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희생 (1)
폭풍같던 전쟁도 어느새 끝을 보이고 있었다.
마왕은 죽었으며 마신 역시 소멸했다.
이제 남은 건 마족들이 마계로 안전히 이주하는 것과 배신자를 처단하는 일만 남았다.
“바딤님.”
루카스는 레어에 남아 호박파이를 연신 먹어 치우는 바딤의 곁에 섰다.
“오. 루카스.”
바딤의 입가에 덕지덕지 붙은 파이 가루가 그의 행복한 기분을 대변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가지를 더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무엇인가?”
바딤은 루카스와 대화 중에도 파이를 먹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렇게 맛있나.’
그걸 지켜보던 루카스 역시 한입 하고싶은 충동이 들 만큼 맛있게 먹어 치우는 바딤의 모습에 침을 한번 꼴깍 삼킨 루카스가 말을 이었다.
“사라진 세이렌들을 찾는 것을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세이렌?”
“예.”
“내가 아는 세이렌과 같다면 그들 역시 물에 사는가?”
“예.”
그가 살던 세상에도 역시 세이렌이 있었던 듯했다.
“강에?”
“아뇨. 바다입니다.”
조금은 달랐지만 말이다.
“흐음. 바다라면 꽤 넓을 텐데.”
바딤이 손에 들었던 파이 조각을 내려두고 손을 탁탁 털었다.
“그들이 어디쯤에 있는지는 혹시 아는가?”
“예. 알고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조금은 수월할 테니 말이야. 하지만 마음먹고 숨어버린 자들인지라 찾는 게 조금 어려울 수도 있겠네.”
그러자 루카스가 아공간을 열어 수정구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음?”
“그곳에 머물던 이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취했었습니다. 강력한 보안 마법으로 얽혀있어 저는 풀지 못했지만, 바딤님이시라면 가능하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번에 아구아와 기에스티오의 수작질을 알려줬던 이였다.
‘그 이후로 연락이 끊겼지만…… 어쩌면.’
그들이 원래 살던 거처에서 사라진 뒤에 왔던 연락이니 어쩌면 찾을 수도 있었다.
“오. 그래. 내가 한번 보도록 하지.”
수정구를 받아 든 바딤이 심각한 표정으로 걸려있던 마법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흐으음…….”
바딤의 미간이 잔뜩 구겨지자, 루카스 역시 덩달아 미간을 구겼다.
‘잘 안되는 건가.’
한숨을 푹 쉰 바딤이 수정구를 탁자 위에 탁 내려두고는 입을 뗐다.
“자네들의 수준이 어디인지 잘 알았네.”
“……?”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오르는 숫자들을 보며 루카스는 놀란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다.
“쯧. 이깟 것도 풀지 못해서야.”
루카스가 풀어내려고 한참을 끙끙거렸던 수식이었다. 몇 번을 꼬았는지 풀어내도 풀어내도 끝이 없었는데, 바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아 수식을 풀어냈다.
“……대단하십니다.”
사실 대단하다는 말로는 조금 모자랐다.
“쯧쯔.”
그와 동시에 바딤의 말대로 본인의 수준이 어디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저들은 얼마나 발전한 건가.’
나름 지상 최강의 생명체라며 군림하고 살았는데, 그 모든 세월이 허상처럼 느껴졌다.
또한 허무했다.
‘우린 아무것도 아닌 것을.’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라도 본 기분이었다.
“뭐 하고 있나?”
바딤이 루카스를 보며 턱짓했다.
“당장 가지 않고.”
“아.”
바딤이 무어라 속삭이듯 말하자 앞에 하얀빛을 뿜어내는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텔레포트를 쓰지 않으시는군요.”
왜 굳이 게이트를 열었는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건 사실 온전한 이동 방법이 아닐세. 보게나.”
바딤이 게이트를 가리켰다.
“앞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은가.”
게이트는 마치 문이 열린 것처럼 반대편의 상황이 보이고 있었다.
“……그렇군요.”
역시나 한 단계 더 발전한 마법에 루카스가 감탄을 뱉었다.
“가지.”
