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아침을 먹고 산책하러 나온 태람은 복도에 쓰러진 세호를 발견했다. 하마터면 밟아버릴 뻔했네. 태람은 세호를 질질 끌어 방으로 옮겼다.
“야. 괜찮냐? 정신 차려.”
“…태람 선배.”
“괜찮아?”
“…괜찮습니다.”
세호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태도는 담담했다. 사람은 적응의 생물이란 말이 맞는지 이제 웬만한 독은 눈살 한 번 찌푸리고 넘겨버리는 그였다.
“이번에도 프랑?”
“프랑밖에 더 있습니까? 오늘은 제 잔에 독을 발라 놓은 것 같군요. 차는 확인했었는데 그쪽은 미처 확인 못 했습니다. 마시자마자 혀끝부터 마비되어서 방까지 못 가고 그만….”
“쓰러진 건 오랜만이네.”
“그래도 조금 지나면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성이 생긴 것 같기도 하네요.”
“모닝 독으로 디톡스! 이러다 너 피부도 좋아지는 거 아니야?”
“…하나도 안 웃깁니다!”
“하하…. 미안.”
“이왕 만난 거 보석이 탁해진 원인이나 같이 고민해봤으면 합니다.”
“그래. 요즘 네가 너무 바빠서 말할 시간이 없었네.”
“정말로 선배가 부럽습니다.”
“간단한 직무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나 여기서는 문맹이잖아.”
“기대도 안 했습니다.”
무시당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지만, 소처럼 일한 세호와 달리 하릴없이 탱자탱자 논 건 사실이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에서 카이란을 만났다고 했죠?”
“응.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확인했을 때는 문제 없었어.”
태람은 손에 들린 책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중앙에 박힌 보석은 밝게 빛나던 예전과 달리 검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프랑도 원작이랑은 다른 만남이었는데 이유를 모르겠네.”
“메인수에게 반하는 프랑이라는 큰 줄기를 클리어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첫 페이지를 채울 때도 느꼈지만 생각보다 판정이 빡빡하지는 않아요.”
“시기는 다르지만 카이란도 나한테 관심을 가진 것 같은데….”
“사소한 것이라도 좋으니 두 사람의 차이점을 생각해봐요.”
“그러고 보니 카이란이 이상한 말을 했어.”
“어떤 말이요?”
“내 존재감이 남들보다 크다고.”
“존재감….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이유라면 저에게도 관심을 가졌을 겁니다. 선배와 저의 차이점은 하나밖에 없네요.”
“그게 뭔데?”
“선배가 원작자라는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 존재감이란 원작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카이란이 그 사실을 인지한 것 자체가 원작의 흐름을 반하는 일인 거죠.”
“그 말은 앞으로 다른 애들한테 내가 원작자라는 걸 들키면 망한다는 거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럴 확률이 높죠. 선배는 앞으로 평범한 차원 이동자가 되어야 합니다.”
“평범한 차원 이동자가 대체 뭐야. 진짜 이상해.”
그러다 문득 어떤 사람이 떠올랐다. 하지만 얼굴도 이름도 안개가 낀 것처럼 기억나지 않았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이럴 때 ……가 있었다면…. 어, 기억이 안 나….”
“선배?”
“힘들 때마다 나를 도와줬던 가족 같은 사람이었어.”
혼란스러워하는 태람을 보고 세호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혹시 민아 선배를 말하는 겁니까?”
“……그게 누구야?”
“선배….”
“노랑이가 말했었지. 원작의 스토리를 벗어나면 이 세계에 동화된다고….”
“…괜찮아요?”
태람은 자신보다 심각해지는 세호의 얼굴을 보고 억지로 웃었다. 정신 차리자, 그래도 내가 선배니까.
“괜찮아. 엔딩까지 후다닥 끝내버리면 전부 돌아올 거 아니야. 그렇지?”
“그렇죠….”
“좋아! 일단 오늘은 내가 혼자 내가 페이지 좀 채워볼게.”
“하지만….”
“제발 좀 쉬어. 독도 독인데 너 그러다 과로사 하겠다.”
“알았습니다. 무리하진 마시고요.”
“맡겨 둬.”
