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바딤 (5)
루카스가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바딤은 고개를 끄덕이기도, 분노하기도 했다.
“그래. 많은 일들이 있었구먼.”
바딤이 마지막 남은 생강 쿠키 한 조각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도와주면 되겠나.”
드디어 바딤의 입에서 원하던 말이 나왔다.
“게이트를 여는 것을 도와주십시오.”
“흐음…… 게이트라.”
“예.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마족들이 타고 넘어왔던 게이트와 같은 게이트를 열고 싶습니다. 그들이 이 땅 위에서 함께 살아간다면 더욱 좋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분노를 삭이지 못한 드래곤 중 누군가가 해코지를 할 가능성이 높겠지.”
바딤의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그 게이트라는 게 뭔지 먼저 좀 봐야겠구먼. 자네 말대로라면 성유물로 만든 것 같던데. 아무리 나라도 신을 능가하는 힘은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열려있는 게이트는 없었다.
때문에 루카스가 무어라 입을 열려던 때였다.
“지금 그 게이트가 없다는 것쯤은 나도 아네. 그러니 그 게이트가 열렸다는 곳으로 안내하게.”
바딤이 쿠키 가루가 묻은 손을 탁탁 털어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실로 대단한 실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아무리 최근에 게이트가 열렸던 곳이라고 한들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그곳에 남아있는 마나를 추적한다는 이야기인가……?’
직전에 텔레포트를 하거나 한다면 그곳을 추적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시전한 상대가 흔적을 아무것도 지우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열렸다가 사라진 지 한참이나 지난 게이트를 추적한다니?
루카스는 아직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가시죠.”
루카스가 팔 한 쪽을 슥 내밀자, 바딤이 눈을 흘기며 미간을 찌푸렸다.
“에스코트라도 하겠다는 건가?”
“텔레포트를 하려는 겁니다.”
“어이가 없군. 자네에게 결속을 걸면 되니 그냥 가기나 하게.”
“…….”
마법의 차이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결속을 건다는 이야기를 이렇게나 쉽게 하다니.’
이쪽에서도 가능하긴 했지만 조금 복잡하고 상대가 동의를 해줘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가 먼저 텔레포트했다.
***
델러다칸 한 구석에 도착한 루카스가 주위를 살폈다.
바딤이 잘 따라왔는지 보려는 것이었다.
“여긴가?”
“!”
양옆을 살피고 아직 뒤를 돌지도 않았던 때였다. 뒤에서 바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들짝 놀란 루카스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놀라긴.”
루카스의 반응에 피식 웃은 바딤이 놀리듯 제 몸을 한번 들썩였다.
“…….”
참 할말을 잃게 만드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었다.
“흐음. 그래. 느껴지는군.”
눈을 지그시 감은 바딤의 입에서 무어라 쉭쉭 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고대어인가.’
하지만 제가 아는 고대어와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었다.
‘저주?’
저주한다는 뜻의 고대어가 슬쩍 들려오자, 루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저쪽이 조금 더 최근 것인가 보군.”
바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거지?’
루카스는 그 뒤를 따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딤이 쓴 마법을 느껴보았을 때 그건 분명 탐색 마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쓰인지 오래된 마법을 추적하는건지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나중에 물어봐야겠군.’
자존심이 조금 상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딤은 저보다 조금 나은 정도가 아닌 한참 대단한 존재이니 말이다.
“여기로군.”
바딤이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다시 무어라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파스스스스…….
“세상에.”
저도 모르게 입밖으로 감탄이 터져나오고 말았다.
땅 위로 주문이 쓰였던 흔적들이 가느다란 금빛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쯧. 이런 것도 하지 못하는 하등한 드래곤이라니.”
바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렇게 마나가 충만한 곳에 살면서도 그러면 어쩌자는 말인가?”
자존심을 벅벅 긁는 말에도 루카스는 그저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했다.
“그래. 자네 말대로 신들의 유물이 대거 쓰였군. 그뿐 아니라 다른 아티팩트들도 많이 쓰였어.”
“예.”
