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피어나기 시작한 3월. 피부에 와 닿는 공기가 아직은 쌀쌀했다.
캠퍼스 안을 오고 가는 학생들은 추위를 잊은 듯 활기찼다. 그들의 밝고 싱그러운 목소리와 생기 넘치는 움직임이 태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제대 후 바로 한 복학이라 혹시라도 겉돌까 봐 걱정이 많았지만, 어색하지 않게 그들 사이에 녹아든 것 같아 내심 안심이 되었다.
향긋한 꽃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살랑거리며 태람의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음, 좋은 향기. 알 수 없는 좋은 예감에 태람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오랜만에 민아랑 만나겠네.”
작게 중얼거린 생긴 태람은 오늘 만나게 될 친구를 떠올리며 자기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음이 잘 맞는 친구이자 동갑내기 사촌지간인 민아는 태람의 초중고 동창으로 대학까지 같이 들어왔다. 어릴 때 꿈을 이뤄 제법 큰 출판사의 인턴 사원이 된 민아는 막 인기를 끌기 시작한 신인 작가인 태람의 훌륭한 조언자였다.
애초에 민아가 아니었으면 시작도 안 했겠지.
민아의 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이 태람을 장르 문학, 그것도 ‘BL(Boy's Love)’의 세계로 이끌었다. 당시 즐겨보던 배구 만화의 신간이라 생각하고 펼친 책에서는 주인공과 라이벌이 적나라하게 얽혀있었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고, 민망했지만, 점점 그 책에 빠져들었다.
양보할 수 없는 목표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하는 두 사람. 그러다 서로를 너무나 잘 파악하게 되고, 마침내 인정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묘한 이끌림. 동성 간의 연애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다양한 위기. 무엇보다 강렬한 감정선이 인상 깊었다.
태람은 여느 때보다 집중해서 책을 탐독했다.
‘야! 그걸 네가 왜 봐!’
태람을 뒤늦게 발견한 민아가 기겁하며 다가왔다. 마침 책을 다 읽은 태람은 민아를 보며 진지하게 요청했다.
‘이거 다음 권은 없어?’
‘…어? 자, 잠깐 기다려.’
이 일을 계기로 원래도 친했던 두 사람은 함께 BL을 즐기며 영혼의 절친으로 발전했다.
‘공모전 참가해 볼래? 팬 픽션만 쓰기에는 아까운 것 같아.’
어느 날 민아는 태람에게 노트북을 선물해주며 공모전 참가를 제안했다. 한창 글 쓰는 것에 재미를 붙였던 태람은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했고, 상당한 성과를 냈다. 지금은 전업을 고민할 정도로 잘 팔리는 작가가 되었다. 모든 것이 민아의 지지와 응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2년 만에 보는 건가? 제대하고도 차기작을 쓰느라 전화나 메신저로만 연락을 주고받아서 꼭 랜선친구가 된 기분이었지. 빨리 얼굴 보고 싶다. 서두르자. 태람은 어느새 차가워진 손을 주머니에 쏙 집어넣고,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과거 몇 번이나 지났던 교정을 가로질러 연륜이 느껴지는 회갈색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빠르게 올라 도착한 강의실에는 아쉽게도 만나길 기대했던 민아는 보이지 않았다.
김민아. 이 배신자. 개강 주니까 수업 제친 건 이해하겠는데 아무 연락도 없는 건 너무 한 거 아니냐? 수업 같이 듣자고 말한 건 자기면서….
태람은 먹이를 빼앗긴 햄스터처럼 잔뜩 시무룩해졌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이 없을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익숙한 얼굴은 없었고, 다들 언제 친해졌는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앉아있었다.
혼자 덩그러니 남겨진 태람은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저 사이에 넉살 좋게 끼어들 용기 따위는 없었다.
방황하는 사이 수업은 시작해 버렸고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갔다.
태람은 끝도 없이 떠드는 교수의 입을 틀어막고 싶어졌다. 오리엔테이션만 하고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태람이 선택한 과목의 교수는 개강 첫 주고 뭐고 시간을 꽉꽉 채우기로 유명한 깐깐한 사람이었다.
