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전쟁의 서막 (1)
하지만 그나마 우호적이었던 엘라임을 제외한 다른 정령왕들은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 땅을 누가 차지하건 상관없다. 땅을 오염시키는 것만 아니라면.]
땅의 정령왕인 노아스는 이렇게 말하곤 사라져 버렸고.
[자연은 역사가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참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바람처럼.]
바람의 정령왕 제피로스 역시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사라져 버렸다.
[X까.]
불의 정령왕 이프리트는 뭐…….
때문에 일이 조금 어려워지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일이 쉽게 풀리는 법이 없네요.”
“항상 그렇지.”
나란히 앉은 하셀과 루카스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하셀의 한숨에는 원망이 함께 섞여 나오는 게 느껴졌다.
얻은 것도 없이 괜히 자존심만 상했다는 거겠지.
“후우…….”
루카스의 한숨엔 막막함이 섞여 있었다.
저들이 있는 곳조차 아직 알아내지 못했으니 더욱 막막했다.
“큰일났습니다!”
그때 갑자기 들이닥친 아만이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무슨 일이냐.”
“엘프의 영역이 모두 습격당했습니다.”
“젠장!”
언제나처럼 떠는 호들갑인 줄 알았건만. 상황이 심각했다.
***
그들은 각자 다른 곳으로 찢어졌다.
하셀은 루스란으로 아만은 라스칸 산맥에 있는 엘프들의 영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루카스는 디바노스에 있는 엘프들의 영역에 와있었다. 엘프들이 사는 곳 중에 가장 큰 규모인 세 곳으로 찢어진 그들은 같은 시간 다른 곳에서 똑같은 장면을 보고있었다.
불타버린 숲과 마을. 여기저기 널브러진 시체들은 이들이 얼마나 끔찍이 당했는지 짐작하게 했다.
“…….”
달리는 모습 그대로 굳어 불에 타 죽은 엘프.
살려달라 애원하듯 손을 뻗은 채 죽은 엘프.
화살을 시위에 걸지도 못 한 채 죽어버린 엘프.
온갖 곳에 모두 다른 모습을 한 채 죽어있는 그들을 보는 루카스의 심정은 참담했다.
‘알람 마법까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그들의 마을에 방어 마법은 물론 알람 마법까지 걸어뒀었다.
하지만 참혹한 현장은 그 모든 게 허튼짓이었다는 듯 말하고 있었다.
이들이 이렇게 당할 때까지 누구도 몰랐다. 불씨는 이미 꺼져있었고, 새까맣게 타버린 잔재들은 이슬을 맞았는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일이 잘못되고 있었다. 마족들이 벌인 짓인 줄은 알지만, 드래곤이 걸어 둔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풀어냈다.
‘누가…….’
그들 중 이만한 실력자가 누가 있다는 말인가. 하다못해 알람 마법이라도 울렸어야 했다.
일부러 마기에 반응하는 알람 마법도 따로 설치해뒀었는데 그것까지 모두 소용이 없었다.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쿵- 쿵- 커다랗게 요동치는 심장 소리가 루카스의 마음을 대변했다.
불안했다. 사실 정령왕들을 설득하는 건 루카스도 지나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대비는 넘치게 해도 모자란 것이니 세웠던 대비책이었다. 그런데 이제보니 넘치는 게 아니라 그도 모자라게 생겼다.
‘그들이 가진 게 뭘까.’
마족은 뛰어난 종족이었지만, 드래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엘프들이 정령술에 능한 것과 같이 딱 그정도 수준인 자들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빠득- 하며 이가 갈렸다.
흔적을 찾아봤지만, 역시나 없었다.
이제 지척까지 적들이 다가왔으니, 이쪽도 조금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파앗!
루카스가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
“오늘도 고생이 많았구나.”
“아니에요.”
멜라니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은 파멜라의 머리 색은 전보다 조금 더 어두워졌다.
게다가 눈동자 색도 전보다 더 어두운 적색을 띠었고, 머리엔 작게나마 뿔이 돋아나고 있었다.
“힘이 잘 맞나보구나.”
마왕이 야스탄이 넘겨준 새로운 힘이 파멜라의 몸에 완전히 적응하고 있었다.
“네. 좋아요.”
파멜라가, 아니, 멜라니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엔 아주 질 좋은 영혼들이 많더구나. 영혼을 다루는 데에도 능숙해졌어.”
