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희생 (3)
거대한 폭발에 휩쓸린 바닷속은 처참했다.
“커윽!”
루카스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왈칵 쏟아졌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토해낸 루카스가 주변을 살폈지만,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암전. 빛 한 점 들지 않는 깊은 바닷속은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네년이 감히…….]
분노에 찬 기에스티오의 목소리가 물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들려왔다.
루카스가 불빛을 불러내 시야를 밝히자, 제 앞을 막고 선 채 휘청이는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땅에 발을 꽉 붙이고 선 인영의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
이내 앞으로 털썩, 꼬꾸라진 인영의 얼굴을 확인한 루카스가 작게 침음을 흘렸다.
“……파멜라.”
넝마가 된 몸에서 흘러나오는 검은 기운이 파멜라를 집어 삼키고 있었다.
[감히…….]
“어째서냐.”
파들파들 떨리는 파멜라의 몸에 치유마법을 시전하자, 이내 떨림이 잦아들었다.
“커으, 으윽…….”
파멜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 끝까지 해보자고.”
루카스가 힘겹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네 힘이 어디까지인지 한번 보자.”
기에스티오 역시 조금 전 거대한 힘을 쏟아 냈으니, 다음 공격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쿠오오오오오…….
루카스의 몸에 거대한 마나 폭풍이 일어났다.
[네깟 게!!!]
바닥에 꽂혔던 기에스티오의 창이 그의 손으로 되돌아갔다.
“같잖은 것 같으니.”
루카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실렸다.
-콰아앙!
루카스의 몸에서 터져 나온 마나가 기에스티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크아악!]
제 몸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아모레의 신성력을 모두 담은 회심의 일격이었지만, 거대해진 기에스티오의 몸을 무너뜨리기엔 무리였다.
[이런! 이런 개 같은!!!]
허리춤에 내리꽂힌 공격은 그의 양쪽 지느러미를 날려버렸다.
“하하하! 속이 다 시원하구나. 안 그래도 그 지느러미가 꼴보기 싫어 죽겠던 참이었거든.”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린 루카스가 다시 한번 힘을 끌어 모았다.
“이번에도 좀 아플 거다.”
[인간 따위가!!!]
-쿠아아아앙! 콰쾅!
다시 한번 응축된 마나가 기에스티오를 향해 날아갔다.
-콰쾅! 쾅!
[끄아아아악!]
창을 들어 루카스의 공격을 막아낸 기에스티오의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갈 듯 너덜거렸다.
“그래. 생각해 보니 네 놈을 못이길 이유가 없는데 말이야.”
루카스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내가 많이 지쳤던 모양이야. 네 놈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니 말이다.”
[나는…… 나는 신이다. 네 놈 따위가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란 말이다!!!]
악에 받친 기에스티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 역시 너 같은 가짜 신 따위에게 당할 리가 없는데.”
피식, 하고 웃어 보인 루카스가 양손에 힘을 끌어모았다.
“내가 다시 얘기해 주마.”
-쿠오오오오오…….
“나는 약속의 종족으로 반만 년을 살았다.”
기에스티오의 주변에 생겨나기 시작한 소용돌이가 그를 잡아 삼킬 듯 크기를 키워갔다.
“내가 아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쿠아아아앙!
“널 죽여주마.”
-콰카가각!
[크아아아악!]
날카로운 톱날처럼 변한 소용돌이가 기에스티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발겼다.
[으아아아아아아!!!]
고통에 찬 신음을 내지르던 기에스티오가 돌연 기합을 넣듯 힘차게 소릴 내지르더니, 창을 들어 바닥에 푹, 꽂았다.
[죽, 여주, 마…….]
칼날 속에 선 그가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 짜내더니.
-콰가가각!
이제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제 손을 번쩍 들었다.
“젠장.”
기에스티오가 준비한 것이 또 있다는 뜻이었다.
[크아아악!]
세이렌 영역에서 밝은 빛이 터져 나와 기에스티오의 몸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아, 안, 돼…… 끄, 흐윽…….”