반쯤 눈이 풀린 채로 강의를 듣다가 드디어 찾아온 쉬는 시간.
한참을 고민하던 태람은 출석 체크는 했으니 문제없으리라 판단하고 결국 수업을 재끼기로 마음먹었다. 이왕 학교까지 왔으니 오랜만에 동아리 방을 들리기로 했다.
입대 전까지 몸담았던 동아리 ‘문예창작부.’ 민아의 추천으로 들어가게 된 이곳은 이름만 번지르르하지 실상은 장르 소설 마니아들의 소굴이었다. 그것도 어째서인지 대대로 BL을 즐기는 사람들만 들어왔다. 동기는 몇 명이나 남았을지, 아직도 동인 행사를 꾸준히 나가는지 등등 궁금한 게 참 많았다.
*
동아리 방의 문을 여니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풋풋한 인상의 새내기, 얼굴만 기억나는 동기, 왜 아직도 학교에 다니는지 의문이 드는 고학번 화석 선배 등이 이미 거나하게 취해 개다 만 빨래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생존자는 오늘 그렇게나 찾았던 민아와 저와 앙숙인 후배 세호였다. 민아를 향한 반가움도 잠시, 태람은 노골적으로 차가운 시선을 보내오는 세호 때문에 기분이 퍽 상했다. 태람은 의도적으로 세호를 무시한 채 민아에게 다가갔다.
“야. 김민아. 강의 째고 술 마실 거면 나도 부르지 그랬어.”
“누나 없어서 외로웠어? 우리 태람이 귀엽네.”
“누나 좋아하네. 나보다 생일도 느린 게.”
“학년은 내가 위잖아. 나는 4학년. 너는 3학년.”
“그래, 그래. 선배님. 대체 얼마나 마신 거예요? 눈이 다 풀리셨네.”
“몰라아. 기억 안 나. 왔으면 빨리 앉기나 해!”
민아의 말투에서부터 느껴지는 진한 알코올 향에 태람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얌전히 민아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자리에 앉자마자 안주용 과자를 입에 털어 넣었다. 민아는 술에 취하면 옆 사람이 취할 때까지 놔주지 않고 술을 권했기에 미리 배를 채워 놓아야 안전했다.
“무조건 한 잔 마시고 시작하기!”
예상대로 바로 술잔이 들이밀어졌다. 태람은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랜만이라 그런지 마음이 동하긴 했다. 조금만 마시자. 태람은 민아가 따라주는 소주를 꿀떡꿀떡 받아마셨다.
한 잔, 두 잔, 석 잔….
테이블 위에 소주병이 늘어만 갔다. 태람은 시야가 빙글빙글 도는 것을 느꼈다. 으…. 어지러워. 바닥이 흐물거리네.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무심코 고개를 드니 건너편에 앉은 세호가 보였다. 묵묵히 술만 퍼마시는 세호의 옆얼굴은 완벽한 조각상이었다.
쌍꺼풀은 없지만 크고 깊이 있는 새까만 눈동자. 높은 콧대에 날렵한 턱선. 세호는 전체적으로 선이 굵고 직선적인 멋이 살아있는 미남이었다. 태람은 재수 없지만 역시 세호가 잘 생겼다고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되었다.
“잘 생겨서 짜증 나. 꼴도 보기 싫은 데에…. 자꾸우만 보게 되잖아. 이 못된 후배 놈아. …아니지, 얼굴은 죄가 없잖아. 그래. 너어 얼굴은 무죄. 성격은 유죄. 무기징역이다아….”
술에 취한 태람은 속마음을 중얼중얼 내뱉으며 세호의 미모를 천천히 감상했다.
“그런데 누굴 닮은 것 같은데….”
그러다 문득 태람은 저번 주에 넘긴 자신의 소설 『귀축광공을 내 손으로 키웠다』의 초고를 떠올렸다.
“너! 이 새끼…. 완전 귀축광공상이네.”
그랬다. 세호의 살짝 올라간 차가운 눈매는 태람의 소설 속 귀축광공 그 자체였다. 태람의 상상 속에서 호텔 가운을 입은 세호가 나타나 우아한 포즈로 에B앙을 마시고 있었다.
