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시작된 전쟁 (2)
“엘라임…… 제발 엘라임을…….”
하얗게 변했던 꼬리가 끝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하…… 흠집이 조금 많이 났었나 보네요.]
아만의 웃음이 힘겨웠다.
“아마록, 아마록. 정신 차려라. 그래, 내 창고… 창고 가져가야지…… 응?”
아만의 커다란 얼굴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은 루카스의 손이 그를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어떻게 해서든 그의 정신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드래곤 하트가 다쳤지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엘라임만 온다면 아만을 살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그거요…….]
아만이 피식 웃었다.
[그거… 없잖아요…… 저 다 압니다.]
루카스의 잇새에서 작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꼬리 끝에서 시작되었던 빛무리가 점차 크기를 키우고 있었다.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하지만 감정을 모두 드러낼 수 없었기에 터져 나오려는 무언가를 꾹 눌러낸 루카스가 담담히 말했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거 못 찾으시잖아요…….]
아만이 힘없이 웃었다. 모든 걸 안다는 듯.
“…….”
루카스의 입가가 떨려왔다.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어떻게든 참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럼 왜 여태 모르는 척했느냐.”
[……좋으니까요.]
“뭐가 말이냐.”
[로드가 좋아서 그랬습니다. 로드를 돕는 것도 좋고…… 뭐 창고 얘기가 나올 때마다 당황하시는 모습도 재밌고.]
아만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려 땅을 적셨다.
눈물이 떨어진 땅이 젖어 짙은 빛으로 바뀌었다.
“크흐윽…….”
결국 참아냈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이젠 애써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가 없을 만큼 사라져 버린 아만의 몸.
팔에 새겨졌던 계약의 인도 희미해지고 있었다.
“엘라임……!”
울먹이는 루카스의 목소리가 뭉그러지며 터져 나왔다.
제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그가 나타나 주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
[로드. 저는 괜찮습니다. 영혼은 있잖아요. 상황이 뭐…… 그리 나쁘진 않은데요? 하하.]
최대한 괜찮은 척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아만의 숨은 꺼져가고 있었다.
눈꺼풀은 조금 전보다 훨씬 느리게 움직였으며, 내뱉는 숨이 짧았다.
아만은 죽어가고 있었다.
“제발, 아마록. 제발 말 좀 그만해라. 제발…….”
말을 할 때마다 생명력이 더욱 깎이기라도 하는지, 단어 하나를 뱉을 때마다 몸이 흩어져 사라지는 게 눈에 보였다.
[괜찮아요. 어차피 로드께서 다 해결하실 거잖아요.]
아만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그러니 울지 마세요. 사실 저 엄청 당황스러워요.]
“안 운다. 누가… 누가 운다고…….”
그도 알고 있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는 것을 말이다.
목소리는 이미 울음에 잠겨 먹먹했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먼지가 들어갔다는 변명으로는 턱도 없었으니까.
[예. 뭐. 그렇다고 치죠.]
아만의 몸을 이루던 것들이 새하얀 빛이 되어 하늘에 흩날렸다.
이제 아만의 몸을 이루던 것들은 반도 채 남지 않았다.
[뭔가… 징그럽네요. 차라리 빨리 흩어지면 좋을 텐데.]
아만의 눈동자가 흩어진 제 몸체를 한번 슥 훑고 천천히 돌아왔다.
“시끄럽다. 지금이라도 엘라임만, 엘라임만 온다면…….”
[헤헤. 이제 엘라임도 힘들걸요.]
“아니, 아니다. 그러니 그런 말 하지 말아라. 제발, 제발 하지 말아.”
아만의 얼굴을 어루만지던 루카스의 손에 힘이 가득 실렸다.
아만의 얼굴을 아래로 꾹 눌러 내린 루카스의 팔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래도… 안 될 건데…….]
비아냥거리는 아만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 흐윽… 래도… 안, 안 될 거예요…….]
