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4)

 눈을 뜨니 하늘하늘 레이스가 달린 침대에 누워있었다. 비현실적으로 화려하고 넓은 방. 천장도 무식하게 높았다. 태람은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몽롱한 정신을 억지로 깨웠다.

  여기 한국 맞아? 놀란 태람은 벌떡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가구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무척 고급스러워 보이는 옷장과 탁자. 금테를 두른 문짝에는 작은 사자 머리 조각상이 붙어있었다. 천장에는 크고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반짝반짝 빛나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공주님이 튀어나올 것 같은 방이었다. 가본 적은 없지만,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이 꼭 이렇게 생겼을 것 같았다.

  “이게 대체 뭐야? 납치? 꿈? 몰래카메라?”

  태람은 일단 자신의 뺨을 여러 번 후려쳐봤다.

  

  아팠다.

  

  숙취 때문에 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억지로 굴리고 또 굴려봤으나 너무 어이없는 상황에 뇌가 다시 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멍하니 서 있는 태람의 앞에 무언가가 날아왔다. 

  

  [뭐하냐삑?]

  정체불명의 생물이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으악! 새, 새가 말을 해….”

  태람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양손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정체불명의 생물은 여전히 하늘에 둥둥 떠 있었다. 

  [정말 소란스러운 인간이다삑.]

  손바닥만 한 크기에 노랗고 오동통한 동그란 몸통. 검은 참깨를 대충 뿌려놓은 것 같은 까만 눈. 작은 부리와 날개가 깜찍했다. 어린이가 그린 낙서처럼 어딘지 허술하게 생긴 노란 새는 날개를 파닥파닥하며 파리 새끼처럼 태람의 주변을 날아다녔다.

  “환상까지 보이다니 내가 미쳤나?”

  태람은 이번에는 뺨을 꼬집어보았다.

  역시 아팠다.

  [자학하는 게 취미냐삑?]

  궁금한 게 많았지만 태람은 일단 가장 거슬렸던 것을 물어봤다.

  “야. 너. 그러니까…. 노랑이! 말투가 왜 그래? 한국어 어디서 배웠어? 되게 이상해.”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고 이것부터 받아라삑.]

  노랑이는 아직 혼란스러운 태람을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태람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았다. 너무나 익숙한 표지의 소설책이었다.

  “『맛있는 남자』?”

  [여기는 소설 속의 세상이다삑.]

  “그게 무슨 개 같은 소리야?”

  [설명하기 귀찮으니까 거울부터 봐라삑.]

  머리가 터질 것 같았던 태람은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노랑이가 시키는 대로 엉거주춤 거울 앞에 설 뿐이었다.

  “…이게 나라고?”

  태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감탄했다.

  탈색 때문에 개털이 되었던 머리는 비단처럼 윤기 있는 은발이 되어 찰랑거렸다. 평범한 색이었던 눈동자는 호박석을 박아 놓은 것처럼 은은하게 황금빛이 감돌았다. 원래도 피부가 좋은 편이긴 했지만, 지금은 작은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밀가루로 빚은 도자기 인형처럼 하얗고 투명했다. 그야말로 현실감이 없는 미모였다.

  미쳤다. 본판은 난데 우아해졌어. 고귀한 인상이 된 느낌?

  태람은 메롱을 해봤다. 그러자 거울 속의 남자도 그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했다. 다음은 콧구멍에 손가락을 넣어봤다. 그 행동 역시 그대로 거울에 비춰줬다. 마지막으로 손바닥으로 얼굴을 찌그러트려 보았다. 아무리 막 다뤄도 얼굴은 아름다움을 유지했다. 이제 친구들이랑 미모 몰아주기 놀이를 못 할 것 같네. 실없는 생각만 툭 튀어나왔다.

  

  노랑이는 변화한 자신의 외모에 푹 빠져 거울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태람을 한심하게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거울 좀 그만봐라삑.] 

  “…솔직히 마음에 들긴 하지만 내가 왜 이렇게 변한 거야?”

  [강제력 때문이다삑.]

  “강제력?”

  [강제력은 원작 그대로 이야기를 진행하려는 힘이다삑. 네 역할은 메인수. 지금 모습은 원작 설정에 맞게 보정된 거다삑.]

  “원작이라면…. 내 소설?”

  [그렇다삑.]

  “더 자세히 말해 봐.”

  노랑이의 말이 이어질수록 태람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졌다.

  강제력은 원작을 재현하려는 힘으로 오차율이 높아질수록 강하게 발동하게 된다. 오차율은 원작을 얼마나 벗어났는지를 나타내는 수치로 태람의 행동에 의해 결정되었다.

  “오차율이 높아지면 어떻게 되는데?”

  [강제력이 너를 이 세계에 동화시켜 버릴 거다삑. 그렇게 되면 너는 원래 세계의 기억을 잃어버리게 된다삑.]

  “…뭐?”

  [대신 소설의 엔딩을 보게 되면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다삑.]

  “다른 방법은 없어?”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이거 뿐이다삑.]

  “너는 대체 뭐야?”

  [나는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탄생한 요정이다삑.]

