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뒤, 소설 속 세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태람과 세호는 다음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스토리를 정리하기 위해 모였다.
왕자의 방은 태람이 사용하는 귀빈 방보다 더 화려했다. 특히 중앙에 작은 분수가 있다는 사실에 태람은 컬쳐쇼크를 받았다. 무엇보다 엄청나게 깨끗했다. 모델 하우스야? 뭐야? 먼지 한 톨도 없네. 매일 치워줘도 너저분한 자신의 방과 비교하니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너 결벽증이야?”
“선배가 더러운 거겠죠.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쪽으로 오세요. 우선은 기본적인 것부터 정리하죠. 간단하게 지도부터 만들까요?”
와다닥 쏟아지는 세호의 말에 태람은 정신이 없었다.
“…그런 게 꼭 필요해?”
“당연하죠.”
세호는 종이와 펜이 놓인 책상 쪽으로 태람을 끌고 가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종이에 큰 원을 하나 그리고 룬베르 왕국이라고 써넣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주요 국가를 표시하면 되겠네요. 나머지는 잘 부탁드립니다.”
“그게….”
태람이 곤란한 얼굴로 세호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러세요?”
“룬베르 제국 말고는 딱히 정한 게 없어.”
“…하다못해 주변 국가 이름 정도는 있을 거 아닙니까.”
“진짜 없어. 항상 옆 나라, 상업이 발달한 나라, 자원이 많은 나라…. 이런 식으로 적당히 넘겼거든.”
“정말로 선배는….”
세호에게서 이를 악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섬뜩한 소리에 태람은 자기도 모르게 예의 바른 자세가 되었다.
“너, 너 그러다 이 상한다.”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너무 화내진 마. 애초에 이 소설은 민아랑 가볍게 장난치면서 쓴 글이었다고.”
“화 안 냈습니다.”
“그럼 그렇게 이 악물고 말하지 말던가…. 나도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겠냐?”
두 사람의 언성이 서서히 높아졌다.
“설정 하나 제대로 기억 못 하는 건 선배면서 왜 큰소리를 내시죠.”
“설정 자세하게 써봤자 다 활용도 못 해!”
“아무리 설정을 자세히 안 짜더라도. 나라 이름은 기본이죠.”
“그게 뭐 어때서! 완결 잘만 냈잖아!”
“즉흥적인 건 좋은 게 아닙니다. 그래서 저희가 이 고생을 하고 있죠.”
“유동적이라고 해줄래? 트렌드 반영이 빠른 거야!”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릉거렸다.
그 와중에 태람은 어쩐지 억울하고 열 받아서 눈물을 찔끔 났다. 내가 그래도 선배인데 한마디도 안 져. 아, 빨리 돌아가고 싶다.
그런 태람을 보고 마음이 약해졌는지 세호가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아…. 말이 심했습니다. 우선 등장인물부터 정리하죠. 선배에게도 도움이 될 겁니다.”
“…알았어. 정리해볼게.”
“제가 받아 적을 테니 말해주세요.”
“그러니까 신관이랑 드래곤이 있어. 아! 마왕도 나온다.”
“그렇게 툭툭 내뱉지 말고 제대로 정리하고 말하세요!”
“잘못했다면서 또 소리 질러? 진짜 짜증 나.”
“말 좀 예쁘게 하시죠.”
“너나 비꼬지 마!”
평화는 10초를 못 갔다. 이 뒤로도 두 사람은 한참을 옥신각신 말싸움을 하다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냥 알아서 쓰세요.”
세호가 태람에게 종이와 깃펜을 거의 집어던지듯 건네주었다. 태람은 펜에 찔릴까봐 깜짝 놀라면서 펜을 받았다.
“겁나 고오맙다.”
“이름, 나이, 종족, 성격, 메인수와의 관계, 키릭 왕자와의 관계.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이왕이면 등장하는 순서대로 써주세요.”
태람이 비꼬든 말든 세호는 자기 할 말만 했다. 반박하기도 지친 태람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이 안 정한 애도 있는데?”
“허술하긴.”
“뭐라 그랬냐?”
“아닙니다. 되는대로 써주세요.”
태람은 무시하는 듯한 세호의 말을 듣자 의욕이 샘솟았다. 아주 끝장나게 써서 세호를 놀라게 하고 싶었다. 그렇게 태람은 분노를 양분 삼아 설정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세호는 마감을 앞둔 소설가를 감시하는 편집자처럼 그를 주시했다. 태람은 부담스러웠지만 꿋꿋하게 글을 써 내려갔다.
*
『맛있는 남자』 등장인물 설정
키릭 루 페르시안. 귀축광공. 인간, 23세. 룬베르 제국의 3왕자. 최연소 소드마스터로 유력한 황태자 후보. 다정한 성격이지만 메인수에게는 강압적인 모습을 보임.
프랑. 얀데레공. 인간, 25세. 주신 리안의 대신관. 어린 시절부터 신성력으로 왕국에 이름을 떨쳤으며, 타국에서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지위를 가지고 있다. 메인수에게만 온화하고 친절. 주변에는 가시를 세움. 독설가. 키릭 왕자와는 특히 사이가 안 좋고 틈만 나면 싸움. 몇 차례 독살을 시도한 전력이 있음.
카이란. 대형견공. 드래곤 로드. 나이 미정. 궁정 마법사로 유희 중. 드래곤 중에서도 독보적인 마력의 소유자.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성격. 특별한 영혼을 가진 메인수에게 첫눈에 반함. 키릭 왕자와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음. 후반부에 마법 제어 실패로 실수로 왕자를 죽일 뻔함.
루시아스. 순애공. 마왕. 4266세. 사는 데 지쳐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음. 무뚝뚝하지만 자상한 성격. 키릭 왕자와는 접점이 거의 없으나 마지막 마왕성 에피소드에서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게 됨.
*
기억이 안 나는 부분도 꽤 있었지만 태람은 뿌듯했다. 이만하면 잘 쓴 것 같았다. 태람은 세호에게 설정을 건네줬다.
“야. 다 썼어.”
“주세요.”
세호는 태람이 쓴 설정을 꼼꼼히 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호의 얼굴이 점점 굳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왕자는 대체 어떻게 살아남습니까?”
메인공이라는 점에서 왕자는 동네북처럼 무차별적인 공격을 받았다. 태람은 괜히 미안해져서 최대한 상냥하게 설명했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지만 자기 능력으로 살아남아. 그, 그래도 인간 중에는 최강자라는 설정이니 안심해.”
“인외 존재까지 포함하면 아니란 소리잖아요.”
“그렇긴 한데…. 어쨌든 살아 있잖아. 좀 고생할 뿐이지.”
“제 생사가 걸린 일을 가볍게도 말하네요. 더 생각나는 건 없습니까?”
태람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으나 설정을 쓴 것이 한계였다.
“…기대도 안 했습니다. 요 며칠 키릭 왕자로 지내면서 알아낸 것들이 있습니다.”
입을 확 꼬맬까보다. 태람은 욱했으나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기에 얌전히 있었다.
“그게 뭔데?”