태람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다음 사건은 파티 결성. 메인수는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다니다가 어떤 소문을 듣고 파티를 꾸려 여정을 나선다. 첫 번째 동료인 왕자는 문제없고, 두 번째는….
*
태람은 세호와 헤어지고 온실 정원으로 프랑을 불렀다.
“가끔은 이렇게 느긋하게 보내는 것도 좋네요.”
섬세한 손길이 닿은 정원수들과 봄꽃이 만개한 화단. 그리고 아름다운 미남. 세 가지의 요소들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러게요.”
잠시 정신이 빠졌던 태람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일부러 눈을 살짝 내리깔았다. 슬픈 생각 하자. 나는 엄청나게 슬프다.
“태람 님? 안색이 안 좋습니다. 혹시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라도 괜찮다면 고민을 들어드릴게요.”
태람은 프랑이 금방 떡밥을 물었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세호가 없어 불안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실은….”
한참 뜸을 들인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킬레인 산맥에 가려고 해요.”
“왜 그런 험한 곳을?”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설마 그 소문의 마법사 말인가요?”
“네.”
태람은 가련함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며 자신이, 아니 메인수가 처한 사정을 설명했다.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
킬레인 산맥에 은둔하고 있는 그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10 써클에 도달한 자이다. 원작의 메인수는 그가 차원 이동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소문을 주워듣고 그를 만나기 위해 여행에 나서게 된다.
“무섭지만 포기할 수 없어요.”
“태람 님의 사정은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요.”
프랑의 표정이 한층 심각해졌다.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는 환영 마법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결계에 말려들면 영원히 악몽을 꾸게 된다고 하죠.”
거기다 킬레인 산맥에는 오랜 시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몬스터가 우글거렸다. 이미 실종되거나 사망한 사람이 수백 명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도 마법사를 찾는 사람이 많은 이유는 그가 자신에게 당도한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실상은 심심한 드래곤의 유희에 불과했고, 그 정체는 카이란이었다.
“알아요. 그래도 저한테는 그의 마법이 절실해요. 왕자님께서도 도움을 주신다고 하셨고….”
“그러고 보니 왕자님은 어디 계시나요?”
“바쁘신 일이 있으신 거 같아요.”
“점심 식사도 안 하신 거 같은데 어디 아프신 게 아닐지 걱정이네요.”
프랑의 예쁜 얼굴이 수심에 가득 찼다. 태람은 가해자인 프랑이 피해자인 세호를 걱정하고 있는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프랑이 가증스럽다고 생각했지만,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연신 프랑과 눈을 맞추며 부드럽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왕자님은 평소에도 일에 열중하시면 종종 식사를 거르시거든요.”
“그런가요? 두 분은 정말 친하시네요.”
“여행을 떠나기 전에 처리하실 게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준비할 게 있어서 조금 힘드네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요?”
“이렇게 이야기를 들어 주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저도 태람 님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태람은 밑밥이 충분히 깔렸다고 생각했다. 티나게 한숨을 크게 내쉰 뒤 조심스럽게 본론을 꺼내 들었다.
“신관님을 한 분 데려가고 싶은데…. 워낙 소문이 안 좋은 곳이라 좀처럼 적합한 분을 찾기 어렵네요.”
태람은 말끝을 흐리며 프랑을 쳐다봤다.
“저라도 괜찮다면 함께 가도 될까요?”
프랑의 말에 태람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 지었다. 그래도 여기선 한 번 튕겨줄까?
“프랑은 대단한 사람이잖아요. 제 개인적인 목적을 위한 여정에 참가시킬 수는 없어요.”
신이 부여한다고 알려진 가장 순수하고 신성한 기운 ‘신성력.’ 프랑은 역사상 그 유례가 없을 정도로 높은 신성력의 소유자이며, 몇십 년 만에 나타난 전투 신관이었다.
원래 치유와 보조 능력에 특화된 신성력으로는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신관 중 마법의 기반인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신성력과 마력을 융합하여 신성 마법을 창조했다. 이 힘을 사용하는 자들을 전투 신관이라고 불렀다.
마법사도 귀한 판국에, 신성력과 마력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전투 신관은 어느 나라를 가든 환영 받았다. 거기다 프랑은 최연소 대신관이니 정치적으로도 탐나는 존재였다.