  “누구의 의지?”

  [금제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삑.]

  “내가 원작자잖아. 들을 권리는 있다고 보는데?”

  [금제 때문에 대답할 수 없다삑.]

  “제일 중요한 질문을 안 알려 주냐?”

  [나도 답답하다삑! 하지만 말해버리면 내가….]

  “금제를 어기면 어떻게 되는데?”

  [존재가 소멸되고 만다삑….]

  태람은 침울한 표정을 짓는 노랑이를 보니 더 따지기도 뭐했다. 저 노랑 덩어리는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로 사라져버리면 곤란했다. 태람은 노랑이를 적당히 달래서 최대한 정보를 털었다. 아쉽게도 특별한 정보는 없었다.

  왜 하필이면 이 소설이냐….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흑역사를 직접 체험해야 하는 거야. 

  『맛있는 남자』는 태람이 민아의 도움을 받아 쓴 첫 소설이었다. 자극적인 소재를 마구 남발했고, 문체는 서투르고 전개도 뚝뚝 끊겼다.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태람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가 쓴 작품이니까 진행하다 보면 기억날지도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태람은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을 내려놓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소설을 출간하며 오만가지 악플을 이겨낸 정신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말하는 걸 잊었는데 너 말고도 한 명이 더 왔다삑.]

  노랑이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태람은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희생자가 나 말고 또 있었어? 무슨 원 플러스 원도 아니고….”

  [너와 인연이 깊은 사람이다삑.]

  군대 때문에 인맥이 와장창 박살 난 터라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일단 당장 떠오르는 건 민아였다. 누구든 간에 혼자인 것보다야 낫겠다고 생각한 태람이었다.

  “여자야? 남자야? 이름이 뭐야? 그건 말해 줄 수 있지?”

  [누구냐면….]

  

  노랑이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쾅, 쾅, 쾅 방문을 두드렸다. 노크라기에는 상당히 거칠었다.

  “빚쟁이도 아니고 뭐야. 중요한 순간이었는데 짜증 나네.”

  태람이 아무 생각 없이 방문을 열려고 하자 노랑이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네가 이쪽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스토리에 영향을 준다삑.]

  노랑이의 말에 태람이 멈칫했다. 만약 문밖에 있는 게 주요 등장인물이고, 자신이 원작과 어긋난 행동을 하면 오차율이 높아질 게 뻔했다.

  “이야기가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확인할 수 있어?”

  [책을 펴면 보인다삑.]

  노랑이의 조언에 따라 태람이 급하게 소설책을 펴보려는 했을 때, 벌컥 방문이 열렸다.

  웬만한 연예인 못지않은 화려한 생김새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멋대로 들어온 불청객에게 뭐라도 한마디 하려던 태람은 순간 말을 잃었다. 불청객은 엄청난 미남이었다. 햇빛에 반사된 백금발 머리카락이 모래알갱이들처럼 아름답고 다채롭게 빛났다. 신비롭고 깊이 있는 자수정 눈동자가 특히 인상 깊었다. 태람은 긴장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누, 누구세요?”

  ”혹시 그 인간, 아니 한태람 선배십니까?“

  불청객의 고운 이마가 팍하고 찌푸려졌다. 아니. 멋대로 쳐들어온 건 그쪽이면서 왜 짜증? 적반하장의 태도에 태람은 기분이 퍽 기분이 상했다.

  “맞는데…. 누구신데요?”

  “하아…. 정말로 선배군요.”

  불청객은 긴 한숨을 내쉬고 입을 꾹 다물었다. 태람은 어딘지 익숙한 모습에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는 너는 이세호냐?”

  “…그렇습니다.”

  태람은 더러운 예감은 빗나가질 않는다고 좌절하며 혼자인 것보다 낫다고 했던 것을 취소하기로 했다.

  “키릭 루 페르시안으로 빙의했습니다. 선배의 소설 속 메인공이죠.”

*

  세호의 말에 따르면 태람의 이름은 원래 세계와 동일했다.

  “메인수가 평범한 대학생이라 그런가?”

  “‘눈처럼 새하얀 토끼 같다’라는 책 속 묘사 때문에 외견은 조금 변한 것 같지만요. 그래도 작가인 선배가 있어서 다행입니다. 저는 뒷내용을 하나도 모르거든요.”

  “뭐? 너 내 소설 다 읽었다며? 왜 몰라?”

  “『맛있는 남자』는 앞부분만 읽고 덮었습니다. 문체가 엉성하고, 내용이 뚝뚝 끊겨서 도저히 읽히지 않았습니다.”

  세호의 말은 태람이 자신의 글을 직접 분석한 것과 비슷했다. 첫 소설이었기에 서툴고, 엉성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세호에게 들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태람은 화를 내지 않기 위해 눈을 한 번 감았다 떴다.

  “어쨌든 너도 내용을 모른다는 거지?”

  “너도? 선배는 모르시면 안 되죠. 작가잖아요.”

  “…오래돼서 기억이 잘 안 나.”

  민망해진 태람이 자신도 모르게 세호의 눈을 피했다.

