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바딤 (3)
[하하! 잘 지냈는가?]
수정구에 떠오른 기에스티오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해맑았다.
“……기에스티오.”
[그래. 야스탄!]
해맑은 얼굴과 그보다 더 해맑은 목소리.
그에 야스탄 역시 자신이 무언가 오해를 한 건 아닌지 잠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를 배신한 이유가 뭔가.”
가장 먼저 묻고싶었던 것이었다.
그는 왜 자신을 배신한 걸까.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걸까…….
[하하하! 배신이라니. 당치도 않네.]
수정구 너머로 웃고 있는 기에스티오의 지느러미가 세차게 흔들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하긴 자네에겐 배신일 수도 있겠네만, 내겐 여기까지 모두 계획된 일이어서 말일세.]
“……그게 정말인가.”
[그래. 그렇다고 내가 자네를 속인 건 아니지 않은가? 이건 그저 내 계획 중 일부였을 뿐이네. 자네가 패배하게 되었을 때 세워둔 계획이지.]
“…….”
야스탄은 말을 잃었다.
[야스탄. 말해보게. 내가 자네를 속였는가? 나는 자네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네. 이것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실일세.]
수정구를 바라보는 야스탄의 눈이 멍했다.
[왜 말이 없는가? 하긴 내가 틀린 말을 하진 않았으니 그렇겠지. 자네가 속상한 것은 알겠으나 이거 하나만 알아줬음 좋겠네.]
기에스티오가 안타깝다는 듯 제 가슴께에 손을 얹고 말을 이었다.
[나는 자네가 잘되길 빌었네. 승리하길 바랐어. 하지만 어쩌겠는가? 자네가 패배한 것을…….]
“그래…… 모두 내 탓이겠지.”
그가 배신하게 된 것도, 전쟁에서 패배한 것도 모두 제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오. 그게 모두 자네 탓이라는 건 또 아닐세. 상황이란 게 모두 그렇지 않은가? 어찌 뜻대로 되겠냐는 말이야.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말게. 다 잘 될 테니.]
아이를 달래는 듯한 기에스티오의 말투에 야스탄은 피식,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렇게 웃게. 웃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하하!]
기에스티오는 언제나 야스탄보다 한 수 위였다.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그 아이는 어디 있지?”
그러니 더 이상 그와 말을 섞어 좋을 게 없다는 것이 야스탄의 판단이었다.
[허허! 그 아이라니?]
세차게 흔들리던 기에스티오의 지느러미가 순간 딱 멈춰 섰다.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의 행동에서 야스탄은 파멜라가 세이렌 영역에 있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했다.
“그 아이는 거기 잘 있는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군. 드워프들을 말하는 건가?]
“그래. 잘 지낸다면 되었네.”
야스탄 역시 이 문제만은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기에스티오. 내 친구로서 마지막 부탁 하나 하지.”
[…….]
“그 아이를 끝까지 책임져주게. 자네가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몰라도 그 아이는…… 가여운 아이일세.”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어서 무어라 할 말이 없네만.]
“그냥 대답해 주게. 그리 해주겠다고 말일세.”
[그러지.]
기에스티오가 결국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되었네.”
[하하하. 참 이상한 친구일세.]
“친구라는 말은 이제 입에 담지 말게.”
야스탄의 눈매가 순식간에 매서워졌다.
“자네는 이제부터 내가 죽여야 할 이들 중 하나이니까.”
기에스티오가 싱긋 웃었다.
[그것도 괜찮지. 그렇다면 이젠 배신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을 수도 있겠군.]
“……!”
수정구의 빛이 푸르스름하게 빛나기 시작하자, 야스탄의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미안하진 않네.]
“크, 윽…….”
어떻게든 움직이려 온몸에 힘을 바짝 주었지만, 몸은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수정구를 통해서 마법을 쓴다는 말은 들은 적도 없었다.
좌표를 추적해서 쫓아오는 건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곁에 있지도 않은데 어떻게……!
‘수정구였구나.’
야스탄이 제 앞에 놓인 수정구를 보며 생각했다.
저 수정구는 맨 처음 기에스티오를 만났을 때 그가 전해줬던 수정구였다.
차원이 달라도 연결이 될 거라며 호언장담하던 세이렌들의 ‘특제 수정구’라고 했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계획한 거냐.’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말게.]
-파스스스스…….
야스탄의 몸에서 하얗게 연기가 피어났다.
