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4)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태람의 파티는 적당한 마을에 도착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노숙을 하게 되었다. 괜찮은 공터를 발견한 세호가 아밀에게 명령을 내렸다.

  “아밀. 오늘은 이곳에서 쉬겠다.”

  “네! 알겠습니다. 왕자님.”

  아밀을 중심으로 모두가 신속하게 움직여 개별 막사를 세웠다. 특히 카이란의 마법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공터 한가운데 모닥불이 활활 타올랐다. 빠르게 잠자리를 갖춰서 여유가 생긴 일행들은 각자의 시간을 즐기다가 저녁 식사를 위해 모닥불 주위로 빙 둘러앉았다. 요리를 마친 아밀이 방긋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다들 맛있게 드세요.”

  저녁 메뉴는 큼직한 소고기가 들어간 스튜였다. 감칠맛을 주는 토마토와 포슬포슬한 감자, 아삭한 식감을 주는 각종 야채까지. 야외에서 이런 조리가 가능한가 싶을 정도로 멋진 요리였다. 딱딱한 육포 정도를 예상한 태람은 감탄했다.

  후식으로는 태람이 좋아하는 커스터드 푸딩도 있었다. 탱글탱글함을 간직하고 있는 푸딩은 참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질 좋은 버터로 만들어진 꾸덕꾸덕한 크림에서는 고소한 향기가 솔솔 올라왔다. 태람은 감동했다. 나 때문에 준비한 건가? 태람의 시선을 알아챈 아밀이 강아지처럼 쪼로로 달려와 속삭였다.

  “태람 님이 좋아하셔서 특별히 마법 도구로 챙겨왔어요. 제가 만들었어요!”

  “…고마워요. 아밀.”

  오래 걸어 지친 태람에게는 슬프게도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아밀 진짜 솜씨가 좋네. 몸 상태만 괜찮았다면 남김없이 먹었을 텐데 아쉽다. 축 늘어진 태람을 유심히 지켜보던 세 사람은 앞다투어 말을 걸었다.

  “피곤하지? 내가 먹여줄까?”

  “태람 님. 제가 체력회복 마법을 걸어 드릴까요?”

  “힘들면 포션이라도 마시는 게 어때? 최고급으로 준비했다.”

  “고마워요….”

  결국, 태람은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깨작거리다 일행 중 가장 빨리 막사에 들어갔다. 다들 이것저것 신경 써주는 게 고맙긴 했지만, 너무 피곤했다. 프랑에게 받은 체력회복 마법도 소용이 없었다.

  “졸려….”

  태람은 아밀이 준비해준 두툼한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파고들었다. 내일이 걱정되지만, 일단은 자기로 했다. 야영용 간이침대는 왕실의 물건답게 물침대처럼 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람은 잠에 빠져들었다.

  저녁을 넘어 야심한 밤. 한참 잘 자는 태람을 누군가 흔들어 깨웠다. 

  “선배, 선배! 일어나세요.”

  익숙한 목소리에 태람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눈을 뜨자 세호의 잘생긴 얼굴이 보였다. 진짜 그림으로 그린 듯한 귀축광공상이야. 북부대공 같기도 하고? 게임이라면 이벤트 CG, 소설이라면 삽화 각이다.

  “긴급 상황입니다!”

  긴급 상황이라는 말에 실없는 생각을 하던 태람은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확 들었다. 여전히 높낮이 없는 음색이지만 세호에게서 당혹스러움이 느껴졌다.

  “뭐, 뭔데?”

  “그러니까 아밀이….”

  세호가 어울리지 않게 뜸을 들였다. 쉽게 말하기 어려운 말인 것 같았다. 태람은 불안함이 증폭되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아밀이 뭐?”

  “놀라지 말고 들으세요.”

  “진짜 뭐데? 빨리 말해.”

  “아밀이 나무 위에서 선배의 막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태람은 소리를 지를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나무 위? 미쳤나 봐. 어디 나무?”

  “진정하세요. 어느 나무인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래도 각도 상 전부 볼 수는 없다고….”

  “진정하게 생겼냐! 아밀 걔 시종이 아니고 자객이야?”

  “그럴 리가 없잖아요.”

  “경찰에 신고하고 싶다….”

