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드래곤, 아카데미 가다!-190화 (190/225)
  • 190화. 시작된 전쟁 (3)

    허전해진 한쪽 팔과 달리 아직 선명히 느껴지는 엘라임의 기운.

    하지만 엘라임은 소환에 응하지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을 너와 나 둘이서 해결하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앨라스는 지금 어디에 있지?”

    대륙 전체에 몬스터들이 퍼져있었다. 영혼을 잃은 몬스터들은 자아를 잃고 무자비한 살육을 반복할 뿐이었다.

    “앨라스는 지금 에스카르 산맥에 있습니다. 남아있는 드래곤들 역시 그곳에 있습니다.”

    괜찮은 선택이었다. 모든 곳이 점령당한 지금은 어느 한 곳이라도 제대로 지켜내는 편이 나았으니까.

    “지금부터 더 이상 전력을 손실할 수는 없다.”

    “저희는 괜찮을 겁니다. 언제나 그랬으니 말입니다.”

    하셀의 대답에 루카스가 버럭 소리를 쳤다.

    “아직도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다니!!!”

    “…….”

    “그 안일한 생각이 너희를 죽인 것이다. 왜 아직도 그걸 모르느냐!”

    하셀이 입을 꾹 다물었다.

    “고고하고 잘난 우리 동족들이 죽은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너무 강해서, 너무 잘나서!!!”

    울분이 터져 나왔다.

    “아만이 죽었다. 바로 내 앞에서. 우린 이미 절반을 잃었다.”

    하셀이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너마저 잃을 수는 없다. 하셀…….”

    하셀마저 잃게 된다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몰랐다. 모든 것이 제 업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이라고 말이다.

    내가 만약 마족들을 용서했더라면? 그들을 마계로 내쫓지 않았더라면?

    이런 온갖 생각이 매일같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 역시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후회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미 벌어진 일을 두고 후회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자꾸 벌어질 때마다 후회가 물밀 듯 밀려왔으니까.

    “알겠습니다.”

    “우선 에스카르 산맥을 지켜라. 그리고 다른 드래곤들에게 계약된 정령왕을 모두 소환해보라 명해라.”

    “예. 로드.”

    “나는 남아있는 이종족들을 찾으러 가마. 그들의 명맥을 모두 끊어버릴 수는 없으니 말이다.”

    마을이 아무리 초토화되었다 해도 살아남은 자들은 분명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위험하실 수도 있습니다.”

    하셀의 걱정에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마족들은 나를 어찌하지 못할 게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제 존재를 아직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남은 이들을 불바다에 던져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느냐.”

    “…….”

    “그것이 우리가 가진 사명이고 책임이니 말이다.”

    단 하나가 남아있다 하더라도 지켜야 했다.

    “예. 로드.”

    ***

    마족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마계를 떠나 지상으로 올라오는 것에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제는 없었다.

    상대조차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드래곤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고 마족들의 피해는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크하하하!”

    술잔을 높이 든 마족 하나가 호탕하게 웃었다.

    “야! 마셔, 마셔!”

    “이 새끼 이거 면죄부가 아니라 작위까지 받게 생겼어!”

    가면을 벗어 던지고 본래 제 모습을 찾은 리월은 여느 때보다 기뻤다.

    사랑하는 여인은 내일 지상으로 올라올 것이다.

    “이제 그 지긋지긋한 인간년도 끝이다! 크하하하!”

    “야, 너 그래도 괜찮겠냐? 마왕님께서 그 인간 계집을 입양하셨다던데?”

    술을 벌컥벌컥 들이킨 리월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그 인간 계집이랑 결혼만 하고 작위만 받으면 돼. 그리고 우리 세라핌은 내 첩실로 들이면 되고.”

    “허? 그럼 세라핌이 가만히 있겠냐?”

    “푸하하하! 가만히 못 있을 건 또 뭔데? 어차피 인간 계집은 우리 세라핌과 경쟁조차 안 될 텐데. 안 그러냐? 나한텐 세라핌 하나뿐이라 그거야. 어? 알잖아!”

    그러자 다른 마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내가 세라핌이어도 이해하겠다. 어차피 첩실이라 한들 정실이랑 다를 게 없을 텐데 뭐. 안 그러냐? 불쌍한 건 그 인간 계집이지.”