제 얼굴을 눌러 내리는 작은 인간의 몸도 함께 떨렸다.
마치 이렇게 하면 아마록이 떠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를 땅에 붙들어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마록, 내가 창고는 꼭 찾아서 주마…… 그러니, 그러니 가지 말아라. 아직은 안 된다…… 이번 생을 끝내지도 못했는데. 약속은 지켜야지. 응?”
아마록의 눈에서 커다란 눈물방울들이 뚝, 뚝 떨어졌다.
[로드… 흐으… 꼬맹이들 앞에서 울기 싫었는데… 드래곤은 멋진 줄로만 알았을 텐데. 진, 짜… 창피하네요.]
아마록의 말이 끅, 끅, 하는 소리와 함께 끊겨 들렸다.
그들을 지켜보는 아이들의 눈에도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꼬, 맹이들…… 그래도 많이 컸다. 앞으로도 잘 커라.]
그러자 루카스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크려면 한참 멀었다. 나도 아직 덜 컸으니 제발 가지 말아라. 아마록, 제발…….”
루카스가 제 가슴을 쾅 내리쳤다. 가슴이 미어졌다.
아무리 힘을 줘도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로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는 거겠죠……?]
아마록이 희미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심장께까지 올라온 새하얀 빛무리를 본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팔에 힘도 주지 않았다.
“물론이다. 아마록. 내가 널 꼭 찾아낼 테니 말이다.”
[그럼 먼저 가 있을게요.]
마지막 생명력을 쥐어짜듯 대답하는 아마록.
“그래. 천사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널 꼭 찾아낼 테니…… 걱정하지 말아라.”
아마록의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예. 걱정 안 합니다…….]
“그래…… 곧, 내가 곧 따라가마.”
[아. 맞다…….]
아마록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왔다.
이제 빛무리는 목 부근까지 올라와 있었다.
[로드 창고…… 아버지가 열어서 가져갔습니다…….]
아마록이 장난스레 속삭였다.
[그래도 너무 일찍은 말고…… 해결 다 하고 오세요…….]
마지막 말을 남긴 아마록의 전부가 빛이 되어 흩날렸다.
“…….”
흩어지는 빛무리 중 하나를 향해 손을 뻗던 루카스의 몸이 힘없이 내려앉았다.
‘마지막까지…….’
아마록은 마지막까지 저를 안심시키려 했다.
루카스의 멍한 눈동자가 새하얀 빛이 흩날리는 하늘을 향했다.
제 몸을 메웠던 아만의 기운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이 팔을 걷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록과의 계약은 끝났고,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다.
땅에 주저앉았던 루카스의 입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고통이 소리로 바뀌어 숲을 울렸다.
***
“로드.”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하셀이 찾아왔다.
“……미안하다.”
하셀의 눈이 붉었다. 그 역시도 느낄 수 있었다.
제 아들인 아마록이 더 이상 세상에 없다는 것을.
“괜찮습니다. 아마록은 천계에 있겠지요.”
하셀이 루카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은 죽음을 애도할 시간도 슬퍼할 시간도 없습니다.”
루카스가 하셀의 손을 맞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몇 번이고 겪었던 죽음 중 하나다. 그리고 언젠가 천계에 가게 된다면 아만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머릿속에 새기자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영원한 이별이 아니라는 것.
“그래…….”
다시 한번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야지.”
루카스가 자신에게 말했다. 가야 한다고.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흐려졌던 눈을 제대로 떠 앞을 보니 아이들이 있었다.
많이 지쳐 보이는 그들의 얼굴 역시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고맙다.”
루카스가 아이들을 향해 말했다.
“…….”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언제나 말이 많던 폴라도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스키르 역시 무어라 입을 떼려는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고, 넬라 역시 그러했다.
“설명은 나중에 할게.”
루카스가 그들을 향해 말했다.
“지하실로 가. 모두 함께. 길은 넬라가 알고 있어.”