  “자기 전에 책을 체크하다가 알았습니다. 아밀은 선배의 막사에 왕자가 들어올 거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침을 꿀꺽 삼킨 세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배가 저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다니? 설마…. 그거? 농담이지?”

  “선배가 쓴 소설입니다.”

  “그래. 내가 죽일 놈이다. 젠장.”

  “하는 척만 하면 될 것 같아요.”

  “그것참 다행이네.”

  태람은 심각하면서 우스운 이 상황에 절망했다. 서로 직접적인 단어를 내뱉지 않았지만 알 수밖에 없었다. 한다는 건 역시 그거겠지. 세, 섹스….

  무의식중에 외면하고 있었지만, 소설 『맛있는 남자』에는 종종 수위가 높은 장면이 나왔다. 분명 여행 중에도 이런저런 게 있었던 것 같긴 했다. 그게 오늘인지는 원작자인 태람도 잊어버렸지만 말이다.

  “날이 밝기 전에 해야 합니다. 지체할 시간은 없습니다.”

  “어쩌자고.”

  “합시다.”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말하는 세호를 보니 태람은 뭔가 울컥했다. 책 속으로 들어온 이래 최고의 동요였다.

  “야! 너는 그런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소리 좀 낮추세요. 그럼 어떻게 말합니까? 수줍게 말해드려야 해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내 정신적 충격은 어쩔 건데!”

  “저는 뭐 즐거워서 뒤질 것 같은 줄 아십니까? 돌아가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라고요!”

  “너 진짜 짜증 나….”

  “지금 싸울 때가 아닙니다.”

  “프랑이나 카이란은? 혹시라도 걔네가 들으면 어떡해.”

  “두 사람 다 깊이 잠들었습니다. 확인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깰 수도 있잖아.”

  “프랑한테 싸대기 한 대를 갈겨 봤는데 꼼짝도 안 하더군요.”

  “그게 말이 돼? 그나저나 너 진짜 쌓인 게 많구나. 그 와중에 프랑을 골라서 때리다니.”

  “어디 사는 대충대충 작가님이 서브공을 처리할 적당한 방법으로 아주 깊은 잠을 선택했나 보죠. 개연성 없는 소설이라 다행입니다.”

  “미안하네. 대충대충 작가라서! 장난으로 쓰기 시작했었고, 애초에 처음 쓴 글이었다고!”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그럼 뭐가 중요한데!”

  왁왁하던 두 사람은 이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 태람이 먼저 침묵을 깨고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한다고…. 해. 빨리 끝내자.”

  “…알겠습니다.”

  태람이 성큼성큼 걸어가 침대에 대자로 누웠다.

  “좋아. 와라!”

  “선배…. 최소한의 분위기는 좀 잡아주세요.”

  “미안…. 기합을 넣느라…. 그냥 입 다물고 있을게.”

  작게 한숨을 내 쉰 세호가 침대 위로 올라왔다 출렁이는 침대를 따라 태람의 마음도 오르락내리락했다.

  “사실은 많이 떨립니다.”

  그렇게 말한 세호는 천천히 태람에게 다가가 두 팔로 태람을 꼭 끌어안았다. 직접 안아보니 생각한 것보다 더 작고, 폭신한 태람의 몸에 내심 놀랐다. 달콤한 체향이 코끝을 스치자 더 긴장되기 시작했다.

  “…선배가 싫지 않습니다.” 

  평소와 달리 한없이 상냥한 세호의 목소리에 태람은 가슴께가 간질간질해졌다. 겹쳐진 몸에서 전해져 오는 감촉과 체온에 어쩐지 멍해졌다. 단련된 몸이라 딱딱할 줄 알았는데 부드럽고 따뜻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이 쿵쾅거렸다.

  “선배의 소설은 가벼워서 제 취향은 아니지만, 완전히 엉터리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 말은 조금은 엉터리라 생각한다는 거야?”

  “입 다물고 있겠다면서요.”

  “너 진짜 짜증나.”

  “깊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희는 지금 메인수와 키릭 왕자입니다.”

  세호의 진지한 눈빛에 태람은 물러날 곳이 없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세호는 죽을 뻔한 적이 많았지. 정말로 소설을 벗어나고 싶을 거야. 내가 여기서 꽁지를 뺀다는 건 이기적인 거겠지.

  “키스해도 될까요?”