“프랑과 함께라면 든든하겠지만 바쁘시니까.”
“하지만 저는 태람 님의 힘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태람이 프랑의 말을 못 이기는 척 허락하려는 순간 노랑이가 나타났다. 뭐야? 나 안 불렀는데?
[설명은 밖에서 할 테니 일단 나와라삑.]
프랑한테는 노랑이의 모습이 안 보이는 것 같았다. 혹시 뭔가 잘못됐나? 태람은 불안한 마음에 일단 자리에서 일어났다.
“프랑. 미안해요.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각났는데…. 잠시만 기다려 줄래요? 곧 돌아올게요.”
“네? 다녀오세요.”
의아해하는 프랑을 뒤로한 채 태람은 일단 온실 정원을 나왔다.
“결정적인 순간에 방해한 건 아주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겠지?”
복도로 나온 태람은 노랑이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억울하다삑! 나는 세호가 시켜서 너를 부르러 온다삑.]
“이세호가?”
[스토리 진행에 문제가 생겼다고 했다삑.]
“…뭐?”
[알았으면 놔라삑! 마침 저기 오고 있으니 직접 물어보라삑. 나는 갈거다삑!]
태람은 노랑이가 사라지며 가리킨 방향을 봤다. 복도 끝에서 세호가 비틀거리며 힘겹게 걸어오고 있었다.
“왜 왔어. 몸도 엉망인 주제에.”
“그것보다 프랑은요?”
“그것보다라니 너 그러다가 진짜 훅 간다.”
“스토리가 엇나가면 훅 가는 건, 저만이 아닙니다.”
“잘 풀리고 있었어.”
“스토리 진행에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뭔데?”
“책을 펴보세요.”
세호의 말에 태람은 책을 펴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오늘 분의 페이지가 텅 비어 있었다.
“뭐야? 아침부터 난리 쳐서 이뤄낸 내 성과는? 전부 개고생이었어?”
“중요한 사건에는 필요한 등장인물이 전부 모여야 한다는 거죠. 이번에는 아무래도 왕자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아니. 아밀 걔는 평소에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염탐을 하더니 오늘따라 폐업했냐?”
“프랑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온실 정원.”
“계획을 짜봅시다.”
태람은 세호에게 지금까지의 상황을 차근차근 말했고, 두 사람은 작가의 상상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간단한 상황극을 만들어냈다.
“그럼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세호가 온실 정원의 문을 거칠게 열고 들어갔다. 그는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프랑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소리쳤다.
“너 따위가 없어도 태람은 내가 지킬 수 있다.”
“갑자기 무슨 일이죠?”
어리둥절한 프랑을 보고 타이밍을 재던 태람도 튀어나왔다.
“왕자님! 잠시만요.”
“태람 님? 이게 대체?”
“방에 물건을 가지러 갔다가 왕자님을 만나서요. 어쩌다가 프랑에 대해 말했더니….”
“설명은 필요 없다.”
세호가 프랑과 태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직 힘든지 세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또 쓰러지진 않겠지? 태람은 진짜로 안절부절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신전으로 돌아가라.”
“저도 여정에 동행하겠습니다.”
“거절한다.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왕자님에게는 버거운 것 같은데요?”
“나를 모욕하는 거냐?”
“보세요. 지금도 그렇게 비틀거리고 계시잖아요? 소유욕도 적당히 부리시죠.”
프랑이 상태가 안 좋은 세호를 비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너야말로 적당히 하지? 네 장난을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장난이라 말 잘하셨네요. 이깟 사소한 장난도 이겨내지 못하는 왕자님이 과연 태람 님을 지킬 수 있을까요?”
태람은 세호가 걱정되었지만 여기서는 절대 개입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었다. 나는 더럽게 순진한 메인수. 독이고 뭐고 몰라요. 태람은 겁에 질린 토끼처럼 눈알이나 굴리고 서 있었다.
“태람 님은 제가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네가 아니라 신관이겠지. 왕실에 우수한 신관은 얼마든지 있다.”
“저보다 뛰어난 자는 없어요.”