“설정이 미치는 범위요. 저는 키릭 왕자의 지식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래서 왕자의 직무도 수월하게 해낼 수 있었어요. 선배는 뭐 달라진 거 없습니까?”
메인수는 태람처럼 갑자기 판타지 세계로 떨어진 대학생이었다.
“달라진 거 없는데…. 아! 글을 못 읽게 됐어.”
“문맹입니까?”
“그렇게 말하니까 이상하잖아! 도서관에서 소설을 읽어 보려고 했는데 전혀 모르는 문자였어.”
“한글처럼 자연스럽게 읽혀서 몰랐습니다.”
“메인수는 진짜 무능하네. 그나마 말은 알아먹어서 다행인 건가?”
태람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빠져있던 세호가 입을 열었다.
“노란 덩어리를 불러주세요. 왕자의 능력을 자세하게 알고 싶어요.”
“네가 부르면 되잖아.”
“제가 부르면 안 나타납니다.”
세호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노랑이가 많이 바쁜가?”
태람은 아까부터 어딘지 기운이 없는 세호를 보고 미약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 하긴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기분이 좋을 리 없긴 하겠지? 태람은 최대한 세호에게 협조해서 기분을 풀어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바로 노랑이를 불렀다.
“나도 시도해 볼게. 노랑아!”
[뭐냐삑.]
“왔는데?”
“왜 저한테만….”
[네가 내 분신을 막 다뤘잖아. 상처 입었다삑.]
세호의 말을 들어보니 처음 봤을 때 노랑이를 창밖에 던졌었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말하는 새가 나타나면 누구나 놀라지 않습니까.”
태람은 잽싸게 세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러다 노랑이가 가버리면 곤란했다. 태람은 노랑이에게 온갖 애교를 떨며 허락을 구했다.
“나는 잘못 없잖아. 말해줘. 응?”
[…알았다삑.]
노랑이의 찹쌀떡 같은 뺨이 새빨개졌다. 태람은 귀여움으로 한 건 했다고 생각하면서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세호는 그런 태람을 한심하게 쳐다봤다.
“키릭 왕자가 가진 모든 능력치를 알고 싶습니다.”
[키릭 왕자의 능력을 전부 말하려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삑. 요약해서 설명해 주자면 인간을 뛰어넘은 무력. 너는 곧 소드마스터를 넘어 그랜드마스터가 될 꺼다삑. 그리고 웬만한 궁정 학자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뛰어난 지력. 특히 마법공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삑.]
“완전 치트네. 부럽다. 노랑아. 그럼 나는? 메인수는 쓸모 있는 능력 없어?”
[너는 남보다 잘 느끼고, 잘 조일 수 있는 능력이 있다삑.]
“즉, 남자를 꼬시는 능력이 선배에게 생겼다는 거군요.”
“너는 또 그걸 분석하고 있냐!”
태람은 속이 탔다. 기껏 판타지 세계인데 능력이 형편없는 쓰레기였다.
이딴 거지 같은 능력을 설정한 놈은 대체 어떤 놈이야! …그게 바로 나지. 젠장.
괴로워하는 태람을 보고 세호가 조용히 말했다.
“원한다면 바꿔드릴 수도 있습니다.”
태람은 냉큼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수시로 목숨을 위협받고, 드래곤이나 마왕과 싸우는 것은 싫었다.
[더 질문 없으면 난 가보겠다삑.]
“고마워!”
감사의 표시로 태람은 노랑이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어 줬다. 노랑이는 기분이 좋은 듯 방안을 몇 번 빙빙 돌더니 뿅 하고 사라졌다.
“선배는 처음 보는 이상한 생물체한테도 그럽니까….”
“뭐가?”
“…아닙니다.”
세호는 한층 더 기분이 나빠 보였다. 태람은 세호가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아서 우울해진 것으로 판단했다. 능력이 있어도 고생하는 건 변하지 않는 거고, 여차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건 유쾌하지 않겠지. 최대한 위로해주자.
“침울한 건 이해해. 내가 메인공이라고 키릭 왕자한테 너무 자비가 없었던 것 같아.”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럼?”
“됐으니까 그냥 신경 쓰지 마세요.”
“남의 일도 아닌데 어떻게 그러냐.”
“남의 일이죠.”
내심 섭섭했으나 어두워진 세호를 보니 태람은 안쓰러움이 더 컸다. 여기서는 농담으로 분위기를 풀어볼까?
“그…. 노랑이한테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볼 걸 그랬나?”
“그런 걸 뭐하러 물어봅니까!”
“혹시라도 너 죽으면 어떻게 되나 해서.”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세호가 얼굴을 팍 찡그렸다. 태람은 세호가 화낼 기운이라도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농담이야. 절대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 나도 최대한 협조할게.”
“선배야말로 괜찮은 겁니까?”
세호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왜?”
“앞으로 원하지 않는 사람과 애정행각을 벌여야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나 걱정해 주는 거야?”
세호는 또 입을 다물었다. 태람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꼭 자기 불편할 때만 말이 없어지는 세호가 짜증이 났다. 그래도 자신을 생각해 줬다는 사실이 고맙긴 했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메인수로 빙의한 태람은 남자와 애정행각을 벌여야 했다. 그래도 이제까지 세호와 한 행위들은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설마 마음도 보정이 된 건가? 그러면 무서운데? 아니면 내가 원래 남자도 괜찮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지. 확실히 흥미가 없진 않았는데….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태람은 금방 답을 내렸다.
“딱히…. 별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
세호는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괜찮다고 말하는 태람을 보며 심장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남자와 얽혀있는 태람을 떠올리니 너무나 불쾌해졌다. 저도 모르게 날선 말투가 튀어나왔다.
“하긴. 정체불명의 생물과도 스킨십을 하는 선배인데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훈훈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날아가더니 싸늘해졌다. 태람은 영문을 몰랐다. 나름 신경을 써줬는데 혼자 뿔이 나서 저러는 세호가 조금 미워졌다.
“왜 또 화내.”
“제가 뭘요!”
“봐. 지금도 이상하잖아. 답답한 건 알겠는데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그런 적 없습니다.”
“이세호. 이야기 좀….”
“남자랑 붙어먹는 게 좋으면 그렇게 하세요.”
원래도 한 성깔 하는 태람이 저런 시비를 그냥 넘기는 건 불가능했다.
“선 넘지 마. 진짜 한 대 맞을래?”
“선배가 저한테 상대나 됩니까?”
세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태람을 깔보듯 내려다봤다.
“야!”
“아니면 저한테도 살랑살랑 애교 떨어 보던가요.”
“너한테 애교를 떠느니 차라리 처음 보는 남자랑 붙어먹는 게 낫겠다!”
“입 다물어요!”
“왜! 말하라고 뚫린 입인데, 싫어!”
세호는 자신의 입술로 태람의 입을 틀어막았다. 머리끝까지 열이 오른 터라 자신도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자각이 없었다. 그저 지금 당장 태람을 닥치게 하고 싶었다.
태람은 태람대로 겹쳐진 입술 사이를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세호의 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미쳤네. 메인수라 잘 느낀다는 걸 의식하니 더 좋은 것 같아.
