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바딤 (6)
세이렌은 하나의 영역에서 생활한다.
엘프나 여타 다른 종족들처럼 부락이 나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찾았다.’
숨어버렸던 세이렌을 찾았다.
게다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오기라도 한 것인지 육지에서 떡하니 보이는 곳에 출몰하기까지 했다.
“잡아 죽여달라는 뜻이군.”
안 그래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던 이들이었다.
게다가 기에스티오의 만행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급할 건 없다. 저들이 어디 있는지는 알았으니 조만간 찾아가 모두 뒤엎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차피 드워프들을 건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소중한 자원이니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은 바딤도 깨어난 상황이지 않은가.
“조만간 모두 죽여주지.”
바딤이 게이트를 열어 마족들을 마계로 내보내는 순간 모두 수장시킬 것이다.
특히 웃는 낯으로 제 등에 칼을 꽂은 기에스티오는 더더욱 곱게 보내줄 수 없다.
루카스가 바다를 한 번 더 눈에 담은 뒤 발길을 돌렸다.
***
바딤에게 줄 먹을거리들을 바리바리 사서 돌아온 루카스가 바딤을 찾았다.
‘저기 있군.’
바딤은 혼자 레어 가운데 우뚝 서있었다.
“바딤님.”
루카스가 오는 것도 몰랐던 것인지 화들짝 놀란 바딤이 뒤를 돌아봤다.
“오오. 그래.”
루카스를 보며 눈을 빛내는 바딤.
‘이거 뭐 사탕 기다리던 어린 애도 아니고.’
바딤은 사 온 것을 얼른 내놓으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기까지 했다.
“연구는 잘 되어가십니까.”
“연구라고 할 거까지도 없네. 그저 이 세계에 맞춰 수식만 좀 다시 쓰면 되는 일인 것을.”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인 바딤이 허공에 손을 휙 저었다.
-파아앗!
그러자 검은빛의 작은 게이트가 허공에 생겨났다.
“……벌써 만들어내신 겁니까.”
“뭐 크기는 토끼 한 마리 겨우 들어갈 크기지만 말일세. 분명 마계로 통하는 것은 맞을 걸세.”
바딤이 게이트를 보며 싱긋 웃었다.
“이제 크기만 키우면 되겠어. 사람 하나쯤은 들어갈 수 있어야 할 거 아닌가?”
“대단하시군요.”
앨라스와 밤을 꼬박 새우며 게이트를 열고자 했지만, 이 작은 것 하나조차 만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바딤은 제가 잠시 나갔다 오는 동안에 이걸 해냈다. 아주 쉬운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얼마나 걸리시겠습니까?”
“어디보자…… 한 이틀쯤이면 충분하겠네.”
속도도 대단했다.
“그보다 얼른 주게. 오랜만에 머리를 썼더니 달달한 게 당겨서 말이야.”
바딤은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손을 척 내밀었다.
“아.”
만들어진 게이트를 보며 감탄하느라 잠시 잊었던 루카스는 바딤을 테이블 쪽으로 이끌었다.
“기대되는구먼.”
바딤은 이제 손바닥까지 열심히 마주 비비며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하하.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루카스가 아공간을 열기 전 먼저 마법을 써 찻주전자에 따뜻한 물을 채웠다.
“시간이 없어 최상품은 구하지 못했지만, 이것 역시 좋은 꽃차입니다.”
“오오! 아까 마셨던 것과는 달리 이건 또 보라색 꽃이로군!”
바딤은 마른 꽃잎이 물에 풀어지는 것을 보며 손뼉을 짝짝 쳤다.
‘귀여운 면이 있군.’
아무래도 지금 바딤의 외모가 이십대쯤 되어 보여서 더욱 그런 것도 있었다.
영롱한 주홍빛이 감도는 머리칼과 그에 대비되는 잿빛 눈동자가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취향하곤.’
게다가 얼굴은 또 굉장한 미남자였으니 그가 먹을 걸 보며 손뼉을 치는 게 귀여워 보일 수 있었다.
“그게 호박파이인가!?”
루카스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자를 여는 것을 본 바딤이 눈을 커다랗게 뜨며 물어왔다.
“네. 아주 맛이 좋습니다.”
루카스가 꺼내 든 호박파이 한 조각을 조심스레 접시에 옮겨 담았다.
