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레인 산맥에 가까워질수록 몬스터의 출현이 늘어났다.
“트롤이다. 다들 전투 준비.”
세호의 한 마디에 각자 전투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못해도 서른 마리. 일반적인 파티라면 한 마리도 버거운 트롤이 무리 지어 몰려오고 있었지만, 다들 여유로웠다.
“모두 조심하세요.”
태람은 기계적으로 전투 중인 모두를 응원했다. 초반에는 몬스터와 마주하는 것도 버거워하던 태람이었다. 그랬던 그는 어디로 갔는지 이제 그의 표정에는 지루함마저 담겨있었다.
엊그제 물리친 오크들, 어제 퇴치한 고블린 떼. 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트롤 무리, 태람은 새삼 자신의 상상력의 범주가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창의적인 몬스터를 등장시킬 걸 그랬나?
넋 놓고 있던 태람의 귀에 프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람 님! 뒤로 물러나세요!”
무리에서 이탈한 트롤 한 마리가 괴기한 고함을 지르며 태람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태람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트롤을 피해 재빨리 뒤로 도망쳤다. 하지만 마땅히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 프랑이 재차 외쳤다.
“카이란 님! 길 좀 뚫어주세요. 태람 님이 위험합니다.”
“알았으니까 빨리 가!”
카이란이 커다란 불꽃 덩어리로 몬스터들을 날려버리자 프랑이 주문을 외우며 태람을 향해 달려갔다.
“주신 리안이여. 적을 꿰뚫을 창을 내리소서!”
프랑의 빠른 영창과 함께 태람을 노리던 트롤의 몸에 수십 개의 빛의 창을 꽂혔다. 트롤은 비틀거리더니 풀썩 쓰러졌다. 정말 간만의 차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오히려 제가 죄송하죠. 제대로 처리를 못해 태람 님을 위험에 빠트렸네요.”
“저야말로 멍하니 있어서….”
“…태람 님은 언제나처럼 상냥하시군요. 혹시 모르니 방어 마법을 걸어 둘게요.”
“마나 부족한 거 아니에요?”
“걱정 마세요. 왕자님의 포션을 마시면 됩니다.”
그거 세호도 허락한 거야? 무서운 프랑.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가호가 깃들기를!”
태람의 주변에 투명한 빛의 장막이 생겼다. 태람은 문득 프랑이 부러웠다. 치유와 공격을 둘 다 쓸 수 있는 신성 마법이 참 편리해 보였다. 판타지 세계인데 마법을 쓸 수 없다니 아쉽네. 태람은 마나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하다못해 검술이라도 배우려고 했지만 아무리 단련해도 햇빛에 피부만 그을릴 뿐 도통 근육이 붙지 않았다.
“그럼 저는 세 사람을 보조하러 가겠습니다.”
“네. 저는 여기에 얌전히 있을게요.”
“금방 끝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프랑은 태람을 안심시키려는 듯 예쁘게 웃었다. 여전히 청초하고 아름다운 미소에 태람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성격만 평범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태람은 수풀에 숨어 네 사람의 전투를 지켜봤다.
트롤은 차라리 오크가 귀엽다고 느껴질 정도로 징그러웠다. 기분 나쁘게 빛나는 붉은 눈에 화상을 입은 것 같이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흉측한 얼굴. 바위처럼 거칠고, 단단해 보이는 표면. 베인 곳이 꾸물꾸물 재생하는 모습은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잔챙이는 네가 처리해!”
“네! 알겠습니다!”
카이란은 주로 아밀과 행동했다. 카이란이 범위가 넓은 광역마법을 쓰면 아밀이 살아남은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식이었다. 아밀은 종종 긴 주문을 외우는 카이란을 지켜주기도 했다. 카이란도 카이란이지만 쌍검으로 트롤을 도륙하는 아밀도 참 멋있었다.
드래곤 옆에 있어도 꿀리지 않는다니 대단해. 아밀은 제국 제일의 사용인 육성 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라는 설정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정말 못 하는 게 없었다. 태람은 말랑말랑한 자신의 팔뚝을 내려다보고는 그저 한숨만 내쉬었다.
그때, 트롤의 공격을 미처 피하지 못한 아밀이 팔을 조금 다쳤다.
“아밀. 어떡해. 아프겠다.”
태람의 염려에 응답하듯 프랑이 아밀의 상처를 바로 치유해줬다.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은총을!”
프랑은 주로 서포트를 맡았다. 프랑에게도 공격 마법은 있었으나 카이란만큼 강력하지 않았고, 1대1 상황이면 몰라도 이런 대규모 전투에 사용할 광역마법은 없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보조 마법도 걸어 드릴게요. 주신 리안의 축복을!”
프랑의 손에서 하얀빛이 쏘아져 나가 아밀을 감쌌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세호가 더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프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태람은 괜히 속상해졌다.
아무리 세호의 재생력이 좀비 급이긴 하지만 너무하긴 하네. 태람은 프랑에게 세호의 치료를 부탁하고 싶었지만 둔해 빠진 메인수를 맡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태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칭찬해 달라며 쳐다보는 프랑에게 웃어주는 것뿐이었다.
세호는 이 상황이 익숙한 듯 혀를 한 번 차더니 다시 트롤 무리를 향해 뛰어들었다.
“아밀! 트롤을 한곳에 모아라.”
“네! 왕자님.”
세호의 명령을 받고 아밀은 트롤을 구석으로 몰아세우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카이란. 너는 지금부터 광역 주문을 외워.”
“응! 맡겨둬. 엄청나게 큰 걸 한 방 쏴야지.”
남은 트롤의 수는 약 십여 마리. 아마 세호는 한꺼번에 해치울 생각인 것 같았다.
“저도 돕겠습니다. 주신 리안이여. 눈앞의 적을 섬멸할 철퇴를!”
프랑의 손에서 수십 개의 작은 빛의 망치가 나타났다. 망치는 대부분 트롤들을 향해 날아갔지만 두어 개가 세호의 뒤통수를 때렸다. 빛의 망치를 맞은 세호는 살짝 휘청거리다 이내 중심을 잡았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공격 마법은 자주 쓰지 않아서 미숙하네요.”
프랑은 무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으나 명백히 고의라는 것을 세호도 알고 프랑도 알았다. 덤으로 태람도. 프랑은 틈만 생기면 저렇게 전투 중 교묘하게 세호를 공격했다.
태람은 웬일로 순순히 협력하는 프랑이 미심쩍었고, 결과는 역시나가 역시나였다. 그럼 그렇지. 저번에는 보조 마법인 척 공격 마법을 쏘기도 했었지. 아마 세호가 소드마스터가 아니었다면 크게 다쳤을 거야….
세호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다음 순간 세호의 칼에 깔끔히 베어진 트롤의 머리가 프랑의 머리에 툭 얹어졌다. 방심하고 있던 프랑은 미처 피하지 못했고, 그의 몸은 역내가 폴폴 나는 꾸덕꾸덕한 트롤의 피로 범벅이 되었다.
세호는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높낮이 없이 말했다.
“괜찮은가? 손이 미끄러졌군.”
“괜찮습니다. 왕자님.”
프랑은 언제나처럼 싱긋 웃고 있었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뒤로는 개판이었다. 프랑은 거의 대놓고 세호에게 공격 마법을 퍼부었으며, 세호도 지지 않고 몬스터를 베는 척하며 프랑에게 검을 휘둘렀다.
카이란과 아밀만 모르는 은밀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다 끝났네요!”
“다들 고생했어! 아, 배고프다.”
마지막 트롤이 쓰러지고 아밀과 카이란이 상큼하게 전투 종료를 알렸다. 화기애애한 두 사람과 달리 세호와 프랑은 서로를 외면하며 영 떨떠름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딱 봐도 앞의 두 사람보다 상태가 엉망이었다.
태람은 속으로 자업자득이라 생각했지만, 걱정이 되기는 해서 혹시라도 다친 곳은 없는지 세호와 프랑을 꼼꼼하게 살펴봤다.
세호는 경이로운 재생 능력으로 옷이 걸레짝이 된 것 말고는 별 상처가 없었다. 다만 무리해서인지 상당히 지쳐 보였다. 세호는 거친 숨을 내쉬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프랑 역시 다친 곳은 없었으나 새하얀 신관복이 원래 빨간색이었던 것처럼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역시 마법을 남발해서인지 힘겨워 보였다.
“다들 괜찮아요?”
“응! 멀쩡해. 내 몸이 더럽지만 않았으면 상으로 쓰다듬어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이따 밥 먹고 깨끗하게 씻고 나면 해드릴게요.”
“태람 님, 저도요!”
“당연하죠. 아밀도 쓰다듬어 드릴게요.”
