법이네.”
“넉넉히 만들었으니 원하는 만큼 먹도록.”
“응! 고마워.”
세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음침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프랑이었다.
“태람 님과 함께 요리라니 용서할 수 없네요….”
태람은 중얼거리는 프랑의 말을 애써 무시하며 식사를 이어갔다. 내일 아침 혹시라도 독을 먹고 쓰러져있을 세호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 꼼꼼하게 복도를 살피기로 했다.
다소 소란스러웠지만 즐거운 저녁이었다.
*
<맛있는 남자 195P>
연회장에 있는 태람 님의 표정이 어딘지 어두워 보였어요. 아마 왕자님이나 다른 분들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아서 그런 걸 걸까요? 특별한 일은 없을 것 같네요. 태람 님과는 다른 이유겠지만 저도 기운이 빠졌어요.
별다른 일 없이 파티가 끝나나 했을 때, 태람 님에게 정체 모를 남자가 접근했어요.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척 봐도 너무 수상해 보였지요. 여차하면 나서서 태람 님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썩 나쁘지 않았어요.
남자는 태람 님과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갑자기 로브를 벗었답니다. 언뜻 보이는 하관이 미남인 것 같긴 했는데 역시 나가 역시나! 남자는 눈이 돌아갈 정도로 근사한 미남이었어요.
마치 뱀파이어처럼 창백한 피부. 밤하늘을 잘라 붙인 듯한 윤기 있는 긴 흑발. 무엇보다 사람을 빠져들게 하는 신비로운 흑 안이 인상 깊었어요. 섹시하고 퇴폐적인 분위기가 저희 파티에는 없는 신선한 매력을 가진 분이었죠.
떨리는 가슴을 부여 작고 두 사람을 관찰하고 있는데 남자가 태람 님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어요. 남자가 태람 님을 마음대로 만졌지만 태람 님은 순한 양처럼 얌전히 그의 손길을 받았어요. 내심 싫지는 않으신 것 같았지요.
저는 그 모습을 보고 크게 반성했답니다. 솔직히 태람 님은 한 번에 세 명이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어리석었네요. 그래요. 한계는 없었던 거예요!
오랜만에 시녀 누나와 만나 밤을 새워가며 진지한 이야기를 나눠야겠어요.
*
따가운 햇빛이 태람의 얼굴을 두드렸다. 군고구마처럼 뜨겁게 익어가는 기분이 들었지만 잠에 취한 태람은 손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최근 파티 때문에 고생한 것도 있어서 몸이 무거웠다.
“역시 아직도 자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만 일어나세요.”
누군가의 깨우는 목소리에도 태람은 몸을 뒤척이기만 할 뿐 끝내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은 깨어있었으나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귀찮았다.
“태람 선배. 빨리 일어나요.”
태람은 자신을 깨우는 사람을 외면한 채 꼬물꼬물 이불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안 일어나면 아침밥 전부 치워 버릴 겁니다.”
“야. 그건 아니지!”
마침내 태람은 눈을 번쩍 떴다. 아침밥은 누군가에게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식도락을 즐기는 그에게는 훌륭한 협박거리가 되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태람의 반응에 세호는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다.
“하하…. 농담이에요.”
반듯하게 접힌 눈매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가. 햇살에 닿아 유난히 반짝이는 백금발이 살랑거렸다. 태람은 세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장난 아니다. 평소에도 잘 생겼다고는 생각했지만, 저 정도면 얼굴만 뜯어먹고 살아도 되겠네.
태람이 진지하게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른 얼굴이다.’까지 생각했을 때, 태람의 배에서 원초적인 욕구에 충실한 소리가 울렸다.
“…아침밥은 테라스에 준비되어 있습니다.”
태람은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테라스로 이동했다.
아침상은 완벽했다. 보기만 해도 속이 편해지는 것 같은 맑은 생선 수프, 큼직하게 썰린 치즈와 토마토가 정갈하게 얹어진 샐러드, 메인은 새우, 버섯, 고기가 가득 들어간 오믈렛이었다.
“우와…. 진짜 맛있다.”
태람은 보들보들한 오믈렛의 식감과 재료들의 조화로움에 절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세호 역시 해바라기 씨앗을 탐하는 욕심쟁이 햄스터처럼 양껏 부풀어 오른 태람의 두 볼을 보고 감탄했다.
