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수 싸움 (2)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이 흑이 이기려거든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기에스티오의 질문에 파멜라가 잠시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음…….”
“역시나 어렵겠지요?”
기에스티오의 말이 끝나자마자 파멜라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 탁, 탁. 그녀의 손이 체스판 위를 빠르게 지났다.
흑이 백을, 백이 흑을 몇 번이고 잡고 잡히는가 싶더니…….
“이, 이럴 수가…….”
흑의 승리였다.
기에스티오가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승리할 방도가 없다고 생각했던 흑이 승리를 거머쥐었다.
“대단한 실력이군요.”
“그저 생각나는 대로 했는걸요.”
사실 체스는 파멜라가 가진 몇 안 되는 특기 중 하나였다.
부활교단에 몸을 담았을 때 교주에게 배운 체스는 어느 순간 교주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빠르게 실력이 늘었다.
‘대단하군.’
기에스티오 역시 체스를 배운 건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지만, 꽤 실력이 있다고 자부했었기에 파멜라의 실력이 더욱 놀라웠다.
“겸손이십니다. 저 역시도 체스는 꽤나 둔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생각을 고쳐먹어야겠군요.”
기에스티오가 빙그레 웃었다.
“그보다 이제 제대로 된 대화를 좀 하고 싶은데…….”
기에스티오의 눈이 파멜라를 향했다. 물에 비친 푸른 눈동자가 깊은 바다 같았다.
‘제대로 된 대화라…….’
파멜라가 찻잔을 들어 입에 가져가며 시선을 슬쩍 내리 깔았다.
표정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저 말은 솔직한 대화를 원한다는 거겠지.’
기억을 잃었다는 핑계 따위는 대지 않고 말이다.
찻잔을 내려두는 파멜라의 눈이 다시 한번 체스판을 향했다.
“여태 한 대화는 제대로 된 대화가 아니었나 보네요.”
천천히 고개를 든 파멜라의 눈동자가 기에스티오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
파멜라의 눈을 마주한 기에스티오는 멈칫 하며 잠시 말을 잃었다.
“하하하하!”
그러더니 돌연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
“그럴 리가요! 아주, 아주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기에스티오가 제 뒤편 벽에 걸린 목걸이 하나를 빼 파멜라에게 건넸다.
“앞으로 이걸 쓰시지요. 여기 아래 있는 팬던트는 귀중한 손님이라는 뜻이니 다들 극진히 대접할 겁니다.”
“괜찮습니다. 지금도 충분한걸요.”
파멜라가 제 목에 걸린 목걸이를 슬쩍 들어 보였다. 지금보다 극진한 대접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다.
“오. 아닙니다. 제 성의나 다름없으니 부디 받아주시지요.”
다시 한번 기에스티오가 목걸이를 내밀자, 파멜라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목걸이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기에스티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족들에게 연락은 따로 취하지 않겠습니다. 그쪽에서 어떤 사정이 있으셨던 건지 모르니 말입니다.”
“…….”
그 말에 딱히 대답을 하지 않은 파멜라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즐거운 티타임이었습니다.”
“저야말로 즐거웠습니다.”
***
기에스티오는 지금 기분이 무척 좋았다.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구나.”
저 아이를 이용한다면 마족을 치는 것도 아주 쉬울 듯 보였다.
“저 아이가 가진 약점이 무엇일까…….”
기억대로라면 분명 파멜라는 마왕의 수양딸이라는 자리까지 오른 개국 공신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저들이 승리했더라면 말이지.’
그런데 바다에 빠진 것을 일족이 구해왔다. 게다가 그들이 있었던 델러다칸과 한참 떨어진 디바노스 앞바다에서 말이다.
“흠…….”
분명 무언가 있을 것이다.
“오!”
그때 기에스티오의 머릿속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그 아이에게 동생이 하나 있더군. 언젠가 그 동생을 데려오고 싶다는 이야기를 어제 하더군. 마족에게 마음을 좀 연 모양이야.’
