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마지막 협상 (3)
저택 지하로 돌아간 루카스의 표정이 착잡했다.
‘곧 전쟁이 끝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구도 앞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야스탄이 전쟁을 그만두고 평화를 원한다고 하여도 드래곤들이 그 뜻을 따라줄 거라는 보장이 없으니 말이다.
“엘라임.”
“그래.”
아이들 곁을 지키던 엘라임이 피식 웃었다.
“왜 웃지?”
“네가 하고 온 짓이 안 봐도 빤히 보여서.”
구태여 그게 무슨 말이냐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순순히 보내줬겠지. 마왕놈을 말이야.”
“……그래.”
“왜 그랬지? 그놈이 뭐라고 하던 목숨을 취했어야지. 이 모든 일의 화근이 아닌가.”
엘라임의 말이 백번 옳았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런데 넌 또 그 알량한 선의를 베풀었겠지.”
엘라임의 비아냥거림이 점점 더 심해졌다.
“그만하지. 난 그들에게도 다시 이 땅 위에 설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알량한 선의 따위가 아니었어.”
“그러시겠지.”
엘라임이 이제 더는 말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는 루카스를 지나쳐 갔다.
“모두 무사하다.”
이 말만을 남긴 채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하…….”
어려운 일투성이였다. 누군가에겐 알량한 선의로 보였을지 몰라도 자신에겐 중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엘라임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이 또 지나친 행동을 한 건 아닌가 싶었다.
‘괜한 짓을 했나.’
엘라임의 말대로 야스탄의 목을 비틀어 끝낼 수도 있던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목을 비튼다 해서 모든 일이 해결되진 않았다.
마족들은 그저 왕을 잃고 설 땅도 잃은 채 이 땅 위를 방황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또 다른 문제가 분명 생겨날 거고.
또한 기에스티오가 뒤에서 벌이는 짓이 지금은 더 중요했다.
‘모든 일의 주범은 사실 그 물고기 자식이니.’
그 생각을 하자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애써 참아 낸 루카스가 곤히 잠든 아이들과 백작 부부의 얼굴을 번갈아 봤다.
잠시 시선을 아래로 내려 제 차림을 본 루카스가 피식, 하고 웃고 말았다.
옷을 비롯한 온몸엔 피가 범벅이었으며, 여기저기 탄 자국까지 있어 아주 볼썽사나웠다.
‘거지꼴이 따로 없군.’
게다가 손등이며 목 언저리에 남은 피딱지는 무섭기까지 했다.
‘조금 더 둬도 되겠지.’
마법으로 몸을 씻을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따뜻한 물 아래 몸을 맡기고 거품을 내 몸 구석구석을 씻고 싶었다.
잠든 이들을 그대로 둔 루카스가 이런저런 마법을 써 그들을 보호할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한 다음 자리를 떴다.
아직은 멀쩡한 백작저로 올라온 루카스가 오랜만에 제 방을 찾아갔다.
‘몇 년 만에 온 기분이군.’
방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은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마치 몇 년은 흐른 것처럼 말이다.
“후.”
짧게 숨을 내쉰 루카스가 욕실로 들어섰다.
***
따뜻한 물 아래 몸을 씻어내고 한결 기분이 나아진 루카스가 옷장을 열어 평소에 꽤나 마음에 들어했던 옷 한 벌을 꺼내 입었다.
하얀 셔츠에 남청색 자켓. 제 머리칼과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색 조합이었다.
소매에 달린 금색 단추도 장식도 마음에 들었고 말이다.
거울 앞에 선 그가 셔츠와 자켓 주름을 탁탁 쳐냈다.
먼지가 날아오르는 걸 눈으로 잠시 쫓은 그가 방을 나섰다.
‘이걸 원한 거였는데.’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몇 번이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이었다.
아주 평범한 일상. 이걸 원했었다고.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좋아하는 옷을 꺼내 입은 뒤 식당으로 가 밥을 먹는 일상.
가족들과 함께 따뜻한 음식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
그 생각을 하던 루카스가 피식, 하고 웃었다.
“웃기는군.”
입 밖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아주 웃긴다고 말이다.
이 몸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가 아직 생생하다.
어이가 없었고 이가 갈렸다.
‘아. 이가 없었던가.’
