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전략적인 선택. (1)
당장에라도 모두 날려버릴 기세로 세이렌 영역으로 향한 루카스는 그 자리에 멍하니 멈춰 서있었다.
“…….”
아무것도 없었다.
혹시 잘못된 좌표로 텔레포트한 것은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다시 해봤지만, 결과는 똑같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몇 번이나 빛을 비춰봐도 그곳은 그저 심해일 뿐이었다.
원래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젠장 할!’
흔적조차 없었기에 그들을 찾는 시도를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어둡고 컴컴한 바다 덕에 정신이 돌아온 루카스가 다시 텔레포트했다.
물 밖으로 나오자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하셀이 보였다.
“괜찮으십니까?”
아무 일도 없이 돌아온 것이 다행이었다.
“그래. 당장 돌아가지.”
당장 돌아가야 했다. 이곳에서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에스카르 산맥에서는 전쟁이 치러지고 있을 테니까.
***
돌아온 에스카르 산맥의 상황은 전보다 조금 나아져 있었다.
-쿠아아앙!
본체로 돌아간 엘라스가 쏘아 낸 브레스가 몬스터들을 한 번에 쓸어 냈다.
-콰쾅! 콰직!
아모레의 천사들 역시 선방하고 있었던 듯 타라스의 천사들 중 몇몇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레아디스와 엘론은…….’
어둠의 안식에 잠식되었던 레아디스와 엘론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콰쾅! 콰콰쾅!
그때 하늘에서 물의 상급 정령인 엔다이론의 공격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엘라임?”
-콰쾅! 쾅!
물과 얼음으로 이뤄진 방벽이 마족들의 움직임을 묶고, 수백 개의 얼음 창이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라노스.”
엘라임이 저벅저벅 걸어 루카스 앞으로 다가왔다.
“……왜 이제야 왔는가.”
“미안하다.”
그리도 간절히 불렀던 이름이었다.
아만의 눈동자가 빛을 잃어갈 때. 그의 숨이 꺼져갈 때 외치고 또 외쳤던 이름이었다.
“왜…… 왜 이제야…….”
이제 와 그의 탓을 한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루카스 역시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탓이라도 하지 않으면 미칠 것만 같았다.
불과 며칠 만에 수많은 동족을 잃었고, 소중한 이들을 잃었다.
“다시 한번 미안하군. 하지만 정령계도 위험했다는 것만 알아주게.”
루카스가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레아디스와 엘론은 내가 치유했다.”
“……고맙다.”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으니 지금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먼저 이곳을 정리해야겠다. 좀 도와주겠나.”
루카스가 엘라임에게 물었다.
“뭐 그런 걸 다 묻고 그러는가. 저들은 나의 적이기도 하다.”
엘라임이 피식 웃고는 전장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루카스 역시 주변을 한번 슥 둘러보고는 공격을 개시했다.
-콰아아앙!
마족들은 마력 공급책으로 쓰이던 프라이얀이 사라져서인지 점차 공격이 잦아들고 있었다.
‘천사 놈 먼저.’
안 그래도 마음에 안 들던 차였다.
“영영 소멸시켜 주마.”
루카스의 몸이 순식간에 솟구쳐 올랐다.
-콰아앙!
아모레의 천사와 대적하고 있던 타라스의 천사가 갑작스런 루카스의 공격에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너 나 알지?”
“인간 놈이……!”
타라스의 천사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루카스를 향해 돌진하려던 차였다.
“꺼져라. 인간. 네깟 놈이…… 아. 너였군.”
그런 그를 막아선 아모레의 천사가 말했다. 이제야 루카스를 알아본 듯했다.
“너나 비켜.”
루카스의 건방진 언행에도 불구하고 아모레의 천사는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며 길을 터줬다.
“그러지.”
루카스가 손에 얼음 창을 들고 타라스의 천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카앙!
루카스의 얼음 창이 천사의 검에 가로막혔다.
“인간 주제에!!! 아모레의 가호를 받고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앞으로 찔러 들어온 검을 몸을 돌려 피해 낸 루카스가 다시 창을 찔렀다.
-파앙!
천사의 귓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난 창이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귓가를 울렸다.
-콰각!
내리 베는 천사의 검이 루카스의 창에 가로막히고.
-투확!
다시 한번 내질러진 루카스의 창이 천사의 허리춤을 스치고 지나갔다.
날개를 넓게 펼친 천사가 뒤로 훌쩍 물러났다.
‘저 날개를 먼저 썰어 없애야겠군.’
-쐐액!
제 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오자 천사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투욱. 투둑.
“크아아악!!!”
깔끔하게 잘린 천사의 두 날개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검을 들었기에 나 또한 똑같이 상대해주려 했다만.”
하늘에서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무언가.
-콰득! 콰드득!
흡사 손바닥 모양과 흡사한 그것이 천사의 몸을 으깨버렸다.
“시간이 없어서 말이야.”
루카스가 등을 돌렸다.
“잔혹하군. 천사를 향해 그런 짓을 벌일 수 있는 인간은 너뿐일 거다.”
그 모습을 본 아모레의 천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칭찬해주니 고맙군.”
루카스가 어깨를 한번 으쓱인 뒤 다른 곳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어딜 감히 도망치려고!!!]
앨라스의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하늘에 울려 퍼졌다.
“도망가는군.”
마족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었다.
[이리 안 와?! 이런 쥐새끼 같은 X발 자식들아!!!]
“…….”
게다가 남아있던 타라스의 천사들 역시 사라지고 있었다.
‘타라스의 명령인가.’
모두 함께 후퇴한다는 것은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지금 쫓아선 안 된다.’
저것 역시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셀. 우리 역시 돌아간다.]
루카스가 하셀에게 전음을 보냈다.