“에B앙 비싼데…. 삼D수라도 가져다 바쳐야 하나….”
두서없이 이어지는 태람의 헛소리. 마침내 세호가 태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쌍의 눈이 마주쳤고, 다음 순간 태람의 귓가에 낮은 저음이 파고들었다.
“한태람 선배님. 그만 좀 쳐다보시죠. 불쾌합니다.”
태람은 술이 확 깨는 걸 느꼈다. 입대 전 세호와 기 싸움했던 나날들이 떠올라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진 계기는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날은 태람과 민아가 동아리 방에서 새로 들어온 부원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에 들어온 후배들 실력 어떤 것 같아?”
“나는 걔가 좋더라.”
“누구?”
“왜 있잖아. 1학년 중에 제일 잘생긴 애.”
“이세호?”
“이름은 잘 몰라. 그래도 워낙 튀는 외모니까 맞을걸?”
“답도 없는 얼빠인 건 여전하구나. 얼굴만 보느라 이름은 듣지도 못했지?”
태람은 순간 찔끔했지만 애써 태연한 척 대화를 이어갔다.
“아무튼! 글 잘 쓰더라.”
“맞아. 교수님들도 좋아하시잖아.”
태람은 가벼운 자신의 글과 달리 묵직하고 무게감이 있는 세호의 글이 멋있어 보였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인 방대한 세계관. 확고한 개성이 묻어나는 독특한 분위기. 현실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 그런 글을 쓸 수 있는 세호가 부러웠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태람이 느끼기에 세호는 고집스럽게 피폐하고 시리어스한 소재만 채택했다. 대중성과는 거리가 있었다.
“소재가 지나치게 한정적이고, 타겟층도 애매해. 수위나 당도를 높이지 않으면 칙칙하고 지루한 글로 보일 위험이 있어. 공모전도 매번 떨어졌다며? 작가 지망이라고 들었는데 이대로는 성공하기 어렵지.”
“그래도 나는 세호 글 좋은데.”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야. 좀 더 전략적이면 좋다는 거지.”
“네가 그렇게 후배를 신경 쓰는 건 처음이네.”
“나한테 없는 장점이 많은 애니까. 더 잘됐으면 좋겠어.”
“정말 그것뿐이야? 나한테는 솔직하게 말해도 돼.”
태람은 민아의 끈적한 눈빛과 음흉한 표정에 기겁하며 자신을 소설의 모델로 삼지 말라고 경고했다.
“되지도 않는 망상 접어라.”
“…그럴 생각 없는데?”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봐.”
“내 창작권을 보장해줘.”
“너나 내 인권을 생각해줘.”
“너 세호 좋아하잖아.”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다. 내가 선호하는 메인공 스타일이겠지.”
“너 예전에 남자랑 하는 거 흥미 있다며.”
”그건! 솔직히 내가 쓴 BL 소설이 몇 갠데…. 실제로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 볼 수는 있잖아. 그렇다고 내가 그쪽인 건 아니야. 그리고 세호한테도 실례야.”
“그건 반성할게. 그래도 태람아. 지구상에는 양성애자가 80% 이상이래.”
“네 앞에서는 무슨 말을 못 하겠다.”
한참 태람과 아웅다웅하던 민아가 퍼뜩 무언가 생각난 듯 가방을 챙겼다.
“어쩌지? 교수님한테 제출할 과제가 오늘까지였어. 미안한데 먼저 가볼게.”
“알았어. 내일 봐.”
“정말 미안. 문단속 잘 부탁해.”
“괜찮아. 어차피 나도 곧 갈 거야.”
민아를 보낸 태람은 대충 눈에 보이는 쓰레기를 줍고, 휴지통을 비운 뒤 반쯤 열려 있던 창문을 닫았다. 불을 끄고 동아리 방을 나서려던 찰나였다. 누군가가 불쑥 태람의 앞에 나타났다.
세호였다.
“아씨. 놀랐잖아. 그러니까 이세범?”
“이세호입니다. 제 이름도 모르면서 그런 소릴 했던 겁니까?”
“아니 그게….”
“저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불쾌합니다.”