“감사합니다.”
“자, 그럼 멜라니. 이번엔 새로운 일을 좀 맡겨야겠는데, 할 수 있겠니?”
야스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주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눈빛은 덤이었다.
“물론이죠.”
멜라니는 몸에서 끓어오르는 힘을 주체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매일같이 영혼들을 모으는 데 힘을 쏟아 부어도 힘이 남아돌았다.
“하하. 역시 우리 멜라니가 일족의 전사보다 낫구나. 보아라 마티사크. 우리 멜라니가 얼마나 용맹한지 말이다.”
“예. 맞습니다.”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바로 그러겠다고 하지 않느냐! 용맹해. 아주, 아주 용맹하다.”
야스탄은 상처 많은 멜라니를 다루는 법을 정확히 알았다. 리월이 전해준 정보도 있었지만, 사실 그런 것 따윈 몰라도 될 만큼 멜라니는 다루기 쉬웠다.
“그래. 멜라니. 이번 일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
“괜찮아요.”
위험하다고? 그렇다면 더 좋았다.
어려운 일을 해낼 때마다 쏟아지는 칭찬은 너무나도 달콤했으니까. 게다가 이 정도 힘이라면 두려운 것도 없었다.
“자, 받아라.”
야스탄이 앞에 놓여있던 종이 한 장을 건넸다.
“거기 쓰여있는 글자들을 읽을 수 있겠느냐?”
“네.”
고대어와 함께 쓰여진 문자들. 하지만 읽는 데 문제는 없었다.
부활교에 있으며 배웠던 거니까.
‘설마…….’
문자를 찬찬히 읽어가던 멜라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역시. 어렵겠느냐?”
왠지 자신을 시험하는 듯한 야스탄의 말투에 멜라니는 얼른 표정을 고치고 싱긋 웃었다.
“아니요. 할 수 있어요.”
못하는 건 없다. 지금 제게 있는 선택지는 무조건 하는 것뿐이었다.
해보고 안 되면 그때 가서 안 됐다고 말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해보지도 않고 못하겠다며 발을 빼는 게 훨씬 실망스러우니까.
그러니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했다.
“하하하! 역시. 우리 딸이구나.”
“그럼 다녀올게요.”
당장 가야겠다. 내 새로운 삶을 위해서는 해야 하는 일이니까.
***
멜라니는 힘을 최대한 숨긴 채 적에게 접근했다.
지금은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었으니, 힘을 드러내지 않으면 위협적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야스탄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오만한 종족이니, 한낱 인간 따위가 자신을 해칠 수 있을 거라 생각조차 안 할 것이다.
힘을 숨기고, 마족들의 도움을 받아 존재까지 감춘 멜라니가 천천히 접근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 때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이것만 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
그렇게만 되면 리월과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마왕의 딸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믿지 못할 인간보다는 마족이 훨씬 나았다.
다시 한 걸음.
깊은 동굴 속에서 잠을 청하는 거대한 존재에게 다가갔다.
커다란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가 대단했다.
‘이게 드래곤이구나.’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뿐인데도 느껴지는 위압감은 몸을 흠칫 떨게했다.
유난히 검은 커다란 영혼석을 품에 안은 멜라니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 존재에게 다가갔다.
이제 손만 뻗으면 그에게 닿을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되었을 때.
-파아아아앗!
손에 든 영혼석을 드래곤의 왼쪽 옆구리에 푹 찔러 넣었다.
[크, 크억! 감히 누가!!!]
심장부에 느껴지는 고통에 드래곤이 벌떡 일어나 커다란 발을 쿵. 구르자, 땅이 울렸다.
‘안 돼.’
그 충격에 뒤로 넘어진 멜라니는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손으로 틀어막은 뒤 숨을 죽였다.
[나와라!!! 이 쥐새끼 같은 놈들!!!]
살짝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놈들’이라니? 나는 혼잔데.
이렇게 생각한 멜라니는 이제 신음이 아닌 웃음을 꾹 눌러 참은 채 길길이 날뛰는 붉은 몸체를 올려봤다.
‘이제 곧…….’
역시 드래곤답게 순식간에 영혼이 삼켜지진 않았다.
[커윽……!]
신음이 터져나오고.
[크어, 어어억!]
