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14)

  태람의 파티는 그린 드래곤이 산다는 신에라 산맥에 도착했다. 보이는 건 온통 황적색의 바위뿐이었다. 흡사 바위산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일행은 가파른 협곡을 걷고 또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태람은 자꾸만 뒤처졌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일행들은 처음에는 힘겨워하는 태람을 걱정했는데 어느샌가 누가 그를 챙기는지를 두고 눈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시선이 따가워. 이러다가 저번처럼 쟁탈전이 일어날 것 같은데…. 태람은 서로 안아 준다, 업어준다, 태워준다며 난리를 피우던 여행 초창기를 기억해냈다. 누구도 불평하지 않을 방법을 곰곰이 생각하다 마침내 그럴싸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저기….”

  태람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밀을 뺀 세 사람이 앞다투어 입을 열었다.

  “힘들지? 역시 내가 업어줄게!”

  “원한다면 안아 줄 수 있다.”

  “어디 불편하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그게….”

  “내키지는 않지만 업는 것도 가능하다.”

  “내키지 않으면 빠지세요. 왕자님. 태람 님! 저는 어느 쪽도 가능합니다.”

  “태워주면 좋을 텐데…. 폴리모프를 풀면 여기 사는 드래곤한테 걸려버리니까 아쉽네.”

  “…저 말 좀 할게요!”

  태람의 외침에 세 사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의 말을 잘 듣는 세 사람을 보며 태람은 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마치 잘 훈련된 강아지들 같았다.

  “부끄럽지만 일정이 너무 지체될 것 같아서 제안을 드려요. 마법으로 수레를 만들어서 제가 거기 타고 가면 어떨까요?”

  안 그래도 다들 태람을 걱정하고 있던 터라 그의 제안은 당연히 받아들여졌다.

  그렇게 결정이 나자 아밀이 나뭇가지를 모아 왔고, 카이란이 바람 마법으로 바위를 깎아 바퀴를 만들었다. 프랑이 그것들을 연결하니 순식간에 한 사람 정도라면 널찍하게 탈 수 있는 작은 수레가 완성되었다.

  “고마워요.”

  쓰러지기 직전이었던 태람은 냉큼 수레에 올라탔다. 하지만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나나! 내가 수레 밀래!”

  카이란이 번쩍 손을 들자 바로 프랑이 나섰다.

  “카이란 님은 만드는 데 고생하셨으니까 그냥 제가 밀게요.”

  뒤를 이어 세호도 나섰다.

  “그런 이유라면 나는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으니 내가 하겠다.”

  “그게 자랑은 아니죠.”

  “체격을 생각하면 내가 끄는 게 가장 적당하다. 보아하니 너는 힘들 것 같군.”

  큰 차이는 아니지만, 확실히 세호가 프랑보다 체격이 좋기는 했다.

  “누가 보면 엄청 차이 나는 줄 알겠네요.”

  “어쨌든 네가 나보다 체격이 작은 건 사실이다.”

  “그러면 여기서 내가 제일 크니까 내가 밀게!”

  승자는 의외로 카이란이었다. 그제야 두 남자의 유치한 다툼이 끝났다. 

  “…마음대로 해라.”

  “태람 님이 안 다치게 조심히 모세요.”

  “맡겨 둬! 태람. 꽉 잡아.”

  그 말을 끝으로 카이란은 개 썰매를 끄는 시베리아허스키처럼 하얀 바위 위를 미끄러지듯 빠르게 질주했다.

  “카이란! 너, 너무 빨라요!”

  

  카이란의 거친 운전에 태람은 아침에 먹은 고블린 고기가 목구멍 위로 올라오는 것 같았다.

  

  “저 진짜 힘들어요. 카이란.”

  “미안. 미안. 밀다 보니 재미있어서.”

  

  카이란이 속도를 줄였다. 어느 정도 수레에 익숙해진 태람은 카이란에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그런데 카이란.” 

  “왜?”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아무리 그래도 동족이잖아요.”

  “헤즐링이었다면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오늘 사냥하는 애는 성체니까 괜찮아.”

  “사실 미안하기도 해요. 제 목적 때문에 아무런 죄도 없는 드래곤이 희생당하는 거니까요.”

  태람은 아무리 스토리 전개를 위해서라지만 말이 통하는 생물을 해쳐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이 들었다. 죽이지 않고, 심장만 따로 빼낼 수는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토끼와 거북이도 아니고 무리겠지만.

  태람의 어두운 감정을 느낀 카이란이 다정하게 말했다.

  “여기 사는 드래곤 말이야. 엄청 포악하대.”

  “포악하다고요?”

  “응. 인간한테도 큰 피해를 줬었고, 다른 드래곤들도 얘 때문에 골치 아픈 일을 많이 당했다고 불평을 많이 했었어. 내가 일은 잘 안 하지만 일단 로드잖아. 보고를 종종 받았지.”

  “그랬군요. 그래도 아는 사이일 텐데 마음에 걸리네요.”

  “너무 어릴 때 봐서 얼굴도 기억 안 나. 찜찜한 건 어쩔 수 없지만 자업자득이야. 너무 부담가지지 마.”

  “위로해주셔서 고마워요.”

  “가장 중요한 건 얘가 성체 중에 제일 약해.”

  “이런 말 하면 안 되겠지만…. 아무도 다치지 말았으면 하거든요. 그래도 카이란이 있으니 문제 없겠죠?”

  “아…. 미안. 이번 전투 나는 참여를 못 해.”

  “왜요?”

  “드래곤은 죽을 때 잔류 사념을 남기거든. 내가 개입된 게 알려지면 곤란해서. 아무리 나라도 동족 살해는 큰 죄야. 그래서 최대한 약한 놈으로 찾은 거야.”

  “세 사람만으로도 괜찮을까요?”

  “아밀은 위험하니까 적당히 보조만 시키고…. 왕자랑 프랑은 인간치고는 꽤 강하니까. 괜찮을 거야!”

  카이란의 말에 태람은 다른 쪽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세호랑 프랑이 전투 도중에 자기들끼리 싸우면 어쩌지? 