  “하아…. 한심하시네요.”

  “뭐라고?”

  “앞부분은 제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선 거기라도 완성해요.”

  세호의 불손한 눈빛과 한심하다는 말에 억눌렀던 태람의 분노 스위치가 꾹 눌려버렸다.

  “말을 꼭 그렇게 기분 나쁘게 하냐?”

  “피곤하게 굴지 마세요.”

  “뭐 피곤? 너랑 있어서 피곤한 건 나야.”

  “쓸데없이 열 올리지 마시고….”

  “네가 자꾸 시비를 거니까 그렇지!” 

  “시비는 선배가 걸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

  “지금도 봐요!”

  왁하고 소리치려던 세호는 주먹을 꽉 쥐어 간신히 충동을 다스렸다.

  “…그만하죠. 저는 빨리 소설을 완성해서 이 거지 같은 상황을 벗어나고 싶습니다. 선배는 싫지만, 최대한 협력하겠습니다.”

  태람은 세호의 칼같은 말에 왜인지 가슴이 답답해졌지만 애써 흘려보냈다.

  “나도 너 싫거든….”

  “곧 그가 올 겁니다.”

  “누구?”

  세호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것같은 순진무구한 태람의 얼굴을 보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맛있는 남자』의 화자. 아밀 말입니다. 설마 아직도 안 보셨습니까?”

  “그러니까 뭘?”

  “소설책이요! 선배도 받았을 거 아닙니까?”

  “아…. 안 그래도 읽으려고 했는데….”

  세호는 태람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먹었다. 

  “대체 뭐하셨습니까?”

  “보려고 했는데 네가 들어왔잖아!”

  “다음 진행이 머지않았으니 빨리 파악하세요.”

  “알았어! 보면 되잖아!”

  태람은 빽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신경질적으로 책을 펼쳤다.

*

  『맛있는 남자』 1P

  친하게 지내는 시녀 누나는 왕자님을 귀축광공이라고 불렀어요.

  언제나 왕자님에게 어울리는 청순가련한 꽃수가 운명처럼 나타날 거라고 말했지요.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던 저도 듣고 보니 그럴싸해서 그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게 되었죠.

  아! 저는 룬베르 제국의 시종 아밀입니다. 나이는 18살이고요. 이래 봬도 제법 능력이 있어서 유력한 황태자 후보인 3 왕자 귀축광공…. 아니, 키릭 루 페르시안 님을 모시고 있어요.

  왕자님은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진 분입니다. 제국 최연소 소드마스터에, 굉장한 천재여서 아카데미 시절에는 모두의 생활을 획기적으로 바꿀 만큼 실용적이고 기발한 마법 이론도 확립하셨대요. 사람들은 모두 왕자님이 위대한 왕이 되어 아름다운 왕비님과 국혼해 후사를 볼 거라고 말해요.

  하지만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 왕자님은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겨버렸어요. 저는 속으로 역시 운명 같은 건 망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분이 오시기 전까지 말이에요.

  그분의 이름은 한태람. 이세계에서 온 신의 대리자래요. 하여튼 성 안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저도 그런 줄 알지요. 태람 님은 왕자님의 성년식 도중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나셨어요. 정신을 잃은 채 강물에 두둥실 떠다니는 그분을 왕자님이 살포시 안아 올리셨죠. 마치 동화 속의 한 장면 같았답니다.

  두 분의 다정한 모습을 보고 느꼈던 벅차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시녀 누나에게 물어봤더니 이제는 저도 키릭태람 커플을 수호하는 동료이니 좀 더 확실하게 일반인 코스프레를 해야 한대요. 은밀한 울림이 어쩐지 멋있어 보여서 같이 하기로 했어요.

  “아밀! 멍하니 있지 말고 빨리 키릭 왕자님의 조식을 옮기도록 해라!”

  “네. 갑니다. 가요.”

  깐깐한 집사장님은 맨날 저를 못 갈궈서 안달이 났지요.

  “정신 좀 차려. 쟁반 똑바로 들고.”

  “키릭 왕자님의 방으로 가져다드리면 될까요?”

  “오늘은 태람 님과 조식을 함께 하신다고 하셨다. 귀빈실로.”

  “네! 다녀오겠습니다.”

  세상에! 두 분이 조식을 함께 하신다니 너무 기뻐요. 키릭 왕자님은 요즘 자주 태람 님이 계신 귀빈실에 틀어박혀 계세요. 저번처럼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다면 좋겠어요.

  아직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저에게는 원대한 꿈이 하나 있어요. 그건 바로 역사서의 저자가 되는 거예요. 먼저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는 것부터 실천하고 있답니다. 매일 매일 왕자님과 태람 님의 일상을 관찰하고 있어요.

  오늘도 예비 역사가로서 사명을 가지고 모든 걸 지켜보고 와야겠어요. 

*

  책을 덮은 태람은 눈을 질끈 감았다. 당장이라도 수치사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빌어먹을. 그 당시에는 순문학을 패러디하는 게 인기여서 『사랑방 손님과 아버지』를 모티브 삼았었는데…. 민아랑 깔깔거리며 쓸 때는 참 재미있었지만 지금 다시 보니까…. 그냥 죽고 싶다.