[고통스럽진 않을 걸세.]
-스스슷…….
김이 오르듯 연기가 피어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야스탄의 몸에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으, 어, 어어…….”
누군가 와주길 바라는 듯 야스탄의 눈동자가 문가를 간절히 바라봤다.
[잘 가게.]
-푸스슷…… 털썩!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짝 마른 야스탄의 몸이 풀썩 스러졌다.
***
-콰직! 포옥!
짤뚱하고 통통한 해츨링의 앞발이 알 껍질을 깨고 퐁! 튀어나왔다.
“어머! 어머나!!!”
“……세상에.”
그 모습을 보던 루카스 역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튀어나온 앞발의 색이 너무도 영롱했다.
“본 적 없는 색이다.”
금빛인 듯했으나 아니었고, 검은빛이 도는가 했으나 또 아니었다.
“이런 색은 처음 봐요.”
“그래. 나도 처음 본다.”
루카스가 들썩이는 알 껍질을 손으로 집어 그를 돕기 시작했다.
힘겹게 밀어내고 있는 듯 껍질 이곳저곳이 연신 들썩였다.
“이거 도와줘도 되는 거예요?”
“힘들어 보이지 않느냐. 게다가 처음 사는 생도 아닌데 뭐 어떤가.”
원래 드래곤들은 해츨링이 알에서 깨어날 때 작은 응원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
태어날 때 알 껍질을 깨며 겪는 고된 과정이 제힘으로 무언가를 하는 거의 처음이자 마지막 일이라서 그런다고 했던가.
하지만 눈앞에 있는 지금 이 알은 어차피 처음 사는 생도 아니니 괜찮았다.
“어어! 얼굴, 얼굴 나온다!”
‘이쪽이군.’
조금 전 나왔던 게 다른 쪽 발이었던지 오른쪽 부분에서 입매가 보였다.
-콰직!
루카스가 입매가 보이던 껍질을 손으로 잡아 뜯어냈다.
“꺄아! 귀여워라~!”
아만 이후로 태어난 드래곤이 없으니, 앨라스는 아만 외에 처음으로 보는 해츨링일 것이다.
‘귀엽군.’
루카스 역시 앨라스의 말에 동의했다.
알 밖으로 툭 튀어나온 주둥이가 너무도 귀여웠다.
그 안으로 보이는 작은 이빨들 하며, 나름대로 위용을 뽐내며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도 너무 귀여웠다.
“어머, 어머! 성질 더러운 것 좀 봐!”
바딤은 입 끄트머리가 튀어나오자, 알에 든 채로 입을 쩍 벌려 껍질을 깨부수기 시작했다.
“이제 다 나왔군.”
바딤의 콧구멍이 씰룩이자, 루카스는 조금씩 도와주는 것을 관두고 껍질을 양손으로 젖혀 열어냈다.
“꺄아아악! 너무 귀여워어엉!!!”
앨라스의 방정맞은 목소리가 동굴 가득 울렸다.
“앨라스. 시끄럽다.”
사실 바딤이 알에서 깨어나는 것을 처음부터 수월하게 도와줄 수 있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생 좀 해보라지.’
사실 다른 드래곤들의 말이 맞았다.
드래곤들은 살면서 도통 힘을 쓸 일 따윈 없으니 알에서 깨어날 때가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마법이 편하니까.’
태어난 지 일주일쯤이 지나면 웬만한 마법쯤은 쓸 수 있는 종족이니 대부분 마법으로 해결하는 것이었다.
“꺄! 얼굴 다 나왔어요! 나왔어!”
귀엽고 통통한 얼굴이었다.
아기 해츨링인 바딤이 입을 쩍 열어젖혔다.
“……!”
“삐오오오옹!”
포효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바딤은 입을 쩍 벌리고 용맹하게 포효(?)를 했지만, 나오는 소리는 아주 귀엽고 깜찍했다.
“끄윽…….”
그 소리를 들은 앨라스가 가슴께를 부여잡고 쓰러지는 시늉을 했다.
“귀, 귀여워…….”
루카스 역시 바딤의 그런 모습을 보니 심장이 저려왔다.
‘너무 귀엽군.’
그 역시 아만 이후로 해츨링을 본 적이 없으니 작은 바딤이 너무 귀여웠다.
“삐오오옹…….”
제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실망스러웠던지 바딤이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작은 소리로 옹알거렸다.
