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마지막 협상 (2)
아이들이 협박을 당하거나 하고 있을 때를 대비해 기척을 숨기고 최대한 천천히 다가가던 때였다.
[아직 한 명인가?]
[두 명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한 명에 비해 기운이 아주 미약하군요.]
탐색 마법으로도 탐색이 되지 않는 상대들이었지만, 하셀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이들이라는 뜻이었다.
‘단 하나라도…….’
아직까진 가족들을 포함한 아이들 모두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들 중 하나라도 혹여 잘못되었다면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먼저 들어가마.]
[하지만…….]
아모레가 했던 말이 걸렸던 것일까. 하셀이 문을 열고 들어서려는 루카스를 막아섰다.
[아니.]
루카스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
문을 열고 들어서자 고이 잠든 가족들과 아이들이 보였다.
“기어이 네가…….”
루카스가 낮은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용서하십시오.”
야스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엔 야스탄의 부하로 보이는 이도 함께였다.
“모두 무사합니다. 저는 그저 로드…….”
야스탄이 말을 하다 말고 하셀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금의 로드는 하셀이니 그런 듯했다.
“어쭙잖은 인사치레는 할 생각 말고 당장 꺼져라.”
그들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되었다. 그리고 저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이곳에서 싸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마지막으로…… 당신과 협상을 하고 싶어 왔습니다.”
야스탄의 말에 루카스가 코웃음을 쳤다.
“……협상? 하.”
“이들을 이렇게 재운 것은 혹여 저를 공격하다 다치기라도 할까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곳이 아니면 당신과 대화할 곳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야스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
그러자 천여 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야스탄이 매일같이 찾아와 울고 빌었던 그날들.
“그래.”
그러자 옆에 선 하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이십니까? 저자와 무슨 협상을 하시겠다는 겁니까. 저놈들은 우리 일족을 죽이고 이용했습니다.”
하셀의 목소리에 분노가 어려있었다.
“안다. 하지만…….”
또 다른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날 믿어주겠나. 하셀.”
“…….”
하셀이 대답 없이 작은 침음을 흘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를 옮기지.”
“예. 알겠습니다.”
야스탄이 순순히 루카스의 말에 동의했다.
‘정말 협상이 하고 싶어 찾아온 건가.’
그 모습을 본 하셀이 생각했다.
“엘라임.”
정령화 상태로 곁에 머물던 엘라임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의 정령왕을 뵙습니다.”
야스탄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당장에라도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것을 참고 있으니 더 이상 아무 말 말고 꺼져라.”
“…….”
정령계 역시 큰 타격을 입었기에 엘라임의 입에서 고운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이곳을 좀 지켜주겠나.”
“부하 부리듯 부려 먹는군.”
루카스의 부탁에 구시렁거리긴 했어도 엘라임은 순순히 넬라 옆에 자리를 잡고 섰다.
“고맙네.”
루카스가 야스탄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파앗!
루카스가 텔레포트하자, 야스탄이 그 뒤를 따랐다.
***
잔잔한 물이 흐르는 호수 앞에, 잘 어울리는 티테이블 세트가 놓여있었다.
‘명색이 협상인데.’
루카스가 친히 아공간에서 꺼내놓은 것들이었다.
딱히 갈 곳이 없기도 했고 말이다. 이곳이라면 혹여 싸움이 벌어지더라도 누가 다칠 일도 없기도 했고 말이다.
“감사합니다.”
야스탄이 루카스가 의자에 먼저 앉길 기다렸다가 그 앞에 앉았다.
“말해봐라. 네 협상 조건이 뭔지.”
“……사실 없습니다. 그저 당신과 독대하고 싶어서 꾸며낸 말일 뿐이지요.”
야스탄이 슬프게 미소지었다.
“언젠가 로드와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저는 몇 번이나 그런 상상을 했었습니다.”
무슨 개소리인가 싶었다.
“협상할 의지가 없다?”
하지만 루카스는 이미 화가 끓어오른 상태였다.
“예. 사실 저희는 더 이상 이곳이 아닌 마계에서 살아갈 수도 없으니까요. 모두 다 죽는 것이 아닌 이상 당신들의 마음에 들 리가 없지 않습니까.”
“…….”