  방금 읽은 부분을 제외하면 책은 전부 백지였다.

  나머지 부분을 다 채워야 한다는 거지? 그것도 저 재수 없는 새끼랑. 태람은 고생길이 열렸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앞부분을 보니 조금은 생각난다는 것이다.

  『맛있는 남자』는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이다. 화자인 아밀이 자신이 모시는 키릭 왕자와 메인수를 응원하며 관찰하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메인수는 화려한 미소년으로, 시쳇말로 도화살 낀 청순가련 아방한 꽃수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이, 종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남자를 홀린다. 왕자를 시작으로 신관, 드래곤, 마왕까지…. 나중에는 본인도 수습할 수 없는 대소동에 이리저리 치이다가 결국 메인공인 귀축 왕자에게 코 꿰이고 그와 결혼식을 올리며 소설은 끝이 난다.

  “조금은 기억이 나십니까?”

  “큰 줄기는 얼추.”

  “얼추? 대충대충 사는 선배다운 말이네요.”

  “내 인생 멋대로 평가하지 마. 안 그래도 심란한데….”

  태람은 욕이 턱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여기서 더 싸워봤자 손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마음이 너덜너덜해져서 기력도 없었다. 그러나 세호는 태람을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어떻게 본인이 쓴 걸 잊어버릴 수 있습니까?”

  “너도 군대 다녀와 봐. 머리가 초기화 돼.”

  “선배 머리 나쁘시죠?”

  “그러는 너는 얼마나 똑똑한데!”

  “적어도 선배보다는 나은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번에도 학년 수석입니다.”

  세호는 승리에 찬 미소를 지었다. 태람은 저렇게 얄밉게 말하는 것도 일종에 재능이라 생각하며 질려버렸다.

  “잘났다. 그래. 인정해 줄 테니까 이제 그만하지?”

  태람의 항복선언에도 세호는 멈추지 않았다.

  “유치한 내용에 가벼운 휘발성 소설이니 쓴 당사자조차 잊어버린 게 이해는 갑니다.”

  “야! 말 다 했냐?”

  “제 말이 틀렸습니까?”

  “그러는 너는! 현대물인데 사람이 추풍낙엽처럼 픽픽 죽어 나가는 기분 나쁜 소설만 쓰잖아!”

  세호가 말없이 태람을 노려봤다. 매서운 시선에 태람은 목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원래도 한 덩치 하는 세호는 강제력 보정으로 더 커져서 그런지 박력이 배로 늘어나 있었다.

  분하지만 태람은 압도당할 것 같았다. 키릭 왕자는 소드마스터라는 설정이었지. 기분 탓인가? 괜히 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여기서 물러나는 건 쪽팔렸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하, 하나도 안 무섭다.”

  태람이 세호를 노려보자 세호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으며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매우 큰 주먹에 태람은 겁이 났지만, 벌벌 떨면서도 지지 않고, 세호를 째려봤다.

  그래. 내가 등치가 없지 가오가 없냐! 까짓거 깽값이나 받는 거야. 그런데 여기는 경찰이 없지. …아! 몰라! 팰 거면 패던가!

  “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잖아!”

  세호는 마치 아기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것 같은 태람의 하찮은 위협이 귀여웠다.

  “선배는 참 성가신 사람이네요.”

  세호가 태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단지 걸어오고 있을 뿐인데도 태람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꼭 고양이 앞에 선 쥐가 된 기분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한 발짝씩 뒤로 물러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차가운 벽이 등에 닿았다. 더 물러날 곳은 없었다.

  “왜 갑자기 조용해졌어요? 아까처럼 말해 봐요.”

  맞는다! 태람은 반사적으로 눈을 꼭 감았다. 세호는 그런 태람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었다.

  “쫄았습니까?”

  저게 지금 나 비웃은 거지! 태람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세호에게 덤빌 결심을 했을 때, 갑자기 나타난 노랑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밀이 왔다삑!]

  “…뭐?”

  “그대로 계세요.”

  세호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양손으로 태람의 얼굴을 꽉 쥐었다.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으로 태람의 턱을 눌러 억지로 입을 열었다. 

  “지금 뭐하는….”

  다음 순간 태람의 입안으로 부드럽고 말캉말캉한 살덩어리가 들어왔다. 이 감촉은 분명 혀였다. 세호의 혀는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태람의 입안을 무자비하게 휘저었다. 부드러운 감촉과 달리 힘이 잔뜩 들어간 투박한 혀 놀림이었다.

  점점 깊이 찔러오는 세호의 움직임에 태람은 숨이 막혔다. 태람은 무의식중에 세호의 머리채를 콱 움켜쥐었다.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린 세호였지만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더 깊이 태람의 숨결을 먹어 치울 뿐이었다. 

  “하으읏…!”

  “하아….”