세호와 프랑은 서로 매섭게 노려봤다. 살벌했다. 아픈데도 프랑에게 꿀리지 않는 세호를 보고 태람은 내심 감탄했다.
“오만하군.”
“그 말 그대로 돌려드리죠.”
흉흉한 분위기가 절정에 달았을 때쯤 세호가 태람에게 살짝 눈짓했다. 지금이 끼어들 타이밍이구나. 태람은 쪽팔리지만 굳은 결심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싸우지 마세요!”
진부하고 오글거리는 대사에 속이 느글느글했지만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을 아밀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그런 거 아니에요.”
프랑의 길고 하얀 손이 태람의 어깨 위에 내려왔다. 프랑에게 살포시 안겨진 태람은 좋은 향기에 마음이 흐물흐물해졌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미인이 싫을 리가 없었다.
“손 떼.”
“싫어요.”
“남의 것에 손대면 안 되지.”
“태람 님을 사물처럼 부르지 마세요. 아직 정해진 것도 없잖아요.”
“건방진!”
태람은 아쉽지만, 프랑의 품을 벗어나 세호에게 매달렸다.
“왕자님. 진정하세요!”
“놔라!”
세호의 거친 움직임에 태람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사전에 이야기를 해둬서 알고 있었는데 너무 아팠다. 태람은 신체 스펙의 차이를 실감하며 조금 좌절했다.
“태람 님!”
“태람!”
넘어진 태람에게 두 사람이 달려왔다.
“제가 치료해 드릴까요?”
“괜찮나? 주치의를 부를까?”
“저는 괜찮아요. 그저 두 사람 사이가 저 때문에 틀어진 것 같아 슬프네요.”
태람은 의도적으로 울먹거렸다. 슬픈 영화를 생각하자. 제발! 흘러라. 눈물! 태람의 가짜 눈물에 프랑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왕자님과 저는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의견이 조금 안 맞았던 거뿐이에요.”
“그렇다. 태람. 네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 너를 다치게 하다니 미안하구나.”
“그럼 우리 안 싸우고 사이좋게 여행 가는 거죠?”
“약속할게요.”
“알았다. 허가하지.”
그렇게 프랑이 파티원이 되었다.
*
프랑을 영입한 것으로 메인 사건을 하나 해결한 태람은 다시 느긋한 백수 생활로 돌아왔다. 출발까지는 일주일 정도가 남아서 여유가 있었다.
일단 오늘은 디저트 파티를 해야지. 태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밀에게 가고 있었다. 복도를 서성이는 붉은 머리카락을 보지 않았더라면 여전히 행복했을 것이다.
카이란? 튀자. 태람은 인기척을 죽이며 조심스럽게 뒤로 돌았지만, 그만 카이란에게 딱 걸려버렸다.
“봐. 또 만났지?”
“…안녕하세요.”
“왜 도망치려고 해? 내가 싫어?”
도망가려는 태람을 보고 밥그릇을 빼앗긴 강아지만 시무룩해진 카이란. 태람은 양심이 찔렸다. 그렇게 쳐다보면 마음이 약해진단 말이지.
“저쪽에 볼일이 있어서 그런 건데요?”
“거짓말. 동요하고 있는데?”
저 망할 치트. 완전 사기잖아. 과거의 나는 왜 저런 설정을 했을까? 태람은 업보라고 생각하면서도 짜증이 났다.
“그나저나 카이란은 왕국에서 일하시나 봐요.”
“또 알면서 모른 척한다. 좋아. 뭐, 특별히 속아줄게. 대신 오늘은 나랑 놀아줘.”
카이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정신을 차리니 태람은 처음 보는 장소에 와있었다.
“여기는?”
“내 방이야.”
오래되어 보이는 고서적들과 신기하게 생긴 마법 도구들. 벽에 그려진 정체 모를 마법진과 유리병에 들어있는 어딘지 수상한 약초까지. 카이란의 방은 참 신기했고, 온갖 것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어 정신 사나웠다.
“아무 데나 편하게 앉아.”
“어디에 앉으면 될까요? 제 눈에는 앉을 곳이 안 보이는데요.”
“알았어.”
카이란이 손을 흔들자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신기하네요.”
“재미있어?”
“네. 또 보여주세요.”