태람은 당황했다. 세호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것도 놀랐지만 세호의 표정에 불만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야 당사자가 없는데 멋대로 뒷말을 한 건 잘못한 게 맞았다. 하지만 욕을 한 것도 아닌데 저렇게 삐딱하게 나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억울하기도 했지만 일단 사과는 했다.
“기분 상했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세호는 그런 태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원래도 크게 잘못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태람은 깔끔히 씹혀버린 탓에 울컥 짜증이 밀려왔다.
기어코 나가려는 세호를 붙잡은 뒤 그를 향해 차갑게 쏘아붙였다.
“사과한다고 꼭 받아줘야 하는 건 아니지만 무시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최소한 고개라도 까딱거려. 그게 사람 간의 예의잖아.”
세호는 여전히 대답 없이 조용히 태람을 노려보았다. 태람은 자신보다 키도 덩치도 큰 세호가 노려보니 주눅이 들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강하게 나갔다.
“입이 붙었어? 왜 대답이 없어?”
그런 태람을 본 세호는 가소롭다는 듯 혀를 차더니 태람의 어깨를 퍽 치고 지나갔다. 그 바람에 몸이 뒤로 젖혀진 태람은 어깨에 몰려오는 시큰한 통증에 작은 신음을 흘렸다. 그 소리를 뻔히 듣고도 세호는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태람은 이번에는 세호를 붙잡지 않았다. 욱신거리는 어깨를 문지르며 절대 겁먹지 않았다며 애써 자신을 위로할 뿐이었다.
그 후로 태람은 세호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고, 무시로 일관하던 세호가 받아치면서 갈등은 격화되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상극이었다.
감정이 풍부하고 변덕이 심한 태람은 쉽게 뜨거워지지만 금방 식는 편이었다. 그래서 세호를 몇 번 들쑤시고 적당히 갚아 주었다고 생각해 미련을 털어버렸다. 반면에 세호는 무뚝뚝하고 신중한 편이라 좀처럼 달궈지지 않았지만 한 번 타오르면 웬만해서는 꺼지지 않았다. 태람의 한 짓을 두고두고 기억해두었다가 집요하게 괴롭혔다.
결국 태람은 다시 달궈졌고, 태람이 입대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질 않았다. 다행히 민아의 중재로 큰 싸움으로 번진 적은 없었다.
*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민아는 정신없이 술만 마시는 중이었으며 태람과 세호는 본격적으로 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뭐? 불쾌? 너는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그러는 선배야말로 조금도 달라진 게 없으시네요.”
“질척질척 음침한 소설이나 쓰는 게.”
“말 다 하셨습니까?”
“아니. 다 못했는데? 너 이번에 쓴 신작 제목이 파편인가 그랬지? 무슨 순문학인 줄?”
“유치한 문장형 제목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는 선배 신작은 제목이 『귀축광공을 내 손으로 키웠다』였죠? 일본 라이트 노벨인 줄 알았습니다. 나중에는 어디까지 길어질까 궁금하네요.”
“한눈에 키워드랑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은 독자의 니즈를 반영한 거야!”
“귀 아프니까 소리 지르지 마세요.”
세호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처음에는 태람을 예쁘장한 선배라고 생각했었다.
분홍색으로 물들인 곱슬머리가 솜사탕처럼 몽글몽글 부드러워 보였다. 거기에 오밀조밀 작고 귀여운 이목구비. 풍성한 속눈썹에 커다란 연갈색 눈동자. 살짝 처진 눈매는 한층 더 인상이 순해 보이게 만들었다. 솔직히 외견만큼은 타입이었다.
중학교 때, 자신이 게이임을 자각했다. 친구랑 놀다 스치듯 맞닿은 손에 손끝이 저릿하며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첫사랑이었다. 혼란스러웠고, 막연하게 두려웠기에 모든 것을 꼭꼭 숨겼다. 점점 말수가 줄었다.
대학에 들어와서 민아 선배를 만났고, 그녀 덕분에 BL 소설을 알게 되었다.
글을 쓰는 것이 좋았다. 글은 항상 숨겨 왔던 나의 성적 취향을 은밀하게 내비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다. 또한, 나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했다. 섹스해본 적도 없었고, 성적으로 건조한 편이었기에 자연히 수위를 높일 수 없었다. 행복한 결말도 낼 수 없었다. 현실적이지 않으니까.
