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운명 (1)
마족들은 드래곤을 농락했다.
오만한 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드래곤의 영혼을 빼앗고 동족에게 돌려보내 죽음을 맞이하게 만들었다.
그들이 테네를 돌려보내 이 같은 짓을 저지른 이유는 하나였다.
경고. 너희들보다 우리가 더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고였다.
그들은 영혼을 잠식당한 드래곤 따위는 우리에게 전력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델러다칸…….”
그리고 지금.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계로 내쫓기기 전 그들의 땅이었던 델러다칸에.
땅 위에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드래곤들이 알아차릴 것이라는 것쯤은 그들도 알았을 터다.
“장로들이 먼저 가보았으나…… 결계에 막혀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
하지만 그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 확실하게.
“무슨 결계였느냐.”
“……밝히지 못했습니다.”
드래곤들조차 풀 수 없는 완벽한 결계.
게다가 그게 마법인지 아티팩트의 힘인지도 모른단다.
“대단하군.”
“……예?”
루카스의 말에 하셀이 되물었다. 적을 대단하다 칭찬하다니?
“칭찬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우리 일족은 저들이 쫓겨난 천 년 동안 발전조차 없었는데 말이다.”
“…….”
“영원한 강자는 없다. 보아라. 우리가 한낱 마족이라 무시했던 이들이 지금 어떤 짓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루카스의 입에서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재밌기도 한 것이…… 기분이 묘했다.
“참…… 재미있구나. 일이 참 재밌게 돌아가.”
지난밤 소집했던 장로 회의에서 한가지 알게 된 사실이 있었다. 실종된 다른 드래곤이 있다는 것.
그것도 장로 중 하나였다.
아프레 오리우드. 골드 드래곤이자 앨라스의 아버지였다.
“아프레는 아직 소식이 없는가.”
“예.”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였지만, 심각한 문제였다. 아프레의 레어에 찾아갔을 때 느껴졌던 기운과 흔적은 분명한 마족의 것이었으니까.
‘아프레까지 당한 건가.’
짐작했지만, 아니길 바라던 일이었다.
“그들은 우리의 움직임을 모두 알고 있었다.”
“…….”
하셀 역시 짐작했던 듯 침묵을 지켰다.
“어이가 없군. 정말 오만했다. 그들이 우리의 행적을 모를 거라 생각했다니…….”
아프레와 테네. 둘은 처음 마족들을 쫓을 때부터 함께 움직였던 드래곤들이었다.
그 뒤로 다른 이들도 합류했지만 마족들은 보란 듯이 처음부터 같이 움직였던 아프레와 테네를 표적으로 삼았다.
“하하…….”
루카스가 실소했다.
“방어한 흔적조차 없다고 했던가.”
“예.”
“그래. 우린 그런 종족이지. 방어가 웬 말이냐. 누군가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곳이거늘.”
“…….”
“몇백 년이 넘도록 바뀌지 않은 방어 마법과 알람 마법이 그들에겐 얼마나 달가운 일이었겠느냐. 안 그러느냐 하셀.”
대답이 없었다. 그 역시 이번 일에 있어 할 말이 없는 것이었다.
그 역시도 같았으니까.
몇백 년이 뭔가. 처음 레어에 들어 왔을 때부터 바뀌지 않는 것이 바로 방어 마법과 알람 마법의 수식이었다.
강한 마력을 바탕으로 하지만, 누구나 뒷받침하는 마력이 있다면 풀어버릴 수 있는 그런 마법.
그들은 그런 마법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아갔다.
아니, 사실 바꿀 필요가 없었다. 어느 간 큰 놈이 드래곤의 레어에 떡하니 들어온다는 말인가.
“그래. 이번 일이 우리 종족의 운명을 달리하겠구나.”
말을 하면서도 입이 까끌했다.
게다가 델러다칸을 다시 차지하고 앉은 마족들의 영토에 쳐들어갈 수도 없었다.
“드래곤은 퇴화하고 마족은 발전을 거듭했구나. 우리를 향한 복수심이 그들의 원동력이 되어 준 것이겠지.”
“조만간 뚫을 수 있을 겁니다.”
루카스가 고개를 저었다.
“힘들 것이다. 그들은 이미 운명을 걸었으니 말이야.”