“태람. 나도 멀쩡하다. 이따가 무릎베개라도 받고 싶구나.”
“…아, 알았어요.”
“저도 다친 곳이 없지만, 원하는 건 없어요. 오히려 태람 님을 걱정시켜버려서 죄송한걸요.”
“고생하셨어요. 프랑.”
“……이번 기회에 완벽하게 청소해야 했는데 아쉽네요.”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중얼거린 프랑의 마지막 말은 오싹했다. 프랑의 차가운 시선이 세호에게 향했고, 세호 역시 그런 프랑을 강렬하게 노려봤다. 오고 가는 살기 속에 불편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태람은 머리가 아파졌다.
무거움을 깬 건 발랄한 아밀의 목소리였다.
“저는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잠시 쉬고 계세요!”
“나도 같이 가. 도와줄게.”
그렇게 말한 카이란이 아밀에게 다가갔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저번에도 카이란님의 마법 덕분에 훨씬 수월했어요.”
“응! 대신 나는 밥 많이 줘.”
그나마 활기를 담당했던 두 사람이 떠나려 하자 태람은 순간 위기감이 들었다. 남아 있어 봤자 세호와 프랑의 신경전에 치여 험한 꼴을 당할 것이 불 보듯 뻔했다.
“저, 저도 도울게요!”
“괜찮아요! 태람 님은 쉬고 계세요!”
“그래. 힘들 텐데 쉬고 있어. 너처럼 연약한 인간한테 일을 시킬 수는 없지.”
태람의 다급한 외침에도 카이란과 아밀은 매정하게 떠나버렸다.
“그런 표정 짓지 마라. 태람. 너는 나의 소중한 사람이다. 궂은일을 할 필요는 없어. 무엇보다 오히려 가봤자 방해만 되지 않겠어?”
“태람 님은 호의에서 말한 건데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야 도움은 전혀 안 되겠지만요.”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누가 그랬나. 태람은 천연덕스러운 아밀이나 차가운 세호보다 상냥함 속에 칼이 있는 프랑이 더 매섭게 느껴졌다.
“그래요. 저보다는 카이란이 훨씬 도움이 되겠죠….”
태람은 투덜거리며 바위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두 사람도 태람의 양옆에 각각 자리 잡았다. 생각해보니 이 두 사람만 두고 가는 것도 걱정이었다. 또 싸우면 나만 피곤하지. 태람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람 님. 괜찮아요? 그러게. 왕자님 말 좀 가려서 하시지 그랬어요.”
“사실만 말했을 뿐이다.”
“태람 님이 비록 아무짝에도 쓸데없긴 하지만 그렇게 콕 짚어서 말할 건 없잖아요.”
프랑에 결정타에 태람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꾹 참았다. 같이 지내면서 느낀 건데 프랑은 확실히 자신에게 친절하고 헌신적이지만 직설적인 말도 서슴없이 내뱉고는 했다. 숨길 수 없는 독설 본능인 것 같았다. 그동안 꽤 상처를 받았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원작에서 메인수는 한 번도 프랑에게 화를 낸 적이 없으니까….
어쩌면 프랑이 메인수를 좋아하게 된 건 아무 조건 없이 옆에 있어 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아무리 얼굴이 예뻐도 저런 성격이면 다 도망가겠지.
태람이 프랑을 분석하는 사이 열기를 세호와 프랑의 묘한 다툼도 열기를 띄었다.
“태람은 수도의 어린아이보다 약하지만 귀엽다.”
“태람 님은 손재주도 없으시지만 귀여우시죠.”
그렇게 당사자를 앞에 둔 채 누가 더 태람을 무능하게 묘사하는지 대결이 벌어졌다. 해탈한 태람은 그저 웃었다. 젠장. 맘대로 지껄여라.
인내력의 한계를 시험하던 태람을 구한 건 귀여운 앞치마를 두른 아밀이었다.
“여러분! 식사하세요.”
“이거 진짜 맛있으니까 빨리 와!”
작은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고기찜과 호밀빵이 올려져 있었다. 태람이 아밀과 잡담을 하는 사이 세호와 프랑은 묵묵히 고기찜을 뜯어 먹었다. 그렇게 난리 쳤으니 배고플 만도 했다.
“잘 먹겠습니다.”
전투적으로 먹는 세호와 프랑을 질려서 쳐다보던 태람이 포크로 고기 한 덩어리를 쿡 찔렀다. 막 입 안에 넣으려는데….
“아! 태람 님. 잠시만요!”
“왜요?”
이어지는 아밀의 발언은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손가락이 통째로 들어갔네요. 더 주의해서 잘랐어야 하는 데 실수했어요.”
태람은 그만 포크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설마 아니지? 이 고기찜 자세히 보니 어딘지 초록빛이 감도네. 불길한 예감에 태람이 아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밀…. 혹시 이 고기 트롤이에요?”
“네! 트롤 고기에요. 가지고 온 재료가 아까 싸움으로 엉망이 돼버려서요. 트롤 고기라도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죠. 제국 특제 비법 소스를 써서 비린내는 하나도 안 날 거예요. 서바이벌 수업에서 배웠어요.”
아밀은 귀엽게 웃었지만, 세호와 프랑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다. 두 사람 다 이미 반 이상을 먹은 뒤였다.
“저는 오늘 고기보다 빵이 더 끌리네요….”
태람은 싱긋 웃으며 빵을 조금씩 떼어먹었다.
“태람 님. 편식은 나빠요. 이렇게 맛있는데 왜 안 드시지?”
“그러게. 어릴 때 엄마가 가져다준 것보다 아밀이 만든 게 더 맛있어.”
아밀과 카이란이 오물오물 맛있게 고기찜을 먹는 사이 세호와 프랑은 오랫동안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태람은 마치 두 사람의 영혼이 나간 것 같았다.
고소하다고 생각했던 태람은 마지막에는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세호와 프랑을 위로해줬다. 매번 두 사람의 기 싸움에 조용할 날 없는 태람의 파티가 이날은 평화로운 밤을 보낼 수 있었다.
*
수많은 몬스터의 방해를 물리치고 태람의 파티는 드디어 킬레인 산맥에 도착했다.
빽빽하게 들어찬 나무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고, 넓은 산맥은 길게 뻗어있었다. 울창하다 못해 웅장했다. 특히 산 전체를 감싸고 있는 커다란 황금빛의 장막은 일행을 압도했다.
“저게 소문의 결계인가?”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게 너무 예뻐요!”
“저렇게 넓은 범위를 감싸는 마법이라니 대단하네요.”
꿀렁거리는 게 귀엽네. 태람은 시범 삼아 결계를 손으로 툭 쳐봤다. 그러자 황금색 스파크가 튀면서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밀어냈다. 딱 가한 힘만큼 돌아온 느낌이었다.
“위험하게 뭐 하는 거야!”
“태람 님! 결계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그러다 다치면 어쩌시려고요.”
당황해서 한걸음에 달려온 두 사람 덕분에 태람은 민망해졌다. 그래도 걱정 가득한 눈빛들을 보니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어쩐지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괜찮아요. 조금 따끔할 뿐이었어요.”
“다친 곳은 없어요? 혹시 모르니까 치료받을래요?”
“포션이라도 마시겠어?”
두 사람은 태람의 몸을 이리저리 꼼꼼하게 살폈다.
잠깐. 누군지는 몰라도 자꾸 이상한 곳을 만지작거리는 것 같은데?
훈훈한 분위기가 깨지고 점차 부담스러워졌다. 결국, 태람은 두 사람을 밀쳐냈다.
“그, 그만 만져요!”
“나는 아니다.”
“저도 살펴보기만 했는데요.”
두 사람은 태람의 시선을 피하며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이것들이! 따끔하게 한마디 해주려고 태람이 입을 여는 순간, 아밀이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카이란 님이 안 보이네요? 어디 가셨을까요?”
아까부터 오디오가 하나 비긴 했지. 태람은 카이란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움직였다고 생각했다. 어디 한 번 와보라는 건가? 태람은 의욕에 불탔다.
“멀리 가진 않았겠죠. 카이란 님은 강한 마법사니까 괜찮을 거예요.”
“그래도 걱정이네요.”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
“그래요. 동물에게는 귀소 본능이 있으니까요.”
자연스럽게 카이란을 개 취급하는 세호와 프랑이 어이가 없었지만 태람은 지적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결계를 뚫을 방법이나 생각해봐요.”
태람이 모두의 등을 떠밀자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결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프랑은 마법으로, 세호는 검기로, 아밀은 발품을 팔아 결계의 취약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태람은 얌전히 구경이나 했다.