    “맞지. 간이며 쓸개며 다 빼줬을 텐데. 쯧. 아, 그럼 마왕님께서는 그러라고 하시려나?”

    그러자 리월이 술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뒀다.

    “야! 마왕님께서는 나를 영웅이라 칭찬하시는데! 나 아니었으면 그 인간 계집이 꼬드겨지기라도 했을 거 같냐?”

    리월의 목소리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어이! 술 좀 더 내와.”

    “하여튼. 이 자식은 진짜 난 놈이라니까? 아니 그 뒷골목에서 빌빌거리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인간 계집을 꼬드겨 별채까지 받아내고 말이야.”

    “그것뿐이냐? 시종에 술에 음식에! 크- 한번 사는 인생 리월처럼 살아야 맞는데.”

    그러자 리월은 기분이 좋은 듯 다시 술잔을 높게 들어 올렸다.

    “야! 마셔! 앞으로 잘보여라. 어?”

    “물론입니다요!”

    허공에서 잔이 부딪혔다.

    ***

    방에 홀로 남은 파멜라는 돌아오지 않는 리월을 기다렸다.

    ‘벌써 며칠짼지…….’

    그는 변했다. 마족들의 일을 돕겠다는 핑계로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았다.

    파멜라가 이젠 완연한 잿빛으로 변한 제 팔을 내려봤다.

    ‘신기하네.’

    맨 처음엔 조금 징그러웠다. 피부가 잿빛이라니?

    게다가 푸른빛도 조금 맴도는 것이 마치 뱀이 가진 색 같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참 신기했다. 온통 잿빛 피부인 마족들 속에 섞여 있다보니 이게 자연스러운 것처럼 느껴졌다.

    게다가 제 시종을 드는 시녀들 역시 피부에 맞춰 옷이며 장신구를 치장해 주니, 잿빛 피부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흐음…….”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마족들은 승리를 거의 확신하고 있는 듯 보였다.

    대단하긴 했다. 드래곤은 엄청난 존재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리도 쉽게 승기를 잡다니.

    ‘별채에 있으려나?’

    처음 그에게 별채를 내준 뒤로 찾아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별채를 원하던 그가 했던 말이 자꾸만 생각났다.

    ‘남자들은 원래 혼자 있을 공간이 필요한 겁니다. 파멜라. 그렇지 않으면 가정에서 겉돌 수도 있어요.’

    그 말에 파멜라는 즉각 별채를 내줬다. 어차피 가지도 않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마족들을 돕기 위해 필요한 공간이라고 하니, 더욱 내줘야 할 것만 같았다.

    “별채로 가야겠어요.”

    이제 대접을 받는 것도 꽤 익숙해졌다. 마왕이 딸이라 부르는 사람이 되고 나니 몸짓 하나도 허투루 할 수는 없었지만, 이 또한 꽤 즐거웠다.

    “파멜라님. 별채엔 지금 리월님과 친구들이 계십니다.”

    시종 하나가 파멜라를 만류했다.

    “그렇다면 더욱 잘 되었네요. 그의 친구들인데 저도 인사는 해야겠지요.”

    평소라면 알겠다며 몸을 돌렸겠지만, 오늘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서요.”

    파멜라가 싱긋 웃으며 시종을 재촉했다.

    “예.”

    결국 시종이 파멜라의 외출 준비를 도왔다.

    ***

    별채에 거의 다 도착했을 때쯤 열린 창문 밖으로 리월과 그의 친구들이 떠드는 목소리가 왁자지껄하게 들려왔다.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고 계시나 보네.’

    저를 따라 이곳에 온 리월이 새로 사귄 친구들과 즐겁다니 안심이 되었다.

    별채와 이어지는 작은 정원을 지날 때 문가에 서 있던 시종 하나가 헐레벌떡 안으로 향하는 것을 보았다.

    ‘뭐가 저리 급할까.’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별채에 한 걸음씩 가까워질수록 술이 얼큰하게 취한 리월의 목소리가 더욱 또렷이 들려왔다.

    “그래서?”

    혹시나 싶었는데 억양을 들으니 리월의 목소리가 확실했다. 파멜라가 귀를 더욱 쫑긋 세웠다.