그러자 다른 생각이 툭 튀어나왔다.
‘이가 자라면 언제든 죽겠다 다짐했었지.’
하지만 그 다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었다.
인간의 몸에 ‘갇혔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살아내겠다고 했던가.’
그래. 언젠가 그렇게 결심했던 것 같았다.
그러다가 아이들을 만나고 하루하루 사는 게 재밌었던 때도 있었다.
따뜻한 가을 저녁 무렵. 아카데미 수업을 마친 루카스와 아이들은 종종 아카데미를 빠져 나가 맛있는 걸 먹곤 했었다.
‘그것도 여의치 않았던 때가 있었지.’
집에 돈이 없어 부모가 제 학비를 대는 게 어렵진 않을까 걱정했던 때가 있었다.
‘여관비를 아끼려 마부를 둘 고용해 집에 갔던 때도 있었고.’
마차에서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집에 돌아갔던 때도 있었다.
‘아만에게 웨어울프 가죽을 벗겨 판다고 했던 때도 있었지.’
추억을 곱씹던 루카스의 입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건방진 드래곤 같으니…….’
아만이 보고 싶었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칭찬을 원하던 그가.
‘그깟 칭찬이 뭐라고…….’
후회가 밀려왔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조금 더 잘한다고 해줄 것을. 타박은 조금 덜할 것을…….
집안 살림이 나아지는가 싶더니 또 시련들이 닥쳐왔었다.
그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살아내는 게 아니라 살아 보겠다’고 말이다.
진짜 인간으로서 한번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느린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루카스의 눈동자가 슬펐다.
떠나버린, 지금은 없는 수많은 이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모두 내 탓이다.’
힘들었다.
‘이제 너무도 지치는구나…….’
걸음을 멈춘 루카스가 멍하니 천장에 난 샹들리에를 바라봤다.
지하로 내려가면 아이들과 제 부모가 저를 반기겠지. 여태 무슨 일을 겪고 돌아왔는지도 묻지 않은 채 제 등을 토닥이겠지.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야 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
지하로 내려가니 폴라가 먼저 제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루키!!!”
벌떡 일어난 그녀가 달려오다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려던 때.
“폴라!”
그 앞에 앉아있던 스키르가 얼른 제 몸을 던져 그녀를 받쳤다.
“으앗!”
폴라가 넘어지며 소리를 지르고.
“커억!”
폴라 아래 깔린 스키르가 고통스러운 소릴 토해냈다.
“어휴. 칠칠 맞긴.”
뒤에 선 넬라가 폴라를 보며 혀를 쯧, 찼다.
“어머, 아들!”
블레인이 루카스를 향해 양팔을 활짝 펼치며 다가왔다.
“오, 아들! 언제 왔느냐. 어디, 어디 보자. 몸은 괜찮으냐?”
그 소리를 들은 시비에가 블레인의 뒤를 따라 제게 다가왔다.
‘그래. 힘을 내야지.’
그들을 보니 조금은 힘이 나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해야만 한다.’
돌아설 수 없었다.
***
루카스는 남아있는 드래곤들을 불러 회의를 소집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카스의 말을 들은 에라몬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놈을 살려 보내주셨다니요!”
“에라몬드. 아직 로드 말씀이 끝나지 않았네.”
레아디스가 그런 에라몬드를 향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화가 나는 건 이해하네만 내 말을 끝까지 들어주겠나.”
루카스가 부드럽게 이야기하자 에라몬드 역시 끙, 하며 작은 신음을 내고는 다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래. 그들이 원하는 건 이 땅 위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거였네. 허나 내게 무슨 권한이 있어 알겠다고 하겠는가.”
“…….”
“그러니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 싶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말일세.”
루카스의 말이 끝나자, 다들 시선을 교환했다.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가우스의 딸인 레드 일족 아벨이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이 땅 위에 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그러기엔 저희들이 겪은 피해가 너무 컸습니다.”
“아벨의 말이 맞습니다. 그들이 억울하게 내쫓겼다 주장하는 것 역시 이해하는 바입니다. 천여 년 전에 저희가 조금 과했을 수도 있지요.”
“저도 그 부분은 동의합니다. 하지만 알을 도둑맞은 부모들의 마음 역시 이해하고요. 게다가 시간 역시 많이 흘렀으니 그들이 이 땅 위에 올라오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드래곤들의 피해가 너무 컸어요.”