원작 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드래곤의 마법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게다가 카이란은 드래곤 중에서도 가장 강한 드래곤 로드. 그나마 가능성 있는 게 세호였지만 그는 아직 그랜드마스터 초입이었다.
일행은 그 뒤로도 이런저런 시도를 해봤지만 결계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갈 수 있는 곳까진 다 가봤는데 반응이 똑같았어요.”
“확실히 이 결계는 전부 같은 강도인 것 같군.”
“신성력도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는 소문처럼 10 써클에 도달했을지도 모르겠네요.”
결계를 둘러보던 프랑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야 드래…. 악!”
자신도 모르게 툭 튀어나온 태람의 말이 고통 속에 삼켜졌다. 어느새 다가온 세호가 그의 옆구리를 콱 꼬집은 것이다. 그야말로 살이 도려내지는 것 같은 아픔에 태람은 눈물이 찔끔 났다.
“태람 님? 괜찮으세요?”
“혹시 또 결계를 건드리셨어요?”
태람의 비명에 놀란 프랑과 아밀이 그의 곁에 다가왔다.
“벼, 별거 아니에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는데 왕자님이 잡아주셨어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넘기는 태람이었지만, 아직도 옆구리가 얼얼했다. 잘못한 건 사실이었지만 너무 가혹한 벌이었다. 태람은 원망을 담아 세호를 노려봤다. 그런 태람에게 세호가 차가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한 게 뭐 있다고 눈을 부라리십니까?”
“인간적으로 너무 세게 꼬집었잖아.”
“경고를 담은 가벼운 터치였습니다.”
“가볍다고? 완전 진심이었잖아.”
“제가 진심이었으면 선배는 벌써 죽었습니다.”
“죽일 테면 죽여보든가. 나 죽이고 혼자 남아서 매일 밤 울며 베개나 적셔라.”
“선배는 짜증나는 사람이에요.”
“누가 할 소리.”
“결계에 섣불리 손댄 것도 그렇고, 조금 전 실언도 그렇고 생각 좀 하고 사세요.”
“어차피 누군가 알아보긴 해야 했잖아! 나도 나름대로 생각하고 행동한 거야!”
“생각한다는 사람이 그 모양, 그 꼴입니까?”
태람과 세호가 조용한 말싸움을 벌이며 아웅다웅할 때, 아밀이 뭔가를 발견한 듯 소리쳤다.
“결계석을 발견했어요!”
아밀이 발견한 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보석이었다. 붉은빛이 감돌고 있는 그 보석은 가넷 같았다. 무식하게 크다. 저거 떼어가면 짭짤하겠는데?
“정말 아름다운 보석이네요.”
태람이 세속적인 생각을 하는 사이 아밀이 홀린 듯이 보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태람은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함께 정체 모를 불안함이 태람을 옥죄이기 시작했다.
“아밀! 잠깐만요! 섣불리 만지지 말고….”
“죄, 죄송해요. 이미 만져버렸어요.”
사과하는 아밀의 목소리와 함께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황금빛 결계가 일렁이더니 일행을 덮쳤고, 태람의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
눈을 뜨니 아주 익숙한 장소가 나타났다. 태람은 대학 강의실에 앉아있었다. 어째서? 의문도 잠시 앞을 보니 세호가 발표를 하고 있었다. 세호는 평소와 달리 왁스로 머리를 말끔하게 올렸고, 각 잡힌 정장을 입고 있었다.
“이상으로 발제를 마칩니다.”
“훌륭하군.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발표야.”
세호가 박수를 받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이게 대체?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태람은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강의실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어떻게든 움직이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제로 강의를 들어야 했다.
“오늘 강의는 여기까지.”
겨우 수업이 끝났다. 한숨 돌리려는데 갑자기 태람의 몸이 제멋대로 움직여 세호에게 다가갔다. 태람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입이 자동으로 열렸다. 꼭 로봇에 탑승한 느낌이었다.
“야. 오늘따라 왜 그렇게 차려입었냐? 면접이라도 있어?”
태람은 혼란스러웠다. 세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거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우리가 친했나? 아니지. 완전 원수였지. 지금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또 선배입니까?”
세호는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이 목석같은 얼굴로 태람을 내려다봤다. 귀찮아하는 표정이 너무나 역력해서, 무안할 정도였다. 태람은 아니, 그의 몸을 대신 조종하고 있는 무언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세호에게 들이댔다.
“또 그렇게 딱딱하게 군다.”
“선배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이번에도 태람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입이 열렸다. 분명 자신의 몸인데 뜻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소개팅이냐?”
“그렇습니다.”
세호는 질린 듯 한숨을 푹 내쉬더니 긍정의 답변을 내뱉었다. 태람은 갈수록 답답해졌다. 나 새끼야. 좀 닥쳐라.
“…뭐?”
태람은 순간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불편하고 불쾌한 감정. 왜 나까지 이렇게 심장이 울렁거리지?
“그럼 가봐도 됩니까.”
“어…. 응. 그래라.”
세호가 나가고 깐죽거리던 태람은 축 처진 채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그래? 기운 좀 차려. 쟤가 소개팅을 나가는 게 이렇게 충격받을 일이냐고!
화면이 전환되고 태람이자 태람이 아닌 존재는 한 커플을 미행하고 있었다. 미팅을 나갔던 세호와 처음 보는 여자였다.
미친. 나 새끼야. 아니 로봇 태람아. 지금 스토커 짓을 하는 거야? 이런 거 하기 싫다고! 태람은 소리 없이 절규했으나 변하는 건 없었다. 로봇 태람은 요지부동. 오직 그들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오늘도 데려다줄까?”
“괜찮아요.”
왕자도 아닌데 반말을 하는 세호는 신선했다. 막사에서의 일도 떠올라 괜히 민망해졌다. 반말 모드 좋았긴 했지.
“그래도….”
“정말 괜찮아요. 혼자 갈 수 있어요.”
“내가 너를 더 보고 싶어서 그래.”
“선배도 참…. 알았어요.”
여자는 수줍게 웃으며 세호에게 다가가 팔짱을 끼었다. 나무 뒤에 숨어있던 로봇 태람은 상당히 충격이었는지 굳어버렸다. 태람 역시 어쩐지 속이 불편했다.
“그럼 갈까?”
“네!”
넋 놓고 있던 로봇 태람은 그들이 이동하자 급하게 따라갔다.
그렇게 서두르던 로봇 태람은 그만 그들의 앞에 꼴사납게 넘어져 버렸다. 세호는 바닥에 엎어진 로봇 태람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태람은 자신이 한 일도 아닌데 수치심이 들었고, 먼지가 되어 날아가고 싶어졌다.
“아는 사람이에요?”
“아니. 모르는 사람.”
매정하게 등을 돌리는 세호.
로봇 태람은 일어나지도 못한 채 눈을 감았다. 로봇 태람의 강한 슬픔이 태람에게까지 그대로 전해졌다. 이제 무엇이 자신의 감정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태람은 한겨울에 반팔만 입고 밖에 나간 것처럼 가슴 속이 매우 시렸다. 눈가가 축축해졌다.
어쩐지 열 받아!
강한 분노를 느낀 순간 태람은 마침내 로봇 태람에게서 몸의 주도권을 되찾았다. 그렇게 자유를 찾자마자 기세 좋게 벌떡 일어난 태람은 세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야!”
“선배?”
세호가 의아한 눈으로 뒤돌아봤다.
“너 나 알잖아.”
세호는 정말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태람은 나사가 하나 툭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고, 서러움이 폭발했다.
“너는 아마 내가 알던 세호가 아닐 거야. 그래도 일단 한 대 맞자.”
태람이 세호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키 차이가 나서 조금 버거웠지만, 까치발을 들어 어떻게든 해냈다. 막 세호를 후려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가 발랄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미안. 미안. 네가 너무 귀여워서….”
시간이 정지하고, 화면이 일그러지더니 시야가 하얘졌다. 건물도, 나무도, 차도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무의 가까운 하얀 공간에 어떤 남자가 쓱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현대의 복장을 한 카이란이었다.
“다른 사람 꿈에서 헤매느라 늦었어.”
“꿈이요?”
“정확히는 네 심층 의식을 구현한 환상이야. 가장 강렬한 감정을 토대로 구축되는 세계지. 이건 악몽에 가깝네.”
“…악몽이라고요?”
“응. 지금의 네가 가장 신경 쓰고, 두려워하는 것이 튀어나온 거야.”
태람은 혼란스럽고 정신이 없었지만, 어느 정도 사태가 파악되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이세호가 나를 무시하는 거라고? 아니, 걔랑 나랑 아무 사이도 아닌데…. 설마 나 이세호를 좋아해?