“…정말 잘 먹네요.”
“가끔은 음식 때문에 남고 싶다는 생각도 해.”
“선배답습니다.”
“그거 욕이지?”
“칭찬입니다.”
“아니면 오늘 아침에 나를 깨우러 온 게 귀여운 후배였다면? 너는 정말 귀엽지 않아.”
“귀엽지 않아서 죄송하네요. 그런 건 게임이나 소설 속에서나 있는 일입니다.”
“여기 소설 속이잖아.”
“토 달지 마시고요. 헛소리는 그만하고 빼먹은 거 없는지나 생각해 봐요. 더 늦기 전에 나가야 합니다.”
태람은 쉴 새 없이 입을 우물거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니까…. 루시아스랑 재회하는 건….”
“더러우니까 다 먹고 말하세요!”
“까탈스럽긴.”
“선배가 지저분한 겁니다.”
태람은 기겁하는 세호를 보니 놀리고 싶어졌지만 그랬다가 정말로 아침상을 치울까 봐 두려워 음식을 꼭꼭 씹어 전부 삼킨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메인수는 보석상에서 루시아스와 만나.”
“…괜찮습니까? 보석상은 수백 개가 넘을 텐데….”
세호는 저번 파티 지옥 때, 힘들어했던 태람을 떠올렸다. 태람이 또 수도에 있는 모든 보석상을 다녀야 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이번에는 괜찮아. 어디인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 그곳에 루시아스가 흥미를 보일 만한 보석이 있거든.”
“루시아스가 보석이요?”
태람에게 루시아스의 물욕 없고, 무미건조한 성격에 관해 들었던 세호가 의문을 던졌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태람은 세호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흑요석을 드워프가 직접 세공한 보석 ‘타천사의 눈물’. 그 어떤 것에도 흥미가 없는 루시아스가 단 한 가지 집착하는 물건이었다.
루시아스는 과거, 소중한 사람에게 타천사의 눈물을 선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소중한 사람이 떠난 탓에 오랜 시간 방황했고, 그때 그만 그 보석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 뒤로 루시아스는 어디를 가든 보석상만큼은 반드시 들렸다.
“수도에서 가장 큰 보석상 있잖아.”
“아. 어딘지 알겠네요.”
“거기서 특별한 흑요석을 한정 판매한대. 바로 오늘.”
“그런 정보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파티에서. 자주 만나다 보니 가까워진 백작 부인한테 들었어.”
“파티 지옥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네요.”
“두 번은 사양이지만…. 아무튼 루시아스는 반드시 올 거야.”
여행에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왕자와 마을로 내려온 원작의 메인수는 보석에 한 눈을 팔다 왕자를 놓친다. 그리고 도둑으로 오해를 받게 된다.
“루시아스가 곤란에 처한 메인수를 도와주는 뻔한 전개겠네요.”
“뻔한 전개라 미안하다. 아무튼 이번에는 문제없이 진행될 것 같지?”
“알겠습니다. 이제 엔딩에 대해서도 슬슬 기억해두셔야 할 것 같은데요?”
세호의 말에 아까까지만 해도 활기찼던 태람이 시무룩해졌다.
“아직 기억이 안 나. 마왕성에 도착해서 마왕이랑 왕자가 전투를 벌이는 건 기억이 나는데….”
“대충이라도 생각해 보세요.”
”나도 노력하고 있다고. 그리고 언제는 대충이 싫다면서.”
“아예 백지인 것보다야 낫죠. 답답하네요.”
태람도 세호 못지않게 답답했다.
왕자는 어떻게 마왕을 이겼을까? 애초에 두 사람은 왜 싸운 거지? 일단은 동료였잖아.
도무지 기억나질 않았다. 세호는 끙끙거리며 이마를 짚고 있는 태람에게 자상하게 말했다.
“늦게라도 생각나면 말해주세요. 코앞에 위기가 닥치면 어떻게든 되겠죠.”
“어? 그, 그래….”
“더 고민해봐야 소용없을 것 같습니다. 우선은 다음 사건부터 진행해 봐요.”