  “프랑한테는 이미 말해뒀어.”

  “벌써요? 카이란과 프랑은 참 사이가 좋네요.”

  “응. 프랑 좋아. 나한테 잘해주니까. 마법 이론 이야기도 신나고.”

  “저번 일도 있었고 신경 쓰이긴 했었어요.”

  “만약 프랑이 정말 나한테 독을 쓰려고 했어도 소용없었을 거야. 애초에 프랑은 똑똑하니까 감히 나를 건드릴 리 없지.”

  자신감을 내비치며 여유롭게 웃는 카이란. 그 모습이 참 자연스러워서 태람은 카이란이 해맑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가 태어날 때부터 강자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마냥 순진하게만 봤던 그의 새로운 면모를 본 순간이었다.

*

  『맛있는 남자』 113P

  "저 말 좀 할게요!"

  태람 님의 한마디에 세 분은 바로 조용해졌어요. 태람 님의 다음 말을 가만히 기다리는 세 분의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고 말았답니다.

  수레라는 멋진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척척 다음 지시를 내리면서 파티를 장악하는 태람 님이 참 멋있었어요. 새로운 가능성을 엿봤어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태람 님은 그야말로 여왕수! 아니면 소악마? 이대로 장르가 바뀌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치명적인 매력이었어요.

  드래곤과 전투라니 무섭지만…. 지금은 쉬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자꾸만 떠오르는 영감을 막을 수 없었네요.

*

  한참을 가도 평온하기만 한 길. 마치 지진이 일어나거나 태풍이 불기 직전처럼 사방이 고요했다. 의문을 품은 아밀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조용하네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게 오히려 수상하군.”

  “네, 꼭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아요.”

  “애매하네….”

  차례차례 의견을 내놓는 일행들의 말을 듣고 태람도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신에라 산맥은 킬레인 산맥 못지않게 방치된 장소였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 건 확실히 이상했다.

  그래도 여차하면 카이란이 나를 데리고 도망쳐 주겠지? 태람이 적당히 안심했을 때였다. 수레를 밀던 카이란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카이란?”

  당황한 태람의 머릿속으로 카이란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태람. 들려?

  주변을 둘러봤지만, 카이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많이 놀랐지? 내 쪽에서는 네가 보이니까 들리면 고개를 끄덕거려줘.

  태람은 빠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전언 마법의 일종일까? 

  - 방금 너한테도 마법을 걸었으니 속으로 나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해 봐.

  - 카이란 들려요?

  - 응. 잘 들려. 네 목소리는 이렇게 들어도 진짜 예쁘다.

  - …고마워요. 그런데 왜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 그린 드래곤의 기척이 느껴져서 일단 순간이동 했어. 너도 데리고 가려고 했는데 수레 때문에 바로 공식을 짜기가 어렵더라. 미안해.

  - 그랬군요. 제 체력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어쩔 수 없죠.

  - 그린 드래곤은 아마 지금도 그쪽을 주시하고 있을 거야.

  - 목표물이 반대로 저희를 타깃으로 삼은 상황인 거네요.

  - 조심해. 일단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척하면서 프랑한테 가. 보호 마법을 걸어줄 거야. 

  - 네. 그렇게 할게요.

  - 본체로 공격해 올 게 뻔한데 그렇게 되면 이 일대는 전부 녹아버릴지도 몰라.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빨리 내 쪽으로 와.

  전부 녹아버린다는 카이란의 말에 태람은 오싹해졌다.

  - 그린 드래곤이 공격해 오면 알려 줄….

  

  카이란의 목소리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태람은 기분 나쁜 예감이 들었다.

  갑자기 하늘이 새까매지더니 시야가 어두워졌다. 정확히는 드래곤의 거대한 몸집이 하늘을 가려버린 것이었다.

  드래곤이 일행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비닐로 뒤덮인 짧고 통통한 꼬리. 도마뱀 같은 기다란 몸통과 짧은 목, 세 갈래로 나누어진 발가락에는 날카로운 발톱이 반짝거렸다. 등에 달린 커다란 날개가 위압감을 풍기며 펄럭거렸다.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가호를!”

  프랑이 재빨리 주문을 외우자 태람의 주변에 하얀 막이 생겼다. 

  “태람님! 카이란 님한테 가세요!”

  “태람. 최대한 멀리 숨어라!”

  “태람 님. 조심하세요.”

  “저는 걱정하지 마세요. 다들 다치면 안 돼요!”

  수레에서 내린 태람에게 다시 카이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 여기야.

  태람은 희미하지만, 카이란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필사적으로 달렸다. 카이란은 마치 전투 때의 태람처럼 수풀 속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심각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태람은 웃음이 나왔다. 드래곤 로드가 참 하찮고 귀엽네.

  “한심하게 보지 마. 나 조금 속상해.”

  “귀여워서 그랬어요.”

  “동족 살해 혐의로 처벌을 받으면 보통은 강제 동면행이야. 그러면 너랑 못 만나게 되잖아. 그건 싫어. 대신 안 들킬 정도로 살짝 보조할게.”

  카이란이 지휘자처럼 공중에 몇 번 손짓하자 태람을 포함해 모두에게 황금 막이 입혀져 있었다. 

  “왕자님은요?”

  “왕자는 소드마스터잖아. 보호막을 입혀도 어차피 깨져.”

  태람은 왕자를 검사로 설정한 것을 후회했다. 키릭 왕자의 능력만 믿어야 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도 했다. 그래도 왕자는 소설 속에서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간이니까 괜찮겠지. 이세호. 제발 진짜 다치지 마라. 다른 사람들도.

  태람이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기도하는 사이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아밀!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네 검으로는 드래곤을 벨 수 없어.”

  “네! 그래도 최대한 서포트 하겠습니다.”

  자수정 빛이 은은하게 세호의 검을 감쌌다.

  “프랑. 이번에는 장난치지 마라.”

  “…알겠습니다.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축복을!”