태람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네가 살던 곳은 정말 신기하네. 마나가 없는데 마법을 쓰는 거 같아. 이 옷도 특이해. 너도 귀엽네.”
“저한테는 카이란의 마법이 더 신기해요.”
“그런데 왕자도 이쪽 세계 사람이야? 그럴 리가 없는데….”
“그렇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마 제가 저도 모르게 그렇게 설정했나 봐요.”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구현된 세계는 처음이야.”
“그게…. 제, 제가 글을 쓰는 일을 하거든요. 그래서 상상력이 풍부한가 봐요.”
“글을 쓴다고?”
“네….”
“세계를 구축할 수 있는 구상력. 남다른 존재감도 가지고 있었지. 혹시 너….”
카이란의 추론을 들으며 태람은 불안해졌다. 빨리 저 생각을 잘라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 것보다 약속을 지켜주세요.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는 만나면 소원을 이루어 준다고 들었어요.”
“굳이 따지면 내가 직접 찾아온 거지만…. 소원이 뭔데? 들어 줄게.”
“정말이죠?”
“응! 나는 거짓말 안 해.”
“저 이전에 다른 사람은 어떤 소원을 빌었나요?”
“마지막 사람이 아마 몇천 년 전이였는데…. 기억이 안 난다.”
몇천 년 전? 그럼 대체 몇 세기야? 깜짝이야. 태람은 진심으로 놀랐다. 청년의 모습이어서 잊고 있었지만, 카이란은 이 파티의 최고령이었다. 드래곤의 폴리모프는 내면을 형상화한다는 설정이었지. 어쨌든 성룡인데 저 모습인 건 정식적으로는 아직 미숙하다는 건가?
“소원을 들어주면 나를 더 좋아하게 될까?”
“지금도 저는 카이란을 좋아해요.”
“결혼할 정도로 좋아?”
“그건 아니지만…. 카이란이 저를 도와주면 저도 나중에 카이란을 도와주고 싶겠죠?”
“나를 돕는다고?”
“그래요. 그렇게 서로 신뢰를 쌓아가다 보면 더 좋은 관계가 될 거예요.”
“…신뢰?”
카이란은 생전 처음 듣는 단어를 들은 것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역시 태람은 어려워. 내 주변은 전부 내가 하라는 대로 다 해줬는데….”
“카이란이 무서워서 그랬던 게 아닐까요?”
“너는 내가 무섭지 않아?”
“네, 무섭지 않아요.”
“내가 너를 죽인다고 해도?”
“그런 마음을 먹었다면 벌써 그랬겠죠? 그럴 리 없겠지만 만약에 카이란이 저를 해친다면 귀신이 되어서 평생 저주하고, 따라다닐 거예요.”
카이란이 웃음보를 터트렸다. 나중에는 어깨를 들썩거리며 데굴데굴 굴렀다.
“아…. 웃기다. 백 년 만에 웃었네. 아까도 그렇고 역시 태람은 재미있어. 너는 귀신이 되어도 귀여울 것 같아.”
“무서운 농담이네요.”
“농담 아닌데? 어쨌든 좋아. 소원을 들어줄게.”
카이란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장난기 어린 미소가 사라지고, 어딘지 고고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나는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이자 드래곤 로드 카이란. 마주친 사람에게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기로 오래전에 맹세했지. 그러니까 뭐든지 말해 봐.”
“정말로 뭐든지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그래도 나는 그냥 드래곤이 아니고, 로드니까! 부담 없이 말해 봐. 아주 많은 걸 할 수 있어.”
“약속한 거예요?”
“응!”
원작대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해야 했다. 하지만 태람은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원작대로 해봤자 소원을 날리게 된다. 돈이나 달라고 해서 로또 맞은 셈 치고 여기 눌러사는 편이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세호가 가만두지 않을 테지. 그리고 결국엔 후회할지도 모르고 말이야. 이상한 생각을 접은 태람은 책의 흐름을 따르기로 했다.
“원래 차원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예상한 답이 아니었는지 카이란은 어린아이처럼 뚱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건 필요 없어?”
“전혀요.”
“정말로?”
“네. 정말로. 혹시 못해요? 드래곤도 만능이 아니군요.”
“…하, 할 수 있어!”
카이란이 빽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럼 원래 차원으로 보내주세요.”
“…당장은 힘들어.”
“왜요? 뭐든지 할 수 있다면서요.”
“차원 이동은 아직 아무도 성공한 적이 없고…. 강한 마력을 품고 있는 매개체가 필요해.”
“가령 드래곤 하트 같은 거요?”
태람은 눈을 반짝이며 카이란의 가슴팍을 쳐다봤다.
“내 건 안 되고….”
카이란이 힘없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살짝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태람은 비정하게 마음을 먹었다. 미안하다, 카이란. 이게 다 스토리를 위해서야.
“카이란. 방금 약속했잖아요.”
“시간이 걸릴 뿐이지 할 수 있어. 매개체도 필요하긴 하지만….”
카이란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태람은 어째 점점 찜찜해졌다.
“역시 카이란이 심장을 빼주면….”
“못 준다니까!”
“농담이에요. 어쩔 수 없으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요.”
“태람은 잔인해.”
카이란은 두 주먹을 꽉 쥐더니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동그란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말랑말랑해 보이는 뺨에 문질러 보고 싶은 볼록한 뒤통수까지. 참 귀여웠다. 진짜 삐지기 전에 그만 괴롭혀야겠다.
“카이란 울어요?”
“안 울어!”
“귀여워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태람은 두 팔을 뻗어 카이란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솜털 같은 촉감이 역시 좋았다. 카이란의 키가 더 컸기에 불편한 자세였지만 당사자인 카이란은 기분이 조금 나아진 듯했다.
“함께 좋은 방법을 생각해봐요. 일단 결계를 풀어 줄래요?”
“그럴게.”
카이란이 손짓하자 두 사람은 원래의 장소로 돌아와 있었다.
“벌써 밤이 되었네요.”
“아…. 배고프다. 그럼 돌아갈까?”
카이란이 밝게 웃으며 태람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람은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마주 잡은 그의 손은 크고 따뜻했다. 어느새 태람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카이란. 앞으로 저를 도와주세요. 일시적인 게 아닌 진짜 동료가 되어주셨으면 해요.”
“진짜 동료?”
“네. 서로를 믿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 진짜 동료요.”
태람은 정작 자신은 원작자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지만,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알았어. 그러면 나랑 같이 다른 드래곤을 사냥하자. 드래곤 하트라면 매개체가 되어 줄 거야.”
“역시 카이란! 바로 해결책을 찾아내시다니 멋져요.”
카이란은 태람이 조금만 우쭈쭈하니 금방 활기를 되찾았다.
“응! 내 정체도 모두에게 밝힐게. 유희가 끝나면 안 되니까 대외적으로는 계속 궁정 마법사로 활동해야 하지만. 동료는 거짓말을 하면 안 되니까!”
“네! 잘 부탁드려요.”
“응! 나도 잘 부탁해!”
우리 카이란. 장하다. 말 안 해도 척척이야.
태람은 자신에게 절대복종하는 애완 드래곤을 얻었다.
*
카이란은 배부른 고양이처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 태람을 보며 참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저 작은 머리통으로 얼마나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을까?
처음 만났을 때부터 태람은 숨기는 게 많았다. 그걸 알면서도 그냥 매번 속아주고 있다. 신기하게도 그게 싫지 않았으니까.
지루한 카이란의 용생에 내려온 특이한 인간. 카이란은 태람이 자신을 어여삐 여긴다면 얼마든지 맞춰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거야. 형이 말했다. 버티는 사람이 최후의 승자가 된다고. 나는 아주 오래 살 거야. 네가 어디를 가든 끝까지 쫓아갈 테니까 기대해.
카이란은 태람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
카이란의 완전한 파티 합류와 드래곤 사냥이라는 스토리 방향성이 확립되었다.
태람은 혼자 이룬 성과에 내심 뿌듯했다. 의기양양하게 걸어오는 태람과 그의 옆에 찰떡처럼 붙은 카이란. 그들을 발견한 일행들이 멀리서 다가왔다.
“두 분 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이야. 태람 님. 무사하셨군요….”
언제나처럼 씩씩한 아밀과 달리 세호와 프랑의 안색은 좋지 않았다. 특히 세호는 그야말로 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대체 어떤 환상을 봤길래 저럴까? 신경 쓰였지만 우선은 카이란을 다시 소개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쩔 수 없지. 이따가 물어보자. 태람은 걱정을 뒤로하고 다가온 동료들에게 카이란을 소개했다.
“다들 새롭게 인사하세요. 그동안 여정을 함께 해온 궁정 마법사 카이란 님은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였습니다.”