카이란은 태람이 질릴 때까지 다채로운 마법을 선보였다.
“네가 웃으니까 기분이 좋아.”
“고, 고맙습니다.”
다시 시작된 불꽃 플러팅에 태람은 어쩔 줄 몰랐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너에 대한 건 전부 알고 싶어져.”
“우정이 아닐까요?”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건 아니고?”
묘한 분위기가 되어버리자 태람은 더 곤란해지기 전에 도망치기로 했다.
“곧 저녁때네요. 더 늦기 전에 저는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돌아갈 준비를 하던 태람을 카이란이 불러 세웠다.
“난 봤어. 꿈속에서 네가 신기한 기계를 만지는 거.”
카이란은 피아노를 연주하듯 허공에서 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였다. 태람은 저 손짓이 컴퓨터를 의미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카이란아. 너 남의 꿈도 엿볼 수 있는 거야? 진짜 개사기잖아. 세호는 무력, 프랑은 신성력. 카이란 마력. 하여튼 나빼고 다 먼치킨이지.
“그 기계가 뭔지 말해주면 보내줄게.”
속이 타는 태람의 심정도 모르고 카이란이 상큼하게 웃었다. 꼭 하이틴 소설의 한 장면을 뜯어온 것 같았다. 어차피 살아있는 거짓말탐지기 같은 카이란을 완전히 속일 수는 없었다.
다른 차원에서 온 건 원작이랑 똑같으니까 밝혀도 문제없겠지?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다른 차원에서 왔어요. 제 꿈에 나온 건 저희 세계의 보편적인 기계인데 정보를 검색할 수 있죠.”
“신기하네. 구조를 알 수 있으면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카이란한테는 마법이 있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그쪽이 더 대단한데요?”
“그런데 너는 검색이 아니라 뭐가 쓰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 일기요! 매일 매일 일기를 썼죠.”
고수위 19금 BL 소설이 건전한 일기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더 괴롭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여기까지 할까?”
“…저는 진짜 가볼게요.”
“마지막으로 그거 한 번 해주라.”
“뭐요?”
다음 순간 카이란이 고개를 숙여 태람의 가슴팍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이거 설마? 쓰다듬어 달라는 건가? 진짜 개냐?
“아. 빨리.”
“아, 알았어요.”
태람은 카이란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복슬복슬 부드러운 촉감에 묘하게 중독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진지하게 드래곤은 무슨 과인지를 한참 고민했다. 하는 짓은 딱 갯과인데, 실제로는 도마뱀이겠지? 잘 모르겠네.
“이제 정말 저 갈게요.”
“응! 조심히 들어가. 아 참!”
“또 왜요?”
“일주일 뒤에 출발하는 거 나도 갈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네?”
태람은 욱해서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아니. 너를 찾으러 가는 파티인데 네가 참가하는 게 말이 되냐?
“제가 누굴 찾으러 가는지 알아요?”
“알아. 그거 나잖아?”
“어….”
너무나 태연한 카이란의 대답에 순간 말문이 막혔다.
“너 내 진짜 정체도 알고 있더라. 처음에는 표면적인 것만 아는 줄 알았는데 나를 볼 때마다 자꾸 드래곤을 떠올리잖아. 대체 어떻게 알았어?”
“그게 어쩌다 보니….”
“깊이 파고들 생각은 없으니까 그런 얼굴 하지 마.”
카이란은 모든 사정을 다 아는 것처럼 이해심 가득한 눈동자로 태람을 바라봤다. 그게 오히려 태람을 더 초조하게 만들었다. 진짜 어쩌면 좋지?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서 왜 따라오려는 건데요? 저를 따라올 이유가 없잖아요.”
“너는 있어? 찾으려는 드래곤이 눈앞에 있는데도 꼭 거기 가야 할 이유.”
태람은 답답한 마음에 툭하고 해서는 안 될 말을 내뱉었다.
“그야 주인공이니까….”
“주인공? 태람은 주인공이야?”
아. 망했다. 태람의 눈앞에 잔소리하는 세호가 어른거렸다. 다른 건 몰라도 원작자라는 걸 들키는 건 곤란했다. 그래. 수치심을 버리자.
