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드래곤, 아카데미 가다!-183화 (183/225)
  • 183화. 앙숙.

    이제 본격적으로 정령왕들을 만나야 할 차례였다.

    자연계인 그들은 사실 드래곤이든 마족이든 돕지 않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봐야 했다.

    “그런데 정령왕들 힘까지 꼭 빌려야 하는 겁니까?”

    하셀이 불만스러운 듯한 목소리를 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마족들을 상대로 싸울 준비를 하면서 정령왕들에게까지 손을 벌려야 하는 상황은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래. 저들이 가진 전력이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 저들이 마신을 등에 업었듯이 우리도 아모레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하셀.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마신은 주신의 권능에 도전하고 있다고 말이다.”

    “도전하고 있다는 것뿐 아닙니까. 아직 주신의 권능 가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하셀의 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다. 하셀.”

    “…….”

    “물론 네 말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비는 해야하지 않겠느냐.”

    결국 하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엘라임을 먼저 만나보지.”

    정령왕들 모두를 모아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그나마 가장 호전적인 물의 정령왕을 불러보는 게 맞았다.

    ‘아는 게 좀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주신의 거울도 그렇고 넬라와 계약도 하지 않았나. 사실 가장 만만한 상대긴 했다.

    소환식이 그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엘라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라임.”

    “그래.”

    지난번 맺은 계약 덕분인지 엘라임은 정령의 모습이 아닌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모습이었다.

    물론 다른 계약자가 아닌 루카스의 마나를 써서.

    “마나는 잘 쓰고 있더군.”

    계약 이후 한 번씩 마나가 뭉텅이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었다.

    “그래. 잘 쓰고 있지.”

    엘라임이 씨익 웃는 것을 보니 역시 루카스가 생각했던 게 맞았던 듯 했다.

    ‘이 자식 잊은 게 아니었나……?’

    루카스를 당황하게 하려는 건지 뭔지는 몰라도, 엘라임은 일부러 마나를 한 번씩 뭉텅이로 가져다 날려버리는 듯했다.

    “그래. 중간계에서 마나가 그만큼이나 필요했다면 필시 위험한 상황이었으리라 믿…….”

    루카스가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서 말했다.

    “위험이라니?”

    엘라임이 피식 웃었다.

    “그냥 호수에 있는 물 좀 퍼다가 나무에 주고 그랬다.”

    물의 정령왕이 마법으로 호수에 있는 물을 퍼다가…… 나무에 줬다고?

    “생각보다 더 악질이군. 엘라임.”

    “너만 할까.”

    엘라임의 표정을 보자 잊었던 것들이 모두 떠올랐다.

    사실 엘라임과 전생의 루카스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서로 상성이 안 맞기도 했거니와 루카스가 몇 가지 나쁜 짓을 저지르기도 했었다.

    ‘젠장. 역시 잊은 게 아니었군.’

    물론 철없던 해츨링 시절에 있던 일이었지만, 나쁜 짓임은 변함이 없었다. 때문에 둘은 전생에 미친 듯이 싸워댔었다.

    하지만 인간으로 환생한 이후 변한 엘라임의 태도에, 루카스 역시 부드럽게 대했었다.

    지난 생이 끝났으니 제가 가진 업보도 모두 지워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그게 아닌가 보다.

    “지난번에 봤을 때 괜찮은 것 같더니. 아직도 그 일을 못 잊은 건가.”

    “잊긴 뭘 잊는다는 거냐. 내가 멍청한 네 놈과 같을까 봐?”

    이거 상황이 점차 안 좋았다.

    ‘아니 저번에 봤을 땐 아무렇지도 않았으면서 갑자기 왜 저래?’

    서로를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둘을 본 하셀이 생각했다.

    “하?”

    루카스의 표정도 점차 굳어지기 시작했다.

    “멍청하다라…….”

    둘의 눈이 허공에서 맞부닥치며 스파크가 튀었다.

    “여기서 한판 해보기라도 하자는 건가?”

    “오호라! 그렇다면 나는 좋다. 어차피 네 놈의 마나를 가져다가 널 두들겨 패는 거니 손해 볼 것도 없고 말이다!”

    엘라임이 이죽였다.

    “그래. 오늘 너 죽고 나 살고 한번 해 보자.”

    루카스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결국 하셀이 그 앞을 막아섰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좀 사이좋게 지내시면 안 됩니까?”