그러다 태람이 장르 소설 작가 찰진 남자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더 호감이 갔다. 자신과는 다른 매력을 지닌 태람의 글이 좋았다. 리듬감이 있고 가독성 좋은 통통 튀는 문체. 인기 소재를 적절하게 조합하는 능력도, 예상치 못한 전개로 가는 의외성도 전부 배우고 싶었다.
세호는 그날 동아리 방에 올라간 것을 후회했다. 문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대화라 전부 듣지는 못했지만 태람은 자신의 글을 칙칙한 글이라며 깎아내렸었다. 처음에는 황당했고, 조금 슬펐다. 나중에는 화가 났다. 내 글에는 나의 일부가 그대로 담겨 있었으니까.
그날 이후 세호는 태람을 이기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 상처 입은 연정. 모멸감과 수치심. 인정하기 싫어서 외면해 왔던 질투심까지. 자각해버린 날 것의 감정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승승장구하며 인기 작가가 된 태람과 달리 세호의 성적은 지나치게 평범했다. 세호에게 있어 태람은 만나면 피곤한 선배가 되고 말았다.
“야. 내 말 듣고 있어?”
또랑또랑한 태람의 목소리에 생각에 잠겨있던 세호가 정신을 차렸다.
“그만하죠. 상대하기 귀찮습니다.”
“말 섞기 싫으니 닥치라고?”
“그렇게까지 말한 적은 없습니다. 무슨 피해망상증도 아니고….”
“진짜 사람 열받게 하네.”
점점 과열되는 두 사람의 싸움에 찬물을 뿌린 것은 어느새 술이 깬 민아였다.
“너네 또 싸워? 됐고. 볼만한 작품 있으면 추천이나 해 줘. 회사가 바빠서 괜찮은 작품 찾을 기력도 없다.”
민아의 개입으로 열기가 누그러지며 화제가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잠시 고민하던 태람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고전이긴 한데 『돈이 없소』 어때? 아무튼 꼴림 보장.”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데?”
“엄청 유명해! 내 인생작이기도 하고! 동아리 방에 있었던 것 같은데…. 찾아줄게!”
태람은 동아리 방 구석에 있는 책꽂이를 뒤적거리더니 표지에 화려한 미소년이 그려진 소설책을 꺼냈다.
“표지 귀엽다. 화사하네.”
“『돈이 없소』는 메인수가 친구의 배신으로 노예시장에 팔려 가며 시작해.”
“소재 한 번 화끈하다. 메인공은 어떤 타입?”
“귀축광공! 사채업자인데 일억 이천 만 원에 주인공을 낙찰 받아. 섹스 한 번에 300만 원씩 주면서 주인공을 밤마다 능욕해.”
“가볍게 보기 좋겠네.”
“조금 진지한 게 좋으면 『내 밑에서 발버둥 치며 울어라』도 재미있어.”
“그건 어떤 내용인데?”
“메인수가 여왕수 속성의 사채업자인데 꽃집을 운영하다가 망한 메인공의 가게를 사들여. 섹스 한 번에 100만 원씩 주면서 메인공을 능욕하다가….”
“…사채업자 많이 나오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과거가 풀리면서 후회수가 되는데 이 부분이 엄청 애절해.”
“여왕수에 후회수. 맛집이네. 그것도 동아리 방에 있나?”
“우리 집에 있어. 다음에 빌려줄게. 일단 『돈이 없소』부터 읽어 봐.”
태람이 민아에게 소설책을 넘기려는 순간이었다. 세호가 중간에서 그것을 낚아채 갔다. 태람의 미간이 팍 구겨졌다.
“너 뭐야?”
“민아 선배는 이쪽을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세호가 민아에게 건넨 소설책 표지에는 피투성이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숨은 팬이 많은 소설 『패배견의 피』는 목숨을 건 격투 게임이 성행하는 범죄자 도시에 살인 누명을 쓴 주인공이 들어가게 되며 시작된다. 내장 실뜨기로 대표되는 과격한 소재가 자주 등장해 화제를 모았었다.