“바딤님. 말씀 하실 수 있지 않으십니까.”
어차피 마나는 충만할 것이다.
막 태어났다 하더라도 당장 마법은 쓸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삐오옹?”
하지만 아기 바딤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꺾으며 루카스와 앨라스를 번갈아 바라봤다.
“바딤님?”
“삐오오옹!”
미쳐버릴 노릇이었다.
정말 이건 아기 해츨링 그 자체였다.
“……설마 기억을 잃거나 그런 건 아니겠죠?”
“앨라스. 그런 재수 없는 소리는 하지도 말아라.”
“……예.”
진짜 그러기라도 한다면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희망과도 같은 바딤이 지금 기억을 잃는다니? 그건 안 되는 말이었다.
“바딤님. 제가 빨리 알을 안 깨서 그렇습니까? 제가 죄송합니다. 그러니 이제 그만 놀리시고 어서 말을 하세요.”
“삐요옹?”
“미쳐버리겠네.”
결국 루카스가 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삐용! 삐요옹!”
“끄아아앙!”
바딤이 앨라스를 향해 짧은 양팔을 쭉 뻗자, 앨라스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바딤을 번쩍 안아 들었다.
“어이구, 어이구 귀여워라.”
앨라스가 바딤의 통통한 엉덩이를 받치고 둥기둥기하며 그의 이마에 얼굴을 부볐다.
‘설마…….’
마지막에 바딤이 남겼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지만, 루카스는 애써 무시했다.
‘성미가 참한 드래곤이 있다면 소개를 좀 해달라고 했던가…….’
앨라스의 목을 꼭 안은 채 얼굴을 부비는 바딤의 모습을 찬찬히 지켜보던 루카스가 미간을 팍 찌푸렸다.
“바딤님?”
“…….”
“바딤님.”
묵묵부답이었다. 그는 제 이름 따위는 모른다는 듯 앨라스의 품에 안겨 이마를 연신 부볐다.
게다가 지그시 눈까지 감는 걸 보니 이제 루카스는 긴가민가 하기 시작했다.
‘진짜 기억을 잃은 건가.’
그것만은 제발 아니길 빌었다.
“어이구, 어이구! 귀여워라.”
바딤을 번쩍 안아 든 앨라스가 그를 하늘 높이 올렸다.
“삐오오옹!”
바딤은 재밌다는 듯 작은 날개를 파닥였다.
“아이구! 아이구! 재밌어라!”
그를 안고 높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는 앨라스.
“앨라스. 그가 기억을 잃었다면 진짜 큰일이구나.”
“에이, 설마요. 잃었다고 해도 잠깐이시겠죠.”
“너도 들었다시피 바딤님은 3만 년을 산 대단한 드래곤이 아니시냐.”
“맞죠~”
앨라스가 바딤을 꼭 끌어 안았다.
“우리 바딤이 3만 년 살았쪄용~”
“삐요옹!”
“…….”
“그랬쪄용~!”
“삐요오오옹!”
저게 연기라면 진짜 대단한 거였다.
‘알아듣는 건가.’
“삐요오옹!”
‘아닌가.’
바딤의 모습을 보며 루카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확실히 확인을 좀 해봐야겠군.’
앨라스는 그러거나 말거나 바딤의 겨드랑이를 간질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 앨라스. 그보다 네가 지금 600살쯤이던가?”
앨라스에게 안긴 바딤의 눈동자가 슬쩍 흔들린 것은 기분 탓일까.
“에!? 아뇨. 저 800년 좀 넘었을 걸요?”
“그래?”
“네.”
“아주 어리구나. 그 누구였더라…… 아, 그래. 프라이얀말이다.”
바딤의 볼이 씰룩였다.
“네. 실버 일족 프라이얀이요.”
“프라이얀이 2천년 쯤 살았던가?”
“그렇죠?”
“그래. 실버 일족이 성미가 괜찮은 편이지.”
“맞죠. 골드도 괜찮긴 하지만, 실버랑 블루가 좀 괜찮은 편이죠.”
그러자 앨라스의 팔을 꼭 끌어안았던 바딤의 손이 슬쩍 느슨하게 풀렸다.
“어이구! 우리 바딤이 배고파용?”
그러자 앨라스의 품에 안긴 바딤이 고개를 슬쩍 저었다.
“허? 고개를 저으신 건가요?”
요놈. 딱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