“네? 카이란 님이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라고요?”
깜짝 놀랐는지 아밀의 눈동자가 동전만큼 확대되었다.
“네. 사정이 있으셔서 정체를 숨기고 있었는데 결계를 헤매는 저희를 두고 볼 수 없었대요.”
“응! 그리고 나 드래곤이야. 다른 사람한테는 말하면 안 돼. 안 그러면 내 유희가 끝나버려.”
“카, 카이란 님이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라고요? 이 결계를 치신 분? 아, 아니! 그보다…. 드, 드래곤이요?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 그냥 예전처럼 대해주면 돼.”
아밀이 고장 난 듯 어버버 거리자 뒤에 있던 프랑이 나섰다. 프랑도 놀라긴 한 것 같았지만 아밀에 비하면 차분한 편이었다.
“카이란 님이 정체를 숨기고 계신 건 알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궁정 마법사가 그렇게 강할 리도 없고, 왕자나 대신관을 막대하지 않으니까요.”
“프랑 님은 알고 계셨군요! 제가 너무 둔한가 봐요.”
“아밀은 검사고, 저는 마법을 쓰니까요. 더 알기 쉬웠어요. 그래도 설마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일 줄은 몰랐습니다. 벌써 몇백 년 전부터 있던 전설 같은 존재였으니까요. 드래곤이라면 납득이 가네요. 그런데 카이란 님은 대체 몇 살이세요?”
“안 샌 지 오래됐는데…. 대충 만 살?”
“새삼스럽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저는 프랑. 주신 리안의 첫 번째 시종입니다. 괜찮으시다면 나중에 제게 결계 마법을 알려주세요. 가호와 융합하면 강력해질 것 같아요.”
“응! 다시 잘 부탁해!”
태람의 걱정과 달리 프랑은 자연스럽게 카이란을 받아들였다.
“저도 다시 소개할게요! 룬베르 제국의 시종 아밀입니다. 아까는 좋은 꿈을 꾸게 해주셔서 감사했어요. 정말 다양한 커플들이 나와서 행복했어요!”
“나도 네 내면이 직선적이면서 유쾌해서 좋았어. 욕구와 욕망에 충실했지.”
“하하…. 그건 조금은 민망하네요.”
아밀 역시 카이란을 평소처럼 대했다. 태람이 다행이라고 한숨을 돌렸을 때였다. 아까부터 상태가 안 좋아 보이던 세호가 갑자기 겁을 뽑아들었다.
“태람한테서 떨어져라. 드래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싸늘한 세호의 말에 와장창 깨졌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세호의 눈동자를 본 태람은 그가 걱정되었다. 평소보다 더 날이 서 있는 건 환상 때문일까? 일단은 막자! 태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호를 타일렀다.
“왕자님, 카이란은 저희를 해칠 생각이 전혀 없어요. 이제까지 잘 협력해 왔잖아요.”
“하지만…. 저 드래곤 때문에 선배가….”
태람은 이번만큼은 연기를 잊을 정도로 진심으로 놀랐다. 세호가 왕자의 가면을 벗어버리다니.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와, 왕자님…. 나중에 이야기할까요? 오늘은 다들 지쳤으니….”
어떻게든 수습하려는 태람을 방해한 건 카이란이었다.
“세호야. 야박하게 굴지 마. 나는 태람이 좋아. 앞으로 말도 잘 듣기로 했어.”
“세호? 분명 태람 님이 만든 왕자님의 애칭이었죠? 최근에는 쓰신 적이 없었는데….”
“그, 그건 제가 환상에서 왕자님을 봐서 그래요!”
수습을 위해 태람이 내뱉은 말의 파장은 상상 이상으로 컸다. 프랑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살기마저 감도는 게 어쩐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태람은 프랑의 상태 역시 세호 못지않게 심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카이란 님한테 들었어요. 환상은 그 사람의 가장 강렬한 감정을 보여준다고요. 태람 님은 왕자님을 쭉 생각하셨군요.”
점점 어두워지는 프랑의 눈빛과는 반대로 아밀은 반짝이는 눈빛으로 혼자 딴 세상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분명 또 망상이나 하고 있겠지. 그런 거 아닌데…. 태람은 아밀의 도움을 포기하고 일단 움직이기로 했다. 어쨌든 수습해야 해!
“아마 더 시간이 지났다면 프랑이나 다른 동료도 나왔을 거예요. 카이란이 저를 너무 빨리 찾아서 이런 일이….”
프랑은 이미 태람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태람 님의 첫 번째는 늘 왕자님이었어요. 어차피 저한테는 애칭도 없으니까요.”
아까의 세호처럼 프랑도 평소보다 격앙된 감정을 내비쳤다. 태람은 프랑이 본 환상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어떡해. 세호한테 나를 뺏기는 환상이라도 봤나 봐.
“왕자님이 사라지면 저에게도 기회가 올까요?”
음침하게 중얼거리는 프랑의 몸 주위에 금빛 아우라가 생겼다. 주변의 공기가 변하기 시작하며 태람은 이질적인 감각에 휩싸였다.
“왕자님은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와 교전 끝에 사망했습니다.”
“응? 나?”
“잠깐만요! 프랑!”
다음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응축된 황금색 덩어리 수십 개가 세호에게 날아갔다.
“왕자님! 피해요!”
태람의 목소리를 들은 세호가 재빨리 마나 블레이드를 생성해 프랑의 공격을 막았다. 황금색 덩어리는 완벽히 가로막혔으나 그 기세를 잃지 않았다. 세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괴로워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세호의 기세도 프랑만큼이나 흉흉해졌다.
“청소에요. 더는 제 것을 잃고 싶지 않으니까요.”
“…원한다면 상대해 주마.”
“프랑! 왕자님! 그만두세요!”
이미 전투에 돌입한 두 사람에게는 태람의 외침은 닿지 않았다.
“한 번쯤은 너를 베어보고 싶었다.”
“그거 우연이네요. 저도 그런데!”
프랑은 본격적으로 세호를 향해 무자비하게 마법을 쏟아냈고, 세호도 검에 기운을 실어 대응했다. 태람은 안절부절못했다. 저 괴수 대결에 끼어들 수도 없고, 어쩌면 좋아.
태람이 옆을 보니 아밀은 아직도 망상 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난리 통에 저러고 있다는 게 이상했다. 아밀 역시 환상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몰라.
이렇게 되니 태람을 도와줄 수 있는 건 어떻게 보면 이 사단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카이란뿐이었다.
“카이란! 두 사람을 말려줘요.”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야. 혈기가 넘치네.”
관전 모드로 들어간 카이란은 어울리지 않게 나이에 걸맞은 고루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래도 다들 결계에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카이란한테도 책임은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은 기운을 너무 많이 써서 피곤해.”
“누군가 다치기라도 하면 저는 상처받을 것 같아요. 너무 슬퍼서 카이란을 평생 쓰다듬어 주지 못 할지도 몰라요.”
태람이 반쯤 협박하자 그제야 카이란이 반응을 보였다.
“그, 그건 싫은데….”
“그러면 도와주세요.”
“내가 뭘 하면 돼?”
“일단 프랑한테 사정없이 물을 뿌려주세요.”
태람은 프랑이 진정하면 세호도 곧 정신을 차릴 것이라 생각했다. 두 사람 다 상대하는 건 아무리 카이란이라도 힘들 테니까….
“휘말리지 않게 뒤로 물러서.”
“고마워요. 카이란.”
카이란이 주문을 외우자 프랑의 머리 위로 작은 구름이 생기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프랑은 귀찮다는 듯이 구름을 없애려 했으나 구름은 흩어졌다가도 다시 뭉쳤다. 구름을 치우려는 시도를 몇 번이나 반복한 끝에 힘이 빠진 프랑이 공격을 멈췄다.
그러자 태람의 예상대로 세호도 공격을 멈췄다. 마침내 싸움이 끝났다.
“제 말 좀 들어줘요. 프랑.”
“태람 님….”
물에 흠뻑 젖은 프랑이 그제야 태람을 주시했다. 한소리 하려고 했던 태람은 처연한 프랑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물에 젖은 미남의 위력은 대단했다. 화내지는 말고 살살 달래보자. 따지고 보면 결계에 의한 환상 때문이니까….
“프랑.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원하는 걸 말해 봐요.”
“태람 님이 제 것이 되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제가 멋대로 프랑의 마음을 재단할 수는 없지만, 저를 좋아하죠? 그래서 왕자님한테 질투도 한 거고요.”
프랑은 태람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프랑. 그런 감정은 너무 불확실하지 않나요?”
“네?”
“저는 사랑을 안 믿어요.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래도 결국 다들 변하잖아요. 그런 것보다 더 멋진 관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게 뭔데요?”