“하지만 따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닐세. 몇가지만 갖추어 진다면 말이야.”
그에 루카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세이렌들이 가진 유물을 달라고 하는 건…….’
바딤이 루카스의 심각한 얼굴을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잘 듣게. 종류가 좀 많거든.”
“예.”
바딤의 말에 루카스는 몸을 앞으로 하며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솜씨 좋은 장인의…….”
바딤이 말을 질질 끌었다.
“장인의……?”
“호박파이 두 개와 버터 쿠키 한 상자. 그리고 질 좋은 꽃차와 아까 먹었던 쿠키에 쓰인 꿀이 필요하겠군.”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
“하하하! 그래야 힘이 나서 얼른 게이트를 열어줄 것 아닌가!”
“알겠습니다.”
바딤의 장난에 루카스는 김이 푹 빠져버렸지만, 그래도 다행이었다.
“당장 구해다 드리지요.”
루카스가 당장 몸을 돌려 바딤이 말한 것들을 구하러 가려던 때였다.
“아! 그리고 하나 더.”
“……?”
이번엔 또 뭔가 싶어 루카스가 고개를 돌렸다.
“아까 말했던 그 실버 일족 처자도…….”
바딤이 볼을 붉히고는 제 머리를 긁적였다.
‘저런 변태같은 게!’
차마 입밖으로 내지는 못한 마음의 소리가 아우성쳤다.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하지만, 뭐 우리에게 그게 대수인가? 핫! 핫! 핫!”
크게 웃어 젖히는 바딤의 배가 꿀렁였다.
“호박 파이를 먼저 구해다 드리지요.”
루카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이고는 얼른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호박 쿠키 가게를 통째로 옮겨다 줘버릴까 보다!’
***
루카스가 떠난 자리에 선 바딤의 얼굴이 퍽 심각했다.
‘흠…….’
루카스에겐 실없는 소릴 했지만, 사실 그가 읽은 것은 게이트의 수식뿐만이 아니었다.
‘시전자 중 하나가 죽었군.’
바딤이 다시 한번 찬찬히 기운을 읽어냈다.
‘마왕과 세이렌의 왕인가.’
분명 중심이 되는 시전자가 둘이 있었는데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니 마왕 쪽이 죽은 듯싶었다.
“쯧. 아주 얍삽한 놈이로군.”
바딤이 혀를 한번 쯧, 차고는 주변을 다시 둘러봤다.
“흐음…….”
물론 시간이 좀 걸리긴 하겠지만 게이트를 여는 건 어렵지 않을 듯 보였다.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것도 아니니 뭐.’
같은 차원 아래에 있는 마계로 가는 문쯤이야 며칠이면 열 것이다.
‘정확도가 문제겠군.’
한번에 많은 이들을 옮길수록 정확도가 떨어질 것이다.
‘한번 가볼까.’
바딤이 주변을 한번 슥 살핀 뒤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
“어서오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루카스는 바딤에게 천상의 맛을 선사하기로 했다.
‘요즘들어 가장 맛있는 곳은 바로 여기지.’
땅의 정령사가 키워냈다는 호박으로 만든 엄청난 호박파이.
루카스는 지금 이것을 위해 생전 오지도 않던 디바노스까지 와있는 상태였다.
“호박파이가 몇 개나 남아있죠?”
루카스가 최대한 상냥하게 물었다.
“음~ 아직은 많이 남아있어요. 몇 개나 드릴까요?”
“전부 주세요.”
“……전부요?”
“예.”
“어, 음. 지금 남은 게…… 대략 서른 개가 넘는데요?”
점원이 루카스의 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예. 다 주세요.”
어디 한번 먹고 배터져 죽어보라는 심보였다.
“음…… 예. 알겠습니다.”
루카스가 주머니를 열어 금화 하나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모두 포장해 두세요. 다른 곳에 들렀다 찾으러 올 테니 말입니다.”
“아, 옙! 알겠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발품을 파는 기분이었다. 아니, 오랜만이 아니라 처음인 기분이다.
‘고작 먹을 걸 사려고 이 난리를…… 아니, 아니지.’