대충, 우선, 어떻게든. 전부 세호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태람은 아까부터 느꼈던 위화감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너도 변했구나 싶어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뚱한 표정의 세호를 보니 아침의 싱그러운 미남은 어디 갔나 싶었지만, 세호가 자신에게 영향을 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 태람은 쿨하게 넘기기로 했다.
“네. 네. 그러시겠지요. 나갈 준비나 하자.”
“…알겠습니다.”
*
태람과 세호는 마을로 내려와 여행용품을 사 모았다. 긴급 스크롤, 포션 등 마법 용품에 각종 생필품까지 더해지는 제법 짐이 늘어났다.
“필요한 건 이게 끝입니까?”
양손 가득 짐을 든 세호가 말했다. 높이 싸인 짐 때문에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아! 모포도 필요해. 마계는 엄청 춥거든. 사막을 생각하면 돼.”
“…빨리 사 오세요.”
“그렇게 노려보지 마.”
“노려본 게 아니라 힘들어서 그랍니다. 이 정도면 아밀도 혼자서는 못 들 짐이라고요.”
“도와주고 싶은데 메인수인 태람이는 연약한걸.”
세호는 어처구니없는 태람의 애교에 짜증이 났지만 그게 또 귀엽게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자신이 싫어졌다.
“귀여운 척 하지 마세요.”
“숨만 쉬어도 귀여운 걸 어떡해.”
“제 손에 짐이 없었다면 꿀밤이라도 한 대 쥐어박았을 겁니다.”
“미적 감각이 죽었다니까….”
“그렇게 끼 부리고 다니지 마십쇼. 남발해 봤자 좋은 것도 없습니다.”
“끼 부린다고? 너 요새 막말이 너무 심하다. 나는 네 선배야.”
“그런 사람을 꼰대라고 하죠.”
“짜증 나. 나갈래!”
“맘대로 하세요. 어차피 스토리 전개상 왕자와 헤어져야 하지 않습니까.”
세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잔뜩 골이 난 태람은 세호를 버려두고 떠났다.
입만 열면 전개, 전개! 열혈 작가 납셨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같이 마을 구경 좀 해보고 싶었는데…. 일하면 될 거 아니야!
태람은 마을에서 가장 큰 보석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발로 도둑 취급을 받으러 간다 생각하니 찜찜했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
태람이 보석상 안으로 들어가자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는 감정하던 보석을 급히 내려놓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게 있으시다면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일단 구경 좀 할게요.”
주인은 노골적으로 태람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층 더 친절해졌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손님.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
“괜찮아요.”
고급스러운 진열대 위로 아름다운 보석들이 은은한 광채를 발했다. 다이아몬드,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 특별한 마법이 깃든 마법 보석까지. 보석들은 다채로운 매력을 뽐내며 품격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 중 태람의 시선을 끈 것은 마법 보석이었다.
보석 안에 불꽃이 움직여! 저쪽은 물이 찰랑거리네. 예쁘다. 신기해. 태람은 그렇게 한참을 보석들을 구경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태람을 보는 주인의 시선이 싸늘하게 변했다. 할 일도 없이 죽치고 있어야 하는 태람은 태람대로 힘들었다. 도둑으로 몰려야 하기에 보석을 살 수도 없었다.
“손님, 혹시 따로 원하시는 게 있으신지?”
결국, 주인은 못마땅한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태람에게 다가왔다. 태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어색하게 웃으며 루시아스가 빨리 나타나 주기를 속으로 기원하는 것뿐이었다.
“특별히 없어요. 보석이 예뻐서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지네요.”
주인은 혀를 차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으나 바로 문제가 생겼다. 조금 전까지 감정 중이었던 보석이 없어진 것이다. 보석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보던 주인은 이내 태람을 향해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당신이 훔쳤지? 아까부터 수상해. 겉모습만 번지르르하지. 계속 구경만 하고!”
“조금 신중한 편이라 오해를 산 것 같네요. 저는 아닙니다.”
“신중 좋아하네. 벌써 몇 시간이나 지난 줄 알아?”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고르고 있었는데….”
마침내 주인은 삿대질까지 하며 태람에게 언성을 높였다.
“웃기는 소리 하지 마! 침 질질 흘리며 우리 아가들을 쳐다보고 있었잖아!”
태람은 주인의 반응이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었다.