  태람은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애써 감추며 허락의 뜻으로 눈을 감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정중한 말과 달리 세호의 키스는 여전히 거칠었다. 그는 뻣뻣하고 서툰 움직임으로 태람의 입안을 깊이 침범했다. 입술을 심하게 물어뜯긴 저번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지만 괴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목구멍이 막혀 숨이 부족해지는 걸 느꼈다.

  한참 뒤 두 사람은 서로의 입술을 뗐고, 거친 호흡을 토하듯 뱉어냈다. 

  “너 얼굴이 파랗다. 숨은 제대로 쉰 거야?”

  태람의 얼굴도 붉게 물들긴 했지만 세호의 얼굴은 심해도 너무 심했다.

  “그냥 멈추고 있었습니다.”

  “저번에는 그냥 기세였어?”

  입을 꾹 다문 세호는 태람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어색한 손짓으로 그의 가슴을 주물렀다. 

  “야. 지금 싸우는 거 아니다. 살살해.”

  “입 다물어요.”

  이어지는 세호의 손짓에 태람은 절대 고의는 아니었지만, 문득 세호의 움직임이 눈이 침침한 어르신이 돋보기안경을 찾는 것 같았다.

  태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세호는 흐름을 이어갔다. 그는 태람의 목덜미를 약하게 깨물면서 쇄골 선을 따라 목을 죽 핥아갔다. 빈말로도 잘한다고 할 수 없는 애무에 태람이 결국 입을 열었다. 

  “이럴 때 하면 안 되는 말이겠지만 꼭 개가 핥는 것 같다. 간지럽기만 해.”

  “제발 닥치라고요.”

  세호가 겉에만 지분거리는 통에 태람은 아쉬워졌다. 도통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너 처음이지?”

  끝내 내뱉어 버린 태람의 말에 세호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론은 알고 있습니다. 해본 적은 없지만….”

  “내가 경험은 적지만 한 가지는 알겠어. 이렇게 하다가는 다 망하는 거야.”

  “어차피 진짜 할 것도 아닌데 상관없잖아요! 적당히 맞춰주시면….”

  “연기하려고 해도 뭐라도 있어야 하지.”

  뚱한 세호의 표정이 귀엽다고 생각해 버린 태람은 아까까지의 김장감이 싹 가셨다. 저 얼굴로 동정이라니 재능 낭비 아니, 얼굴 낭비라고 생각했다.

  이상한 우월감이 태람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 떨어지고 나서 태람은 세호의 말에 전적으로 따랐다. 자신의 소설인데도 전혀 기를 펴지 못했다. 지금이라면 상황을 리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경험이 풍부하진 않지만 해본 적은 있었으니까.

  “너 귀엽다.”

  “놀리시는 겁니까?”

  “전혀. 그보다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지?”

  태람은 세호 위에 냉큼 올라탔다. 세호는 태람의 박력에 밀렸는지 얌전히 있었다. 

  “선배…. 그, 그래도 제가 위인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세호는 어울리지 않게 버벅거렸다.

  “…가만히 있어!”

  태람의 손이 거침없이 세호가 입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감춰져 있던 세호의 탄탄한 가슴이 드러났다. 태람은 조심스럽게 그 위에 손을 대고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푹푹 꺼졌다가 탱글탱글 다시 올라는 세호의 가슴. 손맛이 엄청났다.

  태람은 세호의 가슴을 마구 만지고 있으려니 즐거워졌다. 같은 남자인데도 가슴의 촉감이 전혀 달랐다. 자신의 가슴이 물렁물렁 슬라임이라면 세호의 가슴은 탄력 있는 탱탱볼 같았다. 무엇보다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귀여운 분홍빛 유두가 무척 깜찍했다.

  완벽한 핑두! 이건 메인수인 나한테 달려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도 어둡진 않지만…. 그렇지만…. 아무튼 이건 대단해.

  영문 모를 질투심으로 태람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세호가 미약하게 신음을 내뱉자 그 소리에 태람은 그야말로 눈이 돌아갔다.

  "네 가슴 진짜 좋아. 떡 같은 느낌? 쫀득하고, 착착 감겨."

  "귀여운 얼굴로 그딴 상스러운 말 하지 마세요."

  "내 얼굴 귀여워?"

  세호가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람은 뿌듯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세호는 늘 쌀쌀맞았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세호는 늘 쌀쌀맞았다. 은근히 외모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태람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었다.