태람이 한때 읽으려고 시도했다 포기한 작품이기도 했다. 쓸데없이 세세한 묘사. 짓눌려 버릴 것같이 무겁고, 숨 막히는 애증 어린 관계성. 어느 것 하나 맞는 게 없었다.
“나는 그거 설정이 복잡해서 별로야. 잔인하고 엔딩도 엄청 비극이래. 맥 빠지잖아.”
“은근슬쩍 스포일러 흘리지 마시죠."
“어차피 민아는 그거 안 볼 건데?”
”그걸 왜 선배가 정합니까?”
“안 그래도 회사가 힘들다는 애한테 굳이 그런 고어를 추천 하냐? 출퇴근하면서 가볍게 쓱쓱 볼 수 있는 『돈이 없소』가 좋지.”
“『돈이 없소』 같은 가벼운 작품이나 보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죠.”
세호의 건방진 말에 태람은 다시금 열이 확 올랐다.
“『돈이 없소』 무시해? 유혈 철철 『패배견의 피』보다 훨씬 잘 팔린 작품이거든!”
“팔리기만 하면 좋은 작품입니까? 뇌 빼고 보기에 딱 좋은 저급한 작품이랑 비교하지 마시죠.”
“내 인생 귀축광공이 있는 『돈이 없소』를 욕하지 마.”
“선배가 먼저 『패배견의 피』를 모욕했습니다.”
“취향이 아닌 건 어쩔 수 없잖아.”
민아는 점점 언성을 높이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 전부 읽을 거니까 싸우지 마.”
“먼저 시비를 건 건 선배입니다.”
“내가 언제!”
“둘 다 입 다물고 일단 앉아.”
민아는 태람과 세호를 억지로 앉혔다. 두 사람은 등을 돌린 채 서로를 철저히 외면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민아는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왜 저렇게 사이가 안 좋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중간에 낀 자신만 곤란했다. 두 사람이 친해지면 좋겠는데…. 아! 그 방법이 있었지.
어색하게 앉아있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민아가 벌떡 일어나 자물쇠로 잠겨진 오래된 캐비닛을 열었다.
“야. 너 설마….”
민아의 의도를 파악한 태람이 사색이 되었다. 저 캐비닛 안에는 동아리 회원들의 출간작이 들어있었다.
“찾았다. 한태람 장편 BL 소설 『이번 회귀도 망했습니다』. 여기 주인공이 정말 귀여웠어. 반복되는 회귀에 결국 다 포기하고 귀농했었지? 아마.”
“김민아. 그만해….”
“이것도 그립다. 『돈지랄 오메가의 하렘 구축기』. 오메가버스 세계관에 사이다를 팍팍 넣었다고 호평이었잖아.”
태람은 도시 한복판에서 발가벗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저 너무 부끄러웠다. 민아는 터질 것처럼 붉어진 태람의 얼굴을 보면서도 흑역사의 전시를 멈추지 않았다.
“그, 그건 절대 안 돼. 꺼내지 마!”
“싫은데? 찾았다. 『맛있는 남자』.”
“인간적으로 그건 넣어둬라.”
『맛있는 남자』는 태람이 처음 쓴 소설이었다. 태람의 소설 중 가장 엉성했다.
“어차피 이거 우리 부원들은 다 돌려 봤어.”
민아의 폭탄 발언에 태람은 죽고 싶어졌다. 저 새끼도 봤을까?
“인기 키워드만 따라가던 한심한 작품이라 읽기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세호는 얼굴이 붉어져 자신을 노려보는 태람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너. 두고 보자. 저 새끼! 아니 이세호 작품도 다 내놔.”
“좋아. 2학년들이 쓴 건 여기 있지.”
“민아 선배! 안 됩니다.”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하던 세호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거 나 줘.”
태람이 민아에게 손을 뻗었다. 그래. 나만 벗겨질 순 없지. 태람이 막 책을 잡으려는 순간, 세호가 태람을 막았다.
“절대 안 됩니다.”
“너도 내 거 봤잖아!”
“보고 싶어서 본 게 아닙니다. 눈만 버렸습니다.”
“네 건 얼마나 대단하길래 그러는데 한번 보자고!”