“마신 타라스가 소멸했습니다. 저희로서는 엄청난 전력이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지요. 타라스님이 안 계셨더라면 이렇게 당신들에게 일찍 대적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까요.”
야스탄의 입에서 솔직한 말들이 흘러나왔다.
“당신들에게 죄를 지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니, 그에 대해 무어라 변명할 생각도 없습니다.”
“…….”
루카스는 고백과도 같은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또 죄를 지었군요. 우리의 수많은 일족이 죽었습니다. 나름 마계의 중앙 귀족들이었지요. 하지만…… 당신은 또 아이들을 살려주셨더군요.”
“어른들의 일에 휘말린 가여운 것들 아니냐.”
“하지만…… 당신이 모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야스탄이 루카스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들의 생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부모가 죽는 것을 눈앞에서 지켜본 어린아이들의 인생 말입니다.”
“그것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 나는 그저 죄 없는 아이들의 목숨을 취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 뿐이다.”
“압니다. 당신 역시 고고한 생명체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불행할 것입니다. 평생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고 큰 소리만 들려도 몸을 웅크리겠지요. 마법사를 보면 이를 갈 것이며, 드래곤들을 향해 적개심을 키울 것입니다.”
그러자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고고한 생명체라…… 그러는 너는 아니라고 생각하느냐? 네 생각이야말로 어이가 없구나. 마왕의 자리에 앉아 이들 목숨을 쥐락펴락하니 네가 신이라도 된 듯싶더냐?”
“…….”
“물론 네 말대로 그들이 불행할 수 있겠지. 부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보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죄를 짓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목숨을 잃을만한 이유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어떻게 살아갈지 네놈 따위가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야스탄이 말없이 제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협상안이 없다라…… 나 또한 마지막에 널 보았을 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 이곳에 널 따라왔건만…… 아쉽게 되었구나.”
루카스가 냉정히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때였다.
“마지막으로…… 저희를 용서해 주실 수는 없으십니까?”
다시 자리에 앉은 루카스가 야스탄의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야스탄.”
“제발, 제발 한 번만이라도 용서해 주실 수는 없는 겁니까?”
“마지막으로 너희를 그렇게 보낸 것을 후회한다. 우리의 알을 훔쳤고, 인간에게 멍청하게 속아 넘어갔다 한들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은 것은 사실이니 말이다.”
야스탄이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그때 저희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니, 용서가 아니더라도 왜 인간들과 다른 종족들에게 질 나쁜 소문을 퍼뜨려 미움받게 하셨습니까! 그건 너무 비겁한 행동 아니었습니까!?”
꽉 쥔 주먹을 테이블 위에 쾅 내리친 야스탄의 눈에 분노 비슷한 것이 어렸다.
“그래. 그러니 후회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빵 한 조각을 훔친 자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과한 처사이듯이 너희 또한 과한 벌을 받았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도대체 왜! 왜!!! 우리 일족들이 고통받은 세월을 당신이 알긴 하십니까?! 하루아침에 친구였던 이가 돌을 던지고, 이웃에게서 손가락질받았던 그 설움을 아시냐는 말입니다!!!”
“…….”
루카스 역시 그들이 당했던 일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잘못된 소문을 퍼뜨려 그들을 미움받게 만든 것은 사실 루카스의 뜻이 아니었다.
알을 도둑질당했던 부모들의 뜻이었지.
‘하지만 나 역시 말리지 않았으니…….’
공범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에 변명을 할 여지도 없었다.
“그러니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저희는 이제 오갈 곳도 없는 가여운 이들입니다.”
“네놈들이 기대었던 세이렌에게 부탁해 보지 그러느냐.”
“…….”
말이 없었다. 모든 것을 들켜버린 이의 표정이었다.
“왜. 그들이 너희를 배신했느냐?”
루카스가 피식 웃었다.
“…….”
“네놈들에게 그 잘난 게이트를 열어주고 이곳에 넘어와 우리에게 복수하라며 부추기던 이들 아니냐.”
“…….”
“그들에게 다시 열어 달라고 하면 되지 않느냐. 그 잘난 게이트를 말이다.”
야스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야스탄. 원래 모든 생물은 그런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으니 너희에게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야스탄의 눈동자가 루카스를 향했다.
“도대체 무엇을 원했을까요…… 저희에게 말입니다.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는 저희가 아닙니까.”