숨 쉴 새도 없이 몰아치는 세호의 혀가 치열을 쓸고, 입천장을 살살 훑더니, 갈 곳 없이 방황하는 태람의 혀를 옭아맸다. 태람은 그저 멍청히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사람을 열 받게 만든 벌입니다.”
세호는 그렇게 말하며 퉁퉁 부은 태람의 입술을 이를 세워 콱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태람은 당황스러웠다. 지금 나 피 본 거야?
“이야기의 진행상 다음 사건은 국왕의 생일이니 삼일 정도 남았군요. 저는 그동안 이 몸의 능력에 익숙해지도록 하겠습니다.”
세호는 태람이 뭐라고 대꾸할 새도 없이 방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고 태람은 긴장이 풀려 주저앉았다. 아밀이라도 있었어? 아니 있었다고 해도 사람을 물어뜯어? 개새끼야? 대체 뭐냐?
물어보고 싶어도 당사자는 이미 방을 나가고 난 뒤였다.
“…근데 여기 네 방이잖아.”
들을 사람 없는 태람의 마지막 말만 공허하게 울렸다.
*
드디어 다가온 국왕의 생일파티 날. 아침부터 태람의 방이 소란스러웠다. 아밀을 필두로 시녀들이 들이닥쳤기 때문이다.
“키릭 왕자님께서 보내셨습니다.”
“아…. 들어오세요.”
순식간에 잠옷이 벗겨지고, 몸이 씻겨졌다. 잠이 덜 깬 태람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모든 것이 끝나있었다.
“오늘은 한층 더 아름다우십니다.”
아밀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태람을 거울로 떠밀었다. 옆에 있던 시녀들도 맞장구를 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잘 정돈된 머리와 깔끔하게 다린 제복. 확실히 평소와는 달랐다.
그래도 낯간지럽게 아름답다니. 기왕이면 잘생겼다고 해주지. 과한 프릴이나 호박 바지가 아닌 게 다행이긴 하네.
“키릭 왕자님은 어디 계신가요?”
“먼저 연회장에 가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아밀의 말에 태람은 짜증이 치솟았다. 세호는 그날 이후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속 좁은 새끼. 연회장에 나 혼자 가라고? 메인공 주제에 메인수도 에스코트 안 하고 뭐 하냐!
국왕의 생일파티에서 메인수는 프랑과 처음 만난다. 그 과정에서 키릭 왕자와 동반 입장은 스토리 전개에 필수는 아니었다. 그래도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솔직히 자신이 그때 뭘 잘못했는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점점 험악해지는 태람의 표정에 아밀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람 님, 불편해 보이시는데 혹시 제가 실례되는 행동을 했나요? 알려주신다면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아니면 키릭 왕자님께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
태람은 아밀이 안심하도록 억지로 웃었다. 혹시라도 그가 키릭 왕자와 태람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판단하면 곤란했다. 바로 보석이 검게 물들지도 몰랐다.
“조금 피곤해서요. 아침부터 도와주셔서 고마웠어요.”
“아닙니다. 그게 저희의 일인걸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아밀이 나가고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태람은 다시 침대에 위에 엎어졌다. 생일파티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무료한 시간이 흐르고, 눈이 살살 감겼다.
한참을 졸던 태람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을 떠보니 밖이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연회장! 생일파티! 미쳤다. 이런 젠장….”
프랑과의 공식 대면은 주요 사건이었다. 그냥 넘어가 버린다면 영원히 책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태람은 벌떡 일어나 서둘러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는 연회장을 목표로 왕실 복도를 힘차게 내달렸다.
열심히 발을 움직이며 한창 달리고 있을 때였다. 끼익하는 거친 마찰음이 태람의 귀를 때렸다.
“거기! 비켜요!”
마주 오고 있던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태람을 덮쳤다.
아니, 잠깐. 여기는 하인이 지나다니는 복도가 아닐 텐데? 설마 강제력 때문에?
태람은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저 속으로 쌍욕을 외치며 눈을 꾹 감았다.
젠장! 낮잠은 왜 자서! 이게 다 나를 방치한 이세호 때문이야! 죽으면 귀신이 되어서 찾아갈 거다! 역시 노랑이한테 여기서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물어볼 걸!
응? 왜 안 아프지?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프지 않았다. 슬쩍 눈을 떠보니 태람은 정체 모를 남자의 품에 폭 안겨 있었다. 소위, 공주님 안기라는 자세였다.
“괜찮아요?”
살짝 웨이브 진 민트색 머리카락에 깊은 녹색 눈동자. 전체적으로 색소가 옅은 아름다운 남자였다. 청량하면서도 온화한 인상이 왜인지 낯이 익었다. 태람은 저도 모르게 그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프랑?”
“저를 아십니까?”
당황스러워하는 프랑을 보고 태람은 망했다고 생각했다. 5년 만에 온 고향에서 처음 보는 사람이 대뜸 자기 이름을 말하면 누구나 저럴 것 같았다.
뭐, 뭐라고 변명하지? 소문으로 들었다고? 그런데 나는 설정 상, 아니 실제로 여기 온 지 일주일도 안 됐잖아.
고민 끝에 태람은 일단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이제 그만 내려주세요.”
아직 프랑의 품에 안겨 있는 게 불편하기도 했었다.
“죄, 죄송합니다.”
프랑은 두르고 있던 팔을 풀고 조심스럽게 태람을 바닥에 내려줬다. 프랑의 얼굴은 가을의 단풍처럼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게 메인수의 능력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태람은 촉이 왔다. 프랑 이놈. 벌써 나한테 푹 빠졌어. 아니, 뭐 한 것도 없는데?
태람은 확인차 프랑을 향해 미소 지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아마 저는 크게 다쳤을 거예요.”
“아, 아닙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예상대로 프랑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자신의 손은 쥐어다 폈다를 반복했다. 태람은 확신했다. 대체 어디에 꽂혔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랑은 벌써 넘어왔다고. 이게 바로 설정 버프인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다칠 뻔했네요.”
“그렇지 않습니다. 곤란한 사람을 돕는 건 신관의 의무니까요.”
태람은 어디에 사는 누구누구 씨와는 전혀 다르게 나긋나긋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프랑이 마음에 들었다. 프랑은 상상한 것보다 더 예뻤다.
소설 속에 들어온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아니, 아니지! 이런 생각 하지 말자. 그런데 이대로 괜찮은 건가? 프랑과 만나는 건 원래 연회장인데…. 나중에 책을 확인해 봐야겠어. 젠장. 보석이 탁해지면 안 되는데….
태람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탁해진 보석을 보고 자신을 노려보는 세호의 얼굴이 벌써부터 그려졌다.
“역시 어디 다치셨나요? 치료를 받으러 가는 게 좋겠습니다. 저희 신전으로 오실래요?”
“멀쩡해요! 조금 생각할 게 있었던 것뿐이에요.”
“그러시다면 다행인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태람을 바라보는 프랑. 태람은 그의 눈빛이 참 따뜻하다고 느꼈다.
