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급습 (1)
마왕 야스탄은 지난 전투에서의 패배는 진즉 잊은 듯 평온한 표정이었다.
“흠…….”
올라온 서류들을 찬찬히 살피던 야스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파멜라의 새로운 이름 멜라니와 관련된 서류였다.
‘그 아이가 종을 죽인 건 사실인 것 같고…….’
이미 멜라니가 한 일에 대해서는 보고를 받았고, 이건 그에 대한 증거들이 모인 서류였다.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는군.’
이제 앞으로 멜라니의 행보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마계에 와 자의든 타의든 제 말을 잘 들으며 지내던 아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종을 죽였을까.
‘리월인가.’
멜라니가 돌발행동을 하게 된 이유 중 짐작이 가는 유일한 이유는 리월이었다.
야스탄이 책상 위에 놓인 벨을 누르자, 이내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왕이시여.”
“멜라니를 불러다오. 멜라니와 대화를 좀 나누어야겠다.”
이건 지금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시간이 흐르면 더 곪아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괜한 부스럼을 놔둘 순 없었다.
***
“찾으셨어요?”
파멜라라는 이름으로 마계에 들어왔던 그녀는 이제 누가 보아도 마족의 모습이었다.
윤이 나는 잿빛 피부에 뾰족하게 솟은 작은 뿔까지. 이 모습을 보면 누구도 그녀가 마족이라는 것에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 멜라니.”
야스탄은 멜라니에게 앞자리를 권했다.
“같이 차를 마시고 싶어 불렀다.”
어찌 보면 그녀는 개국 공신이나 다름없었다. 전대 교주였던 알베르토가 죽고 난 뒤 그녀는 눈이 부신 활약을 보였으니까.
“좋아요.”
멜라니가 우아한 몸짓으로 자리에 앉았다.
‘똑똑한 아이다.’
어릴 때부터 어떤 삶을 살았던 건지 그녀는 아주 영민하고 눈치가 빨랐다.
“흠…….”
야스탄이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작게 침음하자, 무언가 눈치챈 멜라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제게 하실 말이 있으시군요.”
“……그래.”
야스탄은 이 아이를 잃고 싶지 않았다. 비록 지금 그녀의 모습이 주술과 마법으로 만들어졌다 한들, 야스탄에겐 제법 소중한 아이였다.
“멜라니. 내가 네게 양녀가 되어달라 했던 날을 기억하느냐.”
“물론이죠. 아직 얼마 지나지도 않은 일인데요.”
멜라니가 싱긋 웃었다.
“나는 네가 정녕 우리의 일원이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언젠가 네가 진정 내 딸이 되었으면 좋겠다.”
한 톨의 거짓도 없는 진실이었다. 야스탄은 누군가를 이용하고 버리는 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이였지만, 이상하게도 멜라니만은 조금 달랐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기뻐요. 저도 같은 마음이에요.”
멜라니 역시 진심이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었으니까.
‘이곳이 아니면 안 되니까.’
야스탄이 멜라니를 지그시 바라봤다.
“멜라니. 왜 네 종을 죽였느냐.”
야스탄의 말에 멜라니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멜라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확한 증거가 없을 수도 있으니 우선 잡아 떼보려는 것이었으나, 소용이 없을 거라는 건 사실 머릿속으로 알고 있었다.
“네 종이었던 크리온을 왜 죽인 거냐 물었다.”
“…….”
“리월 때문인가.”
야스탄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어 나왔다.
“네가 원한다면 리월을 당장에라도 쫓아내 주마.”
사실 멜라니는 그날 리월이 떠들어대던 이야기를 모두 들은 뒤 화가 치밀었고, 홧김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크리온을 죽였었다.
후환을 남기고 싶지 않아서. 또한 자신이 모든 사실을 알았다는 것을 리월이 알게 되면 그가 변할 것이 두려워서.
“……더 이상 버림받고 싶지 않았어요.”
결국 멜라니의 입에서 진심이 터져 나왔다.