검붉은 피가 커다란 입에서 왈칵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악!!!]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 분수가 동굴 천장을 적셨다.
‘됐다.’
이제 곧 끝날 것이다. 아주 손쉽게 말이다.
‘오만하긴.’
아무리 드래곤이라 한들 알람 마법 하나 없이 배를 떡하니 내놓고 자고 있다니? 이 얼마나 오만한가.
[끄아아아아악!!!]
붉었던 눈동자가 힘을 잃고 탁, 풀리면서 검게 변했다.
“됐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 멍하니 벌려진 잇새에서 줄줄 새어 나오는 핏물.
“이러니까 뭐. 그냥 큰 와이번이나 다름없네.”
와이번과는 달리 엄청 커다란 영혼석을 필요로 하는 것만 빼고 말이다.
너무 쉽게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래도 명색이 드래곤 아닌가.
“이제 가자. 자, 어서 폴리모프 해야지?”
멜라니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대했던 드래곤의 몸체가 순식간에 줄어들며 붉은 머리칼을 가진 인간 여자의 모습이 되었다.
“흠. 머리칼 색은 못 바꾸나?”
묵묵부답이었다.
“그렇다면 뭐.”
멜라니가 좌표를 읊자 폴리모프한 드래곤이 멜라니의 손을 붙잡고 단번에 텔레포트했다.
***
“다른 종족들은?”
“아직은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당한 게 엘프뿐이라니.
“바딤은 어떻게 됐지?”
“아직입니다.”
삼 일이면 충분히 깨어날 거라고 장담하더니, 바딤은 일주일이 되도록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한번 가보지.”
텔레포트한 루카스는 바딤이 있는 알을 천천히 살폈다.
“후…….”
알을 보니 다시 과거가 떠올랐다.
“괜찮으십니까?”
하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괜찮다.”
짧게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가 알 위에 손을 얹고 기운을 찬찬히 읽어나갔다.
‘분명 영혼은 있다.’
바딤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전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던 알에서 바딤의 영혼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억지로 깰 수도 없고.’
드래곤의 알을 억지로 깨는 순간 일어나는 참사는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알에 있는 영혼이 파괴되는 것은 물론이고, 알을 깬 자의 영혼도 함께 파괴된다.
때문에 부화하지 못한 드래곤의 알을 함부로 건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깨어나지 않던 알이 오백 년 만에 깨어난 일도 있었고 말이다.
‘이제는 이해가 좀 되지만.’
깨끗한 영혼을 고르고 골라내 만든다는 드래곤.
예전엔 부화하지 못하는 알을 보며 부모가 무척이나 자책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꼭 그럴 필요도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부화하지 못할 운명이라면.’
골라내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 영혼을 주지 않은 걸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
“바딤님.”
루카스가 알에 대고 이름을 부르자, 알에서 부르르- 하는 진동이 느껴졌다.
목소리도 생생히 전달되는 듯했다.
“삼 일이면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잠시 봤던 그의 성격에 미루어 봤을 때 못 견딜만한 말을 하기로 했다. 열받아서라도 깨어나라고 말이다.
지금은 바딤의 힘이 너무나도 간절했다.
“허풍이 심하셨군요. 그래도 삼 일은 너무하셨습니다.”
부르르-
알이 다시 떨렸다.
“무슨 병아리도 아니고…… 아, 병아리도 그보다는 더 걸리던가요?”
부르르르르-!
부정하는 듯한 떨림.
“그럼 흠…… 메추리쯤 되나.”
“로드. 메추리도 그보다는 더 걸린다고 알고있습니다.”
하셀이 옆에서 한술 떴다.
“맞습니다. 그럼 삼 일만에 깨어나는 게 뭐가 있을까요? 흠…… 게 새끼?”
아만도 그들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옆에서 깐죽거리기 시작했다.
“떽. 게도 그보다는 더 걸린다. 새우면 모를까.”
“하하하! 그렇습니까?”
부르르르-!
알이 다시 떨렸다.
한참을 그렇게 알에 대고 약을 올렸지만, 알은 자꾸 떨기만 할 뿐 부화하진 않았다.
“하…….”
실망에 한숨이 절로 나오던 때였다.
“알람이 울렸습니다.”
하셀의 말에 루카스와 아만이 동시에 팔을 내밀었다.
-파앗!
대답을 들을 시간에 움직이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