  “말해봐. 나 귀엽냐고?”

  태람은 여전히 세호의 가슴을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그, 그만 만져요!”

  “싫어. 진짜 조금만 더 만지자. 응?”

  “이! 떨어지라고! 한태람!”

  세호의 반말에 왜인지 묘한 기분이 드는 태람이었다. 존댓말만 하던 애가 갑자기 반말하니까 왠지 엄청 신선하네. 사람들이 반전 매력에 환장하는 이유가 있었어. 이 속성을 다음 소설에 꼭 써먹어야겠다.

  “지금이라면 조금 진도를 더 나가도 될지도?”

  “말도 안 되는…. 개소리 좀 그만 하세요!”

  “…너 지금 욕했냐?”

  “하도 어이가 없어서 그랬습니다! 대체 선배는!”

  “어? 야! 잠, 잠깐!”

  열 받은 세호는 태람의 몸을 억지로 뒤집어 버렸다. 순식간에 시야가 뒤집어진 태람은 정신이 없었다.

  “이제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각오하세요.”

  “어? 야! 잠, 잠깐!”

  이어서 세호는 태람의 양손을 포개서 한 손으로 잡아 머리 위로 올렸다. 태람은 나비의 표본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뭐, 뭐하려고?”

  “아밀이 원하는 걸 할 겁니다.”

  남은 손으로 태람의 턱을 잡은 세호가 그대로 입술을 겹쳐 왔다. 입술이 완벽히 덮어진 태람은 숨이 막혔다. 필사적으로 밀쳐내자 잠시 떨어졌지만,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다시 입술이 겹쳐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 사람의 입맞춤은 깊어졌다. 두 개의 혀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세호는 거칠고 집요하게 달려들어 태람의 입 안을 깊이 파고 들었다. 숨이 막힌 태람이 세호를 밀어내도 잠시 떨어졌다가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태람은 혀가 뿌리까지 뽑힐 것 같은 알싸한 통증이 느껴졌다. 오직 거친 숨소리만이 막사 안에 가득 찼다.

  “미, 미안…. 내가 너무 우쭐거렸어. 조금 천천히….”

  조금 전까지 세호를 비웃었던 태람이 한 가지 간과한 점이 있었다. 바로 소드마스터의 엄청난 학습능력이었다. 몸으로 하는 건 뭐든지 금방 배울 수 있는 세호는 처음과는 격이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태람의 몸이 조금씩 반응하기 시작했다. 몽롱해진 태람은 세호의 손길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분하지만 쾌락의 끌리는 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러다 서버리면 사회적 죽음이야. 태람은 최대한 견뎠지만 끝내 참을 수 없어져 반쯤 울면서 세호의 목을 꽉 끌어안은 채 매달렸다.

  “그, 그마안….”

  “왜요? 저라면 진도를 나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분위기에 휩쓸려서….”

  “무섭습니까?”

  “무섭긴 누가!”

  “그러면 문제없죠? 아밀이 만족할 때까지 계속하겠습니다.”

  세호의 입술이 찾아올 때마다 태람은 온몸이 움찔거리며 소름이 돋았다.

  “아파요?”

  입술이 얼얼해진 태람이었지만 찌릿찌릿함에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도리도리 저었다. 더 진도를 나가면 어떨지 궁금해질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냥 계속 해줘.”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태람이 반쯤 풀린 눈으로 세호를 봤다. 세호 역시 민망한지 귀까지 붉어져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힘이 쭉 빠진 태람이 세호의 위에 힘없이 엎어졌다. 

  “씻어야 하는데….”

  “괜찮으니까 그냥 자요.”

  태람은 샤워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고생하셨습니다. 태람 형.”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본 세호의 얼굴은 무척이나 다정했다.

*

  눈을 뜨니 옷이 갈아 입혀져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막사 안은 어젯밤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태람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보았다. 입이 퉁퉁 부은 것만 빼면 괜찮았다. 오히려 적당한 운동을 하고 잔 다음 날처럼 상쾌하기까지 했다.

  “내가 미쳤지. 미쳤어.”

  어제 일을 생각하니 태람은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예상외로 서툰 세호에게 묘한 우월감을 느껴 폭주해버렸다. 그저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가 왜 그랬지? 닥치고 있을걸! 만나면 뭐라고 하지? 어떤 얼굴을 해야 하나. 죽겠네.