“더 이상…… 더는 버림받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그랬어요. 리월이, 리월이…… 모든 걸 알면 저를 먼저 버릴까 두려웠어요…….”
멜라니가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잇자, 야스탄의 눈빛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멜라니의 눈에는 소리 없이 눈물만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던 누군가를 죽이는 것은…….”
야스탄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죽이라 지시했던 자들이 도대체 몇일까.’
너무도 모순된 일이었다.
“널 위해 일한 자를 죽여선 안 된다.”
“…….”
사실 이 말도 어폐가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자들을 몇이나 제 손으로 없애버렸으니 말이다.
“나는 네가 더 이상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란다.”
그는 이미 드래곤들과의 전쟁이 승리로 끝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에라도 마음이 쓰이는 멜라니가 실수하지 않길 바랐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듣지 않아도 알고 있다. 그러니 말해봐라. 리월을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그러자 멜라니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제 눈가를 한번 찍고는 싱긋 웃었다.
“그대로…… 제 곁에 있게 해주세요.”
그녀의 말에 몸에 힘이 탁 빠지는 기분이었다.
당장에라도 리월을 데려와 처형이라도 해달라고 하길 바랐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진 감정은 그것보다 더한 것이었다.
“…….”
야스탄은 그녀가 억지로 짜낸 미소 속에 숨긴 칼날을 보고야 말았다.
“저는 아직 그를 사랑하니까요.”
거짓이었다. 너무도 새빨간 거짓.
‘무슨 일이 나기 전에 처리해야겠군.’
그를 알아차린 야스탄이 생각했다.
***
모든 준비를 끝마친 드래곤들은 마지막으로 상황을 한 번 더 점검했다.
“하셀, 레아디스, 프라이얀, 에네브. 너희 넷은 아까 말했던 대로 내가 신호하거든 가장 먼저 공격을 개시해라.”
실버 일족 넷. 그들이 선발대였다.
루카스는 모든 상황을 고려해 최적의 공격 노선을 짰다.
“예.”
“그리고 엘론과 에라몬드는 후발대다. 엘론은 델러다칸 위쪽을 맡아라. 그쪽에서 게이트가 열리거든 빠르게 알려주고.”
“예.”
“에라몬드는 아래쪽에서 게이트가 열리는지 감시해라. 그리고 내가 신호하거든 엘론과 함께 합류해라.”
“예.”
루카스의 말에 지난번에 마찰이 있던 드래곤을 비롯한 다른 이들 역시 순순히 따랐다.
이미 많은 일족을 잃은 지금 이들끼리 흩어진다면 더는 방법이 없을 테니까.
“하셀이 정리해서 나눠준 유물과 아티팩트는 알아서들 잘 쓰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아벨.”
“예.”
“너는 나와 함께 주변 성유물과 아티팩트 해체를 먼저 맡는다.”
엘라임과 다른 정령왕들이 일러준 정보를 토대로, 이미 대부분의 아티팩트의 위치와 술식은 이미 파악해 둔 상태였다.
“출발하지. 아벨.”
“예. 로드.”
아벨이 루카스의 곁에 바짝 붙어 서자, 다른 이들의 시선이 모두 그들을 향했다.
“차선책은 없다. 오늘이 마지막 전투가 될 테니.”
“…….”
“지킬 수 있을 거다. 아니, 지켜낼 거다.”
루카스와 아벨이 떠났다.
***
정령왕들이 어찌나 정보를 잘 알려줬는지, 설치된 장치들을 해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또한 해체되며 울리게 될 알람 마법까지도 모두 같이 해제한 덕에, 마족들이 이 사실을 알아차리는 데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아벨과 함께 모두 해체를 마친 루카스가 하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지금.]
그러자 하늘 위에 거대한 네 개의 은빛 그림자가 동시에 드리웠다.
-쿠오오오오오!
-쿠아아아아아아!
하늘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엄청난 굉음이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하자, 주변에 선 나무들도 거세게 흔들렸다.