“저는 늘 제가 제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거로 해줄게. 아무튼 나 말릴 생각은 하지 마. 이미 국왕한테도 말했어.”
태람은 카이란이 얄미워졌다. 영악한 용용이.
“꼭 파티원이 될 거라면 약속해 주세요.”
“응! 뭔데?”
“만약 제가 꾸린 파티가 카이란의 결계를 뚫는다면 카이란은 킬레인 산맥의 마법사로서 일행들을 만나야 해요.”
“왕자랑 하는 연기를 나랑도 하자는 거지?”
진짜 거의 다 아네. 태람은 더 놀랄 힘도 없었다.
“…그래요.”
“이상해. 왜 그렇게 번거롭게 해. 꼭 누가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파고들 생각 없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런데 궁금하긴 해.”
태람은 내심 안심했다. 아밀의 존재를 모른다는 건 이곳이 소설 속 세상이고, 아밀이 화자고, 자신이 원작자라는 것까지는 모른다는 소리였다. 방심할 수는 없지만 말이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요. 그래도 모든 것이 끝나면 진실을 말씀드릴게요.”
“…꼭 말해줘.”
“그럼요. 그때까지는 정체를 숨기는 게임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게임? 흠, 재미있네. 어쨌든 알았어! 이제 나도 왕자처럼 너한테 더 가까워진 거네.”
“그럼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응! 내 청혼을 받아줄 때까지 네 옆에 있을 거야.”
태람은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서운 개, 아니 드래곤. 세호한테는 나중에 적당히 말하자.
이렇게 어영부영 협력자가 생겨났다.
*
카이란과 헤어지고 늦은 밤. 세호가 태람을 찾아왔다.
“아직 얼굴이 안 좋네. 괜찮아?”
“전혀요. 토할 것 같습니다. 개 같은 자식.”
세호는 아직도 약 기운이 덜 가셨는지 힘들어 보였다. 태람은 욕하는 세호가 신선했다. 한편으로는 프랑에 대한 악감정이 어지간히 쌓였다고도 생각했다.
“아프면 내일 오지 그랬어.”
“…선배는 괜찮습니까?”
“응?”
“아까 온실에서요. 조절한다고 하긴 했지만 조금 세게 민 것 같아서…. 선배는 평범한 인간이지 않습니까.”
너도 평범한 인간이라고 말하려던 태람이었지만, 탄탄한 세호의 몸매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괜찮아. 몸도 성치 않은 게 무리하긴. 그래도 걱정 고맙다.”
이어지는 세호의 말에 훈훈한 분위기는 박살 났다.
“책 봤습니다. 카이란이랑 아주 좋은 시간을 보냈더군요.”
“그, 그래? 아밀이 어디선가 보고 있었나 보네. 그래도 보석도 더 탁해지지 않았고, 카이란도 협력해주기로 했으니 잘 된 것 같아.”
“협력이요?”
태람은 실수로 주인공이라 말한 부분만 빼고, 세호에게 카이란과 협상한 걸 설명했다.
“카이란은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만, 소설이나 화자 같은 건 모르는 눈치였어. 그래도 보석도 더 탁해지지 않았고 다행인 것 같아. 그, 그치?”
세호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고, 태람은 그의 눈치를 봤다.
“알겠습니다.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특별히? 그것보다 프랑이랑 여행 괜찮을까? 왕궁에서도 독을 넣는데 밖에서는 더 쉽게 넣을 수 있잖아.”
“선배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되겠죠.”
“너답지 않은 말이네.”
“그러게요. 조금은 선배를 의지하고 있습니다.”
평소보다 온기가 느껴지는 세호의 목소리에 태람은 조금 감동했다.
”맞아. 너 진짜 대단하더라. 어떻게 책도 안 읽었다면서 그렇게 왕자같이 잘 받아 치냐?”
“선배의 소설 속의 메인공은 늘 똑같은 패턴이지 않습니까.”
“뭐!”
“질투심 많고, 독점욕 강해서 주변에 시비 거는 싸가지.”
“너보다는 덜 하거든! 좋게 봐주려고 하면 꼭 초를 친다니까.”
“좋게 봐 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근데 잠깐! 내 소설 속 공 패턴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솔직히 말해 봐. 너 내 팬이지.”