    “사이좋게? 하! 당치도 않군. 저놈이 저지른 짓은 하셀 너도 알지 않느냐. 지난번에 봤을 땐 죽었다 살아온 원수가 돌아와 나도 모르게 반가운 마음이 들어서 살려뒀다지만, 이번엔 말이 다르지.”

    “하! 반가워? 반가워?!”

    “그래! 주신의 심부름도 했어야 했고 말이다!”

    둘은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거렸다.

    “물의 정령왕이라는 자가 그렇게 속이 좁아서야. 도대체 몇천 년 전 일을 아직도 물고 늘어지는 건가!”

    “몇만 년 전 일이라도 상황은 같을 거다! 네 놈이 망가트린 내 유물들! 게다가 네 놈이 심심풀이 삼아 봉인시킨 내 정령들까지!”

    “정령들은 다 풀어줬지 않은가!”

    “풀어줘?! 파괴시킨 게 풀어준 거라면, 오냐. 나도 오늘 널 파괴시켜 이 세상에서 풀어주마.”

    엘라임의 손에 투명한 검이 한 자루 생겨났다.

    “도대체 왜들 이러십니까! 로드도 그만 좀 하세요. 이러자고 엘라임님을 부른 게 아니잖습니까.”

    하셀이 얼른 본론으로 돌아가자며 둘을 만류했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게 번지고 말았다.

    “허! 그래. 한번 해보자 그건가? 오냐. 네 놈은 내가 인간일지라도 거뜬하다.”

    “하하! 지난번에 죽을 뻔했던 건 벌써 잊었나 보지?”

    엘라임이 검을 그러쥐며 당장에라도 앞으로 뛰쳐나갈 태세를 취했다.

    “그러는 네놈은 정령계로 역소환 당해 몇 달이나 밖에 나오지 못했던 건 벌써 잊었나?”

    루카스의 양손엔 얼음 창이 생겨났다.

    이건 정말이지 변하지도 않는 레파토리였다. 둘은 만날 때마다 그랬다.

    “그만들 좀 하세요!”

    하셀이 레어가 떠나가라 소리를 치자, 루카스와 엘라임이 잠시 멈칫했다.

    “다들 앉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두 분 모두 다시는 안 볼 겁니다.”

    하셀이 강수를 뒀다.

    “크흠.”

    “흠흠.”

    그러자 루카스와 엘라임은 서로 눈빛을 잠시 교환하고는 손에 들었던 무기를 다시 흩어냈다.

    “다음엔 진짜 없애주지.”

    “나야말로.”

    끝까지 난리였다.

    하지만 루카스는 지금 상황이 화가 나면서도 너무나 즐거웠다.

    “흥.”

    엘라임 역시 입꼬리가 씰룩이는 걸 보니 즐거운 듯 보였다.

    “하…….”

    둘 사이에 끼어서 난처하게 된 것은 하셀뿐이었다.

    도대체 루카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엘라임에게 도움을 청하자고 하더니만 싸우려 들면 어쩌자는 말인가?

    “엘라임님. 마족과의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안다.”

    “혹시…….”

    “싫다.”

    하셀이 입을 떼기도 전에 엘라임은 거절했다.

    “하? 싫어?”

    그 모습을 본 루카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했다.

    “그래. 싫다.”

    “아직 말도 안 했는데요…….”

    하셀이 난처하다는 듯 나섰지만, 엘라임은 팔짱을 낀 채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도와달라는 거 아닌가?”

    “…….”

    “싫다는 거다. 우리는 자연이다. 생물들의 싸움에 자연이 끼어들어서 되겠는가?”

    그러자 루카스도 팔짱을 척 끼고 입을 열었다.

    “지랄. 어차피 넌 나서게 되어있다.”

    “아닌데?”

    “넌 내 계약자가 아닌가?”

    “그래서?”

    “계약자가 부르면 와야지.”

    그러자 엘라임이 콧방귀를 꼈다.

    “흥. 너야말로 지랄이군. 내가 왜?”

    “그럼 넬라가 널 소환할 텐데?”

    그러자 엘라임의 미간이 구겨졌다.

    “왜지? 그 아이가 네놈들의 전쟁에 나설 이유가 뭐가 있다는 말이냐!”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엘라임은 넬라를 아껴도 너무 아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래서. 안 도와준다고?”

    “…….”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루카스는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넬라가 뭐길래?’

    정령왕이나 드래곤이 계약자를 아끼는 경우는 더러 있었다. 인간을 사랑한 정령왕도 있었으며, 드래곤이 사랑한 정령왕도 있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연인 관계로 발전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 사건도 있었다. 하지만 넬라는 연인으로서의 감정을 가지기엔 아직 너무 어렸다.