바딤이 앞장서서 게이트를 향해 걸어 들어갔다.
***
“하하! 아주 과격한 아가씨였군요!”
파멜라의 몸을 휘감은 검은 회오리가 점점 힘을 키워갔다.
“죽여버릴 거라고 했어.”
파멜라의 투명한 분노에도 기에스티오는 그저 즐겁다는 듯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었다.
“진정하세요. 이곳에서 이렇게 날뛰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요?”
기에스티오의 말이 옳았다. 이곳은 기에스티오가 사는 곳이었으며, 그가 왕으로 군림하는 세이렌의 왕국이었다.
그런 곳에서 날뛰어봤자 좋지 않다는 것을 파멜라 역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니 말해. 건들지 않겠다고.”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제 목숨 따위가 아니었다.
제 동생인 폴라의 목숨이 위협받고 있었다.
‘저 간악한 자식에게 협박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어.’
기에스티오가 한 손을 뻗어 제 옆에 놓인 창을 집어 들었다.
“파멜라양.”
“…….”
“당신 역시 내게 중요한 이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아두어야 합니다.”
기에스티오의 창에서 푸른 기운이 뻗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신을 상대하는 데엔 내 힘을 굳이 쓸 필요도 없지요.”
당장이라도 기에스티오를 덮칠 듯 일렁였던 파멜라의 기운이 조금 수그러들었다.
“당신은 똑똑한 아가씨가 아닙니까. 그러니 잘 생각하세요.”
파멜라의 머릿속에 비상벨이 울렸다.
‘생각해. 파멜라.’
가장 나은 방법을 생각해 내라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폴라의 목숨이 위험하니까. 지금은…….’
파멜라의 힘이 조금 더 수그러들었다.
“그래요. 그래. 잘 생각했어요.”
그러자 기에스티오가 창에 서렸던 제 기운을 조금씩 누그러뜨렸다.
“……내 동생은 내버려 둬요.”
“오! 물론입니다.”
“믿어도 되나요?”
지금은 이 방법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아무리 제게 마왕이 남겨둔 힘이 있다고 해도 기에스티오를 이길 수 있는 확률이 너무 희박했다.
게다가 누군가와 제대로 싸워본 적도 없는 파멜라라면 더욱 그러했다.
“그럼요.”
기에스티오가 아직 손에 창을 꼭 쥔 채 대답했다.
‘별거 아니군.’
파멜라가 저를 속이려 애를 쓰는 모습이 처음엔 꽤나 재미있어 내버려 뒀었지만, 이젠 질렸다.
그게 아니었다면 파멜라가 언제까지 저를 속이는지 두고 봤었겠지만, 한번 시험해 보고 싶었다.
그녀가 가진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린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말이다.
“당신 동생을 해쳐서 내가 얻는 것이 없으니까요.”
“…….”
“그러니 나를 속이는 발칙한 짓은 이제 그만두는 게 좋습니다. 파멜라 양.”
파멜라가 분한 듯 이를 꽉 문 채 고개를 숙였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기에스티오님!”
세이렌 하나가 급박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침입자입니다.”
그 말을 들은 기에스티오가 창을 고쳐 쥐고는 파멜라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재미있는 일이 또 일어나고 있나 보군요.”
***
세이렌들 중에 전투력을 갖춘 이들은 이미 바깥에서 루카스와 대치 중이었다.
“감히…….”
루카스의 분노가 터져 나올 때마다 차가운 바닷물은 더욱 차가워졌으며, 곳곳에 얼어붙기 시작한 물이 그들의 움직임을 묶었다.
“기에스티오는 어디에 있지?”
더 이상 불필요한 희생은 막고 싶었다.
“당장 물러나십시오!”
발치에 얼어붙기 시작한 물을 본 세이렌이 꼬리를 빠르게 저으며 소리쳤다.
“기에스티오님께서는 여기에 안 계십니다!”
그들 역시 어떻게든 싸움은 피하고 싶었던지 루카스를 먼저 공격하지 않았다.
“웃기는군.”
그들 뒤에는 온전하게 옮겨진 영역이 있었고, 투명한 방어막이 그들의 영역을 견고히 방어하고 있었다.