  당황스러움과 수치심도 잠시 태람은 점점 기분이 좋아졌다. 태람이 흐물흐물해지자 세호의 혀가 움직임을 달리해 스텝을 밟듯 차근차근 태람의 입안을 돌아다녔다. 야릇한 감각에 태람은 그만 다리의 힘이 풀렸다. 세호는 태람이 넘어지지 않게 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기분 좋아…. 이게 아니고! 이대로는 안 돼…. 태람은 머릿속이 엉망이었지만 필사적으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태람이 아는 세호는 이유 없이 행동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아밀이 왔다고 했으니 분명 원작대로 움직이고 있을 것이 뻔했다.

  태람은 필사적으로 메인수가 다음에 해야 할 행동을 생각했다. 메인수는 처음에는 왕자를 받아들이지 않고 반항했어. 머리를 굴려보자. 반항해야 해. 한태람! 그래…. 머리! 태람은 있는 힘껏 세호를 밀친 후 그의 얼굴에 자신의 머리를 박았다.

  세호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으나 다행히 쓰러지지는 않았다. 솔직히 태람을 골려줄 생각으로 일부러 거칠게 다루긴 했었다.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강한 반격을 받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세호는 피가 몰려 당장이라도 코피를 쏟을 것 같은 코를 살살 문지르며 태람을 향해 준비해 온 남사스러운 대사를 읊었다.

  “역시 너는 늘 새롭고 자극적이야. 정말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든다는 말과는 반대로 살기가 뚝뚝 묻어 나오는 세호의 목소리에 태람은 움찔했다. 흉흉한 눈빛이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약간의 죄책감과 통쾌함 공존했다.

  마, 많이 아픈가? 박치기가 제대로 들어갔나 보네. 그, 그래도 나는 원작대로 행동했어. 메인수는 초반에 왕자를 거부했으니까….

  자기 합리화를 마친 태람은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머, 멋대로 굴어서 벌 받은 거예요. 저 진짜 무서웠어요.”

  “이 정도는 가렵지도 않지만 다음부터는 조심해. 왕족을 다치게 하면 귀찮아진다. 네가 다른 사람에게 벌을 받는 건 유쾌하지 않아.”

  “애초에 왕자님이…. 왜, 왜 또 가까이 오는 건데요?”

  “네가 귀여운 얼굴을 하니까 자꾸 만지고 싶어져.” 

  달콤한 말과 달리 세호의 행동은 험악했다. 그는 태람의 팔을 잡아 뜯을 것처럼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붙잡은 손에 필요 이상의 힘이 들어간 건 착각이 아니었다.

  “아파요! 놔주세요!”

  태람은 연기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내뱉었다. 머릿속에서 세호를 향한 온갖 욕이 난무하고 있었다.

  “이런. 내가 너무 거칠었나 보군.”

  세호는 짐짝처럼 태람을 질질 끌고 가더니 침대 위에 패대기쳤다. 태람은 등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호는 역할에 충실했다.

  “착하지. 얌전히 있어. 거칠게 하진 않으마.”

  태람에 위에 올라탄 세호. 두 사람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입술끼리 맞닿으려는 찰나였다.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깨지는 파열음이 들렸다. 세호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누구냐!”

  “죄, 죄송합니다.”

  울먹이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소년. 바닥에는 처참하게 박살 난 식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아밀 맞지? 날다람쥐처럼 귀엽다. 태람은 상상한 것보다 더 아담한 아밀을 보며 작은 동물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설정한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태람이 아밀을 감상하는 사이 아밀에게 다가간 세호는 그를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운 뒤 자상한 손길로 먼지를 탁탁 털어주었다. 

  “어디 다치진 않았어?”

  “왕자님. 저를 벌하여 주십시오.”

  “괜찮다. 고작 이 정도 일로 너를 혼내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언제나 나를 도와주는 답례라 생각해라.”

  “…감사합니다.”

  “시종장한테는 비밀로 할 테니 걱정하지 마라.”

  세호가 부드럽게 미소 짓자 굳어있던 아밀의 표정이 눈이 녹듯 풀어졌다. 태람은 완벽하게 키릭 왕자를 연기하는 세호를 보고 소름이 돋았다.

  아까랑은 성격이 전혀 다르잖아. 연극계는 엄청난 인재를 놓치고 있는 게 아닐까?

  활기를 되찾은 아밀이 발랄하게 말했다.

  “그럼 왕자님. 조식을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조식은 되었으니 2시경에 간단한 다과를 가지고 오너라.”

  “네! 알겠습니다.”

  아밀은 씩씩하게 대답하고는 작은 동물처럼 쪼르륵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고, 인기척이 사라진 걸 확인한 태람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힘들다….”

  “일어나세요. 선배. 간단하게라도 맞춰봤으면 합니다.”

  “조금만 쉴게.”

  ”쉴 시간은 없습니다. 아밀이 곧 다과를 가지고 올 겁니다.”

  왕자의 가면을 벗은 세호는 지독히도 무뚝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세호가 주는 거 없이 미워진 태람은 짜증 섞인 투정을 부렸다.

  “딱 10분만 누워 있을게. 응?”

  “지금 저한테 투정 부리시는 겁니까? 위로를 받아야 할 건 접니다.”