    “나는 그냥 그 인간 계집이랑 결혼만 하고 작위만 받으면 돼. 그리고 우리 세라핌은 내 첩실로 들이면 되고.”

    파멜라의 걸음이 멈춰 서고, 옆에 선 시종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시종은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저 이야기를 듣지 못했기를.

    하지만 파멜라는 똑똑히 듣고 말았다. 리월이 뱉는 저 말들을 말이다.

    “날씨가 조금 차네요. 그렇죠?”

    하지만 파멜라는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시종에게 말을 붙였다.

    “아, 예. 파멜라님. 혹시 추우시면 다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럴까요? 이제 생각해 보니 리월님께서 친구분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것을 방해하는 건 좋은 행동이 아닌 것 같아요.”

    파멜라는 입을 움직이면서도 귀를 열고 그들의 대화를 끝까지 들었다.

    그들의 대화가 이어질수록 설마, 하는 마음은 점점 옅어졌다.

    “예. 그럼 돌아가시지요.”

    “그래요.”

    별채에서 등을 돌려 걷는 파멜라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조금 전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어지러이 돌아다녔다.

    ‘리월은 인간이 아니다.’

    그는 저와 같은 인간이 아니었다.

    ‘지금 가진 모습은 리월의 본모습이다.’

    그는 여태 자신을 속였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이유가 무엇이든 용서할 수 없었다.

    ‘제발 아니길 빌었는데.’

    배신은 수없이 당했다. 평생 남자를 믿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왔다.

    ‘리월 너만은 내게 그랬으면 안 됐어.’

    마지막으로 믿었던 남자였다.

    ‘더 이상 당하고만 살진 않을 거야.’

    이젠 내게 힘이 있으니까.

    마지막까지 미뤄뒀던 의심의 조각들이 모두 맞춰졌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춰진 조각들을 두고 다시 한번 ‘설마’라는 자비 아래 의심을 거듭하진 않을 것이다.

    ‘이미 수 없이 겪었으니까.’

    차가운 밤바람이 파멜라의 치맛자락을 슥 훑고 지나갔다.

    “바람이 차니 산책을 좀 더 하고 싶은데…… 혹시 좋은 장소를 알고 있나요?”

    파멜라가 시종을 향해 물었다.

    “정원은 어떠신가요.”

    “흐음…… 이곳에 핀 꽃은 조금 인위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저는 조금 더 자연을 보고 싶어요. 아, 정원 뒤에 난 숲길은 어떤가요?”

    그러자 시종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숲길…… 말씀이십니까. 조금 위험할 텐데요.”

    “위험하긴요. 이곳 주변은 마신님의 가호가 함께하는걸요. 설마 타라스님의 가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자 시종은 마른침을 꿀꺽 삼켜내고 힘겹게 대답했다.

    “설마요. 절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안내해 주겠어요?”

    “예. 파멜라님.”

    시종이 라이트 마법을 쓰며 앞으로 먼저 걸어갔다.

    나뭇잎이 바람에 나부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웠다.

    “공기가 참 좋네요.”

    파멜라가 평소보다 조금 더 상냥했다.

    “예…….”

    앞장서는 시종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 당신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요. 당신 가족들은 어디에 있죠?”

    파멜라는 평소에 개인사 따위를 묻는 인물이 아니었다.

    “가족들은 아직 마계에 있습니다.”

    시종은 거짓말을 했다. 그는 가족이 없었다.

    “저런…… 가족들이 많이 보고 싶으시겠어요.”

    파멜라는 시종의 거짓말을 훤히 꿰고 있었다. 시종의 신상은 그가 집에 들어오기 전 파멜라에게 서류로 모두 보고되니 말이다.

    “예. 조만간 올 겁니다.”

    시종이 뒤를 돌아보며 말하자, 파멜라가 싱긋 웃었다.

    “그럴 필요 있나요.”

    “……예?”

    “지금 만나러 가면 되죠.”

    파멜라의 손에서 검붉은 빛줄기가 뻗쳐 나와 순식간에 시종을 덮치자, 시종이 선 자리엔 말라비틀어진 새까만 조각들이 남았다.

    “미안해요. 또 다른 배신은 나도 힘들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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