  그때 익숙한 저음이 팽창하는 태람의 생각을 뚝 잘랐다.

  “일어나셨습니까?”

  세호는 따끈따끈한 호박 스콘과 오렌지 주스를 들고 있었다.

  “조, 좋은 안녕!”

  당황한 나머지 태람은 멍청한 인사말을 내뱉고 말았다. 좋은 아침이면 좋은 아침이고, 안녕이면 안녕이지 좋은 안녕이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쪽팔려서 고개를 숙였다.

  “아밀에게 선배의 컨디션이 안 좋으니 아침 식사를 따로 준비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편이 더 자연스럽고 같이 책을 확인하기에도 좋을 것 같아서요.”

  “응. 고마워. 그런데….”

  “몸이라도 안 좋습니까? 입술이라던가….”

  “닥쳐! 아, 아무튼 너 어제 나한테 형이라고 했지?”

  “아니요. 한 적 없습니다.”

  칼같이 말하는 세호였지만 명백히 태람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게 뭐 그렇게 큰일이라고. 앞으로도 형이라고 불러.”

  “싫습니다. 선배는 선배죠.”

  “누가 들으면 내 이름이 선배인 줄 알겠다. 어차피 한 살 차이잖아? 편하게 말해.”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입니까?”

  솔직히 태람은 금방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기에 세호가 자신을 뭐라고 부르든 상관이 없었다. 지내보니 그렇게 나쁜 놈도 아니고…. 이렇게 되어버렸으니까 호칭 정리를 해야지. 애초에 태람은 선배라는 호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제 선배 금지. 앞으로 선배라 부르면 또 가슴 만진다.”

  태람이 짓궂게 웃으며 세호에게 다가갔다. 세호는 기겁하면서 태람의 손길을 피해 벽으로 도망쳤다.

  “책! 책이나 보세요!”

  그만 놀려야겠다. 도망가는 세호를 그대로 놓아주며, 태람은 책을 펼쳤다. 책을 소환한 뒤에는 읽는 것에만 집중했다.

*

  『맛있는 남자』 53P

  불침번도 겸해서 나무 위에 올라갔는데 태람 님의 막사 안쪽이 살짝 보였어요. 범죄라는 생각이 들어 그냥 다른 나무로 갈까 했지만 생각해보니 태람 님은 오늘 온종일 상태가 안 좋아 보이셨어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그냥 지켜보기로 했지요. 맹세코 사심은 없었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태람 님을 걱정하는 누군가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쉽다고 생각했을 때 그분이 오셨습니다. 왕자님이 태람 님의 막사 안으로 들어갔어요!

  두 사람은 한동안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참 훈훈한 모습이었답니다. 너무 멀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대충 분위기와 입 모양으로 두 사람의 대화를 유추해 보았어요.

  “화났어요?”

  “네가 그에게 마음을 허락해서 질투가 났다.”

  “오해하지 마세요. 왕자님. 프랑은 그냥 친구일 뿐이에요.” 

  “태람….”

  “저한테는 왕자님밖에 없어요.”

  왕자님이 갑자기 태람 님을 끌어안았어요. 태람 님은 어쩔 줄 몰라 했지요. 태람 님의 가녀린 모습을 본 왕자님은 피식 웃으며 천천히 태람 님의 몸을 탐닉하기 시작했어요.

  “파닥파닥하는 게 귀여워. 마치 아기새 같군.”

  “…왕자님 부끄러워요.”

  “괜찮다. 나에게 전부 맡겨.”

  행위가 중반부에 들어서자 태람 님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무려 왕자님 위에 올라타 버렸답니다. 가슴을 주물거리는 손길이 예사롭지 않았어요. 절륜수 떴다! 엄청 섹시해. 저는 다시 한번 전투 시종을 지망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이 순간을 마주하기 위해 그토록 힘든 시련을 견뎌냈던 것이었죠.

  너무 멋진 애정행각에 저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어요. 하마터면 나무에서 떨어질 뻔했지요. 태람 님은 무리하셨는지 곧 잠이 드셨어요.

  왕자님은 잠든 태람 님의 볼에 살포시 입을 맞췄답니다. 

*

  “너 나한테 키스했어?”