  “네가 뭐! 너 좋을 대로 나를 막 휘둘렀잖아. 이 귀축 새끼!”

  “전부 연기였습니다. 키릭 왕자는 그런 캐릭터이니까요.”

  “아이고. 대단한 배우 납셨네.”

  “그리고 귀축은 선배겠죠. 아까 박치기 진심이신 거 같았는데요. 거기서 제가 넘어졌으면 분명 오차율이 올랐을 겁니다.”

  “그건 메인수가 원래 반항을 했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필사적이었죠.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세호의 정확한 지적에 태람은 순간 할 말을 잃고 입만 뻐끔거렸다.

  “그것 보세요. 선배는 너무 감정적이고 충동적입니다.”

  “…앞으로 조심할 테니까 잔소리하지 마.”

  “잔소리가 아니라 걱정입니다. 선배의 돌발행동 때문에 제가 피해를 보는 게 싫다고요.”

  “누군 좋은 줄 알아? 나도 싫어.”

  “애초에 선배가 쓴 소설이잖아요!”

  “이게 전부 나 때문이라는 거야?”

  “적어도 선배랑 연관이 있겠죠! 잘 생각해 보세요.”

  “몰라! 나도 미치겠다고!”

  “저도 미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단 말입니다!”

  “나야말로 벗어나고 싶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사내새끼한테 당해야 하는데!” 

  “저도 하고 싶어 한 거 아닙니다. 역겨웠어요!”

  역겹다고? 이 얼굴이? 딱 잘라 말하는 세호의 말에 태람은 내심 충격을 받았다. 태람은 원래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있는 편이었다. 설정 버프를 받아 천사 같은 외견을 자랑하는 지금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 아까는 왜 그렇게 진하게 했어. 아밀 눈만 속이면 되니까 하는 척만 해도 됐잖아!”

  “그건 선배가!”

  “내가 뭐!”

  “…아무것도 아닙니다.”

  

  태람만큼이나 열을 올리던 세호가 갑자기 뒤로 빠졌다. 태람은 씩씩거리며 세호를 놔주지 않았다.

  “뭔데 끝까지 말해 봐! 내가 어쨌는데?”

  “가짜로 했다가 들키면 큰일 날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솔직히 말해 봐. 나랑 키스하는 거 좋았지?”

  기세를 타고 나온 태람의 말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태람은 자기가 꺼낸 말이지만 민망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세호의 얼굴도 사과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둘 다 뭐하고 있냐삑?]

  노랑이의 말에 두 사람은 동시에 소리쳤다.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아무 짓도 안 했어!”

  [아무래도 좋지만 책 좀 확인해보라삑. 몇 장 더 채워졌다삑.]

  “소설책! 어디 갔지? 없어졌는데?”

  침대 옆에 둔 태람의 소설책이 온데간데없었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나타난다삑.]

  태람은 노랑이의 말대로 책이 필요하다고 강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태람의 손 위에 소설책이 나타났다.

*

  『맛있는 남자』 13P

  몇 번이나 노크해도 반응이 없어서 안 되는 줄은 알지만, 방문을 살짝 열어봤어요. 그랬더니 문틈 사이로 왕자님과 태람 님이 보였지요. 평범하게 대화를 나눈다고 하기에는 두 사람의 거리가 무척 가까웠어요.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왕자님이 태람 님을 벽으로 몰아세웠어요. 그리고 시작된 격정적인 입맞춤! 저는 숨도 쉬지 않고 집중했어요. 평소보다 거친 왕자님의 말투에 과연 저래서 귀축광공이구나 하고 감탄했지요.

  태람 님의 커다란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고, 아기같이 오동통한 그분의 뺨도 불그스름하게 물들었어요. 조금만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 저는 그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답니다.

  넋 놓고 바라보다 와장창 음식이 든 쟁반을 떨어트렸어요. 당황한 저는 그저 납작 엎드려 사죄의 말만 반복했어요. 왕자님은 황송하게도 직접 저를 일으켜 세워주셨답니다.

*

  태람이 추가된 페이지를 읽고 있을 때, 생각에 잠겼던 세호가 입을 열었다. 

  “어느 정도 이해한 것 같습니다.”

  “뭐가?”

  “페이지가 채워지는 원리 말이에요.” 

  태람은 자신을 한심하게 보는 세호의 눈빛에 또 울컥했지만 궁금함이 분노를 이겼다.

  “잘 모르겠으니 설명해 줘.”

  “실은 아까 몇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어디까지 허용되는지 알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원작과 다르게 행동해 봤죠.”

  “그랬어?”

  “그것도 몰랐습니까? 선배가 쓴 책이잖아요.”

  “…얘기나 계속해 봐.”

  인정하기 싫지만 태람은 눈앞에 있는 싹수없는 후배가 지신보다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년 수석이라는 것도 사실이겠지?

  “원작의 대사와 행동을 전부 다 세세하게 따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즉, 큰 줄기만 따라가면 된다는 거죠.”

  “확실해?”

  “확실합니다. 선배를 침대에 던져버린 건 원작과 다른 행동이었습니다. 원작에서는 발등에 입을 맞추고 조심스럽게 안아 살포시 눕히거든요.”