바딤이 아니었다면 모든 마족들을 죽여야 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 이쯤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그래도 디바노스는 좀 낫군.’
다른 곳들은 아직도 쑥대밭이었지만, 디바노스는 피해가 없는 편이었다.
가장 아래쪽에 있는 섬이기도 했고, 디바노스는 휴양지였기 때문이다.
‘굳이 휴양지를 털 이유는 없지.’
루카스가 바딤을 위한 꽃차를 직접 사기 위해 걸음을 바삐했다.
“어서오세요! 향긋한 꽃잎입니다~!”
점원이 가게 상호를 크게 외치며 루카스를 반겼다.
“가장 고급인 꽃차를 좀 사고 싶습니다.”
그러자 점원의 눈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했다.
“가장 고급 말씀이십니까?! 저희 향긋한 꽃잎의 꽃차는 모두 고급이지만, 그중에도 가장! 고급인 차는 바로 이쪽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점원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고급스러운 상자 속에 포장된 여러 가지 꽃차들이 보였다.
“여기 이 꽃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디바노스에서만 나는 달달꽃입니다! 말 그대로 아주 달고 향기로운 차이지요. 너무 단 것이 싫으시면 여기 이 민트와 함께…….”
“모두 주세요.”
루카스가 점원의 말을 잘랐다.
“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여기 이 꽃차 한 상자와 민트를…….”
“아니요. 여기에 진열된 상자 모두 주세요.”
“모, 모두 말씀이십니까?”
“예.”
루카스가 시큰둥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를 열었다.
‘변태 고룡…… 차나 마시다가 콱 목이나 막혀라.’
루카스가 금화 한 닢을 꺼내 건넸다.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점원이 호다닥 상자들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루카스는 가게 밖을 바라봤다.
‘이곳은 어째 변하질 않는군.’
커다란 돌들이 깔린 투박한 바닥과, 그 사이사이에 낀 바닷가 모래들.
따뜻하면서도 후덥지근한 공기와 함께 풍기는 여러 가지 냄새들이 디바노스에 온 것을 실감하게 했다.
‘저건 못 보던 가게로군.’
오랜만에 디바노스에 와서인지 옛날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르윈이 저곳을 참 좋아했었지.’
차를 파는 가게가 높은 언덕에 위치한 덕에 그 아래로 펼쳐진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있는 작은 방갈로들이 이곳이 휴양지임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손님. 포장 다 됐습니다!”
어찌나 손이 빠른지 직원은 금세 열 상자 가까이 되는 꽃차를 포장해 루카스에게 내밀었다.
“고맙습니다.”
“들고 가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직원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얼른 루카스를 도우려 손을 뻗었다.
“괜찮습니다.”
루카스가 아공간 주머니를 열어 꽃차 상자들을 차곡차곡 넣자, 직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세상에나! 이건 정말 엄청난 물건이군요!”
루카스가 싱긋 웃은 뒤 주머니를 닫고 몸을 돌렸다.
“잔돈 받아가셔야지요!”
그러자 직원이 얼른 쫓아 나오며 루카스를 불러 세웠다.
“잔돈은 됐습니다.”
그러자 직원은 손에 든 잔돈을 든 채 자리에 서서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우렁찬 직원의 인사가 골목에 울려 퍼지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 루카스가 언덕을 내려갔다.
‘오랜만에 한번 가볼까.’
언덕을 내려가자 모래가 밟히는 느낌이 발을 통해 기분 좋게 전해졌다.
‘어째 냄새도 바뀌질 않는군.’
신기한 노릇이었다.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보니 마음이 잔잔해지는 것 같았다.
“흐음.”
크게 숨을 들이켜 바다 내음을 맡은 루카스가 먼 지평선에 시선을 고정했다.
“……?”
그때 눈에 무언가 포착되었다.
‘사람?’
사람이 물에 빠졌나 싶어 한참을 쳐다봤다.
“……!”
하지만 이내 인영이 물속으로 사라지면서 얼핏 보인 물고기의 꼬리.
“세이렌.”
사라졌던 이들이 바로 여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