“…….”
“그러니 우리도 운명을 걸어야 하지 않겠느냐.”
운명을 걸어야 한다. 그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거든 말이다.
***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요? 사람들이 실종이 돼?”
“그렇다니까요! 성녀회를 찾아갔던 사람들이 아직까지 돌아오질 않고 있대요.”
성녀회의 비밀 집회에 참가한다던 사람들이 벌써 며칠째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허! 이것 참. 옛날에 부활교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지 않았나?”
“어? 맞아요. 나도 들어본 거 같아요.”
“그래. 그때도 그랬잖아!”
옛 기억을 꺼낸 사람들이 다시 한번 술렁였다.
“잠깐만…… 이거 혹시 드래곤들이 그런 거 아닐까요?”
남자 하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뭐? 그게 말이 돼? 드래곤들이 뭐 하러?”
그러자 사람들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젓다가 이내 침묵했다.
“아니, 아니지…… 말이 안 될 건 또 없지.”
“생각해 보니 그래요. 부활교도 그렇고…… 성녀회도 그렇고…….”
“드래곤들의 미움을 받았잖나.”
사람들의 화살이 다시 드래곤에게 돌아갔다.
“세상에나. 안 그래도 성녀회가 공격받은 것 때문에 아란트에서 드래곤 토벌대를 꾸린다는 말이 돌 정도라던데!”
“에?! 그게 말이나 돼요? 그 커다란 제국 사람들이 뭐하러 그런 짓을 꾸며요?”
“맞아요. 게다가 드래곤이 한둘도 아니고 말이에요. 내가 알기로는 한 열은 넘는다고 들었는데! 그 많은 드래곤을 무슨 수로 이겨요?”
그러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 하나가 오더라도 재앙이나 다름없는데, 그들을 상대로 어떻게 인간이 전쟁을 일으킨다는 말인가.
“저…… 이건 비밀인데 말이에요.”
여자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뭔데요?”
“아유, 참! 뜸 들이지 말고 말을 해봐요!”
마을에서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비밀을 이야기 해준다는데 그게 무슨 대수라는 말인가.
“마족…… 알죠?”
“에? 마족? 옛날에 있었다던 그?”
이미 천 년이나 지나버린 일이었다. 그런 종족이 있었다고는 들었지만, 그들 눈으로 본 적은 당연히 없었다.
역사 촉에나 나오는 잊혀진 종족이나 다름없는데 뜬금없이 웬 마족?
“마족들이 지상으로 돌아왔대요. 마신 타라스의 가호를 받아서 말이에요.”
“그, 그게 진짜예요?”
그들에게 마족이라는 존재는 미지의 존재나 다름없었다.
잿빛 피부에 뾰족하게 솟은 뿔은 인간들의 공포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고, 엘프 중 그들의 혼혈이라는 다크엘프 역시,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어딘가 음습한 기운이 느껴졌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니, 그런데 그게 왜요?”
성격 급한 사내가 다음 말을 재촉했다.
“사실 마족들이 지상에서 쫓겨난 게 드래곤들의 음모 때문이래요.”
“에? 역사책에는 그렇게 안 써있던데. 그들이 드래곤의 알을 훔쳤다면서요?”
“맞아. 그래서 벌을 받아 마계로 쫓겨난 거라고 하던데?”
그러자 비밀을 이야기하던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그건 사실인데 그다음이 문제예요. 그 알이 잘못된 건 아니었다나 봐요. 게다가 마족이랑 드래곤은 엄청 가까운 사이었고요.”
“그럼 더 문제 아닌가? 알이 잘못됐건 아니건 친한 사인데 알을 훔쳐 갔다는 거 아니야!”
“그렇지. 그건 명백한 배신이지.”
여자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그 뒤로 마왕이 매일같이 찾아가 용서를 빌었다나 봐요.”
“당연히 빌어야지!”
여론이 숭숭했다.
“네. 그런데 용서도 해주지 않고 몬스터들을 풀어 인간을 해쳤다고 하더라고요.”
“마족이 몬스터를 풀었겠지. 이 아가씨 뭘 잘못 알고 있네.”
사내가 반박했다.