  “일부러 그런 거였냐! 엄청 아팠다고!”

  아직도 욱신거리는 등에 결국 태람은 세호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세호도 지지 않고 태람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선배도 있는 힘껏 머리를 박아대지 않았습니까!” 

  “나는 원작대로 했어!”

  “아닌데요! 원작에서는 그런 무식한 박치기가 아니라 살짝 밀치는 정도였습니다.”

  “무식? 한 번 더 박아줄까?”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왜 그러십니까?”

  “유치하게 구는 게 누군데!”

  “아직도 제 코 빨간 거 안 보이십니까?”

  “내 등짝 한번 볼래? 분명 멍들었을걸?”

  태람은 윗도리를 확 걷어 올렸다. 드러난 맨살이 뽀얬다.

  “아, 알았으니까 벗지 마세요.”

  크게 당황한 세호는 쭈뼛거리며 움직이더니 걷어 올려진 태람의 옷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시 내려줬다.

  “놔!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제대로 봐. 누가 더 심한지 어디 한 번 비교해 보자고!”

  “시간이 없으니 거기까지 하시죠.”

  세호는 가지고 있던 소설책을 펼쳐 태람에게 내밀었다. 무서운 속도로 새로운 페이지가 생성되고 있었다. 내용은 전부 아밀의 망상이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태람과 세호는 만리장성을 쌓고 있었다. 민망하기 그지없는 노골적인 묘사에 두 사람은 차마 내용을 자세히 읽지 못했다.

  “…그래. 쌤쌤이라고 치자.”

  “…알겠습니다.”

  “아무튼 사건의 줄기만 잘 따라가면 오차율이 올라가지 않는다는 거지.”

  “보석도 그대로이니 확실합니다.”

  “보석?”

  “정말 아무것도 모르네요. 책 앞에 박혀있는 붉은 보석은 오차율이 올라가면 탁해집니다.”

  세호의 한숨 섞인 목소리에 조금 찔린 태람은 얌전해졌다.

  그 후, 두 사람은 싸움을 멈추고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스토리를 짚어나갔다. 간단한 대본까지 짠 뒤 다시 아밀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2시가 다가올수록 태람은 첫 공연을 앞둔 신인 배우처럼 긴장이 되었다.

  아까는 기세를 타서 어떻게든 연기를 했었지만, 까닥 잘못하면 영원히 이곳에 남게 되는 거지? 토 나올 것 같아….

  초조함을 숨기지 못하는 태람에게 세호가 말을 걸었다.

  “걱정되십니까?”

  “아니! 완전 괜찮아.”

  ”허세 부리실 필요 없습니다.“

  “아, 아니거든!”

  “진정하세요. 선배의 실패는 제 실패나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이제 운명공동체니까요.“

  “…어, 응.”

  낮고 차분한 세호의 목소리에 태람은 조금은 긴장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고마워.”

  “아밀이 오기 전에 마지막 체크를 하죠.”

  “응! 그러니까…. 메인수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내고….”

  “왕자에게 아까 일을 사과하고 화해합니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대사를 주고받았고, 반복된 연습으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태람은 약간의 여유까지 생겼다.

*

  2시가 되자 칼같이 찾아온 아밀은 고급스러운 다과상을 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바삭바삭한 사과 파이에 따끈따끈 김이 나는 호박 스콘, 알이 굵은 딸기가 올려진 푸딩. 태람이 창조한 세상답게 전부 그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태람은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디저트를 보고 그만 눈이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삼시 세끼에 디저트까지 꼬박 챙겨 먹는 민아와 쭉 어울렸던 태람은 먹는 걸 굉장히 좋아했다. 

  “왕자님. 저 이거 먹어도 되나요?”

  첫 대사부터 실패였지만 태람은 이 정도는 괜찮다고 판단했다. 물론 세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얼굴이 급격하게 굳었다.

  “…물론이지.”

  “감사합니다.”

  

  태람은 체면이고 뭐고 손으로 딸기 한 알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새콤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꿀맛이었다.

  “태람 님. 포크를….”

  “내가 전해주마.”

  

  세호는 아밀을 의식해 싱그러운 미소를 가득 띠고 있었지만, 포크를 쥔 손은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소중한 손님이니 내가 특별히 신경 써야지.”

  “저도 지금보다 마음을 다해 태람 님을 모시겠습니다.”

  “고맙다. 아밀.”

  세호와 아밀이 훈훈한 대화를 나누든 말든 태람은 딸기 푸딩을 격파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아직도 따뜻한 호박 스콘에 오렌지 잼을 잔뜩 발라 우적우적 입안에 밀어 넣었다. 스콘은 겉은 바삭하지만 속은 촉촉했다. 잼도 싱그러웠다.

  “정말 잘 먹는군. 뭐 더 필요한 건 없나?”

  세호가 험악한 기류를 숨기고 태람을 불렀으나 먹느라 정신이 팔린 태람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한태람.”

  이글이글하는 세호와 눈이 마주친 순간, 태람은 아차 싶었다. 