야스탄이 했던 이야기였다.
“동생이라…….”
기에스티오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라도 이번 일이 실패한다면 저 아이를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아구아가 주신의 열쇠라는 인간을 처리하고 자신이 야스탄을 처리한다면 모든 일은 끝날 것이다.
‘세이렌의 승리로 말이지.’
기에스티오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웃음이 피어났다.
***
앨라스와 함께 게이트를 여는 법을 연구하는 루카스의 머릿속도 복잡하긴 매한가지였다.
‘야스탄을 죽여야만…….’
마족들을 모두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종족이나 같은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의 죄로 인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고한 백성들이 피를 흘리며 죽는 것은 어디나 같았으니까.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많이 죽는 것은 백성이다.
낮엔 뙤약볕 아래 밭을 일구며 저녁에 있을 가족들과의 단란한 저녁 식사를 기다리던 가장도 하루아침에 전장으로 내몰려 죽어야 했으며, 한평생을 함께할 반려를 만나 이제 막 가정을 일군 사내도 전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그로 인해 아빠를 잃은 아이들은 다시 한번 불행한 삶을 반복해야 할 것이고, 그 아이들을 지켜내려 애쓰는 지아비를 잃은 여인도 불행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은 어떠한가.
전장의 뒤편에 가만히 앉아 그들이 피를 흘리는 것을 그저 지켜보며 배부르고 등이 따뜻하게 살지 않는가.
그러니 마왕 야스탄을 처단하고 죄 없는 마족들을 살리는 것이 지당한 일이었다.
“그래.”
“예? 갑자기 무슨…….”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앨라스가 연구하던 마석에서 시선을 떼고 루카스를 쳐다봤다.
“아. 아니다.”
“참…… 정신 좀 차리세요. 로드.”
앨라스가 어깨를 한번 으쓱 하더니 다시 마석에 수식을 입력하고 마나를 불어넣기 시작했다.
“하. 이번엔 좀 되려나.”
하룻밤을 꼬박 새고도 진전이 없었다. 게이트는커녕 쥐구멍도 열리질 않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흠…….”
루카스 역시 앨라스를 도와 문제점이 무엇인지 함께 찾고 있었지만 딱히 뾰족한 수가 보이질 않았다.
-파스스스…….
다시 한번 마석이 힘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으아!! 짜증 나!!!”
앨라스가 부서진 마석을 향해 들입다 소리를 쳤다.
“앨라스.”
“……죄송해요.”
앨라스가 황급히 방금의 행동에 대해 사과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가 생각을 조금 바꿔야겠구나.”
“예? 어떻게요?”
“그들이 새로운 마법을 만들어 게이트를 열었다는 생각 부터가 잘못되었다. 아무리 세이렌이 마법과 정령술에 능통한 종족이라한들 그들을 너무 높게 샀다.”
“……?”
“그들은 아티팩트를 함께 이용했을 것이다.”
“아!”
그러자 앨라스가 무릎을 탁, 쳤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아무리 세이렌이 마법을 잘 쓴다 해도 새롭게 수식을 만들었다?
그건 몇백, 아니, 몇천 년이 걸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우리가 접근을 잘못했구나.”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서야 그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이 분했지만, 지금이라도 생각을 떠올린 것이 어디인가.
“그럼 시공간…… 시공간 아티팩트가…….”
“아마록!”
“……!!!”
아만이 예전에 훔쳐다가 시간을 뒤틀었던 그것.
“호라의 왕관.”
시간의 여신인 호라. 그녀의 왕관이었다.
“그게 지금 어디에 있죠?”
앨라스가 물었다.
“하셀에게 있겠지.”
[하셀. 이곳으로 와주겠나.]
[예.]
루카스가 하셀에게 전음을 보내자, 하셀이 곧장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하셀. 호라의 왕관은 지금 어디에 있지?”
“……호라의 왕관 말입니까?”
