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새로운 구도. (1)
그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야비했다.
루카스는 지난 공격 이후 마족들이 며칠은 잠잠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란 듯 빗나가고 말았다.
“젠장 할!”
저택을 둘러싼 수많은 마법 수식과 함께 엮인 아티팩트들이 무차별 공격을 퍼붓고 있었다.
-쾅! 콰쾅!
쉼 없이 일어나는 폭발에 대지가 흔들렸다.
-쿵! 쿠쿠쿵!
엮여 있는 아티팩트와 술식이 도대체 몇 개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콰쾅! 쾅!
루카스가 쏟아지는 공격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는 동안에도 공격은 쉼 없이 쏟아졌고, 그동안 방어 마법은 계속해서 허물어졌다.
‘저들이 이렇게까지 발전하는 동안에 나는, 우리는 도대체 무얼 했는가…….’
해봤자 소용없는 늦은 후회만 밀려들었다.
고작 인간을 공격하고자 쓴 수가 저 정도인데, 정작 드래곤을 제대로 상대할 땐 어떤 수를 쓸지 감도 오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엘라임의 날카로운 말이 정신을 파고들었다.
“그래.”
애써 눈을 부릅뜨고 상황을 똑바로 보려 노력했다.
“하. 얼이 빠졌군. 넬라는 아직 안전하다. 다행히도 그곳까지 뚫지는 못한 듯싶더군.”
“…….”
도통 방법이 생각나질 않았다.
“정신이 나갔군. 이번 건 차라리 내가 해결할 테니 너는 잠자코 지켜나 봐라.”
결국 보다 못한 엘라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움직였다.
“보통 이럴 때 역정을 내면서 ‘네깟 게 뭘 하냐’며 소리를 버럭 질렀을 텐데. 쯧.”
“……부탁하지.”
엘라임의 말대로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엘라임의 움직임을 멍하니 눈으로 좇았다.
-콰쾅! 콰콰쾅!
수없이 쏟아지는 공격들 사이로 들어간 엘라임이 상급 정령을 둘 불러내더니 아티팩트를 하나씩 파괴하기 시작했다.
“아.”
방법은 사실 쉬웠다.
하지만 당황하면 누구나 머리가 새하얗게 변하곤 하지 않는가. 지금 루카스가 겪는 상황이 딱 그러했다.
-콰쾅! 쾅!
어느새 공격이 드문드문해지기 시작했다.
-콰앙……! 쾅!
“되었군. 이곳은 언제나 정령들이 지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고맙다.”
이런 상황에 엘라임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가지.”
엘라임이 저택을 향해 고갯짓했다.
“…….”
하지만 루카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러든지.”
들어가서 좋을 게 없을 거란 판단이었다.
‘작별인사는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생각해 지난번에 가족들을 비롯한 아이들과 모두 인사를 나눴었다.
‘그들은 인사인 줄 모르겠지만.’
어찌 보면 굉장히 이기적인 판단이었다. 하지만 루카스는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엘라임이 저택 내부로 사라지자, 그곳을 멍하니 지켜보던 루카스가 다시 한번 방어 마법을 정비했다.
허물어진 방벽을 다시 두텁게 쌓았다.
‘용언이 있더라면 더 좋을 텐데.’
지난번에 아만과 하셀이 도왔기에 이만큼이나 버텨줬던 것이겠지.
‘아쉬워도 뭐.’
어쩔 수 있나. 저택을 향해 마지막으로 시선을 옮긴 루카스가 작게 웃었다.
***
“캬학! 너 이번에 진짜 뒈질 뻔했더라?”
“닥쳐라.”
타라스는 자신을 찾아온 아구아를 향해 거칠게 말했다.
“캬학! 학! 아주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던데?”
“약 올리러 온 거면 당장 꺼져라. 네가 그러지 않아도 이미 짜증 나 있는 상태니까.”
그러자 아구아는 숨이 넘어가게 웃고는 타라스 앞에 물건 하나를 툭 던졌다.
“……?”
“뭐 고맙다는 인사는 됐고. 다음에 싸울 때 더 좋은 구경거리를 주라는 의미라고나 할까.”