그러자 넬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에 대비해 백작저 지하에 만들어 둔 벙커가 있었다.
갑작스레 시작된 탓에 아이들이 모두 뛰쳐나와 도움을 줬지만, 원래 계획은 이렇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면 부모님과 아이들 모두를 지하 벙커로 가게 할 예정이었다.
그곳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다른 차선책들도 준비해 뒀고, 루카스는 그 모든 것들을 넬라에게 먼저 일러줬었다.
혹시 자신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어서 가.”
루카스의 말이 끝나자, 넬라가 폴라와 스키르를 향해 손짓했다.
“가자.”
“루키…….”
폴라의 애처로운 눈이 루카스를 향했다.
“오빠. 몸조심해.”
“얼른 와야 해.”
“기다리고 있겠다. 그리고 네 부모님은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꼭 지킬 테니.”
아이들의 걱정 어린 말에 루카스의 가슴 속에서 다시 무언가 울컥하고 올라왔다.
“……그래.”
표정을 숨기려 애써 웃어 보인 루카스가 하셀의 팔에 손을 얹었다.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
하셀과 함께 텔레포트해 도착한 곳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이었다.
하셀의 말이 모두 맞았다.
그들은 지금 누군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 따윈 없었다.
“젠장 할!”
영혼을 잃은 몬스터들이 엘프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분개하는 것도 잠시.
-파앗!
다시 하셀의 팔을 붙잡자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이번엔 드워프의 마을인 이그노스였다. 끓어오르는 용암이 온 마을을 덮쳐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가장 꼭대기에 있던 족장의 집뿐이었다.
-파앗!
픽시의 마을도.
-파앗!
여우족이 살던 산맥도 상황은 같았다.
“같은 시각에 모두 벌어진 일입니다.”
“…….”
“일족 중 절반이 당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말 그대로입니다. 일족 중 절반이 죽었습니다.”
순식간에 드래곤이 절반이나 당하다니?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인가.
“…….”
“본 적 없던 마법입니다. 아티팩트의 힘과 결합했더군요.”
이미 충격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던 탓인지 하셀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엘프들의 마을을 지키러 갔던 울론드가 봉인을 당했습니다. 마법 하나 써보지 못한 채로 죽었습니다. 영혼도 모두 빼앗긴 채 말입니다.”
“울론드가…… 말이냐?”
골드 드래곤 중 하나였다. 게다가 4천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 낸 드래곤인 만큼 마법도 실력도 모두 뛰어난 자였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었다니…….
“예. 이어서 아티스도 같은 방법으로 당했습니다. 이그노스에서 말입니다.”
생각했던 것보다 상황이 훨씬 심각했다.
“아티스까지…….”
같은 골드 드래곤 중 하나였다.
“픽시의 숲에서는 길레온이 당했고, 베네타로 갔던 가우스도 똑같이 당했습니다.”
말을 마친 하셀이 실소했다.
“저희가 정말 어리석었습니다. 이렇게나 어처구니없이 일족들을 잃을 거라고는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모든 말을 전해 들은 루카스 역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엄청난 충격이 몸을 덮치자 사고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만 같았다.
“아마록이 거기서 죽은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나마 영혼이라도 건졌으니 말입니다.”
맞는 말이었다. 루카스 역시 조금 전 들었던 생각이었으니.
차라리 다행이라고. 영혼이라도 온전하니 다행이라고 말이다.
“이건 마족과 마신의 머리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이 아니다. 분명 누군가 조력자가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마법이 뛰어나다 해도 드래곤들 모두를 같은 방법으로 죽일 수 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하셀의 물음에 루카스는 잠시 생각했다. 과연 이 말을 해도 좋을지 말이다.
‘엘라임…….’
그가 제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이 안 그래도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정령왕들은 어디에 있지?”
“그야 정령계…… 설마……!”
하셀의 눈동자가 거세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