“그러니 어서 물러나세요!”
세이렌 하나가 날이 선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보게 루카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바딤이 조용히 루카스를 불렀다.
“저곳을 그냥 부수면 되지 않는가?”
“그건 안 됩니다.”
루카스 역시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저곳에 머물고있는 드워프들이 문제였다.
“저곳엔 지켜야 할 이들이 있습니다.”
“흠…… 자네 말대로라면 기에스티오라는 자가 그들을 인질로 삼고도 남을 자인 것 같던데.”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하고 있던 문제였다.
“기에스티오를 불러와라.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여주마.”
이건 진심이었다. 그들과 대치하는 것도 이젠 한계였다.
“그렇다면 저희도 어쩔 수 없이 당신을 공격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루카스의 앞을 막아선 수십의 세이렌들이 마법을 영창하기 시작했다.
‘저들 역시 전사다.’
오랜 세월을 바닷속에 살며 수련을 거듭한 이들이었다.
정령술과 마법 모두에 능했으니 저들 모두를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겠군.”
루카스의 양손에 하얀 구체가 생겨났다.
“더 이상의 희생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으나…….”
-고오오오오오.
양손에 생겨난 구체에서 강한 회오리가 일기 시작하자, 세이렌들이 몸을 움츠렸다.
“희생을 감수하는 수밖에.”
-콰콰콰쾅!
그와 동시에 세이렌들 역시 주문 영창을 끝냈다.
-콰아아앙!
그러자 루카스와 세이렌들의 마법이 맞붙으며 커다란 폭발을 일으켰다.
“하하하! 이렇게 찾아오시다니. 역시 대단하십니다.”
폭발이 끝남과 동시에 큰 소리로 울리는 목소리.
“기에스티오.”
해맑은 그의 웃음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이것 참! 이렇게 만나다니. 이것도 인연이 아닙니까.”
뻔뻔한 그의 태도에 헛웃음이 났다.
“죽여주마.”
더 이상의 대화는 불필요했다.
루카스의 몸에서 거대한 마나의 소용돌이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 옆에 선 바딤은 스스로를 보호할 힘을 충분히 갖췄으니 공격의 강도를 조절할 필요도 없었다.
-쩌적. 쩌저적!
바닥에서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바닷물이 순식간에 범위를 넓혀 기에스티오를 향해 빠르게 쏘아졌다.
-콰지지직! 콰직!
기에스티오 앞에서 막힌 얼음 조각들이 부서져 휘날리고.
-쩌저적!
부서져 휘날렸던 얼음 조각들이 다시 범위를 넓혀 기에스티오의 주변을 모두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말 대단한 실력입니다.”
기에스티오는 얼음 속에 갇힌 채로 입을 놀렸다.
“닥쳐라.”
루카스가 기에스티오를 감싼 얼음 조각들에 힘을 응축시켰다.
“하하! 제가 죽는다면 안에 있는 이들 역시 무사하지 못할 텐데요.”
얼음 속에서 기에스티오의 해맑은 목소리가 웅웅 울려 퍼졌다.
“…….”
어쩐지 아무런 저항도 없이 순순히 당해준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파멜라. 그 계집도 이곳에 있습니다. 제가 죽는다면 안에 있는 드워프들과 함께 파멜라 그 계집도 저와 함께 길동무가 되어주겠군요.”
“야. 이런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개자식아.”
루카스의 입에서 걸걸한 욕지거리가 터져 나오자, 옆에 선 바딤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하! 입이 험하시군요.”
“넌 내가 이야기했지?”
“……?”
“내가 아는 가장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여주겠다고 말이야.”
기에스티오에게 천천히 다가서는 루카스의 입꼬리가 한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나는 오천 년이라는 시간 동안 약속의 종족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네.”
-콰콰쾅!
루카스를 막아서던 세이렌들이 순식간에 저만치 날아가 처박혔다.
“크, 크억!”
처음 겪어보는 생경한 고통에 기에스티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에겐 안타깝지만…….”
“커어억!”
“어쩔 수 없는 일 아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