“도대체 날 돕는 이유가 뭐지? 그럴 거면 차라리 내 편에 서서 싸워주면 될 텐데.”
타라스의 말에 아구아가 피식 웃었다.
“야. 너는 꼭 그렇게 선을 넘더라?”
아주 같잖다는 듯 비아냥거린 아구아가 타라스 앞에 털썩 앉았다.
“넌 그게 문제야. 자꾸 주제를 몰라.”
“……그게 무슨 말이지?”
“지금이라도 나는 네 모가지를 따버릴 수가 있어. 아모레는 뭐 좀 어려우려나? 그런데 내가 왜 나보다 약한 놈 편에 서서 싸워야 하냐고.”
“…….”
아구아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그 역시 태초부터 존재했던 신이었고, 게다가 세상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물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물의 신. 그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다.
“내 말이 틀려? 나는 그냥 너희들 싸움이나 구경하면서 지루한 생에 한 줄기 재미라도 얻어보겠다고 하는 건데 내가 왜 널 돕냐고. 이 정신 빠진 새끼야.”
도저히 신이라고는 볼 수 없는 언행. 이런 아구아를 두고 주신은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미친놈’이라고 말이다.
자신이 빚어냈지만 도저히 어떻게 만들어진 건지 모르겠다는 물의 신 아구아.
이런 아구아를 두고 다른 신들 역시 똑같이 말하곤 했다. 미친놈이라고 말이다.
주신이 약에 취해 만든 게 아니냐는 말까지 돌았으니 뭐.
“그러니까 제발 나대지 좀 마. 알았어? 그냥 내가 도와줄 때 고맙습니다~ 하란 말이야. 난 네가 주신의 자리에 올라선 이후에도 당장에라도 그 권능을 빼앗을 자신이 있으니까.”
거칠고 당당했다.
“꺼져라.”
하지만 타라스도 저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드워프들의 신인 불의 신 역시 강한 신이었지만, 아구아에 비할 것은 못 되었으니까.
불은 물을 이길 수 없다. 게다가 모든 곳에 존재하는 물이라면 더더욱.
“그래. 꺼져줄 테니까 꼭 다음 싸움은 더 흥미진진하게. 알았지?”
아구아가 싱긋 웃고는 떠났다.
“……젠장!”
기분이 아주 엿 같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아구아는 그만큼 강한 신이었으니까.
아구아가 던져둔 물건을 집어 든 타라스의 입가가 살짝 떨려왔다.
‘이걸…… 준다고?’
물건의 정체를 본 타라스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도대체 저 자식이 원하는 게 뭐지?’
헤르도네를 소멸시킬 수 있었던 것도 아구아의 도움이 컸다. 그런데 이번엔 아모레까지 한 번에 보내버릴 수 있는 물건을 가져다주었다.
‘사랑의 신의 약점…….’
아구아가 던져준 물건은 주신의 물건 중 하나인 ‘배반의 돌’이었다.
사랑에 있어 가장 치명적인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배신과 의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타라스의 손에 쥐어진 ‘배반의 돌’은 아모레에게 가장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생각에 잠긴 타라스가 의자에 몸을 깊이 기댔다.
“하아…….”
자신이 과연 잘하고 있는 건지 작은 의구심이 들었다.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하지만 이제 되돌리기엔 너무도 멀리 와버렸기에…….
‘해야만 한다.’
***
세이렌들은 새롭게 옮겨진 그들의 터전에 적응하는 중이었다.
“오! 자네 왔는가!”
“기에스티오!”
기에스티오가 투르캄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짓했다.
“그래. 어서 이쪽으로 오시게!”
“기에스티오. 우리 마을 사람들 연락은 아직인가?”
투르캄은 어느 날 갑자기 마을과 연락이 끊겨버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 내가 듣기로는 지상에서 한바탕 커다란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던데…….”
“하지만 우리 마을은 괜찮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 맞네. 자네 마을은 괜찮은 게 확인이 되었네만, 그곳에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하더군.”
“이런! 안 되겠어. 내가 아무래도 나가봐야…….”