  못마땅한 얼굴의 프랑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협조적으로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태람은 흐뭇해졌다. 이유야 어쨌든 프랑이 세호에게 처음으로 제대로 된 보조 마법을 걸어줬다는 게 기뻤다.

  드래곤의 번들거리는 녹색 눈이 세 사람을 향했다. 곧이어 드래곤이 거대한 입을 벌리자 앞에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태람마저도 압박감을 받을 정도로 강한 존재감이었다.

  “저거 브레스죠? 곧 쏠 거 같은데 세 사람이 막을 수 있나요?”

  태람은 불안한 마음에 카이란에게 어깨를 흔들었다.

  “아슬아슬?”

  카이란의 말에 태람은 더 불안해졌다.

  드래곤이 뿜어낸 마력 덩어리가 마치 레이저포처럼 쏘아졌다. 태람은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어 눈을 돌렸다. 세호는 검으로 드래곤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막아냈다. 뒤에 태람이 있다는 걸 알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세호의 발이 묶였고, 근처의 나무며, 돌이며 모든 것이 녹아내리듯 사려졌다.

  “프랑! 빨리 보조 마법!”

  “알았어요!”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프랑이 쉴 새 없이 주문을 외웠다. 아밀은 낄 수 없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태람과 카이란처럼 뒤로 빠졌다.

  한참 뒤 마나를 소진한 드래곤이 땅으로 내려왔다.

  드래곤은 낮게 저공비행을 하며 가장 앞에 서 있는 세호를 향해 육중한 꼬리를 휘둘렀다. 세호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빠른 몸놀림으로 그 공격을 피하거나 쳐냈다.

  검기를 두른 검과 꼬리가 맞부딪칠 때마다 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겼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세호도 드래곤도 서로 치명타를 주지 못하고, 잔 상처만 늘어갔다.

  전투를 지켜보는 태람은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그때, 늘어지는 전투에 변화가 생겼다.

  “주신 리안이여. 눈앞의 적의 움직임을 봉쇄하소서! 걸렸어요. 왕자님!”

  프랑이 수십 번의 시도 끝에 마비 마법을 성공시켰다. 드래곤이 주춤한 사이 세호가 드래곤의 꼬리 끝부분을 잘라냈다. 꼬리에 큰 상처를 입고 중심이 무너진 드래곤이 휘청거렸다. 세호는 드래곤의 옆구리에 검을 찔러넣었다.

  “프랑! 네 그 개 같은 공격 마법. 그거 빨리 저기에 때려 넣어!”

  “명령하지 마세요! 주신 리안이여. 눈앞의 적을 섬멸할 철퇴를!”

  수십 개의 작은 빛의 망치가 드래곤의 벌어진 상처를 공격했다. 드래곤의 비명이 귀를 때렸다. 승기를 잡은 두 사람은 봐주는 것 없이 그대로 드래곤을 몰아붙였다.

  “제법 하네.”

  태람은 영화를 관람하듯 여유 있는 카이란이 얄미웠다. 

  몇 번의 공격 끝에 드디어 세호가 드래곤의 팔을 잘라냈다. 드래곤은 비명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세호도 프랑도 지친 듯했으나 공격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드디어 세호의 검이 드래곤의 아랫배에 박혔다.

  “주신 리안이여. 눈앞의 적에게 매서운 칼날을!”

  뒤를 이어 프랑의 빛의 칼날이 드래곤의 목을 베었다.

  드래곤은 무너지듯 쓰러졌다.

  “뒤를 부탁한다.”

  “저도 쉴게요.”

  드래곤이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한 두 사람은 픽하고 쓰러졌다. 문자 그대로 모든 힘을 다 쏟아부은 것 같았다.

  “왕자님! 프랑!”

  태람은 바로 쓰러진 두 사람에게 달려갔다.

  “카이란! 치유 관련 마법은 없나요?”

  “비슷한 건 있어! 전문은 아닌데 한 번 해볼게. 힐링!”

  카이란의 마법에 두 사람의 얼굴이 한결 나아졌지만, 호흡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카이란. 한 번만 더요! 팍팍 좀 써봐요! 네?”

  “아, 알았어. 힐링, 힐링, 힐링!”

  카이란의 힐링은 프랑의 치유만큼 효과가 좋지는 않았으나 계속 반복하자 세호와 프랑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안심한 태람은 그제야 카이란을 돌아봤다.

  “괜찮아요?”

  카이란은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축 늘어져 있었다.

  “진짜 지친다. 이렇게 마나를 많이 소진한 건 용생 처음이야.”

  “이러다 카이란까지 쓰러지겠네요. 저 두 사람을 빨리 옮겨야 하는데 어쩌죠?”

  그때였다. 생기발랄한 표정의 아밀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를 들고 태람과 카이란에게 다가왔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아밀이 들고 있는 고깃덩어리는 그린 드래곤의 일부 같았다.

  “카이란 님! 제가 내일 아침에는 특별한 요리를 만들어 드릴게요!”

  “와. 진짜?”

  “물론이죠. 저도 처음 써보는 고기라 기대가 돼요!”

  “혹시 재료 손질 힘들면 말해. 나도 도와줄게.”

  카이란이 기운을 차린 건 다행이지만 태람은 그 특별한 요리를 절대 먹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잠깐. 카이란이 드래곤을 먹는 건 닭이 치킨을 먹는 거랑 똑같은 거 아닌가? 모르겠다. 태람은 그냥 더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죄송한데 이 두 사람부터 먼저 옮겨주세요.”

  “네! 제가 하겠습니다. 카이란 님, 이 고기 좀 저쪽에 놔주세요.”

  “응!”

 빈손이 된 아밀이 세호와 프랑을 번쩍 들어 짐짝처럼 양쪽 어깨에 들쳐멨다.

*

  태람의 파티는 재정비를 위해 킬레인 산맥으로 돌아왔다.

  “이걸 매개체로 써서 차원 이동이 가능한지 연구해 볼게. 예전에 만든 마법식이 있긴 한데 아직 써본 적이 없거든. 확신은 없지만 출력은 충분할 것 같아.”