태람은 열심히 바둥거렸지만, 체격 차이로 세호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비켜! 덩치만 크면 다냐!”
“작은 게 자랑은 아니죠.”
“너 진짜 짜증 나!”
“피차일반입니다.”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쳐다보던 민아가 태람의 손에 세호의 책을 쥐여줬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지만 여기서는 공평하게 세호 후배 것도 까자.”
“…맘대로 하세요.”
세호는 체념한 듯 태람을 놔줬다. 태람은 참 고소하다고 생각하며 책을 폈다.
“필명이 selfish? 중2병이냐? 촌스러워. 오글거려. 창피하지 않냐?”
“필명이 찰진 남자인 사람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
세호가 투덜거리든 말든 태람은 그의 작품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어디 보자. 『살의와 애정』. 표지부터 그로테스크하네. 첫 장부터 사람이 죽었어! 무서워. 패스! 다음 책은 『갈증』. 관계성이 너무 무거워. 다음! 마지막은 『굴곡』. 스토커가 세 명? 세 명이 싸우다 사이좋게 하나씩 팔다리 절단? 으…. 못 보겠다.
“어때? 세호 후배의 글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감정선이 참 멋있어.”
민아가 잔뜩 기대하며 태람을 바라봤다. 태람이 생각하기에도 세호는 확실히 필력이 있었다. 오탈자나 비문은 거의 없었고, 문체도 단아하고 정갈했다. 수업 때 세호가 쓴 글들을 읽어보고 감탄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소설은 아니었다. 세호가 선택하는 소재와 풀어내는 감정선은 태람의 취향과 일억 광 년 정도 동떨어져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또 싸움이 나겠지? 지친 태람은 기계적으로 대꾸했다.
“응. 잘 쓰는 것 같아. 재미있네.”
태람의 형식적인 대꾸에 세호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태람을 노려봤다. 그 시선에 태람은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칭찬해줘도 지랄이지.”
“빈말인 거 뻔히 아는데 하나도 안 기쁩니다.”
“자꾸 시비 걸래?”
도돌이표 같은 상황에 마침내 민아가 화를 냈다.
“싸울 거면 둘 다 그냥 집에 가! 뒷정리는 나 혼자 할게.”
세호에게 더 따지려던 태람은 민아의 눈치를 살살 보더니, 테이블을 치우러 갔다. 세호는 널브러진 사람들을 챙겼다.
*
상황이 정리되고 태람은 민아와 나란히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호 진짜 좋은 애야.”
“너는 몰라. 이세호 그 새끼. 처음 만났을 때 내 말 다 씹고, 어깨 치고 지나치고 그랬단 말이야.”
“오해가 있었겠지. 나중에라도 잘 풀어 봐.”
“몰라.”
태람은 입을 꾹 다물어 불만을 표시했다. 민아는 그런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달래듯 말했다.
“둘 다 우리 동아리에 몇 없는 남자잖아. 사이좋게 지내.”
“진짜 안 맞는데….”
“너희 취향이 정반대이긴 하지. 너는 가볍고, 세호는 무겁지. 어쨌든 앞으로 계속 볼 텐데 친해져 봐.”
“싫어….”
“거절은 거절한다. 내일까지 이거 전부 읽고 오기. 세호도 세호의 글도 익숙해져 봐.”
“…알았어.”
태람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 『맛있는 남자』 말이야. 집에 가져가서 읽으면 안 돼?”
“이미 가져와 놓고 뭘 물어보냐.”
“허락한 거다?”
“맘대로 해.”
태람은 세호가 쓴 소설책들을 전부 챙겨서 집으로 돌아왔다.
세호를 생각하면 여전히 열이 뻗치지만, 민아의 얼굴을 봐서라도 노력은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잠들기 전 세호의 작품을 펼쳐봤다.
“내용 한번 살벌하네. 이 새끼는 인생에 불만 있나? 왜 죄다 이따위야. 안 봐! 짜증 나.”
책을 들고 끙끙거리던 태람은 결국 책을 덮고 깊은 잠에 빠졌다. 눈을 뜬 후 어떤 난장판이 기다리고 있을지 이때의 태람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