“친구요. 친구는 아무 조건 없이 마음만 맞으면 평생 같이 있을 수 있잖아요.”
“친구….”
태람은 되는대로 지껄인 것이었지만 반쯤은 진심이었다.
“프랑은 어떻게 생각해요?”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신다면 어떤 것이라도 되고 싶어요.”
“저희는 이미 친구니까 허락하고 말고도 없죠.”
“저희가 이미 친구?”
“그래요! 저는 왕자님도 친구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친구끼리는 싸우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부탁할게요.”
“태람 님이 원하신다면 그렇게 할게요.”
프랑은 여전히 떨떠름해 보였지만 태람의 의도를 이해해준 것 같았다.
“괜찮아요. 사람은 누구나 잘못된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걸 잡아주는 게 친구니까요.”
프랑은 여전히 왕자는 싫었지만, 안심했는지 미소가 돌아온 태람을 보자 마음이 편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안정감이었다.
*
프랑은 자신이 길바닥에서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친구도 가족도 없는 언제 죽어도 상관없는 가치 없는 목숨. 그래서 더 거침없이 행동했었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신성력이 발현되었다. 프랑은 미천한 자에서 신의 뜻을 품은 고귀한 자가 되었다. 그러나 프랑은 여전히 혼자였고, 세상은 부조리했다. 신앙심이 없어도 신성력을 쓸 수 있다는 모순. 밑바닥이었던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권력자들. 모든 것이 우스웠다.
죽지 못해 사는 프랑에게 태람이 나타났다.
마치 신이 안배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마음속으로 들어온 독특하고 사랑스러운 이 세계의 사람. 벌써 몇 번째일까요? 당신은 또다시 제 세상을 무너트렸어요.
*
“오늘 일은 죄송했습니다.”
“아니에요. 환상 탓도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태람 님.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요. 내일 봐요.”
프랑이 막사로 들어갔고, 어느 정도 사태가 진정되었다고 판단한 태람은 세호에게 다가갔다.
“너 괜찮아?”
“…괜찮습니다. 제가 실수를 했네요.”
괜찮다고 말하는 세호였지만 얼굴은 아까보다 창백했다.
“네가 본 환상…. 아니다. 너도 이제 쉬어.”
“네. 선배도 쉬세요.”
세호까지 들어가니 태람은 겨우 한숨을 돌렸다. 이제 좀 쉬려는 찰나, 카이란이 태람을 향해 우다닥 달려왔다.
“태람! 오늘 나 힘냈으니까 상 줘!”
카이란은 귀여웠으나 이리저리 시달린 태람은 너무 피곤했다.
“카이란 님! 괜찮으시다면 저한테 마법 아이템을 보여주세요. 인간에게는 없는 특별한 것을 가지고 계실 것 같아요.”
“음, 그래! 어떤 종류를 보여줄까?”
아밀의 말에 카이란의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나며 화제가 넘어갔다. 태람은 아밀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고, 아밀은 믿음직하게 웃어줬다.
“마법 검에 관심이 많아요.”
“마법 검 좋지. 이리 들어와. 보여줄게.”
모두가 각자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니 남은 건 태람 뿐이었다.
“잠깐, 이렇게 되면 오늘 불침번은 나야?”
태람은 오늘따라 일진이 사납다고 생각했다.
*
『맛있는 남자』 73P
카이란 님이 그 유명한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였다니 너무 놀랐어요. 제 인생 최초로 등장한 인외공이에요. 만 년 넘게 산 드래곤이라니 분명 경험도 풍부하시겠죠?
태람 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것은 역시 귀축광공인 왕자님이라고 쭉 생각해왔지만 매일 빵만 먹으면 질려서 가끔은 별식을 먹어 줘야 하잖아요? 저는 이제 4p도 괜찮은 것 같아요. 청초한 미인공 프랑 님에 천진난만한 인외공 카이란님도 껴서요!
하지만 세 명이나 상대하려면 태람 님의 체력이 버틸 수 없을 거예요. 가뜩이나 연약하신 분인데 어쩌죠? 안 되겠다. 내일부터는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만들어야겠어요. 고블린이 그렇게 정력에 좋다는데 혼자라도 가서 잡아 와 볼까 봐요.
*
태람은 타들어가는 모닥불을 멍하니 응시했다.
카이란이 보여준 환상 속에서 세호 때문에 몇 번이고 흔들렸다. 세호의 차가운 태도에 서운하고 속상했고, 상처를 입었다. 끝내는 바보 같은 짓을 하기도 했다. 스토커처럼 미행하질 않나, 멍청하게 넘어지질 않나. 구겨지다 못해 땅에 처박힌 체면.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 창피했다.
엄밀히 따지면 그것은 태람이 아니었지만, 그때 느꼈던 저릿하게 아려오는 감정은 진짜였다. 만약에 현실이었다면 평생 얼굴을 못 봤을지도 몰라. 정말이지 가짜 세호 앞에서 벌어진 일이라 다행이었다.
태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세호에게 끌리고 있다는 사실을.
마음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에 의문도 생겨났다. 순수하게 세호를 좋아하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이것 또한 강제력의 영향을 받아 생겨난 마음인 걸까? 어쩌면 무인도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니 흔들 다리 효과일 수도 있지.
여러 생각이 뒤섞여 태람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누구든 붙잡고 상담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동료들에게 물어보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했고, 그렇다고 당사자인 세호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노랑이를 잠깐 생각했다 이내 머릿속에서 지웠다. 인간도 아닌 생물한테까지 기댈 생각을 하다니 절박하긴 하구나.
태람은 처음에는 이 비정상적인 상황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런데 이제는 끝이 오는 것이 두려워졌다. 끝이라…. 내가 메인수이기 때문에 세호를 좋아하게 된 거라면 정말 어쩌지? 페이지가 다 채워져서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감정도 초기화되는 걸까? 애초에 이곳에서의 기억들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졌다. 머리 아픈 생각은 하기 싫었는데 자꾸만 고민이 머릿속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태람은 신경질적으로 땔감을 모닥불 속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꺼져가던 불씨가 다시 활활 타올랐다.
“아씨. 짜증 나. 쓸데없는 생각도 전부 타서 없어져 버렸으면 좋겠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하필이면 태람이 제일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었다. 고민의 원천인 세호였다.
“선배. 불침번 바꿔 드리겠습니다.”
태람은 평소보다 더 딱딱한 세호의 얼굴에 가짜 세호가 떠올라 버렸다. 그때의 분노가 되살아나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말을 툭 내뱉고 말았다.
“형이라 부르는 게 그렇게 어려워?”
언짢아 보이는 태람의 말에 세호는 당황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침울해진 세호의 표정을 보고 태람은 아차 싶었다. 짜증 내지 말걸. 나도 아직 환상의 영향을 받고 있나 봐. 저건 가짜 세호가 아니야.
태람이 아는 세호는 가짜 세호처럼 매정한 애는 아니었다. 답답할 정도로 말을 아끼는 무뚝뚝한 후배였지만 성실하고 예의가 발랐다.
뭐, 조금 피곤한 성격이긴 하지. 세호는 옳다고 생각하면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한 마디로 꺾이면 꺾였지 휘어지지는 않는 타입이었다. 나도 한 고집하지만, 쟤도 만만치 않아. 그러니까 많이 싸웠지. 그러면서도 경험이 적어 서툰 모습을 보일 때가 있는데 태람은 그런 세호가 귀여웠다.
태람은 세호를 생각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흘렸다.
“서, 선배? 아니…. 형?”
세호가 호칭을 바로 정정하며 태람의 눈치를 살폈다. 눈빛 속에 저 형이 정신이 나갔나? 라는 감정이 감겨 있어 태람은 살짝 화가 날 뻔했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하니 답이 나오긴 했다.
이세호가 갑자기 실실거리면 무섭긴 할 것 같아. 내가 잘 못 했네.
“쌀쌀맞게 굴어서 미안. 그냥 선배든 형이든 너 편할 대로 해.”
“솔직히 갑자기 그러셔서 조금 놀랐습니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혹시 호칭에 대한 트라우마라도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제가 좀 더 주의를….”
“그런 거 아니야.”
“저한테는 숨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좋든 싫든 한배를 탄 사이지 않습니까?”
그냥 넘어가면 될 것을 깊게 파고드는 세호가 답답했다. 으! 열내지 말자. 태람은 살살 짜증이 났지만 그런 모습이 너무나도 세호다워서 안심되기도 했다.
“집어치우고. 환자는 들어가서 잠이나 퍼질러 자라.”
“저는 환자가 아닙니다.”
확실히 창백했던 세호의 얼굴은 한결 나아져 있었다. 그래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 둬.”