“사고를 낸 하인은 도망갔네요.”
온화하던 프랑의 목소리가 일순간 싸늘해졌다. 태람은 나를 못 봤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었다.
“괜찮아요. 바쁜 날이라 정신이 없었나 봐요.”
하인의 부주의에 죽을 뻔한 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강제력 때문에 일어난 사고 같았다. 메인수는 프랑과 반드시 만나야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그 하인이 피해자라고 느껴졌다. 남의 직장을 뺏는 건 미안한 일이고….
“저도 부주의했고요.”
태람은 애써 웃어보였다.
“그래도 크게 다칠 뻔했잖아요.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친 곳도 없는걸요. 그럼 된 거죠.”
“저는 그 하인이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살랑살랑 봄바람 같던 프랑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태람은 애써 외면해왔던 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제가 괜찮다고 해도요?”
“그게 법이니까요.”
프랑은 법전으로 사람을 팰 것 같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프랑은 인간을 믿지 못해서 신을 섬기기로 했잖아요. 그런데 왜 인간이 만든 법을 따르려고 하나요?”
프랑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신관이 되기로 한 이유를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한테도 말한 적 없었는데….
무심코 구해준 사랑스러운 외모의 남성.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고 가벼운 몸을 안고 있으니 원인 모를 만족감에 사로잡혔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기묘한 감각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어쨌든 저는 룬베르 사람이 아니니까 제 마음대로 그 하인을 용서할래요. 프랑도 봐주면 안 돼요? …프랑?”
태람의 말에 멍하니 있던 프랑이 겨우 해동이 된 듯 버벅거리며 말했다.
“아…. 그러니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한태람입니다.”
“태람…. 한태람. 이국적인 이름이네요.”
“하하…. 제가 아주 멀리서 오긴 왔죠.”
“당신에게 무척 어울립니다.”
구름처럼 포근한 프랑의 미소를 보니 태람은 어쩐지 가슴께가 간질간질했다.
백합같이 청초한 미남! 프랑 내 새끼. 너무 잘생겼다. 이대로도 참 좋은데 내가 왜 그랬을까? 그 설정은 넣지 말 걸 그랬어. 프랑의 숨겨진 설정을 떠올린 태람은 아쉬움을 느꼈다.
“아! 그러고 보니 도와주신 사례를 하고 싶은데 제가 지금은 가진 게 없네요.”
“정말 괜찮습니다.”
“그래도! 작은 거라도 꼭 답례하고 싶어요.”
“…정 그러시다면 태람 님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태람 님은 저를 아까처럼 편하게 프랑이라고 불러주세요.”
“네, 좋아요. 잘 부탁해요. 프랑.”
훈훈한 공기가 두 사람을 감쌌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뭔데요?”
“태람 님은 이 나라 사람이 아니라고 하셨죠? 그럼 언제 여기로 오셨나요?”
“일주일 정도 됐어요.”
“어떻게 저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태람은 갑자기 로맨스에서 추리물로 장르가 변하는 것을 느꼈다.
“소문을 들었어요.”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저는 룬베르에는 5년 만에 옵니다. 그리고 극비리에 돌아왔습니다. 5년 동안 룬베르에 없었던 사람 이야기를 여기 온 지 일주일 사이에 들으셨다고요?”
태람을 바라보는 프랑의 눈빛 속에는 호감이 가득 차 있었지만 작은 의심도 깃들어 있었다. 어물쩍 넘기려고 했었지만 프랑은 예리했다. 방심했어. 태람은 재빨리 변명거리를 생각해냈다.
“그게 그러니까…. 키릭 왕자님께 들었어요! 제가 지금 그분에게 신세를 지고 있거든요.”
태람이 겨우 내놓은 무난한 대답에 프랑은 어느 정도 납득한 것 같았다.
“그러셨군요. 키릭 왕자님이라면 제3왕자님이시죠. 뵌 적은 없지만,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네. 이곳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저에게 많은 걸 알려주셨어요.”
“사이가 좋은가 봐요?”
“아무래도 가장 의지하고 있죠.”
“가장? 부럽네요. 저도 태람 님과 더 친해지고 싶은데….”
프랑은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어딘지 싸늘했다. 태람은 영문 모를 불안함에 휩싸였다.
“이, 이제부터 친해지면 되잖아요! 한동안 여기 계실 거죠?”
“네. 잘 부탁드려요. 태람 님.”
화사하게 웃는 프랑의 미소는 역시 아름다웠다.
“죄송하지만 저는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제가 너무 붙잡고 있었나 보네요. 가보세요.”
“그럼. 태람 님. 당신에게 주신 리안의 가호가 있기를.”
말을 마친 프랑은 태람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성스러운 빛 무더기에 둘러싸여 순식간에 사라졌다.
부드러운 촉감과 아직 남아있는 온기. 희미하게 떠도는 프랑의 체향. 생소한 감각들이 하나둘씩 되살아나면서 태람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민트 향이 나네.
*
프랑을 만난다는 목적을 달성한 태람은 방으로 돌아가려다 혹시 몰라 연회장으로 향했다.
아직 안 끝났겠지? 가서 맛있는 거나 먹고 세호가 일하는 것을 구경할 생각이었다. 세호와의 냉전을 풀고 싶기도 했다. 연회가 끝나면 이야기해봐야지.
“아! 들어가기 전에 책 확인 먼저….”
책을 소환해보니 다행히 보석의 밝기는 그대로였다. 적어도 육안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주요 사건이 반드시 정해진 장소에서 일어날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새롭게 알아낸 정보에 태람은 조금 들뜬 기분이 되었다.
연회장에 들어선 태람은 분주하게 움직이는 세호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이 여자 저 여자, 심지어는 남자까지 상대하며 능숙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곁에 있는 영애, 영식들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태람은 저게 왕자가 해야 할 일이란 걸 알면서도 괜히 울컥하고 어쩐지 속이 답답했다. 저 꼴을 보고 있으려니 원인 모를 짜증이 치솟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방에 가서 잠이나 더 잘 걸 그랬네. 나는 만찬이나 즐기련다. 거슬리는 감정을 무시한 태람은 겨울을 준비하는 햄스터처럼 입안에 음식을 잔뜩 욱여넣었다. 전부 태어나서 처음 접해보는 산해진미였는데 이상하게 맛이 없었다.
태람이 억지로 음식을 집어삼키며 자신을 학대하던 중 태람의 앞으로 후드를 뒤집어쓴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여기 모인 왕족이나 귀족들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걸음걸이에 마치 용병처럼 거칠고 활기찬 분위기를 풍겼다. 남자는 발랄한 목소리로 태람에게 유리잔을 건넸다.
“이거 마셔. 맛있어!”
유리잔 안에는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음료가 담겨 있었다. 태람은 기세에 휩쓸려 쭈뼛거리며 남자가 건넨 음료를 받아들었다.
“고맙습니다.”
음료에서는 상큼함을 뛰어넘어 절로 침이 고일 정도로 강렬한 신 냄새가 올라왔다. 이거 마셔도 되는 건가?
“괜찮아. 독 안 들었으니까 마셔.”