“아벨!”
“예.”
루카스가 아벨의 이름을 불러 자리를 떠났다.
-콰아아아앙!
-콰콰쾅!
-쿠아아아앙!
네 마리의 실버 드래곤이 동시에 쏘아낸 브레스가 델러다칸을 감싼 방어 마법 위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콰쾅!
-콰아아앙!
주변은 애초에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진즉 쓸려나갔다.
-콰아아아아앙!
그 위에 다시 한번 쏘아진 브레스.
-쩌적…… 쩌저적…….
그러자 델러다칸을 감싼 방어 마법이 깨어지기 시작하더니.
-콰아앙! 콰쾅!
엄청난 굉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
델러다칸 안에 머물던 마족들은 갑자기 하늘 위에 생겨난 검은 그림자에 패닉에 빠졌다.
“도, 도망쳐!!!”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나타났다!!!”
“젠장! 텔레포트가 안 돼!”
“모든 마법이 막혔어!”
곳곳에 비상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고, 마족들은 이리저리 날뛰며 제 몸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방어 마법을 더욱 견고히 하려 해도 마법이 써지질 않았으며, 이 상황을 벗어나려 텔레포트를 시전해도 먹히질 않았다.
그때 자신들의 왕인 야스탄의 목소리가 온 곳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다들 지하로 대피해라. 그리고 전사들은 지금 당장 전투태세를 갖추고 성벽으로 모여라.]
왕이 직접 하는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던 것일까. 마족들은 경비병들의 안내를 받아 일사불란하게 대피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이쪽으로 오십시오!”
“지하로 향하는 문 앞에 경비대가 있습니다!”
“아이들 먼저 들어오십시오!”
지상으로 먼저 올라온 이들은 대부분 귀족들이었고, 평민 계층은 그들의 시중을 드는 사용인들이었다.
때문에 경비대는 모든 이들을 빠르고 안전하게 대피시키려 갖은 애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브, 브레스…… 브레스다…….”
앞서간 제 주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사용인 하나가 바닥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하늘이 울리는 굉음. 드래곤의 거대한 입 속으로 소용돌이치듯 빨려 들어가는 시뻘건 화염.
-쿠오오오오오
대기가 진동하는 거대한 울림에 다른 이들 역시 몸이 굳은 듯 멍하니 하늘을 올려봤다.
“다, 당장…….”
지하를 향해 손짓하던 경비대원 역시 몸이 굳었다.
“……우린 모두 죽을 거야.”
희망을 잃은 듯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드래곤에게…… 드래곤에게 대적하다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승리를 자축하던 그들의 얼굴에 절망이 들어찼다.
[당장! 지하로 대피하라!!!]
다시 한번 크게 울려 퍼진 마왕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든 이들이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 수 있다! 우리에겐 위대한 전사들이 있으니!!!”
누군가 소리친 말에 사람들은 용기를 얻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타라스님이 계신다!!!”
“가장 어두운 곳에 빛이 있나니!!!”
가슴께에 타라스를 향한 성호를 그은 이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야스탄님. 드래곤들이…….”
“알고 있다. 먼저 주민들을 모두 대피시키는 게 먼저다. 전사들은 마나 제한을 푸는 데 열중해라. 아직 시간은 있다.”
덤덤하게 말하고는 있지만, 야스탄의 얼굴 역시 파리하게 질려있었다.
‘저들이 먼저 공격해 오다니…….’
저들이 강자의 자존심이라고 여기던 것을 깨고 먼저 공격을 해왔다.
‘지금 막아내지 않으면…….’
-콰아아아앙!
-콰쾅! 콰콰쾅!
그때 방어 장막 위로 브레스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쩌저적! 쩌적!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방어막에 금이 가기 시작하자, 야스탄의 잇새에서 까득, 하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대로 가다간 당하고 만다.’
여태 준비해 온 모든 것들이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
그때 야스탄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지금 써야 한다.’
야스탄이 빠르게 제 품을 뒤져 물건 하나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