뒤편에 누워있던 파멜라가 그 장면을 보고 힘겹게 말했다.
‘지금 끝내야 한다.’
기에스티오에게 흡수되는 힘의 근원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기에 당장 끝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쿠아앙! 콰쾅! 쾅!
루카스가 미친 듯이 빠른 속도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크아악!]
하지만 기에스티오는 공격을 막지도 않은 채 기를 모으듯 몸을 웅크리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미친 새끼.”
광기에 찬 기에스티오의 눈을 마주한 루카스의 몸에 소름이 돋아났다.
지금 루카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 뿐이었다.
‘제발 죽어라.’
-콰쾅! 콰콰콰쾅!
얼마나 지났을까.
온갖 저주와 함께 쏟아붓는 공격에 무한에 가깝던 마나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독한 새끼.”
그동안 기에스티오의 몸에 흡수되던 새하얀 빛 역시 사그라들었다.
[나는…… 나는 신이다.]
넝마가 되어 알아볼 수 없었던 기에스티오의 몸 역시 회복이 되어 온전해지고 말았다.
[네 놈 따위가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지만 잘렸던 지느러미와 맨 처음 공격을 감행했던 목 부근은 회복되지 않았다.
‘신력.’
아모레의 신력을 담아 공격했던 곳들이었다.
-콰쾅! 콰아앙!
그 뒤로도 몇 번이나 공격을 퍼부었지만, 이제 더 이상 파괴력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결국 지쳐버린 루카스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기에스티오를 올려봤다.
[다 했느냐?]
거친 숨을 내뱉는 루카스를 보며 기에스티오가 가소로운 듯 웃었다.
‘진짜 끝인가.’
도대체 그가 준비한 것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인간으로서 얻은 힘치고는 대단하구나.]
마치 신하를 치하하듯 하는 기에스티오의 말투가 거슬렸다.
“지랄하네.”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은 루카스가 다시 한번 힘을 끌어모았다.
[그래. 끝까지 발악해 보아라.]
“아, 안, 돼요…….”
“…….”
기어서 온 건지 제 바지를 붙잡은 채 겨우 쥐어 짜내는 파멜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 을, 흡수…….”
띄엄띄엄 힘겹게 하는 말이었지만, 단박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크하하하!]
그 모습을 보며 기에스티오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웃어 젖혔다. 아주 웃기다는 듯이.
‘젠장. 그런 거였나.’
하얀빛이 기에스티오에게 흡수되던 때부터 미친 듯이 쏟아부은 공격.
그러자 기에스티오의 몸이 회복되었다.
‘하얀빛이 원인이 아니었다니.’
그 뒤로 제 공격이 잦아들자 하얀빛 역시 잦아들었다.
‘저놈을 도와준 꼴이 되었구나.’
의도치 않게 기에스티오의 회복을 도운 꼴이 되었다.
[그래. 네 놈의 힘이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욕도 아까웠다.
[이젠 쓸모가 없겠구나. 어쩌겠느냐? 도망이라도 치겠느냐?]
기에스티오가 아주 커다란 선심이라도 쓰듯 루카스를 향해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아니.”
루카스가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도망치지도 못할 것이다.’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주변에 겹겹이 둘러진 엄청난 결계를 말이다.
“죽지 뭐.”
저깟 놈에게 주신의 권능을 내어주느니 당장 목숨을 끊어 주신의 권능을 제가 받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섰다.
[네놈이 목숨을 끊어도 권능은 내 것이 될 것이다.]
루카스가 마지막 남은 마나를 모아 제 목에 겨누자 기에스티오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지랄하지 마라.”
저건 거짓이다.
숨을 한 번 들이켠 루카스가 응축된 마나를 제 목에 대고 터트리려던 그때.
“……!?”
누군가 제 손을 턱 하고 붙잡았다.
***
죽을 고비를 넘긴 바딤은 바깥으로 나와 한참을 생각했다.