세호는 또 입을 다물었다. 태람은 정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너는 꼭 불리하면 말이 없어지더라. 내 소설 정독했지? 소장본도 샀지? 다 읽었지? 읽었잖아? 그렇지?”
세호는 불쾌한지 눈썹만 꿈틀거릴 뿐 여전히 침묵을 지켰다. 태람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추궁했다. 한참 뒤 세호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디까지나 시장조사였습니다.”
개미만 한 소리였지만 태람은 똑똑히 들었다.
“웃기네. 맨날 무거운 소재만 쓰면서 무슨 시장조사야. 소설에 반영도 안하면서.”
“슬럼프 극복용이었습니다. 이 정도가 팔리는데 제가 못 할 리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특히 이 책은 예의상 전부 읽으려고 했는데 결국 초반만 손대고 못 읽었죠.”
“야! 꼭 그렇게까지 말해야겠어?”
“혹시라도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선배의 소설이 싫습니다.”
“나도 네 소설 무겁고 질척질척 기분 더러워서 싫거든!”
“질척? 전부터 생각했는데 단어 선택이 참 유치하시네요.”
“뭐야?”
그날 밤 두 사람은 밤새도록 토론을 방자한 말싸움을 했다.
*
일주일 뒤 태람의 파티는 여행에 나섰다.
태람은 일행들을 슬쩍 둘러봤다. 새삼스럽지만 엄청난 인선이었다. 물론 나쁜 쪽으로.
사사건건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되는 성격 더러운 세호, 선량한 미소에 속으면 홀라당 먹혀버릴 것 같은 독을 품은 신관 프랑, 마냥 해맑다고 방심하면 불꽃 플러팅을 펼치는 제멋대로인 드래곤 카이란, 그리고 귀여운 얼굴로 음흉하기 그지없는 아밀까지.
이 파티 이대로 괜찮은 걸까? 불안함은 남아 있었지만 갑갑한 왕실을 나오니 기분은 좋았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싱글벙글 꽃처럼 활짝 핀 태람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가파른 숲길에 가도 가도 변하지 않는 풍경에 질려버렸다. 저질 체력도 문제였다. 죽겠다. 다리가 부들거려.
태람의 파티가 이렇게 험한 길을 선택한 이유는 결코 본의가 아니었다. 눈에 띄지 않게 수행 시종도 아밀 한 명만 대동하고 나선 여행이었지만 일행은 지나치게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끌었다. 급하게 후드를 구매해 깊게 눌러썼지만,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숲을 우회하는 것이었다.
“태람 님. 많이 힘드세요?”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태람에게 프랑이 다가왔다. 대답할 힘도 없는 태람은 말없이 고개를 끄떡였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카이란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힘들면 내가 안아 줄게! 아니면 업어줄까? 태워줄까?”
태람이 속으로 툴툴거렸다. 카이란아. 사람은 사람을 태우지 못한단다. 드래곤인 거 인증해?
“카이란 님. 태람 님은 신의 대리자입니다. 예의를 지켜주세요.”
“태람이 괜찮다고 했는데?”
“그래도 지켜야 할 선이….”
“그렇게 부러우면 내가 양보할까?”
“제가 부러워했다고…. 그런 적 없어요!”
“다 보이는데?”
“…정말 말이 안 통하네요.”
태람은 프랑이 꼼짝 못 하는 것을 보고 어쩐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프랑이 가위고, 카이란이 주먹이네. 태람이 조용히 분석을 하는 사이 카이란이 프랑에게 다시 제안했다.
“그렇게 열망이 이글이글 올라올 정도면 그냥 업어버려!”
“그,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끼리 있잖아. 뭐 어때? 태람이 엄청 힘들대.”
카이란의 설득에 프랑은 결국 행동에 나섰다.
“그럼. 태람 님. 실례하겠습니다.”
“네? 자, 잠깐!”
막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다가온 프랑은 태람을 번쩍 안아 올렸다. 태람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런 미친! 내 엉덩이. 프랑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엉큼하네. 은근슬쩍 만지고 있어!
아밀이 이쪽을 빤히 쳐다보며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기에 태람은 두 배로 민망해졌다.