  그렇게 말한 카이란은 세호와 프랑이 고생고생해가며 얻은 그린 드래곤의 심장을 가지고 자신의 레어에 틀어박혔다. 나머지 일행은 레어 주변에 막사를 설치했다.

  하루가 지나도 나오지 않는 카이란이 걱정된 태람은 그래도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프랑을 들여보냈다. 안으로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이 나왔다.

  “카이란 님이 적어도 이틀은 기다려 달라고 하네요.”

  “일정이 지체되는군.”

  “그때까지 쉬면 되잖아요.”

  “태람 님 말이 맞아요. 아니면 왕자님 혼자 돌아가시던가요.”

  프랑의 구박에 언제나처럼 세호와 프랑의 설전이 시작되려는 찰나, 밖에서 청소하고 있던 아밀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저 마을에 가보고 싶어요!”

  “마을요?”

  “안 될까요? 식자재도 보충하려 했었는데….”

  식자재라는 말에 태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드디어 아밀의 몬스터 요리를 벗어날 찬스가 왔다는 생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요. 가요! 제가 짐 들어드릴게요.”

  “정말요? 금방 준비할게요! 아…. 짐은 괜찮아요.”

  얌전히 아밀과 나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프랑과 세호가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태람 님,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나도 간다.”

  “네. 당연하죠. 생각해보니까 저희 모처럼의 여행인데 제대로 쉰 적이 없었네요.”

  “여행이 목적인 게 아니었으니까 그렇지.”

  “꼭 그렇게 초를 치셔야 마음이 풀리십니까?”

  “갈수록 건방져지는군. 프랑.”

  “건방?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말이네요. 왕자님이 뭔데요?”

  “너는 룬베르의 제국민이고, 나는 왕자다.”

  “신전은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받았어요. 제 위에 계신 분은 오직 주신 리안 님뿐입니다.”

  태람은 2차전이 시작되기 전에 재빨리 두 사람을 떼어 놓았다.

  “프랑. 혹시 모르니까 막사에 결계를 쳐주시면 안 될까요? 왕자님은 아밀을 도와주세요.”

  “네. 카이란 님보다는 못 하겠지만 최대한 강한 결계를 치겠습니다.” 

  “알았다.”

  세호가 아밀 쪽으로 가고, 프랑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태람은 두 사람이 갈수록 유치해진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주신 리안이여. 이곳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 장막을!”

  우웅하는 소리와 함께 막사에 빛의 장막이 쳐졌다. 카이란의 구역이라 별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하니까 더 든든했다.

  그렇게 네 사람은 킬레인 산맥에서 그나마 가장 가까운 마을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들이 도착한 코른 마을은 중세 유럽풍 건물이 즐비한 아기자기한 마을이었다.

  “수도와는 분위기가 참 다르네요.”

  태람은 좋게 말하면 깔끔한, 나쁘게 말하면 칙칙한 룬베르 주변 마을과 달리 컬러풀한 코른 마을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태람 님은 코른이 처음이었죠?”

  “아무래도 그렇죠.”

  “코른은 수도와 많이 떨어져 있어서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게 됐어요. 몇 안 되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마을이기도 하고요.”

  태람은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어지는 프랑의 설명을 들었다.

  코른 마을은 법으로 엄격하게 다스려지는 수도와 달리 규율이 느슨한 편이라 예술인이 많이 이주했고, 그 결과 문화 산업이 발달했다고 한다.

  - 수도와 떨어진 작은 마을. 수도와는 상반된 분위기를 가졌음.

  고작 한 줄짜리 설정이었다. 심지어 마을 이름조차 정하지 않았었다. 태람은 자신이 설정하지 않은 부분이 이렇게나 멋지게 채워졌다는 게 신기했다. 대견하기도 한 게 이상한 기분이야.

  태람이 감성에 잠긴 틈을 타 프랑이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본 세호는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곤란해하던 태람을 떠올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태람 님, 저기 보세요! 군무가 참 우아하네요.”

  방해꾼이 없어진 프랑은 더 적극적으로 태람에게 밀착했다. 은근슬쩍 몸을 만지작거리기도 했으나 볼거리에 정신이 팔린 태람은 아무것도 몰랐다. 

  “정말 멋있어요….”

  코른은 화려했고, 매우 활기찼다. 독특한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 가인들의 아름다운 노랫가락. 마법 쇼부터 차력 쇼까지. 다양한 종류의 현란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세호만 빼고 모두가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때, 아밀이 갑자기 프랑을 불러세웠다.

  “프랑님! 저 좀 도와주세요.”

  “무슨 일이신가요?”

  “꼭 사고 싶은 식자재가 있는데 혼자 들고 오기에는 무거울 것 같아요.”

  “힘을 쓰는 일이라면 저보다 왕자님이….”

  “마법이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미약하게 반항하는 프랑을 아밀이 막무가내로 끌고 갔다.

  “그럼 태람 님. 왕자님. 이따가 광장 분수대에서 만나요!”

  태람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두 사람은 바람처럼 사라져버렸다.

  세호와 태람은 단둘만 남게 되었다. 태람이 먼저 세호에게 제안했다.

  “같이 좀 더 둘러볼까?”

  “네, 좋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세호는 태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괜히 미아라도 되면 제가 귀찮아지니까요.”

  “그 말만 안 하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태람은 투덜거리면서도 세호의 꼭 잡았다. 손바닥 전체가 맞닿아 있으니 키스도 한 사이인데 어쩐지 부끄러웠다. 옆을 보니 세호 역시 손끝부터 얼굴까지 새빨개져 있었다. 태람은 간질간질한 기분에 휩싸였다.

  두 사람은 풋풋한 분위기를 풍기며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를 나란히 걸었다.

  “이렇게 편하게 이야기하는 거 오랜만이네.”

  “그렇네요. 여행 중에는 서로 메인수와 왕자를 연기했으니까요.”

  “쭉 보면서 느낀 건데 너는 돌아가면 꼭 연기학원 끊어라.”