‘죽게 둬서는 안 될 텐데.’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저 생을 제대로 끝내지 못하면…….’
바딤이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 물고기 놈.’
기에스티오가 벌인 짓을 떠올리니 절로 혀가 쯧, 하고 차졌다.
영악한 놈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짓까지 벌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어쩜 그리 담대한지.’
순진무구한 표정을 하고 뒤에서 저런 짓들을 벌였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떼잉!”
그곳을 빠져나올 때까지만 해도 결계가 그리 두텁지 않았지만, 지금은 더욱 두터운 결계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드래곤들을 겨냥하고 설치한 결계이니 더욱 들어서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아모레를 부를까.’
하지만 아모레 역시 지금 아구아를 감시한다고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아구아까지 날뛰면 정말 답이 없을 텐데.’
물고기와 물의 신이 작당하고 나쁜 짓을 벌였다.
그런데 물고기인 기에스티오가 스스로 신이 되겠다며 저런 짓을 벌인 판국에 진짜 신인 아구아까지 합세한다면 끔찍할 것이다.
“이걸 어쩐다…….”
아직 찾아야 하는 물건을 찾지도 못했다.
아니, 찾지 못했다기 보다는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옳았다.
“게다가 맛있는 게 너무도 많은데…….”
몸을 얻고 맛본 음식들이 너무도 맛있었다.
“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바딤이 결국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세차게 한번 끄덕였다.
“그래. 결심했다.”
지금은 어찌 되었건 기에스티오를 막는 게 중요했다.
‘음식은 아깝지만…….’
언젠가 또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해야 했다.
“떼에잉!”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제 성질을 표출한 바딤이 어딘가로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파앗!
바딤이 도착한 곳은 거울이 놓여있는 동굴이었다.
“에휴.”
한숨을 푹 내쉰 바딤이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손을 가져댄 바딤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κράτος.]
바딤의 입에서 노래하듯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 나왔다.
[ἰσχύς ύος]
거울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ἐπιστρέφω ἄρχων]
바딤이 눈을 뜨자, 그의 눈동자에서 샛노란 빛이 번뜩였다.
-파아아앗!
밝은 빛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바딤이 사라졌다.
***
제 손을 붙잡은 이가 누구인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루카스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누구냐.”
처음 마주하는 얼굴과 기운.
그는 드래곤도 인간도 다른 어느 종족도 아니었다.
“누구긴 누구인가! 나일세!”
신력이 느껴졌으나 또 신은 아니었다.
[같잖은 것이 하나 더 늘었구나.]
기에스티오의 창끝이 둘을 향했다.
[죽을 자리를 찾아서 말이지.]
기에스티오가 팔을 뒤로 천천히 젖혀 창을 내던지려던 때였다.
“스읍. 어디 감히.”
의문의 사내가 기에스티오를 향해 팔을 뻗었다.
[크윽!]
그러자 기에스티오의 팔이 무언가에 묶인 듯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누구십니까.”
그 모습을 본 루카스 역시 한 걸음 슬쩍 물러나며 물었다.
“쯧쯔. 아둔한지고.”
[네 놈은 누구냐!!!]
분한 듯 소리치는 기에스티오를 향해 그가 다시 손을 뻗자, 기에스티오의 입이 꾹 다물렸다.
[으읍! 으으읍!!!]
“어디 감히! 물고기 주제에 말을 그따위로 하느냐!”
금안의 사내가 버럭 소리치자, 루카스의 몸이 움찔했다.
“……설마.”
“그래.”
사내가 싱긋 웃더니 유려한 몸짓으로 물살을 갈랐다.
-쿠아아아아아…….
사내의 손짓에 따라 갈라진 물살이 기에스티오를 빙 둘러 돌기 시작했다.
[ἐπιπλήσσω]
사내의 입에서 노랫말 같은 맑은 음성이 흘러나오자.
-콰득, 콰드득!
기에스티오의 몸이 기이하게 비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