하셀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래.”
불안함을 느낀 루카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대답이 없나.”
“찾아보겠습니다.”
하셀이 얼른 몸을 돌려 나가려던 때였다.
“하셀.”
“……예?”
“솔직히 말해라. 어디에 있나.”
“…….”
“설마 그걸 잃어버렸다고 하진 않겠지.”
“…….”
“하셀!”
결국 참다못한 루카스가 버럭 소리쳤다.
“사실은…….”
쭈뼛거리며 말을 잇는 하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걸 바다에 수장시켰다?”
루카스가 죽고 난 다음 그의 레어를 물려받은 하셀은 물건을 정리하다가 호라의 왕관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 왕관을 보니 아마록이 사고를 쳤던 때가 기억이 나서 화가 났고, 당장에 바다로 달려가 그 왕관을 봉인한 뒤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어차피 시간이나 공간을 뒤틀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나.
“예. 하지만 제가 그 바다가 어딘 줄 아니까…….”
“그래서였군. 그래서 세이렌들이 그 엄청난 걸 만들 수 있던 거였어.”
어쩐지 이상했다. 맨 처음 한둘쯤이야 그들의 실력으로 어찌저찌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마족들이 우르르 넘어왔다.
거의 일족 대부분이 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하며 생각을 거듭했었는데, 그들이 ‘호라의 왕관’을 손에 넣었다면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었다.
“그래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젠장.”
이렇게 가다간 연구에 성공하더라도 마족들을 돌려 보내는 데에만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다시 한번 루카스의 머릿속에 좋지 않은 생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신의 자리.’
그 자리에 올라 주신의 권능을 모두 이어받는다면 그들을 마계로 돌려보내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겠지.
아주 손쉽게 그들을 돌려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안 된다.’
하지만 아직 생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그런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인간으로써 누리는 마지막 생. 그걸 끝까지 한번 잘 살아보고 싶었다. 아직은.
“그게 꼭 필요하신 거……지요?”
하셀이 루카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없는데 어쩌겠나.”
“그런데 그건 왜…….”
“왜긴 왜야! 게이트를 열려면 필요하니 그렇지! 게다가 네 놈이 호라의 왕관을 바다에 내던진 덕에 세이렌 놈들이 그걸 주워다가 이 사달이 난 것이 아니냐!”
“……!”
앨라스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하셀을 쳐다봤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자 하셀 역시 놀란 듯 어쩔 줄 몰라하며 앨라스와 루카스의 눈치를 번갈아 살폈다.
“그래. 봉인만 해서 아공간이든 다른 창고에든 넣어두면 될 것을 어째서 그걸 바다에다가 내던지고 지랄을 떨었느냐는 말이다!”
“죄송합니다…….”
“진짜 그것 때문에 마족들이 올라온 거예요?! 어쩐지! 이렇게 어려운 일을 그 물고기들이 잘도 해냈다 싶었어!”
앨라스가 하셀을 노려봤다.
“미안하구나.”
하셀 역시 죄책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는 중이었다.
“하…….”
“그렇다면 혹시 호라님께 왕관 하나만 더 달라고 하면…….”
“미친놈.”
호라의 왕관은 그녀의 뜻에 의해 지상에 내려온 것이 아니었다.
공간의 신인 디아스테가 호라를 골탕 먹이기 위해 그녀의 왕관을 지상으로 내던진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왕관을 하나 더 달라고 하라니?
“정신 빠진 소리나 할 거면 당장 꺼져라!”
“옙.”
루카스의 말에 얄밉게 대답한 하셀이 냉큼 몸을 돌려 사라졌다.
“그럼 이제 어떡해요? 다른 시간 아티팩트 없나?”
“흠…….”
루카스가 머리를 열심히 굴리는 중이었다.
“아. 맞네.”
하셀을 볼 때마다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나지 않던 것이 드디어 떠올랐다.
[당장 다시 와라.]
[……옙.]
하셀이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