  “놀리지 마세요.”

  “나 진심이야. 너는 생긴 것도 딱 귀축광공이라 어울리더라.”

  “그러는 선배도 생긴 것만은 꽃수가 맞습니다.”

  “생긴 것만? 묘하게 기분 나쁘다.”

  “설마 그 더러운 성질머리로 본인을 청순가련한 꽃수라고 생각하셨습니까?”

  “내가 뭐! 나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성격이지.”

  “저돌적인 다혈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봅니다만….”

  “너처럼 까칠한 사회 부적응자한테 듣고 싶지 않거든! 친구도 없는 게.”

  “친구 있어요!”

  “어이구. 그러셨구나? 열 손가락은 채워지나요?”

  “꽃수가 될 수 없다고 짜증 내는 선배보다는 낫다고 생각합니다.”

  “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옥신각신하며 싸우던 두 사람을, 정확히는 태람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어딘가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였다.

  “치킨? 그것도 양념이야.”

  “…자, 잠깐만요. 선배!”

  “닭이 튀겨지는 소리가 들린다.”

  태람은 홀린 듯이 냄새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쩔 수 없이 세호도 그의 뒤를 따랐다.

  구석에 있는 낡고 오래된 작은 흙벽돌집에는 닭 요리라는 투박한 푯말이 붙어있었다. 태람은 잔뜩 들떠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나 이제 간단한 요리 용어는 읽을 수 있거든? 저거 닭이지? 그렇지?”

  “…마침 점심때이기도 하고 들어갈까요?”

  “응! 빨리 가자.”

  

  겉과 달리 식당의 내부는 제법 깨끗했으며 주문하자마자 금방 요리가 나왔다. 두 사람의 앞에 놓인 접시 위에는 어디를 어떻게 봐도 치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요리가 담겨있었다. 태람은 감격했다. 여기 와서 피자 비슷한 건 봤었지만 치킨은 처음 이었다.

  “그만 보고 어서 드세요.”

  과하게 행복해하는 태람을 보고 질려버린 세호였다. 

  태람은 세호의 시선을 뒤로 한 채 경건한 자세로 닭 다리를 들어 한 입 베어 물었다.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 감돌았다. 겉은 바삭했고, 안은 촉촉했다.

  “맛있다….”

  태람은 그동안 먹었던 기괴한 몬스터 요리를 전부 지워버리겠다는 듯 전투적으로 치킨을 먹고, 또 먹었다.

  “천천히 드세요. 선배. 일인일닭 이잖아요.”

  별것 아닌 말을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세호 때문에 무심코 웃어 버린 태람은 그만 우물거리던 치킨이 목에 걸리고 말았다. 캑캑거리는 태람에게 세호가 얼른 물을 떠다 주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먹으라고 했잖아요.”

  “…고마워.”

  “제발 조심하세요. 치킨 먹다 골로 가고 싶습니까?”

  그리 말하며 세호는 태람의 등을 조심스럽게 토닥여주었다. 

  “따지고 보면 너 때문이야. 아까까지 만해도 오만한 왕자였는데 갑자기 일인일닭이라고 하니까 소시민 같은 게 웃겨서….”

  “그게 저 때문이라고요?”

  “그건 아니지만….”

  입이 삐죽 튀어나온 태람을 보고 세호가 피식 웃었다.

  “하여튼 선배는 시시각각 잘도 변하네요. 그게 참….”

  “그게 참?”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세호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부끄러워서 그래? 왜 또 내가 귀엽냐?”

  “그게 아니라….”

  “아니면 뭔데?”

  태람은 여행 초반 막사에서의 일을 떠올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귀엽다고 생각했습니다. 대체 왜 선배 같은 사람을…. 이런 저한테 화가 납니다.”

  예상치 못한 세호의 급발진에 태람은 먹고 있던 치킨을 떨어트렸다. 놀리려다 오히려 역공을 당해버렸다.

  “그렇게 정색하니까 내가 다 민망하네.”

  “먼저 말을 꺼낸 건 선배입니다.”

  “하하…. 내가 장난이 심했지. 안 놀릴 테니까 치킨이나 먹자.”

  “매번 그렇게 웃으며 얼버무리려고 하니까 프랑 같은 놈이 달라붙는 겁니다.”

  “갑자기?”

  “전부터 생각했는데 선배는 프랑한테 너무 물러요.”

  “그런가? 나도 나름 선을 긋는 것 같은데?”

  “아까도 프랑이 여기저기 만져도 가만히 있었잖아요.”

  “강하게 나갈 수 없는 건 사실이지. 아무래도 제일 고생해서 만든 애라 그런가?”

  “애라고요? 프랑은 저희보다 연상입니다.”

  “그건 그런데….”

  “아무리 원작자라도 적당히 거리를 뒀으면 좋겠습니다. 메인공은 접니다.”

  “네가 그렇게 신경 쓰고 있는지는 몰랐어.”

  “엄청 신경 쓰입니다. 프랑이 선배를 안 만졌으면 좋겠다고요.”

  “그, 그래?”

  민망해진 태람은 앞에 놓은 치킨을 쿡쿡 찌르며 살코기를 갈기갈기 쪼갰다.

  “저는 선배가 프랑을 조심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프랑 설정이 극단적이긴 한데…. 내 말은 잘 듣잖아.” 

  “그런 점이 무르다는 겁니다. 이미 프랑은 원작과 달라지고 있어요. 제가 처음에 한 말 기억하세요?”

  “…여기가 현실이라고 한 거?”

  “맞아요. 지금보다 더 원작을 벗어나면 모든 기억을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는 선배와 함께 돌아가고 싶어요.”

  “…나도 그래. 너랑 같이 돌아가고 싶어.”

  “선배….”

  세호가 물끄러미 태람을 바라보더니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가까워졌다.

  

  키스 당하는 걸까? 그리 싫지만은 않았던 태람은 두 눈을 꼭 감았다. 마침내 세호의 손이 태람의 얼굴에 닿았다. 잔뜩 긴장한 태람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 순간 세호는 자신의 손가락으로 태람의 입가를 부드럽게 닦아냈다.