“선배야말로 피곤하시죠?”
“진짜 괜찮다니까. 어차피 나는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고. 가끔은 너무 꿀 빠는 것 같아 민망할 정도야.”
“그래도 조금은 자두는 게 좋습니다. 내일부터 강행군이 이어지니까요.”
“괜찮아. 나는 완전히 전력 외잖아. 이런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 싶어.”
뭔가 더 말하려고 했던 세호는 입을 다물고 태람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아무래도 들어갈 생각은 없어 보였다. 결국 태람은 들어가라는 권유를 포기했다.
“너 혹시 나한테 할 말 있어?”
“특별히 없습니다.”
세호의 말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어색해 죽겠네. 이럴 거면 뭐하러 있는 거야? 이대로 아침까지 있다가는 숨이 막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태람은 뭐라도 말해보고자 노력했다.
“아까 책을 꺼내봤는데 절반 정도 채워졌더라.”
“네. 저도 봤습니다.”
“정말 얼마 안 남은 것 같아.”
“그러네요.”
“프랑한테 당한 곳은 좀 어때?”
“전부 나았습니다.”
“여전히 괴물 같은 회복력이네. 그래도 다행이야. 많이 걱정했거든.”
“고맙습니다.”
“내일 아밀이 몬스터 요리를 또 내올까? 나는 정말 못 먹겠더라.”
“글쎄요.”
“‘왕자님! 오크 스프예요!’ 할까 봐 겁난다. 그치?”
“그렇네요.”
세호의 단답형 대답에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고 매정하게도 침묵은 금방 찾아왔다.
태람은 새삼스럽지만 세호와 자신은 정말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근본적으로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이런 일이 없었다면 평생 앙숙이었을지도 몰랐다.
“선배는 검을 배울 생각은 없습니까?”
“응?”
오늘 처음으로 세호가 먼저 대화를 시도한 탓에 태람은 반응이 한 박자 늦었다. 세호는 차분하게 재차 말을 꺼냈다.
“검을 배울 생각이 없냐고 물었습니다.”
“갑자기 검?”
“전부터 생각했던 겁니다.”
“너도 알다시피 이 몸은 정말로 연약해. 말도 못 타는 거 봤잖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 전투가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그나마 프랑이 선배를 신경 써 주지만 저번에 트롤 때도 그렇고 조금만 늦었더라면 큰일이 날 뻔한 적이 많았어요. 선배가 최소한의 회피 능력이라도 갖춘다면 위험이 줄어들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잠깐, 잠깐! 멈춰 봐.”
태람은 와다닥 말을 쏟아내는 세호에게 질려버렸다.
“네 말은 알겠어. 하지만 카이란도 있잖아.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선배가 늘 그렇게 대충대충 사니까 불안한 겁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마운데, 그놈의 대충대충이란 말 좀 그만해.”
“저는 선배의 안전을 생각해서….”
“그런 말투로 걱정한다고 하면 누가 좋아해. 그리고 이제 와서 너무 새삼스럽지 않아? 이 몸이 초등학생만도 못한 건 이미 검증된 거잖아.”
“이제 와서가 아닙니다. 계속 생각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연약한 선배가 기본 체력을 가질 수 있을지를 말이죠.”
“말 안 하면 몰라.”
“선배를 옆에서 보고 있으면 얼마나 불안한지 아십니까?”
태람은 언성을 높이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이제까지 잘 해왔잖아. 카이란 일도 나 혼자 해결했어. 기본 체력도 없어서 이동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고. 원래 몸이면 또 몰라. 이 몸으로는 무리야.”
“선배는 원래 몸도 여리여리해서 지금이랑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냥 게으른 겁니다.”
결국 태람의 인내심이 뚝 끊어져 버렸다.
“너는 능력치 좋은 왕자잖아! 이 몸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 겪어 본 적 없으면서!”
“선배도 겪어 본 적 없잖아요! 제가 이 능력을 다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한 줄 아십니까?”
“몰라! 알고 싶지 않아!”
태람은 씩씩거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선배! 제 말 좀 들어 주세요.”
세호가 사나운 기세로 튀어나와 태람을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겉보기에는 로맨틱한 광경이었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세호에 의한 엄청난 압력에 태람은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이거 놔!”
“싫습니다. 진지하게 생각해주실 때까지 안 놓을 겁니다.”
“아닌 건 아닌 건데 어쩌라고!”
태람이 발작하며 소리를 지르고 바동거렸지만, 세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좋게좋게 봐주려고 한 걸 다 망쳐놓네.”
지금 세호의 행동에 자신에 대한 걱정이 들어가 있다는 건 태람도 알았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과민반응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물어뜯든 할퀴든 실력행사를 하려고 했을 때였다.
태람의 어깨에 물이 한 방울이 떨어졌다. 비? 아니야. 이건….
놀랍게도 세호가 태람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눈앞에서 형이 죽는 걸 봤어요.”
세호의 떨림이 등을 통해 그대로 전해지자 태람은 그 자리에서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세호의 손에 힘이 풀리며 헐거워졌지만 태람은 그대로 세호의 품을 벗어나지 못했다.
“우, 울지 마.”
“…선배가 걱정됩니다.”
물기 어린 세호의 목소리에 태람은 화가 속 들어가 버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얌전히 그의 품에 있었다. 이세호 비겁해. 이런 미인계를, 아니, 미남계를 쓰다니.
세호는 보송보송한 태람의 몸을 끌어안고 있으니 따뜻한 온기가 온몸에 스며드는 것 같았다.
“조금만 이렇게 있어도 될까요?”
“응.”
겨우 진정된 세호에게 태람은 따뜻한 밀크티를 건넸다.
“마셔.”
“감사합니다.”
얌전히 밀크티를 몇 모금 홀짝거리던 세호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는 제가 심했습니다. 불안해서 견딜 수 없었어요.”
“나를 걱정해 준 거잖아. 이해해. 그래도 조금 아프긴 했다.”
“그래도 선배의 가족들도 분명 걱정하고 있을 테니까 나중에라도 생각해 봐주세요.”
“가족?”
“…선배?”
“나한테 가족이 있었나?”
“그게 무슨….”
”누군가와 함께 살았던 것 같은데…. 기억 안 나.”
태람은 부자연스러운 현상을 떠올랐다. 생각해 보면 카이란에게 소원을 빌 때도 자연스럽게 이곳에 남는 것을 고민했었다.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확실히 전보다는 옅어져 있었다.
이렇게 점점 기억이 사라지는 건가? 태람은 공백의 공포를 느꼈다. 옆에 있던 세호의 눈동자에도 혼란이 깃들기 시작했다.
“선배가 이대로 이 세계에 동화되면 저는….”
태람은 극도로 불안해졌지만, 자신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처참한 세호의 표정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괜찮아. 벌써 절반이나 채웠잖아.”
태람은 안개가 낀 듯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세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안심이 되긴 하네. 지금 내가 흔들리면 안 그래도 불안한 세호가 더 힘들어질 거야. 태람은 주먹을 꽉 쥐고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너무 심각해지지 마.”
“왜 선배만? 저도 선배의 고통을 분담하고 싶은데….”
“고통은 무슨. 어차피 나중에 전부 기억 날 텐데 어때. 차라리 잘됐어. 나는 친구가 많잖아.”
“하지만….”
“너였으면 이미 왕자랑 동화됐을걸?”
“증상을 완화할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정말 괜찮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말고.”
“죄송합니다. 선배가 더 불안할 텐데….”
“이제 너는 들어가.”
“선배가 먼저 들어가세요.”
“아 좀! 나도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거든?”
“…알겠습니다.”
미련이 남았는지 자꾸 뒤를 돌아보는 세호를 억지로 막사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래도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야.”
태람은 세호가 지나간 자리를 멍하니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잠 못 드는 긴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태람은 밤새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잠시 뒤로 미루기로 했다. 일단은 앞만 보고 달리기로 했다.
“여러분. 아침 식사하세요!”
아밀의 말에 모두가 꾸역꾸역 막사를 나왔다.
불침번을 섰던 태람을 제외하고 가장 먼저 식탁에 도착한 사람은 의외로 아침잠이 많아 늘 늦게 나왔던 프랑이었다. 그가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태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태람 님, 좋은 아침이에요.”
“좋은 아침이에요. 프랑.”
태람은 나른한 분위기의 프랑이 어쩐지 위험해 보였다.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기는 모습이 마치 혈통서 붙은 페르시안 고양이 같았다. 평소에는 꼭 청량음료 광고에 나올 것 같은 청순함인데 오늘은 뭔가 야해…. 엄한 상상을 하는 태람의 등 뒤로 누군가 달려들었다.