“세상에나!”
호박파이의 잘린 단면을 본 바딤이 입을 떡 벌렸다.
“영롱하군. 아주 영롱하고 예쁜 빛이야.”
그는 접시를 들어 제 눈앞에서 이리저리 돌리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얼른 드셔보시지요.”
그런 바딤의 반응에 루카스 역시 기대가 되었다.
‘얼마나 맛있어할까.’
그가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본다면 기쁠 것만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러지!”
군침을 꼴깍 삼킨 바딤이 얼른 자리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먼저 차를 한 모금 해야지.”
찻주전자를 들어 잔에 차를 따라낸 바딤이 코를 벌름거리며 향을 음미했다.
“흐으으음~”
“하하하.”
그 모습을 보니 루카스 역시 웃음이 났다.
“크으! 아주 맛이 좋군. 엄청난 꽃차야. 향을 들이킬 땐 마치 꽃밭에 선 것 같더니 한 모금 들이켜니 내가 꽃이 된 것만 같군.”
“다행입니다.”
바딤이 들뜬 표정으로 포크를 집어 들었다.
“오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아주 부드럽군.”
파이에 포크를 찔러 넣는 바딤의 얼굴이 잔뜩 상기되었다.
“으으음! 세, 세상에나!”
고작 호박파이 한 입을 했다고는 믿을 수 없는 반응에 루카스 역시 절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이건 혼자서만 먹을 수 없는 맛이네! 얼른, 얼른 자네도 앉아서 좀 들게!”
“저는 괜찮습니다.”
“어서 들래도! 이거 진짜 맛있대도!”
“저는 아는 맛입니다.”
“이, 이런! 어떻게 아는 맛을 거부할 수가 있는가! 나는 믿을 수가 없군.”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리는 바딤의 표정이 볼만했다.
“더 있으니 마음껏 드세요.”
루카스가 아공간에서 수많은 파이 상자와 함께 꽃차가 든 상자, 그리고 꿀통을 꺼내 들자 바딤의 얼굴이 더더욱 상기되기 시작했다.
“자, 자네…….”
이제는 감동받은 표정이었다.
“나를 위해서 이 많은 것들을 손수 사온겐가?”
곧 눈물이라도 흘릴 듯 초롱초롱 빛나는 바딤의 눈이 부담스러웠지만, 루카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에게 감동을 안겨줘서 나쁠 건 없었기 때문.
“정말, 정말 감동했네. 나 바딤 자네와 영혼의 계약이 없더라도 내 힘을 다해 도왔을 걸세!”
“하하. 고작 먹을 것입니다.”
“고작 먹을 거라니!!!”
바딤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루카스가 흠칫 놀라 그를 바라봤다.
“생물이 살아가는 데 있어 필수인 것이 아닌가! 싫어도 살려면 먹어야 하는데 맛있는 거라면 얼마나 더 좋은 일이냐는 말이야!”
마치 먹을 것에 한이라도 맺힌 사람 같았다.
‘드래곤이 먹을 게 없었을 리는 없고…….’
바딤이 살던 세상에도 분명 먹을 건 있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맛있는 것들 말이다.
그런데 어째서 저렇게 어릴 때부터 굶주린 인간처럼 예민하게 구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크흡! 게다가 새로운 맛있는 거라니…… 나는 여기서의 삶이 끝날 때쯤 다른 차원으로 또 가고 싶을 정도일세. 그곳에도 또 맛있는 것들이 있지 않겠는가!”
“아.”
그저 바딤은 먹을 것에 진심인 용이었다.
“게다가 아직 내가 이 세상에서 먹어보지 못한 게 얼마나 많겠는가! 나는 정말이지 너무 행복하다네.”
바딤이 다시 한번 호박파이를 크게 잘라 입에 가져가며 감탄을 내뱉었다.
“흐으으음~ 정말이지 천상의 맛일세.”
“다행입니다.”
종잡을 수가 없는 용이었다.
버럭 화를 냈다가도 호박파이 한입에 저리도 행복해하다니.
“게다가 이렇게나 많이 사오다니. 자네는 정말 좋은 사람일세.”
“별말씀을요.”
“오! 내게 좋은 생각이 있네만…….”