말을 마친 남자는 태람이 들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음료를 거침없이 꿀꺽꿀꺽 마시기 시작했다. 한 번에 털어 넣는 모습이 리듬감이 느껴질 정도로 경쾌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람도 용기를 내 음료를 한 모금 들이켰다.
“…맛있다.”
달달하고 새콤한 과일 향이 입안에 퍼졌다,
“그치? 네가 맛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무식하게 음식을 퍼먹는 게 불쌍했어. 대체 왜 그런 거야? 인간은 정말 이상해.”
덩치는 큰 놈이 조잘조잘 잘도 떠드네. 인간이 어쩌고저쩌고 중2병 같아. 태람은 속마음과는 반대로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꼭 인간이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너도 그렇잖아. 네 영혼은 이질적이고 특이해. 적어도 이 세계의 것은 아니지.”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남자의 말에 태람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아. 아닌데요. 갑자기 무슨 말이세요?”
“숨겨도 소용없어. 나한테는 다 보여. 네 영혼은 다른 차원의 것이야. 엄청난 존재감도 느껴지는 게 참 신기해.”
영혼을 보는 마법사라면 걔밖에 없잖아. 아니, 그렇지만…. 걔가 왜 벌써 나와.
혼란의 빠진 태람은 그제야 눈앞의 남자를 자세히 탐색했다. 삐죽 튀어나온 붉은 머리카락. 동전같이 동그랗고 장난기가 가득 깃든 붉은 눈동자. 결정적으로 드래곤의 일족임을 나타내는 작은 송곳니. 어딜 봐도 카이란이었다.
생각에 잠긴 태람에게 카이란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많이 혼란스러워 보여. 나 때문이야?”
시무룩한 카이란의 얼굴이 태람의 시야에 가득 담겼다.
선이 굵고 멋있는 세호. 청초하고 아름다운 프랑. 카이란은 그런 두 사람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대형견 같다고 해야 하나? 저 덩치인데 부들부들 깜찍해. 귀엽다.
『맛있는 남자』는 대충 휘갈긴 엉성한 글이었지만 캐릭터 설정만큼은 확실했다. 메인공에 서브공들까지 전부 영접한 태람은 만족감을 느꼈다. 멋있고, 예쁘고, 귀엽고 다 하네. 다 해. 솔직히 행복하다.
“내가 편해졌어? 갑자기 너한테서 긍정적인 감정이 흘러들어와.”
고개를 갸웃거리며 태람을 빤히 쳐다보는 카이란. 태람은 그를 애써 외면한 채 밀어냈다. 아무리 자식 같은…. 아니,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가 귀여워도 스토리를 망칠 수는 없었다.
“초면인 사람이 편할 리가 없잖아요. 가까우니까 떨어져요.”
“아닌데? 너는 나를 제대로 알고 있어. 반가워했잖아.”
“저는 바빠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그럼.”
떠나려는 태람의 소매를 카이란이 꽉 잡았다.
“가지 마.”
“…놔 주세요.”
매정하게 뿌리쳐야 하는데 카이란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 태람이었다.
“조금만 더 나랑 있어. 응?”
카이란은 슬슬 룬베르를 떠날 생각이었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반복되는 일상. 궁정 마법사 일도 이제는 지겨워졌다.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러다 우연히 만난 예쁜 영혼을 가진 인간. 그 누구와도 다른 특별한 영혼이었다. 갖고 싶다고 생각했다.
아직까진 보석함에 보석을 모으는 정도로 가벼운 감정. 하지만 이 감정이 점점 커져서 미래에는 자신을 삼키고, 지배하고 말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나랑 같이 놀러 갈래?”
“싫어요.”
“내 연구소에 구경 오면 유용한 마법 아이템을 선물해줄게.”
“안 된다니까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 안 돼?”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만 빼고 다른 걸 들어줄게요.”
“그럼 나랑 결혼할래?”
훅 치고 들어온 카이란의 불꽃 플러팅. 태람은 당황스러웠다.
아니, 왜 갑자기 모든 단계를 건너뛰는 건데. 카이란아. 너 성격이 참 급하구나.
“인간은 결혼하면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다며? 나는 돈도 많고, 엄청 강해. 평생 너를 지켜줄 수 있어.”
천진난만한 미소로 경계심을 내린 뒤 갑자기 진지해진 카이란 때문에 태람은 혼이 빠지는 걸 느꼈다. 순식간에 홀려서 얼렁뚱땅 혼인신고서를 제출할 정도의 파괴력이었다. 적어도 얼빠 기질이 다분한 태람에게는 그랬다.
이런 비겁한 귀여움이라니…. 넘어갈 것 같네. 하지만 안 돼. 메인공은 왕자니까.
“저는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이 있어요. 아직 서로 알아가는 단계지만 운명 같은 사람이에요.”
태람은 운명공동체라는 세호의 말을 떠올리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도 냉전 상태에 만나면 개처럼 싸우는 게 일상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어지지 않으면 둘 다 망하니까.
“별로 행복한 감정은 아닌데?”
귀신같이 감정을 알아채는 카이란의 능력이 살짝 원망스러웠다. 더불어 저런 능력을 설정한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아무튼 저는 가봐야 해요.”
“그 사람이랑 결혼했어?”
“그건 아니지만….”
“약혼은?”
“안 했어요.”
“그럼 문제없네. 우리 형이 그랬어, 도장을 찍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래.”
태람은 드래곤들 주제에 지나치게 세속적인 형제가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속으로 평정심을 백 번 외우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안 됩니다.”
“안 통하나? 내 얼굴 좋아하길래 될 줄 알았어.”
카이란은 조금 아쉬워하다 태람의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하였다.
“또 만나. 그때는 이름 알려줘.”
갑작스러운 접촉에 넋이 나간 태람이 정신을 차렸을 때, 카이란은 없었다. 그저 보드랍고 말랑한 감촉과 달짝지근한 향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카이란이 말했던 존재감이란 게 뭐지? 메인수의 존재감?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제멋대로인 드래곤을 상대하다 기운이 빠진 태람은 배가 고파져서 열심히 밥을 먹었다.
한참 식사를 하고 있는데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거리는 게 느껴졌다.
“저 남자가 키릭 왕자님이 아끼는….”
“이 세계에서 왔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일까요?”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들었어요.”
“생각보다 수수한데? 키도 작고 못생겼잖아.”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마치 물건을 품평하듯 위아래로 자신을 훑어보는 통에 태람은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대한민국 평균 키에 봐줄 만한 얼굴이라고! 태람은 순수한 메인수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해 차마 화를 내진 못하고 주먹만 꽉 쥐었다.
“어차피 남자니까 애도 못 낳고….”
하지만 엉덩이에 달라붙은 더러운 시선을 느낀 순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이봐요!”
욱해서 한마디 해주려고 태람이 입을 열었을 때였다.
등 뒤에서 쿵 하고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웅성거리는 사람들과 호들갑 떠는 영애들의 목소리로 연회장이 시끌벅적해졌다.
“왕자님! 어쩌면 좋아.”