“저들은 바다를 원했다. 기에스티오는 아주 영특한 자다. 신을 제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놀 만큼 말이다.”
“……바다는 이미 있지 않습니까.”
“온 세상이 바다가 되는 것을 원했다지.”
루카스 역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적잖이 놀랐었다.
‘미친놈.’
아마 ‘그’가 언젠가 이 이야기를 전해주지 않았더라면 영영 몰랐을지도 모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나니 모든 퍼즐 조각이 딱 맞게 끼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뜬금없이 세이렌이 마족들을 구하겠답시고 나설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게 정말입니까.”
야스탄 역시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하…… 어쩐지 이상했습니다. 아무리 저와 제 일족을 돕겠다고 한들, 그렇게까지 나서주는 것이 이상했지요.”
“기에스티오와 연락이 끊어졌겠지.”
“…….”
단순한 추측이었건만 야스탄은 대답이 없었다.
‘진짜인가.’
그렇다면 정말이지 영악하고 악독한 놈이 따로 없었다. 마신이 소멸하고 더 이상 쓸모가 없는 것 같으니 팽한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야스탄.”
“예.”
“우리 일족이 너무도 많이 죽었다.”
“…….”
“몇이나 죽었는지 혹시 아느냐.”
“일곱…… 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알고 있구나. 그렇다면 남은 일족은 얼마인지 혹시 아느냐.”
“여덟입니다.”
“그래. 이번 일로 우린 절반을 잃었다. 너희는 얼마나 잃었느냐.”
야스탄이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3분의 1을 잃었습니다.”
“숫자는 훨씬 많겠지만, 어찌 보면 너희의 피해가 더 적구나. 하지만 천 년 전에 잃었던 일족들이 3분의 1쯤 되었다지.”
야스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너희는 절반을 넘게 잃었겠구나.”
루카스의 목소리가 고요했다.
“나는 어차피 인간의 생을 살다 떠날 몸이다. 하지만 너희들과 드래곤들은 다르겠지. 더 긴 생을 살게 될 것이다. 그동안 서로 이를 갈며 살아가게 될 수도 있다.”
“압니다.”
“이 땅 위에 남아 살아갈 자신이 있느냐.”
“견디겠습니다. 더 이상 일족들을 잃을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나는 인간의 생을 살다 갈 몸이다. 지금의 드래곤 로드는 하셀이지. 그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
“지금 남은 이들도 대부분 누군가를 잃었지. 적어도 천 년은 더 함께할 줄 알았던 이를 허무하게 말이다.”
루카스 역시 눈앞에 있는 야스탄의 목을 몇 번이고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꾹 참아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너무도 가여웠다. 이미 죽어버린 자들을 두고 돌아오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앞으로가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이 일은 장로들과 다시 상의해 보마. 그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다시 한번 피를 흘릴 각오를 해야겠지.”
루카스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야스탄의 눈이 그 모습을 좇았다. 야스탄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더 이상 분노나 슬픔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다시 한번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
“그리고 너희가 돌아오게 되면 인간을 비롯한 다른 종족들에게 안팎으로 나돌 소문 또한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드래곤이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가 돌겠지.”
“…….”
“네 말대로 고고하고 자존심이 높은 이들이니 그걸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모든 협상을 뒤엎고 너희들을 다시 공격할 수도 있겠지.”
“압니다.”
“그리고 세이렌 일족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구나. 양쪽 모두를 배신한 이들이니.”
“그들의 위치를 압니다.”
야스탄이 당장에라도 그들의 위치를 말할 듯 입을 열려던 때, 루카스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더 이상 네게 빚을 지고 싶지 않다. 오늘 널 살려 보내는 것과 협상을 제시한 것으로 천 년 전의 빚은 끝났다.”
그들의 위치를 야스탄에게서 받아버린다면, 장로들과 이야기가 잘 끝나지 않았을 때 마음에 짐이 되고 만다.
“……알겠습니다.”
“행운을 빌어주마.”
루카스가 떠나고, 그곳에 남은 야스탄은 조용히 앉아 호수를 바라봤다.
“이곳을 좋아하셨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잔잔한 호수가 제 마음을 위로하는 것만 같았다.
‘내 목숨을 주고 일족을 살릴 수만 있다면…….’
야스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