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화. 바딤 (4)
“바딤님?”
루카스가 바딤을 부르며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삐요옹.”
바딤이 커다란 눈을 굴려 루카스의 시선을 피했다.
“이제 그만하시죠.”
“삐용…….”
앨라스의 품에 안긴 바딤이 머리를 푹 박고 안 들리는 척 이마를 부벼댔다.
“어머!”
그 행동에 앨라스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자, 바딤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삐요오오옹…….”
그러더니 이내 바딤의 몸이 환한 빛에 휩싸였다.
“봐. 이럴 줄 알았어.”
“세상에나! 정말 응큼하시네요!?”
주홍빛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미남자로 폴리모프한 바딤이 멋쩍은 듯 이마를 긁적였다.
“반갑네. 나는 바딤 아르티스라고 한다네. 토파즈 일족이지.”
바딤이 싱긋 웃으며 앨라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허! 됐거든요?”
조금 전까지 아기 해츨링 모습에 깜빡 속았던 앨라스는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휙 돌렸다.
‘저런 응큼한 드래곤 같으니라고.’
처음부터 모든 기억이 다 있으면서 모르는 척 앨라스의 품에 안겨 ‘삐요옹’하는 그런 소리를 내다니!
“바딤님.”
“…….”
그 역시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는 건지 루카스의 말에 못 들은 척 먼 산을 바라봤다.
“바딤님!”
“왜, 왜 부르는가! 나도 다 듣고 있다네!”
민망한지 바딤이 버럭 짜증을 냈다.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크흠! 그건 나 역시도 마찬가지일세!”
바딤이 고개를 홱 돌리며 구시렁거리자, 작게 한숨을 내쉰 루카스가 앨라스를 향해 말했다.
“앨라스. 여기 잠시 있거라.”
“네. 걱정말고 다녀오세요.”
이미 바딤을 보는 앨라스의 눈빛은 좋지 못했다.
‘제대로 찍혔군. 변태 노룡 같으니.’
***
바딤과 단둘이 마주 앉은 루카스는 할 말이 너무 많아 어디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하는지 감도 오질 않았다.
“차라도 좀 내오게. 이거 원 참.”
결국 침묵을 참다못한 바딤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루카스는 순순히 마법으로 차를 세팅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물을 보며 바딤이 코를 벌름거렸다.
“흐음. 이건 무슨 차인가?”
“디바노스라는 섬에서 나는 꽃차입니다. 그곳 주민들은 대부분 그곳에서 나는 꽃으로 차나 술 등을 만들어 판매해 먹고 살지요.”
“호오. 꽃이라…… 내가 있던 곳에서는 들풀 차가 훨씬 높은 값어치를 치는데 말이야. 어쨌건 이걸 팔아 먹고 살 정도라면 맛이 꽤나 좋다는 말이렸다.”
바딤이 눈을 빛내며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갔다.
“흐으음~ 향기롭군.”
크게 숨을 들이켜 향을 먼저 음미하고 한 모금 들이켠 바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오! 이 맛은!”
“…….”
“대단하군! 꽃에서 이런 맛이 나다니! 들풀보다 훨씬 향기롭구먼!”
“입맛에 맞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이 쿠키는 뭘로 만들었는가?”
이번엔 쿠키였다.
“그건 일반적인 버터 쿠키입니다. 그래도 가장 큰 제국인 아란트라는 곳에서 유명한 집 쿠키이니 맛이 괜찮을 겁니다.”
“오오!”
바딤이 냉큼 쿠키를 하나 집어 들어 입으로 가져가는 사이, 루카스는 머릿속에 든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상황을 먼저 설명해야겠지.’
루카스와 하셀은 바딤과 영혼의 계약을 맺었었다.
‘그러니 싫더라도 우릴 위해 싸워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루카스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바딤은 버터 쿠키를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고 있었다.
“너무, 너무 맛있는 맛일세!”
마치 천상의 맛을 마주한 듯 바딤의 눈이 희번득하게 뒤집혔다.
“다, 다행이군요.”
고작 차와 쿠키만으로 이런 반응이라니.
“먹는 것에 진심이신 모양입니다.”