“불편하시진 않으세요?”
“그게…. 저 진짜 괜찮아요!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하지만…. 그러다 쓰러지시면….”
태람은 한참을 발버둥 친 끝에 겨우 프랑의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프랑은 신관 주제에 힘이 세고, 끈질겼다. 생긴 건 가녀린 미인인데 방심할 수가 없네.
“업히시는 게 부담스러우시면 제게 기대셔도 됩니다.”
“저보다 어린 아밀도 혼자 걸어가고 있는데 제가 그럴 수는 없죠. 게다가 저 때문에 말도 못 타게 못 타게 됐잖아요.”
그랬다. 태람의 파티는 처음에는 말로 이동을 했었다.
하지만 말을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던 태람은 말에 오르는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겨우 세호와 함께 말을 탔으나 메인수 보정을 받은 태람의 가녀린 몸은 장기간 이어진 승마를 버틸 수 없었다. 결국, 중간에 말을 팔고 걸어서 이동하게 되었다. 태람은 아직도 엉덩이가 얼얼했다. 이 정도면 디버프 수준이야. 재앙이야.
“태람 님은 일반인이시잖아요. 아밀은 제국의 시종. 그것도 전투 시종입니다.”
앞서가고 있던 아밀이 뒤돌아서서 씩씩하게 말했다.
“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꾸준히 단련하고 있습니다!”
태람은 새삼 아밀이 엄청난 양의 짐을 짊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충 봐도 본인 몸무게의 몇 배에 달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저 여유. 반면 태람은 아밀이 짊어진 짐의 반의반도 안 되는 가벼운 가방을 메고 있었지만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젠장. 내가 여기서 제일 약골이냐. 태람은 자신이 최약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태람 님! 제가 가방이라도 들어 드릴게요!”
“정말 괜찮은데….”
태람은 못 이기는 척 아밀에게 가방을 넘기려고 했다. 조금 창피하지만 나도 살아야지.
“내가 들지.”
어느새 나타난 세호가 태람의 가방을 중간에서 낚아챘다. 은근슬쩍 태람을 자기 옆으로 끌고 오기까지 했다. 그러자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프랑이 나섰다.
“제가 들겠습니다. 감히 왕자님께 이런 일을 시킬 수는 없죠.”
“웃기고 있군.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지?”
“애초에 제가 먼저 도움을 드리기로 했으니까요.”
“손 놔. 태람의 것은 내 것이기도 하다.”
“태람 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건 아니지만….”
아까 전 카이란한테 밀리던 프랑이 세호한테는 조금 강했다. 태람은 세 사람의 관계성이 신기했다. 그럼 세호가 보자기네.
소소한 즐거움도 잠시 두 사람은 태람을 사이에 끼고 옥신각신했다. 그 바람에 태람은 이리 밀쳐지고, 저리 밀쳐졌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귀찮으니까 전부 저리 가!”
모두의 시선이 태람에게 쏠렸다. 너무 피곤한 나머지 본심이 튀어 나와 버렸네. 뭐라고 변명하지? 다른 건 몰라도 세호의 굳은 표정이 특히 무섭다고 생각했다. 태람은 세호에게 혼나기 전에 수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개판 오분 전의 상황을 정리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내가 들래!”
마법을 써서 태람의 등 뒤에 뿅 하고 나타난 카이란이 태람의 가방을 쏙 빼갔다. 목표를 상실한 세호와 프랑은 잠시 망연자실해 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정말 대단하다. 어떻게 여기를 끼어들 수 있지? 태람은 카이란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에 감탄했다.
사태가 진정되고, 짐도 없어진 태람은 몸도 마음도 편해졌다.
“카이란. 고마워요.”
“아니야. 태람은 내 남자친구 후보니까.”
아니. 아니. 그건 아니지. 항의하는 태람의 시선을 무시하고 카이란이 태람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조금만 천천히 가요.”
그 모습을 본 아밀은 평소의 활기찬 그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중얼거렸다.
“천진난만한 순진공…. 맛있다.”
어쨌든 갈등은 무사히 해결되었고 다시 여행은 이어졌다. 태람은 곧 다가올 위기도 모른 채 평화를 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