  “어?”

  “입에 소스가 묻었습니다.”

  “그래.”

  세호의 의아한 눈동자와 마주치자 태람은 오해를 해버린 게 민망해졌다. 아씨. 쪽팔려. 태람은 그대로 식탁에 얼굴을 묻었다. 

  “선배? 갑자기 왜 그래요?”

  “몰라! 그냥 나 좀 내버려 둬.”

*

  프랑이 낀 반지가 쉴 새 없이 반짝거렸다. 

  - 아무리 원작자라도 적당히 거리를 뒀으면 좋겠습니다. 메인공은 접니다.

  머릿속에 들리는 세호의 목소리에 프랑은 걸음을 멈췄다. 원작자? 메인공? 이어지는 대화의 내용은 생소한 내용이었다.

  “프랑 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걸음을 멈춘 프랑을 아밀이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더 살 건 없으신 거죠?”

  “없어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이제 광장으로 갈까요?”

  “네! 저쪽에 지름길이 있어요!”

  프랑은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앞서가는 아밀을 뒤따라갔다.

  카이란에게 받은 반지는 일정 거리 안에 대화 내용을 엿들을 수 있는 마법 아이템이었다. 프랑은 태람과 세호의 대화를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정리했다.

  

  태람 님. 왕자님.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시고 계시네요. 오차율, 강제력, 기억을 잃고 동화된다. 이게 태람 님이 감추고 있던 비밀인가요?

  

  프랑은 의심스러웠던 정황을 기억해냈다.

  짧은 시간에 왕자와 가까워진 태람. 지나치게 생소한 애칭으로 왕자를 부르던 태람. 때때로 미래를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던 태람. 무엇보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꼈던 강한 이끌림.

  이 세계는 태람 님이 만들어낸 이야기. 어쩌면 이 마음도 그렇게 되도록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프랑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오직 태람이 이 세계를 떠나지 못하게 할 방법을 수없이 생각할 뿐이었다.

  태람 님. 당신이 만든 이야기를, 저를 끝까지 책임 져 주세요.

  원작을 벗어나면 당신은 이곳에 남는 거겠죠?

  당신의 모든 기억이 소실 되면 영원히 제 옆에 둘 수 있을까요?

*

  저녁을 먹고 쉬고 있는 태람에게 프랑이 찾아왔다.

  “태람 님, 저랑 산책하러 갈까요?”

  “네. 마침 걷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다행이네요.”

  태람이 흔쾌히 수락하자 프랑이 방긋 웃었다. 태람은 오늘따라 생기가 넘치는 프랑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밤의 프랑도 참 예쁘다. 나를 조금…. 아니, 상당히 좋아하지만 친구가 되고 싶다는 의사도 확실히 전했고, 괜찮겠지.

  방금 전까지 프랑이 자신을 도청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태람은 태평하기만 했다.

  “코른에만 있는 아주 특별한 장소가 있는데, 가보실래요?” 

  “코른이요? 너무 멀지 않을까요?”

  “마법으로 이동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좋아요!”

  “잠깐 실례할게요.”

  

  프랑은 태람이 허락하기도 전에 태람의 손을 확 잡았다. 태람은 약간은 서늘한 프랑의 손에 움찔했다.

  “이동하려면 이렇게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해요. 꼭 잡고 있어요.”

  “네. 알겠어요.”

  “주신 리안이여. 옳은 길로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프랑의 주문과 함께 두 사람은 빛 무더기에 둘러싸였다.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익숙하지 않았던 태람이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작은 건물이 있었다.

  “정말 코른이다. 신기해요. 이대로 마왕성까지 가도 되겠어요.”

  “한 번 갔었던 곳만 이동할 수 있어서요. 마나도 많이 들고, 공간을 조율하는 거라 신경 쓸 게 많아서 자주 쓸 수는 없어요.”

  “그렇군요. 그나저나 저 건물 참 특이하네요.”

  작은 건물은 알록달록 펑키한 외견이 꼭 유원지의 놀이기구 같았다.

  “여기는 뭐 하는 곳이에요?”

  “하늘과 가까워지는 곳이에요.”

  “…하늘이요?”

  “들어가 보면 알아요. 두 명이요.”

  프랑은 답변 대신 매표소 같아 보이는 곳에서 나무로 된 네모난 조각을 샀다.

  “입장권 인가요?”

  “네, 저를 따라오세요.”

  입구로 들어가자 건물의 외견처럼 다채로운 색감의 광대 옷을 입은 여자가 짠 나타났다.

  “안녕하세용! 사랑이 이루어지는 하늘공원에 잘 오셨어용! 두 분은 이쪽 방으로 들어가시면 됩니다앙!”

  

  앙앙거리는 여자는 대꾸할 틈도 안 주더니 두 사람을 어떤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프랑. 여긴 대체 어디….”

  태람은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말을 잃었다. 그곳은 문자 그대로 별세계였다. 둥근 돔 형태로 되어있는 방 안에는 크고 작은 별이 가득 차 있었다. 

  

  “예쁘다….”

  별 들은 바닷속의 물고기처럼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며 반짝반짝 빛났다. 빙글빙글 도는 별도 있었고, 위아래로 움직이는 별도 있었다. 

  “세상에. 별이 움직여요!”

  태람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마법으로 만든 플라네타륨? 스케일이 장난 아니네.

  “이 안에서는 자유롭게 날아다닐 수 있어요.”

  어느새 둥둥 떠 있는 프랑이 태람을 하늘 위로 잡아끌었다. 부유감과 함께 태람의 몸이 붕 떠올랐다. VR이 더 발전하면 이런 느낌일지도? 신이 난 태람은 강아지가 수영하듯이 파닥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별이 움직이는 게 그렇게 신기해요?”

  “네! 이 세계는 이게 보통인가요? 저 별도 귀엽다. 꼭 살아있는 것 같아요,”

  “태람 님이 더 귀여워요. 맞다. 여기서는 이런 것도 할 수 있어요.”