  태람은 세호를 골탕 먹일 건수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한 적 없습니다.”

  “여기 쓰여 있는데?”

  “그럼 선배는 책에 나와 있는 것 같은 낯뜨거운 소리를 하셨습니까?”

  “내가 언제 이런 소리를 했어!”

  “그런 겁니다. 전부 아밀의 왜곡에 불과하죠.”

  “아니. 그래도 없는 걸 지어내지는 않았잖아. 여기 봐. 내가 중간에 네 위에 올라탄 것도 제대로 기록되어 있어.”

  “절대로 아닙니다.”

  태람은 너무 확실히 부정하는 세호 때문에 조금 서운해졌다. 어제는 귀여웠는데 지금은 하나도 안 귀여워.

  “말 나온 김에 한마디 하겠습니다.”

  “또 잔소리?”

  “보석도 그대로라 넘어가려 했지만 안 되겠네요. 어제 선배는 너무 적극적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안 했으면 실패했을지도 모르잖아.”

  “그래도 정도가 있죠. 그게 어디가 청순가련한 꽃수죠?”

  “얼굴이?”

  “헛소리는 그만하시고, 다음부터는 조심해주세요.”

  결국 태람은 무신경한 세호에게 속상함이 터졌다. 쟤한테 위로를 기대한 내가 바보지.

  “어제 일이라면 네가 더 문제였어! 전혀 메인공답지 않았어.”

  세호의 인상이 팍하고 굳었다. 태람은 순간 쫄았지만 할 말은 다 하기로 했다.

  “키릭 왕자는 절륜하다는 설정이었잖아. 너는 더럽게 못 해.”

  “이론은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론을 안다는 놈이 애무도 제대로 못 하고 무식하게 퍽퍽퍽.”

  “확실히 경험이 부족하긴 했습니다. 그래도 후반부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생각하는데요. 선배도 충분히 느끼셨잖아요.”

  “조용히 해!”

  듣다 보니 민망해져서 세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식사나 마저 하세요. 저는 씻고 오겠습니다.”

  “나도 갈래. 옷만 새것이라 더 찜찜해.”

  태람은 강가에서 샤워나 하며 머리를 식혀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가고 싶습니다.”

  “누가 너 따라간대? 나는 나대로 갈 거야.”

  “…맘대로 하십쇼.”

  세호는 태람을 완전히 무시한 채 말없이 걸었다. 울컥한 태람은 속도를 올려 성큼성큼 세호를 앞질러 갔다. 그러자 세호도 속도를 더 높였다. 금세 따라잡힌 태람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래. 너 다리 길다. 젠장. 짜증 나.

  신경질적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태람을 세호가 뒤에서 꽉 붙잡았다. 정신 차려보니 태람은 세호에게 안겨 있었다. 뭐야. 왜?

  태람의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그가 갈 예정이었던 자리에 어린아이 머리만 한 돌도끼가 박혀 있었다. 태람의 얼굴이 공포로 물들며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인간, 피했다. 안 죽었다, 다음, 절대, 죽인다!”

  태람을 공격한 건 판타지 세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오크였다. 개구리같은 녹색 피부에 돼지 머리. 피부가 두껍고, 다리는 짧았다. 입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나 있었다.

   “선배! 제 뒤에 숨어 계세요!”

   “으, 응!”

  세호는 태람을 공격해 오는 오크의 옆구리에 칼을 찔러 넣었다. 오크는 눈을 뒤집더니 즉사했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태람은 속이 울렁거렸다.

  “정신 차리세요! 아직 끝이 아닙니다! 제가 전부 막을 테니까 아예 수풀 속에 숨어요.”

  “아, 알았어!”

  태람은 재빨리 수풀 속에 숨었다.

  “형제, 죽었다, 인간, 죽인다!”

  “매정한, 인간, 죽어! 우리가, 더, 많다! 공격!”

  오크들이 일제히 돌진해오기 시작했다. 방금 세호가 쓰러트린 오크를 빼도 10마리가 넘었다. 수적 열세에도 그는 군더더기 없는 칼솜씨로 손쉽게 오크 무리를 베어나갔다. 기이한 비명이 숲속에 울려 퍼지고, 살덩어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어느새 마지막 한 마리만이 남았다.

  “이 인간, 강하다, 하지만, 저 인간, 약하다!”