예상했던 대로였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그들의 마음 역시 이해하고 말입니다.”
“그럼 그들을 마계로 다시 돌려보내는 것은 어떻습니까?”
“저도 그렇게만 한다면 뭐 전쟁을 끝내는 건 찬성입니다. 죽여봤자 별 의미도 없는데 뭐 하러 죽이겠어요?”
다른 드래곤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게이트는 이미 닫혔고 그들이 돌아갈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 마신 타라스 역시 소멸했으니 말이다.”
“흠…….”
다시 벽이었다.
“그렇다면…….”
에네브가 주변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말해보게.”
루카스가 허락하자, 에네브가 침을 한번 꼴깍 삼킨 뒤 입을 열었다.
“먼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로드께서 주신의 권능을 이어받으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이 혹시 사실입니까?”
루카스가 하셀을 한번 찌릿 째려봤다.
‘벌써 그걸 다 말했어?’ 하는 눈빛이었다.
그러자 하셀이 루카스의 눈을 슬쩍 피했다.
‘저 자식이…….’
어쩔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인정하는 게 나았다.
“그래. 맞다.”
그러자 다른 드래곤들 역시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감탄할 게 아닌데.’
그들을 보며 루카스가 생각했다.
“그렇다면 로드께서 주신의 자리에 오르시면 되는 문제 아니겠습니까?”
“…….”
에네브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다른 이들 역시 그걸 원하는 듯 루카스가 무어라 대답할지에 집중하는 듯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에네브.”
“그, 그렇다면…….”
“하지만 그 방법만은 먼저 피하고 싶구나.”
“…….”
“이기적인 결정인 줄 안다. 하지만…… 이번 생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 생이라면 조금만, 조금만 더 살아보고 싶구나.”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런 방법은 어때요?”
앨라스였다.
“어차피 세이렌들도 만들어 낸 거 아니겠어요? 저희가 세이렌보다 못 할 이유도 없고요. 저희가 그냥 게이트를 좀 만들어 주죠?”
골드 나인 상단주 다운 발상이었다.
“그래. 네 말도 일리가 있다.”
그리고 가장 가능성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럼 제가 한번 만들어 볼게요. 뭐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다 죽이는 수밖에.”
앨라스가 어깨를 한번 으쓱했다.
“얼마나 걸릴 것 같은데?”
아벨이 앨라스에게 물었다.
“흠…… 모르겠네. 걔네가 얼마나 걸렸냐에 따라 좀 다를 것 같은데. 누구 차원 게이트 열어보신 분?”
앨라스의 질문에 다들 눈만 굴릴 뿐 대답이 없었다.
“아니, 우리 드래곤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학구열이 없었어요?! 나 정말 배울 게 없네?!”
앨라스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내가 도와주마. 앨라스.”
“에? 로드가요?”
“……왜. 싫으냐?”
저건 분명 싫은 내색이었다.
“뭐, 싫다기보단 로드는 좀…… 꼬장꼬장하시잖아요?”
충격적이었다. 꼬장꼬장하다니?!
하지만 앨라스의 말에 다들 동의하는 듯 여럿이 고개를 끄덕였다.
“……?”
루카스가 그들을 향해 눈을 흘기자 여기저기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크흠… 내가 좀 꼬장꼬장하긴 해도 고룡…… 아니냐. 도움이 좀 되지 않을까?”
루카스가 최대한 자세를 낮추고 물었다.
사실 자신이 지금에라도 주신의 자리에 오르면 해결될 문제인데 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책임질 필요가 있었다.
“흠…… 그런가?”
“…….”
“그래요. 그럼. 도와주세요.”
앨라스의 허락에 왠지 기쁜 마음이 든 루카스가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그건 그렇게 하시더라도 누구 하나는…… 본보기가 되어야 합니다. 저들을 위해 게이트를 만들어 주는 건 저희가 베푸는 최소한의 자비여야 하고요.”
실버 일족인 프라이얀이었다.
‘어릴 때부터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아이였지.’
그녀의 날카로운 질문에 루카스가 생각했다.
“알고 있다. 그 부분도…… 생각해 보자꾸나.”
“마왕을 죽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