“떽! 그런 말 말게. 이 긴 세월 동안 먹는 즐거움을 뺀다면 무슨 즐거움으로 살겠는가. 인간들처럼 술을 마시고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약에 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바딤의 말을 듣던 루카스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그래. 술은 어지간하면 취할 수 없겠지만, 약은 또 달랐다.
“약에 취할 수 없다니요?”
“드래곤이 취할 수 있는 약이 어디 있는가! 독도 듣지 않는 것을.”
“……?”
물론 어지간한 독으로 드래곤을 죽일 수는 없다.
드래곤이 통째로 들어갈만한 커다란 통에 맹독을 가득 담고 목욕을 시키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 이야기를 하는 건가?’
루카스가 의아한 표정을 짓자 바딤의 눈이 다시 크게 뜨였다.
“설마…… 이곳 드래곤들은 술에도 취하고 약에도 취하는가?”
“물론입니다.”
“……이곳이 천국이로군.”
“하지만 바딤님 말씀처럼 어지간한 독이나 술로는 취하지 않지요.”
“그래도 취할 수는 있다는 것 아닌가!”
바딤의 목소리가 하늘 끝까지 높아졌다.
‘우리는 저런 걸 찾지 않고도 잘만 살았는데…….’
하긴 그렇다기엔 살아가는 세월이 달라도 너무 다르긴 했다.
‘삼만 년쯤 살면 저렇게 되는 건가.’
연신 쿠키를 집어 먹는 바딤의 얼굴은 한없이 행복해보였다.
‘쿠키 먹을 시간 쯤은 줘도 괜찮겠지.’
갈 길이 멀지만, 그가 먹는 시간쯤은 기다려 줄 수 있으니까.
“정말 너무 맛있군! 대단한 맛이야!”
“다음엔 더 맛있는 쿠키를 드리겠습니다. 그 쿠키와 차가 입맛에 맞으시면 아마도 이 세상에 바딤님이 즐길 먹거리가 가득 있을 거 같군요.”
“하하! 알겠네. 벌써부터 생각만으로도 즐겁구먼!”
한가득 먹어 치운 쿠키 덕에 바딤의 기분은 날아갈 듯 즐거워 보였다.
‘뻔뻔한 노룡.’
조금 전까지 기억을 잃은 척 앨라스의 가슴팍에 이마를 부비던 자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보다 왜이렇게 오래걸리신 겁니까?”
이제 이야기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하려 했네!!!”
그러자 바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
“도대체 나에게 기운을 불어 넣으러 왜 오질 않았던 건가! 3일이면 된다고 했지 마력 없이도 된다고는 안 했을 텐데!?”
“아.”
바딤에게 마나를 불어넣는 일은 아마록에게 일임했었다.
“……죄송합니다. 미처 그 생각을 하지 못했군요.”
여태 왜 깨어나지 않느냐고 바딤을 탓했던 것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떼잉! 그래 놓고 뭐? 순 허풍쟁이에 거짓말쟁이라고 나를 모욕해?!”
“…….”
제 연인이었던 르윈의 말이 맞았다는 것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알에서도 진짜 다 듣고 있군.’
대부분의 해츨링들이 깨어나서 기억하지 못하길래 아닌 줄로만 알았는데.
“바딤님을 깨우는 것을 돕기로했던 아이가…… 죽었습니다.”
“…….”
“제가 경황이 없어 그랬습니다. 제 불찰입니다.”
루카스가 고개를 숙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리 경황이 없어도…….’
처음부터 바딤만 있었더라도 전쟁의 판도가 바뀌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잊는 바람에 상황이 이지경까지 오다니.
‘이미 지나간 일이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바딤이 깨어나서 말이다.
“그,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없지.”
“감사합니다.”
바딤이 사과를 받은 뒤 자리에 다시 털썩 앉았다.
“상황이 많이 안 좋은가 보군?”
“지금은 그나마 조금 나아졌습니다.”
“흐음…… 일족을 몇이나 잃었지?”
“절반입니다.”
“……쯧.”
바딤이 안타깝다는 듯 의자 위에 손을 탁 내리쳤다.
“일족을 잃는 것은 슬픈 일이지.”
“…….”
“하지만 올라가면 다 만날 수 있을 걸세.”
“영혼이 소멸당했습니다.”
“…….”
의자 위에 올려져 있던 바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영혼이 소멸당해?”
“예.”