[예.]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
기에스티오가 마족들과 함께한다는 것을 알고 나니 모든 것이 짜 맞춰지기 시작했다.
마왕인 야스탄은 전생에서부터 알던 자였다.
‘하지만 야스탄의 머리에서 나올 수 없는 생각이었지.’
안 그래도 배후에 누군가 있을 거란 생각을 하긴 했었다.
“하셀.”
레어로 돌아온 하셀과 루카스는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았다.
“예. 로드.”
“많은 이들을 잃었다.”
“…….”
하셀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아마 죽어버린 이들이 모두 생각난 거겠지.
“미안하구나. 아마록을 지키지 못해서 말이다.”
“아닙니다. 아마록은…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하셀이 슬프게 웃었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마. 아마록을 꼭 다시 만나게 해주마…….”
하셀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루카스의 웃음 역시 슬펐다.
“그래…….”
“오늘 마족들의 전력이 상당했습니다. 오늘도 동족들을 잃을 뻔했어요.”
이가 부득 갈렸다. 오늘도 레아디스나 엘론을 잃었더라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래도 프라이얀을 되찾아왔으니…… 오늘은 승리했다고 해도 괜찮겠군.”
하셀과 상의할 일이 산더미였다.
“그런데 그 세이렌은…….”
루카스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왕과 함께하는 듯싶더군.”
“세이렌이 말입니까?”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어찌 된 사연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일어난 일들이 모두 세이렌의 머릿속에서 나온 생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루카스가 겪은 기에스티오는 똑똑한 이였다. 해맑은 웃음은 그저 제 본모습을 가리려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 생각이 맞았을 줄이야.’
그가 알던 야스탄은 솔직한 자였다. 권모술수에 능하지 못했으며 누군가 쓰는 수도 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언제나 정확히 아는 자였다. 그렇기에 더욱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기억하느냐. 야스탄이 내게 와서 처음으로 용서를 구했던 날을 말이다.”
“예. 기억합니다.”
“그래. 나도 그날이 똑똑히 기억난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보는 내가 가슴이 다 아프더군.”
해츨링 알을 훔쳤던 그가 다시 돌아와 용서를 빌었던 날. 그날 야스탄은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울며 바닥에 엎드려 빌었다.
“그랬었죠.”
“그래. 그 모습을 너도 봤으니 하나 묻겠다. 그의 눈물이 거짓이라고 생각하느냐?”
하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날의 눈물은 진실이었지. 아주 슬픈 눈물이었다.”
“예.”
“그리고 너 역시도 야스탄을 알고 지냈으니 하나 더 묻겠다. 그가 이 모든 일을 계획했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모두 야스탄의 머리에서 나왔다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요.”
하셀 역시도 루카스와 생각이 같았다.
“그래. 하셀. 나 역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날 야스탄이 원했던 것은 용서였다. 그리고 그가 마계로 떠나던 날 원했던 것 역시…….”
“용서였지요.”
마족들을 가엾게 여긴 마신이 새로운 마계를 부여받아 그들을 이주시키던 날 마지막으로 야스탄이 찾아왔었다.
그는 그날도 눈물로 호소했다.
‘다시는 눈에 띄지 않을 테니…… 제발, 제발 용서만 해주십시오.’
그리고 루카스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가슴은 아팠지만, 그 역시도 용서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래. 그랬었지.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날 역시 용서를 원했다. 그리고 그날… 그들은 마계로 떠났다.”
“그렇게 떠날 줄은 몰랐는데 말입니다.”
정말이지 깔끔하게 사라졌다. 혼혈이 아닌 순혈 마족들은 모조리 사라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야스탄이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 역시 용서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땅 위에 남은 동족의 혼혈을 제발 박대하지 말아 달라는 호소문과 함께 말이다.”
“예. 맞습니다.”
“그런 야스탄이 천여 년도 더 지난 지금에서야 복수를 꿈꿨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게다가 내가 만난 타라스 역시 그랬다.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고 운을 띄웠지만, 그 역시 솔직한 이였지.”
“아무래도 마족들은 마신의 거울이나 다름없으니 말입니다.”
마족들은 그들의 신인 마신을 본 따 만들어졌다. 때문에 마신이 가진 성격이나 특징을 마족들 역시 어느정도 가지고 있었다.
그 특징 중 솔직함이 있었다.
“그래. 그런 마신이 갑자기 마왕의 이야기를 듣고 주신의 권능에 도전한다는 것도…… 나는 조금 미심쩍구나.”
“하지만…… 아무리 왕이라 해도 세이렌이 마신의 결정에 콧바람을 넣을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말도 맞다. 하지만 다른 신을 이용했다면 어떻겠느냐.”
루카스는 기에스티오가 가진 엄청난 성유물들과 아티팩트를 보았다.
“흠…… 거기까진 억측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젠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둬야 한다. 기에스티오가 저들을 쥐락펴락 하고 있는 것 같으니 우리 역시 그에 대한 준비를 해야겠지.”
루카스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신계는 지금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소멸한 신들의 숫자 역시 엄청나다. 하급 신들은 물론이고 중급 신과 상급신도 몇몇 소멸했으니 말이다.”
그러자 하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헤르도네가 소멸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태초부터 존재했던 신의 소멸. 그것이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는 불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래. 그러니 우리도 이제부터 전략적으로 싸워야 한다.”
루카스는 앞으로 싸울 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전략적으로…….”
하셀이 루카스의 말을 곱씹었다.
“그래. 저들이 더럽게 굴었던 만큼 우리도 더럽게 굴 것이며. 저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 역시 그렇게 싸울 것이다.”
“…….”
“더 이상 동족을 죽게하지 않을 것이다.”
루카스가 두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