그러자 기에스티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안 되네. 그러다가 자네도 험한 일을 당해버리면 이곳에 남은 자네 동족들은 어쩐다는 말인가!”
기에스티오의 진심 어린 걱정에 투르캄은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그래.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게나. 내가 꼭 자네 마을 소식은 전해줄 테니 말일세.”
“알겠네. 그럼 소식이 들려오거든 꼭, 꼭 내게 가장 먼저 알려주게나. 응?”
“그럼! 물론일세. 물론이야.”
투르캄이 어두운 표정으로 방을 빠져나가자, 기에스티오는 혀를 쯧 찼다.
“쯧. 이제 식량도 오질 않으니…… 저 식충이 같은 것들을 어째야 좋을꼬!”
자신이 마왕을 도왔던 흑막인 것이 밝혀진 이상, 지상에 나가 식량을 구하기도 여의치가 않았다.
저들에게 그저 물고기나 계속 공급하면 문제는 없겠지만, 다른 것도 아닌 술이 문제였다.
드워프들은 매일같이 술을 미친 듯 마셔대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술이 귀했다. 물론 만들 수는 있었지만, 그래 봐야 해초나 그런 것들을 이용해 만든 술뿐이었다.
‘게다가 입맛은 어찌나 까다로운지!’
그들은 미식가였다. 바다에서 난 어지간한 음식들로는 저들의 입맛을 충족시키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아직 만들 게 많으니…….’
당장 쫓아낼 수도 없었다.
“흐음…….”
고민을 거듭하던 중 기에스티오의 앞에 작은 빛무리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아, 아구아님?’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운이었지만, 기에스티오는 단박에 기운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여어~ 물고기~]
아구아였다.
“아, 아구아님을 뵙습니다!”
새하얀 빛무리에서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그래.]
모습은 모두 드러내지 않았지만, 분명 아구아였다.
[잘 지냈어? 우리 물고기 집 이사했네?]
“예, 예. 그…… 사정이 있어서…….”
해봤자 소용없는 거짓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는 난폭한 신이었으니까.
[그래. 그 사정이란 게 타라스를 돕는 일이라지?]
“…….”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었다. 아구아는 모든 걸 알고 찾아왔다.
[야. 너무 그렇게 쫄지 마. 어? 내가 너 타박하러 온 건 아니니까.]
“……예.”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래. 타라스 돕는 일은 잘 돼 가? 아닌 거 같던데. 이번에 싸운 게 처음 아니었나? 그런데 보기 좋게 당했다던데.]
“예…….”
[캬학! 학! 진짜 웃긴다. 야. 너 그래도 싸울 거면 이겨야지 지고 그러면 어떡해. 내 면이 안 살잖아.]
높은 목소리로 웃어 젖혔던 아구아의 음성이 일순 낮게 가라앉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기에스티오가 숙였던 머리를 더욱 바짝 숙여 바닥에 붙였다.
[그래. 그래. 죄송해야지. 내가 얼마나 창피하던지. 쯧! 그래서 말인데…….]
기에스티오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좀 도와줄까?]
“……!?”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기에스티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구아가 갑자기 나서서 돕겠다니?’
이건 필시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 내가 뭐 생각을 좀 해봤거든? 그런데 어디 가서 지고 다니는 것보다야 이기는 게 낫잖아. 그치?]
“예. 맞습니다.”
[그러니까 좀 도와줄까 하고.]
기에스티오가 고개를 살짝 들어 빛무리를 올려봤다.
“어떤 도움인지는 몰라도…… 사실 걱정이 조금 됩니다.”
기에스티오의 말에 빛무리가 흠칫 흔들렸다.
[걱정? 무슨 걱정?]
날카로운 아구아의 목소리에 몸을 슬쩍 웅크린 기에스티오가 이내 꿋꿋이 말을 이었다.
“건방진 말이라는 것은 알지만…… 제가 알기로는 마신 타라스님께서 주신의 권능에 도전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여 타라스님의 승리가 아구아님께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면…….”
그러자 빛무리가 일순 환하게 빛나더니.
[야.]
아구아가 현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