“경비병! 아니, 신관을 불러라!”
“대체 왜 이런 일이….”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점점 커졌고, 태람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왕자가 다섯이나 있는데 세호일 리가 없어. 설마 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뒤돌아보니 기대를 배신하고 세호가 연회장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태람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세호!”
놀라서 한걸음에 세호에게 달려갔다. 태람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소설의 완성이고 뭐고 아무래도 좋았다. 쓰러진 세호는 피를 흘리며 괴로운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컥컥거리며 괴로운 신음을 내는 세호를 보니 태람은 가슴이 아팠다.
“제발 정신 차려! 이세호! 세호야!”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호칭….”
세호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이 희미했다. 태람은 세호가 조금이라도 편하도록 자신의 무릎에 그의 머리를 얹었다.
“알았으니까 그만 말해.”
“정말로 괜찮…. 으니까….”
세호는 쿨럭거리더니 다시 한번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진득한 피가 태람의 옷을 붉게 물들였고, 얼굴이며 팔에 잔뜩 묻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바보야! 무리하지 말라니까!”
“태람….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는 괜찮다.”
다 죽어가는 세호가 왕자를 연기했다. 태람은 급격히 표정이 굳었다. 심각해진 그를 본 세호는 힘겹게 상반신을 일으켜 태람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마나 덕분에 자연재생 되고 있습니다.”
세호의 말은 사실인지 그의 숨소리가 한결 편안해지긴 했다. 하지만 그래도 태람은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나 많은 피를 쏟아 낸 직후였다.
“아. 진짜. 이세호. 말하지 말라니까.”
“선배야말로 제 이름 부르지 말라니까요. 사람들이 보고 있습니다.”
“이 미친 새끼가! 지금 그게 중요해?”
“선배도 말했잖아요. 키릭 왕자는 강하다고.”
“지금 그게….”
태람의 눈동자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사정없이 흔들렸다. 죄책감에 눈을 돌리고 싶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만들었던 설정과 사건들. 실제로 그것들을 마주하니 지독한 현실감에 몸이 가늘게 떨렸다.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야?”
“와인에 독이 들어있었습니다.”
“…역시 프랑이었구나.”
“독살 시도. 선배가 말해준 보다 빨랐네요. 방심했습니다.”
“전부 나 때문이야. 미안해.”
원래의 계획은 프랑이 수작을 부리기 전에 미리 해독제를 준비해 둘 생각이었다.
“만났습니까?”
주어를 뺀 세호의 질문에 태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랑이 예상보다 일찍 메인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
“메인수가 아닙니다. 선배잖아요.”
“…그래. 그랬지.”
세호의 말이 태람의 가슴에 화살처럼 박혔다.
여기에 있는 건 메인수가 아닌 한태람.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메인공도 키릭 왕자도 아닌 이세호였어. 조금 더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저는 금방 일어날 겁니다. 그러니까 제가 쓰러져도 걱정하지 말고 이야기를 진행….”
세호는 미처 다 말하지 못한 채 기절했다. 태람 역시 긴장이 풀린 탓에 의식을 놓아버렸다.
*
태람은 몸이 붕 떠오르는 신비로운 감각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동아리 방이었다.
마치 영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시야라고 생각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떤 남자가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고 있었다. 그 남자는 태람 자신이었다.
“특색이 없어….”
지금보다 더 앳된 얼굴을 한 과거의 태람이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고민에 빠져있었다. 모니터를 보니 『맛있는 남자』라는 제목이 크게 박혀있었다. 이게 꿈이라면 악몽 확정이었다.
“아직도 프랑 때문에 고민이야?”
민아가 등 뒤에서 과거의 태람에게 말을 걸어왔다.
“응. 미인공도 나쁘진 않은데 다들 개성이 뚜렷하니까 상대적으로 수수해 보여.”
“확실히 밋밋하긴 하네.”
당시 대세였던 순문학 패러디 외에 온갖 인기 소재를 다 때려 넣어 버무린 소설 『맛있는 남자』. 처음에는 신이 나서 썼던 태람이었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수습하기 어려워졌다. 특히 프랑은 마지막까지 고민이 많았었다. 이 고민을 해결해준 것이 민아였다.
“얀데레 설정을 한번 넣어 보면 어떨까?”
“얀데레?”
“우리 태람이 공부 좀 더 해야겠네. 쉽게 말하자면 한 사람에게만 병적으로 집착하는 성향을 말해.”
“그거 좋다. 프랑이 메인수한테 집착해서 폭주하는 걸 넣을래! 온화하고 헌신적인 겉과 달리 속이 아주 새까만 거지.”
그 뒤로 차마 입에 담기도 두려운 하드 코어한 말들이 오가며 점점 캐릭터의 형태가 잡혀갔다.
“독살만 있는 건 좀 심심한 것 같아.”
프랑의 설정이 완성되어 갈 때쯤 민아가 무서운 소리를 꺼냈다. 신이 나서 합세하는 과거의 태람. 그걸 지켜보는 태람은 무교인 주제에 속으로 신을 찾았다. 주여. 제발 저들의 입을 틀어막아 주소서. 그러든지 말든지 과거의 두 사람은 활기차게 의견을 교환했다.
“그런가?”
“전투 때 실수인 척 메인공을 공격하는 음습함은 어때?”
“채용. 호시탐탐 목숨을 위협받는 메인공도 좋네.”
“그래. 요즘엔 수보다 공을 굴리는 게 인기더라.”
“좋아. 더 참신하게 엿 먹이는 방법은 어디 없을까?”
“아예 왕자를 불능으로 만들어 버리는 건? 고자공 어때? 새롭지? 치료과정에서 사랑이 더 깊어지는 거야.”
“극적인 요소가 필요하긴 한데 조금 심했다. 너무 심각하지 않을 정도로 너무 심각하지 않은 위기가 좋겠어.”
“예를 들면?”
“절벽에서 떨어진다던가?”
태람은 과거의 자신에게 쌍욕을 날렸다. 나 새끼야! 적당히 해. 제발. 충분히 심각해.
“잠시 떨어져 있으면서 서로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좋네.”
“그치?”
“여차하면 왕자를 죽이고, 다른 공으로 갈아타.”
“그것도 좋을지도. 다공일수는 편리하네.”
해맑은 과거의 태람과 민아.
안 돼. 죽이지 마. 태람은 점점 과거와 멀어졌다.
화면이 전환되더니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세호의 모습이 나타났다.
‘저는 괜찮습니다….’
태람은 이미 봤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여기 와서 한 번도 등장인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소설이라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태람은 이 상황이 너무 무서워졌다. 혹시라도 나 때문에 세호가 죽는다면 어쩌지? 상상하기도 싫었다. 이미 조금씩 내용이 달라지고 있었다. 그 말은 즉, 앞으로 세호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세호 없이 혼자서 책을 채울 수 있을까? 아니, 만약에 혼자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처럼 지낼 수 없겠지. 그럴 자신이 없어.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런 건 싫어. 절대 안 돼.
태람은 비명을 지르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안 돼!”
벌떡 일어난 태람을 세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배!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이세호…. 여기는?”