“아니에요. 모든 몬스터들의 왕은 드래곤이라고 하더라고요. 마족들은 몬스터와 소통이 조금 가능한 것뿐이고요. 엘프들이 숲에 살며 동식물과 소통하는 것처럼요.”
그러자 사람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에? 아닐 텐데?”
“맞아. 내가 알기로는 마족들이 몬스터를 조종한다고 했어. 드래곤의 알을 훔치고 몬스터들까지 민가에 풀어 사람들을 해쳤다고. 그래서 마계로 쫓겨난 거라고 알고 있는데?”
여자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아니에요. 절대. 마족들은 그런 짓을 한 적이 없어요. 모두 드래곤이 마족들을 쫓아내려고 벌인 짓이래요.”
“세상에나. 그게 정말이면 마족들은 좀 억울하겠네.”
다른 여자 하나가 말을 거들었다.
“그래도 뭐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니까.”
“아니, 그런데 잠깐만 생각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아요? 나는 잠깐 들어도 느낌이 오는구먼. 봐요. 마족들이 드래곤의 알을 훔친 건 잘못했는데,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굳이 몬스터들을 풀어 인간을 해칠 이유가 있어요?”
그러자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드래곤이랑 싸워봤자 이기지도 못할 건데 뭐하러 그런 짓까지 벌이겠냐구요.”
“그 말도 맞지.”
“생각해 보니 그렇네?”
생각을 마쳤는지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기 시작했다.
“어머나! 그럼 진짜?”
“그런데 마족들이 지상으로 왔다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전쟁이라도 벌이나? 드래곤이랑?”
“설마요!”
여론이 들끓었다.
“그런데 마신 타라스의 가호까지 받았다면…….”
“에이, 그래도 드래곤이잖아요. 드래곤이 얼마나 강한데요. 제국 하나쯤은 우습게 쓸어버린다고요.”
“그런데 마족들이 어디로 왔다는 거예요?”
그러자 비밀 이야기를 하던 여자가 싱긋 웃더니.
“델러다칸이래요.”
대답했다.
***
델러다칸에 다시 터를 잡기 시작한 마족들은 축제 분위기였다.
“마왕성이 그대로 옮겨 오다니!”
“크하하하! 진짜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 위용 좀 보십시오!”
마족들 중 내노라하는 마법사들이 모여 연구한 마법이었다.
널리 알려진 텔레포트보다 몇 단계는 상위 마법이라 불릴 새로운 마법을 개발한 그들은, 델러다칸에 마왕성을 통째로 옮겨오는 성과를 보였다.
“이제 드래곤들도 어찌할 방도가 없을 겁니다!”
“크하하! 게다가 낡아 빠진 그들의 주문으로는 이 방어 마법을 뚫을 수도 없을 겁니다!”
그들은 계획을 세운 뒤 백 년 가까운 시간 동안 뼈와 살을 갈아 넣어 마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드래곤들은 아니었다. 몇만 년이 되는 세월 동안에도 새로운 마법 연구는커녕, 그저 있는 마법들만 쓰며 편히 살아왔으니 말이다.
물론 중간중간 새로운 수식이나 마법을 개발해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또한 무슨 일을 당했을 때가 아니면 드문 일이었다.
인간들이 새로운 봉인 마법을 개발했다거나 했을 때만 새로운 해금 마법을 연구해 풀어냈다.
그도 수준이 높지 않으면 연구조차 필요 없이 당장에 풀어내는 그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안 그래도 이번에 드래곤들이 델러다칸에 왔었다고 하더군요. 무려 장로들이 셋이나 왔다고 합니다. 로드도 포함이었다지요?”
“그렇습니까?”
“예. 그런데도 못 뚫고 돌아갔습니다! 첫 번째도 뚫지 못했어요!”
“하하하하! 아주 꼴이 우습게 됐군요.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아주 궁금하군요!”
“저도 그 표정을 볼 수만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내놓을 판입니다! 하하하하!”
축제도 이런 축제가 없었다.
그대로 옮겨온 마왕성은 엄청난 위용을 자랑했으며, 마왕의 배려로 원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의 집까지도 하나씩 옮겨오고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었다.
“이제 저들을 굴복시키는 일만 남았군요.”
“게다가 아주 손쉽게 드래곤 둘을 처리했으니…….”
“시작이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족들의 입가에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