  “제가 너무 게걸스러웠네요. 조금 허기져서….”

  “아니다. 잘 먹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부끄러워요.”

  “진실만을 말했을 뿐이다. 귀여워.”

  

  세호가 갑자기 일어나 태람에게 다가왔다.

  “와, 왕자님?”

  “이런…. 예쁜 얼굴이 더럽혀졌구나.”

  세호가 손을 올리자 태람은 반사적으로 질끈 눈을 감았다. 먹을 거 좀 먹었다고 때리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마음에 몸이 굳었다. 다행히 세호의 손은 태람의 입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쓱 닦아내기만 했다.

  안심도 잠시 태람에게 가까이 다가온 세호는 그에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였다.

  “제대로 안 하면 아밀한테 디저트를 전부 치우게 할 겁니다.”

  “미안. 배고파서….”

  “정신 차리고 잘합시다.”

  태람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디저트를 치운다는 세호의 말은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아직 사과 파이에는 손도 못 댔기에 마음이 다급해졌다. 위기감을 느낀 태람은 아까 맞춰봤던 대사를 내뱉었다.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왕자님.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나야말로 거칠게 행동해 너를 놀라게 한 것 같구나.”

  “아닙니다. 감히 왕자님에게 손을 댄 제가 나쁘죠.”

  “괜찮다. 이제 우리 사이의 오해는 다 풀린 거지?”

  “네.”

  이제 태람이 수줍게 웃으며 세호에게 안기기만 하면 끝이었다. 태람은 최대한 얼굴 근육을 움직였다. 매우 어색한 태람의 미소와 달리 태람을 향한 세호의 미소는 제법 자연스러웠다.

  “내 사람이 되어 줄 순 없을까?”

  부드러운 목소리와는 달리 세호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태람은 설레기는커녕 무서웠다.

  “왕자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나 너를 원하고 있는데도 말이냐?”

  태람은 손발은 오그라들어 없어질 것 같았다.

  “대체 뭐가 문제지?”

  “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요. 흑. 흑. 흑.”

  태람은 우는 흉내를 내며 세호에게 폭 안겼다. 누가 봐도 완벽한 발연기였다. 태람이 슬쩍 실눈을 떠 아밀을 보니 다행히 그는 눈을 반짝이며 경청하고 있었다. 세이프인가 봐.

  “걱정하지 마라. 내가 최대한 도와주마.”

  세호가 태람을 꼭 끌어안았다. 덩치가 커서 그런지 세호의 품이 편안했다. 태람은 따뜻함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그의 품에 더 깊이 파고들었다.

  “아밀. 너는 이만 나가보도록 해라. 나는 태람이 진정될 때까지 함께 있겠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다과상을 치우도록 하겠습니다.”

  아밀의 말에 태람은 세호의 등에 손톱을 세웠다. 세호가 아픔을 참으며 아밀 몰래 태람에게 속삭였다.

  “왜 그러세요.”

  태람은 냉큼 대답했다.

  “사과 파이. 두고 가라 그래.”

  “…알았으니까 힘 빼세요. 아픕니다.”

  그제야 태람은 손에 힘이 풀렸다.

  “다과상은 두고 가거라. 오늘은 아무도 이 방에 들이지 말아라.”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방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밀이 나갔다. 그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한결 편해진 목소리로 태람이 말했다.

  “갔나?”

  “그런 것 같네요.”

  “페이지는 잘 채워졌겠지?”

  “확인을 해봐야겠죠. 식량을 확보해서 좋으시겠어요.”

  “비꼬지 마.”

  “그것보다 이만 떨어져 주시죠?”

  태람은 바로 세호의 품에서 벗어났다.

  “아…. 미안. 채, 책이나 확인해 보자!”

  민망해진 태람은 서둘러 책을 꺼냈다. 대량으로 추가된 페이지를 보니 뿌듯해졌다.

  “이 기세라면 금방 다 채우겠다.”

  “선배가 걸신들린 것처럼 먹어댈 때는 걱정했지만 다행입니다.”

  “또 재수 없게 말하지!”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지은 죄가 있는 태람은 한마디 쏘아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배가 고팠다고는 해도 반성하긴 해야겠지. 문득 혼자였다면 무사히 페이지를 완성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

  “뭡니까?”

  세호는 멍한 표정으로 태람이 내민 손을 멀뚱멀뚱 쳐다볼 뿐이었다. 

  “서로 협력해야 하잖아. 우리는 운명공동체라며. 그만 싸우자고.”

  “항상 싸움을 거는 건 선배 쪽이었습니다만.”

  “야! 좀!”

  머뭇거리던 세호가 태람의 손을 맞잡았다.

  “저도 잘 부탁합니다.”

  세호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입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왕자를 연기할 때 보였던 가식적인 미소와 달리 자연스럽게 마음에 스며드는 멋진 미소였다. 역시 잘생겼어. 태람은 새삼스럽게 감탄했다.

*

  한편, 멀리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붉은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깊이 눌러쓴 후드 아래로 호기심과 흥미가 가득한 담긴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예쁘고, 특이하네. 이제까지 본적 없는 이질적인 영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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