오래 죽치고 있긴 했는데 아가라니 다른 사람이 들으면 오해하겠네. 내가 무슨 납치범이야?
“저는 훔치지 않았어요.”
“아직도 시치미야! 훔친 보석이나 내놔!”
주인은 화를 참지 못하고 투박한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지금이 위기인데 루시아스는 왜 안 오는 거야. 그렇다고 피하거나 반격하면 피해자가 될 수 없을지도 몰라. 모르겠다. 한두 대 정도 맞을 수밖에 없지.
태람은 반쯤 체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무자비한 공격이 태람의 얼굴에 닿기 직전 누군가가 주인의 팔을 잡아챘다.
“멈춰라.”
태람의 귓가에 낯익은 목소리가 와닿았다. 루시아스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루시아스의 등장에 태람의 얼굴이 활짝 폈다.
“저, 저 손님이 잘못했어요. 기웃거리며 기회를 엿보다 제 보석을 훔쳤다고요!”
주인은 덜덜 떨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얼마면 되지?”
“그것이….”
루시아스의 말에 주인이 냉큼 가격을 말했다. 그는 상당한 액수의 금화를 주인에게 던졌다. 그리고는 태람을 돌아보며 짧게 말했다.
“나와.”
“네? 그렇지만….”
“괜찮으니까 어서.”
태람은 조용히 루시아스의 뒤를 따랐다. 돈으로 전부 깔끔하게 해결된 상황. 속이 시원하긴 했지만, 가게를 나오면서도 여간 찜찜한 게 아니었다.
이러다 도둑수 속성이 생겨버리는 건 아니겠지? 괜한 오해가 생길까 두려운 태람은 빠르게 결백을 주장했다.
“저는 결백해요.”
“알고 있다.”
“알면서도 왜 저렇게 큰돈을 내셨나요?”
“너와 함께하는 시간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으니까.”
“어….”
끽해야 귀찮으니까 정도의 대답을 기대했던 태람은 내심 놀랐다.
“나에게 재물은 의미가 없다. 고작 이런 것으로 너를 도울 수 있다면 몇 번이든 그렇게 하겠어.”
루시아스의 말은 간결하지만, 힘이 있었다. 태람은 자신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 짓는 루시아스를 보고 저도 모르게 형님이라고 부르고 싶어졌다. 그에게서 어른의 여유가 느껴지는 것이 참 든든했다.
“고마워요.”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당장이라도 떠날 것 같은 루시아스에 당황한 태람은 그의 옷자락을 꽉 잡았다. 여기서 동료가 되지 못하면 보석이 탁해질 게 불 보듯 뻔했다.
“자, 잠깐만요! 루시아스 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도둑으로 몰릴 뻔했어요. 답례를 하고 싶어요.”
“루시아스.”
“네?”
“님은 붙이지 마. 루시아스가 좋다.”
“그럴게요. 루시아스. 아무튼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말해 봐요.”
“뭐든지?”
“네! 뭐든지요!”
“그런 말은 쉽게 하지 않는 것이 좋아.”
“아무한테나 하는 말은 아니에요.”
루시아스가 손을 뻗어 태람의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그는 무언가를 확인하듯 천천히 태람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태람은 루시아스를 처음 만난 날처럼 차마 그의 손을 치워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대는 참 무방비하군. 저번에도 그렇고, 내가 나쁜 사람이면 어쩔 거지?”
“루시아스는 나쁜 사람이 아니잖아요.”
“…역시 닮았어.”
“누구랑요?”
루시아스는 말없이 쓰게 웃었다.
“네 이름을 알고 싶다. 답례는 그것으로 하지.”
“태람…. 한태람이에요.”
“다르군. 그래도 기분 좋은 울림이야.”
루시아스는 처음에는 태람이 그의 자손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형식의 이름에 그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루시아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루시아스는 태람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조금만 어울려 주겠어?”
“네! 얼마든지요.”
두 사람이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예술가들이 공연하는 구역이었다. 곳곳에서 크고 작은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다들 멋지네요.”
이리저리 둘러 보는 태람과 달리 루시아스는 인적이 드문 골목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 보고 있어요?”