바딤이 돌연 목소리를 줄이며 얼굴을 붉혔다.
“……?”
“아니, 별 뜻은 없고…… 그저 이렇게나 파이와 차가 많은데 나만 먹기에 조금 그렇기도 하고…….”
자꾸만 말끝을 흐리는 게 이상했다.
“말씀하시죠.”
대충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된 루카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
“그…… 성미가 괜찮은 실버 드래곤을 불러 같이 먹으면 어떨까하고 말일세.”
“…….”
“그, 그게 아니라면…… 오, 그래! 그 아까 보았던 골드 일족 아이를 불러 호박파이를 좀 나누어 주는 게 어떻겠는가?”
루카스는 자신을 올려보며 해맑게 묻는 바딤의 얼굴을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나가 사라졌더니, 다른 하나가 나와 나를 괴롭게 하는군.’
작게 한숨을 내쉰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혼자 드시는 게 어떻습니까. 다음에 제가 실버 일족과 자리를 한번 만들어 보지요.”
“쳇.”
루카스의 말에 바딤의 주둥이가 댓발이나 튀어나왔다.
‘저렇게나 뻔뻔하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귀까지 붉어져 말을 우물쭈물 하던 이는 어디 가고, 이제 입이 튀어나와 구시렁거리는 꼴을 보니 또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서 드십시오. 갈 길이 멉니다.”
“알겠네! 알겠어!”
버럭 소리친 바딤이 신경질적으로 파이를 푹푹 찔렀다.
“흥. 파이 좀 나누어 먹겠다는데 거참!”
“다음엔 모라인이라는 왕국에서 나는 체리 타르트를 사다 드리겠습니다.”
“……그건 또 뭔가?”
“그것 역시 천상의 맛이라 소문이 자자하지요. 타국에서도 그 타르트를 먹겠다 찾아오니 말입니다.”
“그게 정말인가!”
“예. 게다가 이곳은 오랜 내전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귀족들과 왕가가 나서서 보호하는 가게입니다. 그만큼 맛있다는 뜻이지요.”
“나라가 나서서 보호하는 타르트 가게라니! 무척이나 기대가 되는군!”
조금 전까지 구시렁거렸던 바딤은 또 금세 사라졌다.
‘쉽군.’
바딤을 조련하는 방법을 완벽하게 터득해버린 루카스가 만족스레 웃었다.
“예. 그러니 얼른 드시고 게이트를 여셔야지요. 지난번 전쟁으로 맛있는 집들이 피해를 많이 입었으니 말입니다.”
순식간에 바딤의 눈에 투지가 깃들었다.
“알겠네. 나만 믿게.”
***
루카스의 먹거리 조공(?)으로 인해 게이트는 하루만에 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어떤가!”
“대단합니다.”
루카스 역시 하룻저녁 동안 바딤의 수발을 들며 옆에서 보고 배운 것이 참 많았다.
‘응용력이 대단해.’
바딤의 마나는 제가 가진 것보다 아래였지만, 그 마나를 알차게 활용하는 것도 대단했을뿐더러 기존에 있던 수식을 응용하고 변형하는 능력이 대단했다.
“자. 그럼 다음 일을 시작해야지 않겠는가?”
바딤이 루카스를 보며 싱긋 웃었다.
“어서 약속했던 체리 타르트를 가져오게.”
“예. 물론이지요.”
루카스 역시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암. 그럼. 체리 타르트 가게 사장이라도 잡아다 줘야지.’
제 키만큼 커진 게이트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을 생각하자 루카스의 마음이 순식간에 낮게 가라앉았다.
‘해야겠지.’
야스탄을 만나 마무리를 지을 시간이었다.
***
루카스는 전에 야스탄을 만났을 때 받았던 수정구 좌표로 연락을 취하는 중이었다.
수정구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루카스는 마음이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마치 사형선고를 내리는 기분이군.’
야스탄의 목숨 하나로 모두를 구할 수 있겠지만, 루카스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마음이 무거웠다.
-파앗.
어두워졌던 수정구가 다시 밝아지며 건너편에 인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야스탄.”
[…….]
점차 수정구 속에 든 인영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루카스는 제 눈을 믿지 못해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네가 왜.”
[하하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 그때 바다에서 뵀으니 그리 오랜만은 아닌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