  프랑이 작은 별 하나를 따서 태람의 손 위에 올려 주었다. 별은 태람의 손바닥 위에서 춤을 추더니 곧 그의 손을 빠져나왔다.

  “여기 있는 별 들이요. 하늘에 떠 있는 별이랑 똑같은 건가요?”

  “똑같지는 않지만 여기 있는 건 전부 진짜 별의 조각이에요.”

  프랑은 천천히 이동하면서 태람에게 별자리에 관해 설명해줬다. 성좌의 이름도 그 유래도 죄다 생소했다. 태람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경이로운 느낌이 들어 가슴이 벅차올랐다.

  “프랑은 여길 어떻게 알았어요?”

  “저를 돌봐주시던 신관님이 데리고 와줬어요. 고아였던 저한테는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죠. 어릴 때는 밥 한 끼 먹는 것도 힘들어서 이런 장소는 사치였어요.”

  태람은 프랑의 설정을 짤 때, 외모와 성격에 많은 공을 들였었다. 한껏 공들이며 애를 먹은 탓인지 나중에는 다른 설정을 채우는 게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가족관계 같은 부차적인 것 들을 전부 빈칸으로 두고 말았다.

  멋대로 방치한 작은 빈칸들이 프랑의 인생을 뒤바꿨다. 프랑에게 제대로 된 가족이 없는 것도 내 탓이겠지. 태람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안색이 안 좋네요. 제가 억지로 끌고 온 걸까요?”

  “아, 아니에요! 흥미로운 곳이라고 생각해요. 그냥 좀 피곤해서….”

  “기운 나게 해드릴까요? 손 내밀어 보세요.”

  “…이렇게요?”

  태람은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주신 리안이여. 저희를 포근하게 감싸 안아주소서.” 

  프랑이 주문을 외우자 둥둥 떠다니는 별 중 하나가 빛에 둘러싸였다. 잠시 후 태람의 손안에 은은하게 빛나는 별의 결정이 떨어졌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색으로 변하는 결정은 신비로웠다.

  “보고 있으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아요.”

  “별의 결정을 지니고 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해요. 사실 이렇게 가져가는 건 금지 됐지만 저는 여기 자주 왔으니까 하나 정도는 괜찮겠죠?”

  태람은 문득 세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세호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누구를 생각하고 계시나요?”

  

  프랑은 온화하게 웃고 있었으나 그를 둘러싼 공기가 차갑게 변했다. 태람은 여기서 솔직하게 말하면 세호의 사망 플래그가 확정되겠다고 생각했다.

  

  “동료들을 생각했어요. 아밀이랑 카이란이랑 왕자님이요.”

  “왜 저는 없나요?”

  “프랑은 지금 함께 있잖아요. 지금은 프랑만 생각하고 있어요.”

  “태람 님….”

  “이렇게 멋진 장소를 알려줘서 고마워요. 같이 와서 좋았어요.”

  세호는 프랑을 조심하라고 했지만 태람은 프랑을 저버릴 수 없었다. 귀찮아서 넘겨버린 설정 때문에 프랑은 가족 없는 사람이 되었다. 자신을 향한 마음조차도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 것인데 여기서 더 프랑을 상처 입힐 수는 없었다.

  “태람 님은 원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여행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카이란 님이 방법을 찾아내면 바로 돌아가실 건가요?”

  “시간이 허락한다면 조금은 이곳에 머물고 싶어요. 결국에는 돌아가겠지만요. 모두를 만날 수 없게 되는 건 아쉽지만 돌아가려고 해요.”

  “저나 왕자님이 가지 말라고 해도요?”

  “네….”

  

  프랑은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했다.

  

  “프랑?”

  “저도 태람 님의 세계로 따라가면 안 될까요?”

  “하지만…. 프랑도 여기에 기반이 있을 텐데….”

  “이곳에 큰 미련은 없어요. 저는 태람 님만 있으면 돼요.”

  태람은 프랑의 무거운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한편으로는 결코 보답 받지 못하는 그의 마음이 안타깝기도 했다.

  

  원작의 메인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가지 않지만, 왕자를 선택한다. 엔딩을 보게 되면 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태람은 적어도 지금 하는 거짓말이 프랑에게 작은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확실한 방법이 있고, 프랑이 원한다면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태람 님.”

  프랑의 입술이 태람의 뺨에 조심스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싫었어요?”

  프랑에 말에 태람이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에게서 나는 민트 향기와 미약하게 남겨진 온기가 태람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그런 태람을 보고 프랑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콩콩 뛰는 심장에 태람은 세호에게 미안해졌다.

*

  『맛있는 남자』 147P

  키릭태람 한 길만 걷기로 한 저는 프랑 님에게는 미안했지만, 그분을 두 사람한테서 억지로 떼어 놓았어요. 그리고 그날 밤 저는 격하게 후회하고 말았답니다.

  낮에 놀러 갔던 코른에 예쁘고 멋진 남자가 한가득이라 밤에도 슬쩍 빠져나와 구경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세상에! 프랑 님과 태람 님이 다정한 모습으로 하늘 정원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어요? 저렇게 아련하면서도 애상적인 장소를 선택하다니 역시 프랑 님에게는 섬세함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두 사람을 몰래 미행했어요. 들키지 않았냐고요? 사용인 육성 학교에서 배운 기척을 숨기는 스킬이 있었거든요. 덕분에 저는 아주 손쉽게 하늘 정원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태람 님은 하늘 정원이 신기한지 꽃사슴 같은 순수한 눈동자로 여기저기 둘러보고 있었고, 프랑 님은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시선으로 그런 태람 님을 뚫어지라 쳐다봤어요. 이미 충분히 훈훈한 광경이었지요.