“누가 그런 짓을 하였는가. 그건 금기시되는 일일세.”
“마족들입니다.”
바딤의 잇새에서 까득, 하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저희는 마족들을 마계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뭐라?!”
바딤이 버럭 성질을 냈다.
“그런 천하의 몹쓸 놈들을 살려 보낸다는 말이야?! 그놈들 역시 영혼을 모두 빼앗아 불살라 버려야 하거늘!!!”
“…….”
“일족의 수장이라는 자가 제 일족 절반을 잃고도 그런 무른 결정을 내린다는 게냐!”
바딤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어차피 이 땅 위에 있지도 않았던 이들이다! 마계로 쫓겨나 영영 보지도 못했을 이들이란 말이다. 그런 놈들을 마계로 다시 돌려보내다니? 그건 세계의 질서를 위해서 내린 결정도 아니다. 그저 네 놈의 쓸모없는 동정심 때문일 뿐이지.”
바딤의 눈동자가 분노에 이글거렸다.
“압니다. 하지만 일족 모두 동의한 일입니다.”
“네 놈의 잘난 자존심 덕에 일족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겠구나.”
루카스 역시 바딤의 칼날같은 말에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나도 모두 아는 이야기다.’
그의 말 역시 맞다. 하지만 바딤은 이곳의 사정을 모두 알진 못하니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저희 세상에 있던 일입니다. 그리고 저 역시도 그들을 살려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내쫓은 이도 바로 저고, 그들이 복수의 칼날을 갈고 돌아오게 한 것도 바로 저입니다.”
“하! 그런데도 그런 놈들을 다시 살려 보낸다? 다시 한번 지하에서 성장해 올라오라는 이야기로구나.”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바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바딤 역시 지금 상황을 제 일인 양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고, 많이 참는 듯 보였다.
하지만 루카스도 마찬가지였다.
바딤은 제 일인 양 화를 내고 있을지 몰라도 루카스는 진짜 제 일이었으니까.
“그들에겐 죄가 없습니다. 윗 놈들의 결정에 따른 것 뿐이겠지요. 물론 개중엔 드래곤 때문에 조상을 잃고 핍박받은 이들도 있었겠지만, 그저 마계에서 하루하루 평온한 날을 원했던 이들도 있을 겁니다.”
“…….”
“그런 이들에게까지 죽음이라는 아픔을 겪게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어요.”
“그게 돌려보내는 일이다? 죽어버린 네 일족들은 환생의 길도 없이 영혼을 잃었다. 그런데도 그저 윗놈들을 따른 이들이 가여워 기회를 주겠다?”
“…….”
“멍청하고 아둔한 소리만 지껄이는구나.”
“…….”
바딤이 분노하고 분개했다.
“그들의 왕을 벌하기로 했습니다. 백성들은 살려주자고 말입니다.”
“…….”
무어라 입을 떼려던 바딤이 이내 입을 닫았다.
“도와주십시오. 저들의 과거가 어찌 되었건, 저희에게 어떤 아픔을 주었건 다시 한번 살아갈 기회를 주게 해주십시오.”
루카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이자, 바딤이 한숨을 길게 주욱 내쉬고는 몇 번 심호흡을 했다.
“후우…….”
마지막으로 긴 숨을 내쉰 바딤이 루카스를 향해 말했다.
“그래. 맨 처음 널 봤을 때 멍청하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었다. 네가 그런 결정을 내린 데엔 다 이유가 있겠지.”
“감사합니다.”
“그러니 너희 역사를 좀 들어봐야겠구나.”
그에게 지난 일을 설명할 기회가 왔다.
‘다행이군.’
루카스는 말하는 내내 바딤이 이대로 벌떡 일어나 마족들을 모두 쓸어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했었다.
‘계약 내용 중 마족은 적이라는 이야기 역시 있으니.’
루카스가 바딤의 기분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할 새로운 쿠키와 차를 꺼냈다.
“천천히 드시지요. 호박 쿠키와 코코넛 향을 입힌 홍차입니다.”
“……그러지.”
바딤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먼저 마신은 소멸했습니다.”
“크하하! 그것 참 잘되었군!”
호박 쿠키를 입에 넣은 바딤이 크게 웃어 젖혔다.
바딤의 분노가 사라진 듯 보이니 이제 이야기가 한결 수월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