  한 마리 남은 오크는 하필 뒤에 있던 태람을 향해 도끼를 던졌다. 태람은 피할 생각도 못 하고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거짓말이지?

  “젠장! 태람 형!”

  세호가 태람에게 달려왔다. 귀가 아플 정도로 큰 굉음과 함께 오크의 도끼가 튕겨 나갔다. 준비도 없이 도끼를 정면에서 받은 충격은 컸는지 세호가 그만 검을 놓치고 말았다.

  “실패, 그렇지만, 인간, 버렸다, 무기!”

  오크는 맨손인 세호에게 달려들었다. 다음 순간 세호의 손에서 자수정의 검이 생겨나더니 오크의 목을 꿰뚫어 버렸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나는 괜찮아. 그보다 너 피 나!”

  도끼에 베여버렸는지 세호의 팔에서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괜찮습니다.”

  안절부절못하는 태람과 달리 세호는 침착한 태도로 자신의 옷을 찢어 상처에 묶었다. 하얀 천이 금방 붉게 물들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프랑 데려올게!”

  “프랑이 저한테 제대로 된 치료를 해줄 것 같습니까?”

  “확실히 그건 그렇지만….”

  세호의 천은 원래 빨간색이었나 싶을 정도로 피에 절어 있었다. 태람이 조심스럽게 세호에게 다가갔다. 

  “…미안해. 내가 괜한 고집을 부려서….”

  태람은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정말 괜찮습니다.”

  세호는 상처에 감아 두었던 천을 풀었다.

  “뭐 하는 거야! 바보!”

  “보세요.”

  세호의 상처는 그새 지혈이 되었는지 피는 더는 흐르지 않았다. 제법 큰 상처였던 거 같았는데 면적이 좁아져 있었다.

  “괜찮다고 했잖아요.”

  “소드마스터는 좀비 같은 거야?”

  “선배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말했잖아. 설정 날렸다고.”

  “자랑은 아니죠.”

  세호는 피식 웃으며 자신의 능력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줬다.

  “검에 검기를 주입할 수 있는 것이 소드 익스퍼트. 검기로 마나 블레이드를 만들 수 있고, 자유자재로 응용할 수 있는 것이 소드마스터입니다. 저는 굳이 따지자면 그랜드마스터의 초입 정도는 됩니다. 완전히 그 경지에 다다르면 몸이 재구성되고, 마나 블레이드에 속성이 생긴다고 하네요.”

  “자수정이면 무슨 속성인데?”

  “어둠입니다.”

  “메인공인데 어둠?”

  “매번 말하지만, 선배가 쓴 소설입니다.”

  “왜 또 선배로 돌아왔냐? 아까는 형이라며.”

  세호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태람은 예전에는 세호의 이런 점이 답답했는데 지금은 그저 귀여웠다.

  “말 안 할 거야?”

  “…익숙해지면 그렇게 부르겠습니다.”

  “연습해야 잘하지. 한번 해 봐. 태람 형.”

  “싫습니다.”

  “닳는 것 아닌데 해줘.”

  “닳습니다.”

  “진짜 치사하게. 해달라니까.”

  태람은 세호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그는 황급히 뒤로 몸을 뺐다. 

  “아, 알았으니까 떨어져요. 태람 형. 이제 만족하십니까?”

  미세한 차이지만 세호의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태람은 그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다쳐가면서까지 자신을 구해준 세호에게 고마웠다.

  

  고맙다고 하기에는 늦은 감이 있어서 태람은 나름대로 화해의 제스처를 내밀었다.

  “…옷 더러워졌네. 같이 씻으러 갈래?”

  “알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강가에 도착했다.

  나무 그늘까지 있는 그곳은 노천탕을 생각나게 했다. 태람은 휙휙 옷을 벗어 던지고 강에 몸을 담갔다. 사방이 탁 트인 강에서의 목욕은 그를 들뜨게 했다. 시원한 물이 머리까지 시원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너 뭐하냐? 안 들어와?”

  세호는 그런 태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엉거주춤하게 서 있기만 했다. 

  “선배는….”

  “형이라니까.”

  “…선배는 참 비위가 좋네요.”

  태람은 끝까지 선배를 고집하는 세호를 보니 어이가 없었지만, 그답다고 생각했다.

  “뭐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강은 더럽잖아요. 위생을 생각하세요.”