“태람!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카이란.”
“오늘도 그거 해줘!”
씩씩하게 말한 카이란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얼른 쓰다듬어 달라는 듯 태람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태람은 익숙한 손길로 카이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카이란의 머리카락은 잔뜩 헝클어진 채였지만 촉감은 매우 부드러웠다.
우리 카이란. 어째 갈수록 개 같네. 드래곤의 정체성은 어디다 팔아먹은 건지…. 귀여우니까 상관없지만. 종으로 따지면 코카 스파니엘일까? 성격을 생각하면 골든 리트리버?
태람이 한참 카이란과 어울리는 견종을 고민하는 사이 차가운 얼굴의 세호가 태람과 카이란의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다
“좋은 아침이다. 태람.”
“안녕하세요. 왕자님.”
세호는 언제 씻었는지 머리카락도 가지런하고 얼굴도 뽀송뽀송했다. 원래도 잘 생겼는데 관리까지 하니 그야말로 심장이 떨릴 정도의 미남이었다. 태람이 세호의 미모에 새삼스럽게 감탄하고 있을 때, 아밀이 다시 한번 모두를 불렀다.
“다들 서 있지 말고 앉으세요. 오늘 메뉴는 꼬치구이에요.”
식탁에는 먹기 좋은 크기로 썰려 노릇노릇 구워진 꼬치구이와 샐러드가 있었다. 언뜻 보면 닭꼬치와 비슷하게 생긴 요리를 보고 태람은 촉이 왔다. 저건 분명 몬스터 고기일 게 분명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식탁에 고기가 올라올 수 없었다. 지난 전투로 식량을 대부분 잃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요 며칠 나무 열매나 얼마 남지 않은 육포로 식사를 해결해왔다.
몬스터 고기는 먹기 싫었지만 태람은 차마 아밀에게 어떤 고기냐고 물어볼 수 없었다. 몬스터 고기가 맞는다고 해도 아밀이 보는데 못 먹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 태람은 그냥 꼬치구이에 손대지 않기로 했다. 슬쩍 옆을 보니 세호와 프랑도 같은 생각인지 눈치만 보면서 고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뭐야? 왜 고기는 안 먹어? 이게 메인이잖아.”
제대로 식사를 즐기고 있는 카이란. 그의 만족스러운 표정을 앞에 두고 세 사람은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다들 혼란스러운 감정이네. 왜 그래?”
“그게 그러니까….”
“피곤해서 그런지 입맛이 없네요.”
억지 미소를 짓는 태람과 평소와 똑같았지만 미묘하게 미간이 찌푸려진 프랑. 침묵하는 세호. 세 사람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이란은 망설임 없이 양손에 꼬치를 쥐고 오물오물 베어 먹었다.
“이것도 엄청 맛있어!”
카이란의 눈동자에 별이 내려왔다. 태람은 기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카이란이 꼭 어릴 때 즐겨봤던 요리 만화 속 등장인물 같았다. 당장이라도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 미미(美味)를 외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카이란 님은 잘 드셔서 만드는 보람이 있어요.”
“진짜 최고야! 우리 아빠가 구워주던 것보다 더 맛있어!”
“과분한 칭찬이에요.”
“저번에 먹은 거랑 다른 고기지? 담백한 끝맛을 보니 오크? 아니지. 조금 더 고소한 풍미가 있는데…. 혹시 고블린?”
“정답이에요! 카이란 님은 미식가시네요!”
태람은 발랄하게 끔찍한 대화를 주고받는 아밀과 카이란에게 경악했다. 원래도 없던 입맛이 뚝 떨어졌다. 미친! 미식가는 무슨. 괴식가겠지.
“카이란 님의 아버지는 주로 어떤 몬스터 요리를 만드셨나요?”
“가고일 날개 구이를 많이 해줬어. 움직임이 많은 애가 특히 쫀득쫀득하더라.”
“과연. 그렇군요. 저도 참고할게요.”
“그리고 리저드맨으로 만든 꼬리찜도 맛있었지. 엄마가 이 맛에 반해서 결혼을 생각했다고 들었어.”
“리저드맨이라니! 써본 적이 없는 재료네요. 그나저나 요리에 반해서 결혼했다니 로맨틱해요.”
태람은 로맨틱이 다 얼어 죽었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괜히 말했다가 억지로 고기를 먹게 될 것 같아 일단은 참았다.
“말 나오니까 먹고 싶다. 아빠가 깨어나면 해달라고 할 거야.”
“동면에 들어가셨나요?”
“맞아. 아빠랑 엄마는 같이 동면에 들었거든. 못 본 지 대충 백 년 정도 됐나?”
“그러고 보니 서로 가족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네요. 다들 형제가 있으신가요? 저는 외동아들이라 형제가 있는 친구들이 늘 부러웠어요.”
자연스럽게 가족 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갔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가족이 없었습니다. 고아였거든요.”
프랑의 말에 공기가 얼었다.
“룬베르 제국은 왕위 계승 전이 벌어지고 있지. 형제는 많지만, 빈말로도 좋은 사이라고는 할 수 없군.”
세호가 가세하자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졌다. 태람은 결국 기억도 나지 않는 가족을 입에 담았다.
“저도 아밀처럼 외동아들인데 부모님은 평범해요. 그보다 카이란은 형님이 있지 않았나요?”
“아…. 까먹었다.”
“가족을 잊어버리면 어떡해요.”
“형은 엄청 게을러서 아직도 자고 있어. 몇 천 년은 못 본 것 같아.”
“그러시구나. 저는 자주 만난다고 생각했어요. 처음 만났을 때도 형님한테 조언을 들었다고 하셨으니까요.”
“헤즐링 때 조금 신세를 지긴 했지. 형은 인간에 대해 많은 걸 알려줬어.”
“두 분의 첫 만남! 꼭! 반드시! 알고 싶어요!”
흥분해서 물어오는 아밀의 눈동자에는 타오르는 열망과 탁한 욕망이 담겨있었다. 어느새 프랑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도 궁금하네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프랑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빛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소름이 돋은 태람은 카이란에게 눈치를 주었다. 카이란아. 말 잘해. 잘못하면 너도 모닝독에 당할 수도 있어. 하지만 태람의 간절한 눈빛은 카이란에게 닿지 않았다.
“지나가다 우연히 태람을 봤는데, 특별하다고 생각했어. 영혼이 참 예뻤어.”
“그렇죠. 태람 님은 분명 영혼도 아름다울 거예요.”
아밀의 호들갑에 민망해진 태람은 식탁 아래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직접 마주한 건 연회장이었지. 그때 내가 태람한테 청혼을 했어.”
카이란의 말에 얼굴이 굳은 프랑은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드래곤은 얼마나 강한 독이 있어야 죽일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향하는 프랑의 살기를 감지한 카이란이 시무룩해져 말했다.
“프랑…. 나 싫어졌어?”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면 뭔데? 갑자기 내가 미워졌어? 나는 인간은 잘 모르니까 알려주면 좋겠어.”
“한 가지만 약속해 주세요. 새치기는 안 됩니다.”
“응! 나 태어나서 한 번도 새치기한 적 없어!”
“…밥이나 드세요.”
태람은 카이란의 순수함이 어둠을 퇴치, 아니 프랑의 분노를 잠재우는 광경을 목격하고 감탄했다. 프랑이 한 말은 그 뜻이 아닌 것 같지만 카이란아. 너는 그저 빛이다. 빛.
“벌써 고기가 떨어졌네요.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금방 가지고 올게요.”
아밀의 고기 추가 선언에 프랑과 세호가 파랗게 질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아침이라 그런지 금방 배가 부르네요.”
“나도 이 정도면 될 것 같다.”
매우 드물게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아직 많이 남았는데….”
“걱정 마. 아밀. 나 아직 배고파. 그리고 태람도 별로 안 먹어서 먹을 수 있어!”
“네?”
슬쩍 자리를 피하려던 태람은 얼마 못 가 덜미를 잡혔다.
“아쉽지만 저희끼리 먹어야겠네요.”
“응? 아니 저도 이만….”
“태람. 같이 먹을 거지?”
“태람 님. 저 정말 힘들게 만들었어요. 미래를 위해서도 영양 보충은 중요하니까요!”
애처롭게 올려다보는 아밀과 기대가 가득 찬 눈빛을 쏘는 카이란. 내뺄 타이밍을 놓친 태람은 울며 겨자 먹기로 고블린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태람은 다시 자리에 앉아 꾸역꾸역 몬스터 요리를 먹었다. 묘하게 맛이 있는 게 어이없었고 어쩐지 분했다. 이 파티의 최강자는 역시 이 두 사람이야. 그래도 맛있긴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