“왕자의 방입니다.”
창틈 사이로 들어온 산들바람이 부드러이 태람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생생한 감각이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줬다.
“너! 살아있는 거지!”
태람은 세호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무작정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감촉이 선연했다. 세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일단 안심이 되었다.
“더러우니까 침부터 좀 닦으시죠.”
세호는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태람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태람은 기분이 확 상했지만 민망함이 앞섰고, 서둘러 손등으로 입가를 박박 문질렀다.
“그 정도로 팔팔하다면 괜찮은 것 같네요.”
“너는? 치료 잘 받았어?”
“몇 시간 만에 멀쩡해져서 따로 치료를 받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행이네.”
“소드마스터는 참 좋네요. 그때는 누가 제 오장육부로 실뜨기를 하는 것 같이 괴로웠는데….”
“미안해.”
“…안 어울리게 또 왜 그러십니까?”
“내가 쓴 소설이잖아. 예정보다 일찍 프랑을 만난 것도 그렇고…. 네가 처한 상황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아.”
“선배 탓이 아니에요.”
세호의 커다란 손이 태람의 머리 위에 얹어졌다. 세호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태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자상한 손길에 태람은 죄책감과 불안감으로 엉망이었던 마음이 점차 안정되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미 어느 정도 각오했던 일이었습니다. 저와 선배는 진짜 메인수도 메인공도 아니니까 완벽히 같은 이야기를 재현해 낼 수는 없어요.”
“하지만….”
세호는 잠시 주저하다 태람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사과해야 할 건 접니다. 죄송합니다. 처음에 이곳에 왔을 때, 선배한테 괜한 화풀이를 했어요.”
“내가 더 미안해. 나도 계속 반발만 하고 까칠하게 대했잖아.”
“멋대로 입술을 물어뜯은 것도, 그 뒤에 방치한 것도 전부 사과하겠습니다.”
“…이, 입술은 솔직히 그렇게 기분 나쁘지 않았고…. 방치는 내가 애도 아니고 하나도 속상하지 않았어. 그냥 왕자 일이 바쁜가 보다 했지. 아무튼 내가 더 미안하지.”
“아니요. 제가 더 죄송하죠.”
“아니야. 내가 선배인데 부끄러운 꼴을 보인 것 같아. 미안해.”
“그렇게 따지면 제가 후배인데 건방졌던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 내가 더!”
“…이제 그만 하죠. 끝이 없겠어요.”
“…그래.”
“그런데 정말 싫지 않았습니까?”
“뭐가?”
“키스요.”
“그게 그러니까…. 좋았지. 너 잘생겼잖아.”
“선배는 잘생기기만 하면 누구든 괜찮습니까?”
“너는 그걸 또 그렇게 해석하냐!”
질리지도 않고 또 싸우기 시작한 두 사람 사이에 노랑이가 난입했다.
[두 사람 다 뭐하는거냐삑! 지금 프랑이 온다삑!]
갑작스러운 프랑의 방문한 당황한 태람과 달리 세호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갑자기 웬 프랑이야?”
“제 상태를 확인한다며 최근에 자주 들립니다. 목적은 선배인 것 같습니다.”
“…나 얼마나 잤어?”
“연회 이후로 만 하루가 지났습니다. 선배는 대외적으로 충격을 받아 쓰러진 거로 되어 있어요. 실상은 코 골면서 퍼질러 잤지만.”
“말을 해도 꼭 그렇게….”
태람이 세호에게 뭐라고 한마디 해주려는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왕자님. 프랑입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생각 없이 문을 열려는 태람을 세호가 붙잡았다.
“선배. 이번에는 최대한 조용히 계세요.”
“왜?”
“말을 할 타이밍을 놓쳤는데 보석이 탁해졌습니다.”
“뭐!”
“확실한 원인은 모르겠지만 선배가 영향을 준 건 확실합니다. 일단 등장인물들과의 접촉을 최대한 줄여보죠.”
태람은 순간 연회장에서 만난 카이란을 떠올렸다.
“어쩌면 내가 카이란을….”
태람이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프랑이 재차 방문을 노크했다.
“이야기는 이따가 하죠.”
태람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세호는 곧 키릭 왕자의 모습으로 돌변했다.
“들어와도 좋다.”
“제국의 세 번째 빛, 키릭 루 페르시안 님을 뵙습니다. 오늘도 간단한 검진을…. 태람 님!”
사무적인 태도의 프랑은 태람을 발견하자마자 만면에 미소를 띠며 반가워했다.
“깨어나셨군요? 몸은 괜찮으신가요? 치유해드릴까요?”
태람은 사람 좋아 보이는 프랑의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저런 벌레도 못 죽일 것 같은 얼굴로 독살 시도라니 무서웠다. 하지만 프랑을 저렇게 만든 건 자신이었다. 감정을 숨긴 채 억지로 밝게 웃었다.
“저는 괜찮아요.”
“괜찮긴요. 얼굴이 반쪽이 되셨는데….”
내 얼굴은 원래 작아. 호들갑을 떠는 프랑을 보니 태람은 괜히 민망해졌다. 악몽을 꾸긴 했지만 잘 먹고 잘 잔 게 다였기 때문이다.
“그보다 키릭 왕자님을 진찰하러 오신 게 아닌가요?”
태람은 프랑이 직무 태만이라고 은근히 돌려 깠다. 소심한 복수였다. 프랑은 태람의 의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화사하게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혹시 신관 일에 흥미가 있으신가요? 기쁘네요. 왕자님은 걱정하지 마세요. 아주 건강하십니다. 강한 분이시니까요.”
저 좋을 대로 해석하고 있네…. 질린다. 진짜. 태람이 꽁해져 있을 때 프랑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폭탄 발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연회장에서 태람 님이 왕자님을 세호라고 부르셨죠?”
“네?”
태람은 표정관리에 실패했다. 수습해야 하는데 아무 생각이 안 났다. 우왕좌왕하는 그를 대신해서 옆에 있던 세호가 나섰다.
“태람이 나에게 특별히 지어 준 이국식 애칭이다.”
“그런가요?”
“네! 제가 살던 곳은 친한 사이에는 특별한 애칭을 만들어서 사용해요!”
“특별한? 신기하네요. 저한테는 안 지어 주시나요?”
“어…. 그게…. 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 생각해 둘게요.”
“정말요?”
“네! 프랑에게 어울리는 예쁜 이름을 생각해 둘게요.”
“저를 위한 애칭이라니 기뻐요.”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짓는 프랑의 얼굴에 태람은 넋을 잃었다.
“태람 님은 저를 예쁘다고 생각하시는구나.”
“남자한테 할 말은 아니지만 저는 프랑이 참 예쁘다고 생각해요.”
“태람 님이 해준 말이라서 좋아요.”
“다행이네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태람은 프랑의 작은 속삭임과 차가워진 분위기에 정신이 확 들었다.
“더 가까워지려면 또 어떤 방법을 써야 하려나?”