  그러다 갑자기 프랑 님이 태람 님에게 다가갔어요. 그리고는 태람 님의 뺨에 입을 맞췄지요. 심장이 툭 바닥에 떨어지는 줄 알았답니다.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지만, 태람 님이 무슨 말을 하자 프랑 님이 웃었어요. 마치 꽃이 피어나는 싱그러움이었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입술을 깨물어 가면서 꾹 참았어요. 앞으로는 그 누구도 방해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어요. 태람 님만 행복하다면 아무래도 좋아졌어요. 그래도 왕자님이 더 분발하셨으면 좋겠네요.

*

  약속한 이틀을 훌쩍 넘겨 일주일 뒤에 나타난 카이란은 태람을 보자마자 사과부터 했다.

  “미안! 노력해 봤는데 이걸로는 부족해.”

  이미 결과를 알고 있던 태람은 속으로는 냉정하게 다음 전개를 생각하며 겉으로는 안타까운 척 연기를 했다. 이제 아무나 마계 또는 마왕을 언급하게 만들면 되었다.

  “다들 그렇게 고생했는데 아쉽네요.”

  “진짜 미안해….”

  잔뜩 시무룩해진 카이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만 만지작거렸다. 축 처진 어깨가 여간 불쌍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태람은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달랬다.

  “카이란의 탓이 아니에요. 오히려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해 주신 게 감사한걸요.”

  

  이어서 태람은 눈을 내리깔며 한없이 선량하고 가련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돌아가지 못해도 괜찮아요. 가족들이 걱정되긴 하지만….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거예요.”

  

  어색하기만 했던 초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한 태람의 연기는 이제 세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었다. 옆에 있던 세호도 장단을 맞춰줬다.

  “태람…. 상심하지 마라. 그대가 원하는 건 반드시 이뤄주겠다.”

  세호는 태람의 연기 롤모델답게 눈빛부터 남달랐다.

  “왕자님. 고마워요.”

  다른 사람들도 훈훈한 분위기에 동참했다.

  “저도 미약하지만, 힘을 보탤게요.”

  “든든하네요. 아밀.”

  “태람 님. 저도 방법을 알아보겠습니다.”

  “믿고 있어요. 프랑.”

  “나도! 혹시 매개체로 쓸 만한 아이템이 없는지 레어를 뒤져볼게.”

  “무리하지는 마세요. 카이란.”

  태람은 주위를 둘러보며 싱그럽게 미소 지었다. 

  “다들 신경 써주셔서 기운이 나네요. 저도 방법을 생각해볼게요. 출력이 높은 매개체가 있으면 될 것 같은데….”

  태람이 의도적으로 던진 떡밥을 프랑이 훌륭하게 물었다.

  “제 생각에는 드래곤에 준하는 상위 존재의 심장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상위 존재…. 또 싸우게 되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반드시 지켜드릴게요.”

  “저보다 다른 사람이 다칠까 봐 걱정돼요.”

  “태람 님은 상냥하시네요. 모두가 다치지 않게 제가 더 힘낼게요.”

  그렇게 말하며 프랑은 태람을 토닥토닥 다독여 주었다. 그러자 세호가 태람의 등을 쓸어내리고 있는 프랑의 팔을 강하게 쳐냈다. 

  “주신 리안의 심장이 좋을 것 같군.”

  선을 넘은 세호의 발언에 태람은 조심스럽게 프랑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이미 프랑의 표정을 싸늘해져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심장은 어떨까요? 드래곤을 물리칠 정도로 강하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요.”

  프랑이 다시 내 등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도 세호가 프랑의 손을 쳐냈다.

  “주신 리안이 안 된다면 대신관은 어떤가? 상징적이기도 하고 말이지.”

  “지금 싸우자는 겁니까?”

  “걸어온 싸움은 피하지 않겠다.”

  또 시작인가? 태람은 머리를 짚었다. 프랑과 세호가 틈만 나면 싸우려 드는 통에 골치가 아팠다. 원래도 사이가 안 좋긴 했지만, 여행하면서 골이 깊어진 것 같았다.

  세호도 프랑을 대할 때는 연기가 아닌 것 같아. 자연스럽게 마계로 화제를 몰고 가려고 했는데…. 망했어.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태람이 다음을 기약하여 그냥 막사로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아밀이 흉흉한 분위기를 뚫고 발랄하게 말했다. 

  “드래곤 로드를 때려잡으면 어떨까요?”

  “로드요?”

  “네! 로드는 드래곤 중에 가장 강하다고 들었어요.”

  아밀의 천연덕스러움이 세호와 프랑의 싸움은 말렸으나 또 다른 문제를 만들었다. 카이란이 태람을 애처롭게 쳐다보며 도움을 바라는 눈길을 보냈다. 강아지가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카이란아. 너 갈수록 용이 아닌 개 같아진다. 그나저나 드래곤 로드인 걸 마음대로 밝히면 안 되나 보네. 막을 사람은 나뿐인가?

  태람은 한층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아밀에게 말했다.

  “드래곤 로드는 안 될 것 같아요.”

  “왜요?”

  그야 우리 동료니까 그렇지. 태람의 속도 모르고 아밀은 마냥 해맑기만 했다. 

  “가장 약하다는 그린 드래곤도 겨우 잡았는데 드래곤 로드는 힘들지 않을까요?”

  “더 강해진 왕자님과 프랑님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 저도 더 수련할게요!”

  아밀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미 한 번 드래곤으로 실패를 했는데 또 드래곤으로 도전한다는 건 비효율적인 것 같아요. 카이란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응! 나도 태람 말에 동의해. 드래곤 말고 다른 쪽으로 생각해보자. 제발….”

  

  카이란은 팔짱을 끼고 깊이 생각에 잠겼다. 그의 작은 머리통이 핑핑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우리 마계에 가볼까?”

  “마계요?”

  “응. 마왕을 잡자. 버거울 수도 있겠지만 내가 가세한다면 할 수 있어! 드래곤이면 협력할 수 없지만 마족을 상대하는 건 문제없거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도 각오를 다질게요.”

  아밀이 설득당하자, 다른 사람들도 긍정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 같군.”

  “저도 찬성입니다. 마족이라면 저도 활약할 수 있겠네요.”

  태람은 원작대로 흐르는 상황에 안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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