  “그렇게 안 더러운데? 봐. 자갈까지 보이잖아.”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강물은 바닥이 훤히 비취 보일 정도로 맑았다.

  “빼지 말고 들어와.”

  “싫습니다.”

  “그럼 왜 씻는다고 했는데?”

  “찜찜하긴 했으니까요.”

  세호는 아무리 피곤해서도 꼭 씻고 잠자리에 드는 타입이었다. 반대로 태람은 귀찮다고 그냥 잔 적도 종종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세호는 늘 아밀이 끓인 깨끗한 물로만 씻었지. 태람은 세호가 진짜 왕자 같다고 생각했다.

  “너 정말로 성가시구나.”

  “그러는 선배야말로 귀엽게 생겨서 더러워요.”

  “열 받게 말하네. 아니! 잠깐! 너 지금 나보고 귀엽다고 했지?”

  “아닌데요.”

  “사기 치네. 내가 똑똑히 들었는데? 방금 나보고 귀엽게 생겼다고 그랬잖아.” 

  “몰라요. 저는 갑니다.”

  세호가 태람의 시선을 외면했다. 부끄러워하는 게 빤히 보여서 우스웠다.

  “좋아! 서비스할게. 내가 네 몸 구석구석 전부 씻겨줄게! 어제 옷 갈아 입혀준 빚도 있고.”

  태람은 강에서 빠져나와 맨몸으로 세호에게 매달렸다. 태람에게 닿자 세호의 몸이 경직되었다.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떨어지세요!”

  “싫은데.”

  세호는 차마 태람을 억지로 떼어내지는 못하겠는지 왔다 갔다 하며 털어내려 했다.

  “내가 먼지냐! 기분 나쁘게.”

  울컥한 태람은 더 필사적으로 세호에게 매달렸다. 한참 실랑이를 한 끝에 세호가 살짝 휘청거렸다. 태람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그대로 강가로 떠밀어 넣었다.

  결국 두 사람은 사이좋게 물에 퐁당 빠지고 말았다. 

  “최악입니다.”

  세호가 물을 먹었는지 콜록거리며 연거푸 기침했다.

  “젖어도 잘생겼네. 광고 하나 찍어도 되겠다.”

  태람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세호를 보며 실컷 웃었다. 

  “웃깁니까?”

  “당연하지. 너 완전히 얼빠진 표정으로 허우적거렸거든? 아까워라. 카메라가 있다면 대대손손 가보로 남기는 건데.”

  그때였다. 세호의 주위에 물보라가 일어났다.

  “야! 너 뭐 하는 거야!”

  세호는 당황하는 태람을 보더니 씩 웃었다. 악동 같은 미소에 태람은 자기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어떻게 저것도 잘 생겼냐? 세상 참 불공평하네.

  “선배도 한 번 당해보세요.”

  세호의 손짓에 물이 솟아올랐다. 물은 마치 뱀처럼 태람을 끈질기게 쫓아서 덮쳐버렸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에 태람은 맥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너무 심하잖아!”

  “그러게 누가 사람을 그렇게 놀리래요.”

  “두고 봐!”

  태람은 첨벙거리며 세호에게 미친 듯이 물을 뿌렸다. 세호는 치사하게 능력을 사용해 태람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았다. 그래도 아까같이 심한 공격은 하지 않았다.

  고작 10분도 되지 않아 태람은 완전히 방전되었다.

  “말린 오징어 같네요.”

  “능력만 쓰고 진짜 치사한 새끼.”

  “…제가 조금 심했네요.”

  세호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강가에 축 늘어진 태람을 안아 올렸다. 태람은 세호와 피부가 맞닿자 어제의 감각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부끄러워져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피곤해요?”

  “응. 많이 힘들어.”

  태람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혹시라도 떨림이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이번만큼은 세호가 담담한 성격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 나 싫다고 막 떨구면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요. 시끄러우니까 잠이나 자요.”

  내용과 다르게 상냥한 세호의 목소리에 태람은 정말로 잠이 솔솔 왔다. 세호의 품은 넓고 포근해서 기분이 좋았다. 쭉 이대로 머물러 있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원래대로 돌아가도 세호가 내 옆에 있어 줄까? 태어나서 처음 느껴보는 불안감이었다. 태람은 불안을 떨쳐내기 위해 세호의 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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