무서워. 눈빛이 반쯤 돌았잖아. 프랑아. 눈에 힘 풀어. 무섭다고. 태람은 프랑이 괜히 다른 마음을 먹기 전에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 그보다 프랑! 밥은 먹었어요?”
“아직 인데…. 괜찮으시다면 함께 가실래요?”
“네. 이 주변은 잘 모르니까 알려주세요.”
“혹시 못 드시는 음식은 있으신가요?”
“없어요. 저는 다 잘 먹어요.”
“그렇다면 룬베르 제국에만 있는 파스타 집이 있는데 어때요? 아니면 특이한 이색음식을 파는 식당도 있고요. 고급은 아니지만 소박한 맛의 서민 식당도 있는데….”
“어…. 저는….”
“태람은 나와 먹기로 했다.”
태람이 대꾸할 틈도 안 주며 밀어붙이는 프랑의 기세에 눌려 결정 장애가 왔을 때, 세호가 튀어나와 자연스럽게 태람을 자신의 등 뒤로 감췄다.
“왕자님은 병상에서 일어나신 지 얼마 안 되셨으니 태람 님은 저에게 맡겨주세요.”
여전히 방긋 웃고 있지만 어딘지 차가워진 프랑. 세호의 표정 역시 좋지 않았다. 태람은 방 안의 온도가 훅 내려간 것이 느껴졌다. 세호가 저렇게까지 적대감을 보이는 게 이해가 가긴 했다. 자길 죽이려고 했던 사람인데 곱게 보일 리가 없지.
“나는 괜찮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만 가서 쉬지 그래?”
“왕자님은 제국의 빛이십니다.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안정을 취하시죠?”
“아까 네 입으로 나는 건강하다고 보증했을 텐데?”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에 태람은 숨이 막혔다.
“태람 님. 저와 같이 식사하실 거죠?”
프랑의 아름다운 미소에 이끌린 태람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 여자를 떠나서 그는 미인이었다. 알맹이는 새까맣지만, 겉가죽만큼은 태람이 손수 짠 설정 속의 이상적인 미인이었다.
세호가 째려보는 게 느껴졌지만 애써 외면했다. 프랑이 자신을 싫어하게 되면 스토리가 꼬이니까 어쩔 수 없다며 자기 합리화를 하는 태람이었다.
“태람은 마음이 여려서 타인의 호의를 쉽게 거절하지 못한다.”
“왕자님이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건 아니고요?”
“태람은 왕실도 다 구경하지 못했어. 나가긴 아직 일러.”
“태람 님이 어린애도 아니고 과보호하시는 거 아닌가요? 아까도 제 말에 흥미를 보이셨어요.”
세호에 말을 프랑이 맞받아치며 본격적으로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태람은 어느새 관전 모드로 두 사람의 말싸움을 구경했다. 뭐니 뭐니 해도 불구경, 싸움 구경이 최고라더니 이거 쏠쏠한 재미가 있다. 모르겠다. 이기는 편이 내 편이야.
“태람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 가는군. 고작 하루짜리 인연 아닌가? 나는 태람이 룬베르에 온 뒤부터 쭉 함께 있었다.”
태람은 감탄했다. 고작이라는 공격적인 단어를 써가며 오래된 사이라는 점을 무기로 사용하는 세호. 우리라는 말에 특별히 힘을 줘서 친밀감도 한층 어필했다.
“너무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시는 거 아닌가요? 분명 태람 님과 제가 알게 된 건 만 하루입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낯설지 않았어요. 고작이란 말로 매도하시다니 폭력적이시네요. 오래 안 사이일수록 관계가 깊다고 생각하세요? 숫자에 불과한 걸 맹신하다니 왕자님은 참 어리네요.”
어른의 여유를 가지고 조리 있게 반격하는 프랑. 비록 두 살 차이지만 연륜은 무시할 수 없다고 태람은 생각했다.
“태람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책을 즐겨 읽는지 알고 있나? 사실은 다혈질인 것까지 다 알고 있냐는 말이다.”
프랑의 반격에 잠깐 주춤했던 세호가 기세를 탔다. 태람은 자신이 여기서는 문맹이고, 다혈질도 아니라 생각했지만 어쨌든 세호가 온갖 정보가 판치는 현대 사회의 사람답다고 생각했다.
“방금 숫자를 맹신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왕자님은 머리가 나쁘시네요. 가까이 있어서 모르는 것도 있는 법이죠.”
프랑의 정중한 말투에는 가시가 있었다. 특히 마지막 말이 의미심장한 게 멋있었다.
“건방진….”
“아무리 제국의 왕자라도 방금 건 상당히 무례한 언행이었습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 노려봤다. 태람은 심장이 쫄깃해졌다. 세호가 말이 없다는 건 진짜 화났다는 건데 어쩌지? 나서지 말라고 했지만 싸움이 커지는 것보다는 낫겠지!
과열되는 흉흉한 분위기에 태람은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들어갔다.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은 조금 무서워요. 그냥 같이 가면 안 될까요?”
태람의 어색한 연기에 두 사람의 기세가 누그러졌다.
“함께 가도록 하지.”
“제가 어른스럽지 못했네요. 왕자님께 실례되는 말을 해서 죄송했어요.”
으르렁거리는 개처럼 흉흉했던 세호도 평소의 차분함을 되찾았고, 발톱을 세운 고양이처럼 날이 서 있던 프랑도 상냥한 분위기로 돌아왔다.
결국 팔자에도 없는 연기를 펼쳐야 했던 태람만 손해 본 기분이 들었다.
*
『맛있는 남자』 34P
저는 정말 운이 좋은 것 같아요.
갑자기 심부름을 하러 가게 돼서 너무 싫었는데 세상에나. 가는 길에 태람 님과 왕자님을 봤어요. 왕자님은 여전히 멋있으시고, 태람 님도 귀여우셨죠. 저는 심부름을 잠시 뒤로 하고 두 사람을 따라갔어요.
“태람 님. 제 옆으로 오세요.”
두 사람만 있는 줄 알았더니 옆에는 5년 만에 룬베르로 돌아왔다는 소문의 신관님도 있었어요. 어쩌면 좋죠? 상상한 것보다 더 예뻐요. 성별을 초월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미인공 떴다!
왕자님과는 반대로 부드러운 매력이 있는데 태람 님과도 참 잘 어울리네요. 저는 키릭태람을 밀지만 프랑태람도 상당히 좋네요.
“태람. 이쪽으로 와라.”
“왕자님은 태람 님에게 강압적이신 거 같아요.”
“너한테 듣고 싶지 않군.”
“제가 중간으로 갈게요.”
왕자님과 신관님은 태람 님을 사이에 두고 내내 티격태격했어요. 곤란해 하는 태람 님이 안타까웠지만 너무 사랑스러웠어요.
그 순간 번뜩이는 생각이 떠올랐어요. 생각해보면 식당에서 꼭 한 가지 메뉴만 먹을 필요는 없잖아요. 세 분이 함께인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문득 시녀 누나가 말해줬던 왕 햄 토스트의 가능성을 떠올렸어요.
시종장님한테 혼나도 좋으니 오늘은 끝까지 세 사람을 따라가리라 마음먹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