루시아스의 시선을 따라가니 느릿느릿한 연주에 맞춰 차분하게 노래하는 가희가 있었다. 그녀의 실력은 뛰어났고, 음색도 맑고 청아했지만 화려한 공연을 펼치는 주변과 달리 소박했기에 구경꾼이 가장 적었다.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꿋꿋하게 자신의 세계를 펼쳐 냈다.
“좋은 노래네요.”
“그 사람도 저런 노래를 불렀지.”
“소중한 사람이었나요?”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루시아스는 태람에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과거를 이야기했다.
태람은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기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분명 자신이 설정했던 이야기였는데 루시아스의 입을 통해 들으니 와닿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모래 심장을 가진 남자는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냉철함을 가지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 화려한 의복, 진귀한 보석, 아름다운 미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지만 늘 공허했다. 그 무엇도 그의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남자는 밝은 미소가 인상적인 청년을 만났다. 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물과 같은 사람이었다. 풍부한 감정과 밝고 올곧은 모습이 남자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 모습이 남자는 좋았다. 그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옆에 있었고, 남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편안함을 느꼈다.
무엇을 채워도 흘러내렸던 남자의 모래 심장이 단단해지며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행복한 나날도 잠시 유일한 빛이었던 청년이 어느 날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남자는 아무것도 몰랐던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텅 비어 버렸다. 더 큰 절망이 남자를 덮쳤다.
“아직도 내가 그에게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다.”
무미건조한 말투 속에는 깊은 슬픔이 숨겨져 있었다. 태람은 강한 죄책감에 루시아스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당신은 평생 그 이유를 모를 거야. 왜냐하면 나도 모르니까….
루시아스의 오랜 괴로움은 태람이 만들어낸 한 줄짜리 설정에 불과했다. 태람은 그저 마왕이 메인수를 빨리 좋아하게 될 적당한 이유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 외에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복잡한 심경의 태람에게 루시아스가 말을 걸었다.
“그대는 용사고, 마계로 떠난다고 들었다.”
“네. 어쩌다 보니….”
“나도 그 여정에 합류하고 싶군. 용병 일을 오래 해서 마계라면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게….”
바라던 순간이었는데 태람은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피곤한가?”
“아, 아니요.”
“고민이 있어 보이는군.”
“피곤해서 그래요. 마침 마계를 잘 아는 분을 찾고 있었는데 잘 부탁드려요.”
“빨리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 안색이 안 좋아.”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어영부영 태람의 처음 목적대로 루시아스가 파티원이 되었다.
태람에게 간단한 일정을 들은 뒤 루시아스는 떠났다. 혼자 남은 태람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 없었다.
“생각났어.”
태람은 떠올리고 말았다. 마왕이 동료가 된 이유와 왕자가 마왕을 쓰러트린 방법을. 루시아스의 숨겨진 설정은 헌신공이었다. 그는 메인수를 위해 스스로 심장을 뽑았다.
원작 속 루시아스의 마지막 대사가 태람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차피 나한테는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어. 이런 내 심장을 채워 준 것은 너니까. 기꺼이 바치겠다. 내 모든 것을.’
태람은 루시아스의 다정함이 무겁다고 생각했다.
메인수를 위해 희생한 루시아스. 그리고 이제는 나를 위해 희생하겠지. 그래도 되는 걸까?
태람은 오늘 알아낸 사실을 일단 세호에게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느새 붉게 물들기 시작한 하늘이 괜스레 태람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
한편, 왕궁에서는 프랑이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다.
“카이란 님. 계세요?”
카이란이 방문을 열자 음식을 한가득 들고 있는 프랑이 있었다.
“어쩐 일이야? 맛있는 냄새가 나네.”
“아밀이랑 같이 만들었어요. 오우거 손가락 튀김이에요.”
프랑의 마음속에 칼날이 보이네? 평소에도 왕자한테 자꾸 저러니까. 나나 태람한테만 피해가 안 간다면 상관없겠지?
카이란은 평소와는 다른 프랑의 미소에 잠시 경계심을 가졌다가 이내 긴장을 풀었다.
“맛있겠다! 나 주려고 만들었어?”
“그럼요. 마법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잠깐 들어가 되나요?”
“그래. 들어와!”
“실례할게요. 환상 마법에 관해 궁금한 점이 생겨서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프랑이 카이란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