    ‘설마…….’

    잠시 나쁜 생각이 떠올랐지만, 루카스가 아는 엘라임은 그럴 자가 아니었기에 생각은 금세 지워졌다.

    ‘그렇다면 왜지?’

    항상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데 이리도 쉽게 넘어오다니?

    “그 아이를 전쟁에 세우지 않는다면 너의 계약자로서 나서주지.”

    “하?”

    도대체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

    “엘라임. 내가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넬라가 뭐기에 그렇게까지 하는 건가?”

    정말 순수하게 궁금했다. 정령왕은 드래곤보다 더 긴 시간을 사는 자들이었다. 그런 이들에게 인간이란 생물은 정말 찰나를 사는 종족이었다.

    게다가 아무런 접점도 없는 넬라를 저리도 아끼는 이유가 뭐라는 말인가.

    “그냥.”

    엘라임의 입에서 들려온 간단한 대답.

    “옛날에도 넬라를 직접 찾아왔었던 거 알고 있다.”

    백작저 후원에서 느꼈던 엘라임의 기척. 루카스는 그걸 알고 있었다.

    “흥. 그래서?”

    “도대체 넬라가 뭐기에 그렇게까지 하냐는 말이다. 넬라는 평범한 인간이다. 알지 않나?”

    “안다.”

    “그런데?”

    엘라임이 피식 웃더니 입꼬리 한쪽을 올린 채 루카스를 쳐다봤다.

    “내가 왜 네게 말해줘야 하지?”

    저 얼굴. 루카스는 저 얼굴이 너무나도 싫었다.

    “개자식. 오늘도 역소환을 겪게 해주마.”

    “하! 가소롭군. 아니! 귀엽다!”

    엘라임과 루카스가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하…….”

    하셀은 모든 걸 포기한 듯 소파에 몸을 묻고 미간을 지그시 눌렀다.

    루카스의 손에 얼음창이 생겨나고, 엘라임의 손엔 투명한 검이 소환됐다.

    “넌 오늘 뒈졌다.”

    “미안한데, 난 못 뒈지는데?”

    타앗! 둘이 동시에 지면을 박차고 나아가자, 하셀이 가만히 앉은 채 방어 마법을 시전했다.

    “어? 뭐 하세요?”

    그때 아만이 둘 사이에 떡하니 나타났다.

    “으, 으아앗!”

    이미 둘은 지면을 박차고 나간 상태였고, 그 사이에 갑자기 아만이 생겨났으니 결과는 뻔했다.

    얼음 창과 검은 쓰이지 않았지만, 엘라임과 루카스가 꼴사납게 아만을 사이에 두고 부딪혔다.

    “으윽!”

    “큭!”

    아만은 가운데 끼어 난데없는 사고를 당했다.

    “푸, 푸하하하!”

    자리에 앉아있던 하셀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푸학학!!! 하하하하학!!!”

    하셀은 제 무릎까지 퍽퍽 쳐대며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하긴. 얼마나 웃기겠는가. 서로를 향해 죽일 듯이 달려들었는데, 갑자기 사이에서 나타난 아만 때문에 공격은커녕 서로 우스꽝스럽게 아만에게 부딪히고 말았으니 말이다.

    “푸하학! 하하하학!”

    아만은 양어깨를 부여잡은 채 고통을 호소했고, 루카스와 엘라임 역시 저마다 가슴께와 코를 붙잡은 채 작게 신음했다.

    광장에서 하는 싸구려 희극 같은 연출이었다.

    “그만 웃어라.”

    “하하하하!”

    “그만 웃지?”

    “하하하하하!”

    “그만 웃으세요.”

    셋 모두 하셀에게 같은 이야기를 했으나, 웃음은 끊이질 않았다.

    “참나.”

    “쳇.”

    “흥.”

    웃음은 전염된다고 하던가. 셋 역시 고통이 가시고 나니 얼굴에 슬쩍 미소가 어렸다.

    저들도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하필 거기 딱 떨어질 건 뭐라는 말인가.

    피식- 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분위기가 한껏 풀어졌다.

    “엘라임. 내가 미안했네.”

    “흥.”

    “그러니 이만 화 풀고 내 사과를 좀 받아주게.”

    루카스가 결국 사과했다. 언제나 유치한 레파토리로 이어지는 싸움은 전생엔 할 때마다 삶의 활력이 되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러니 더는 이어갈 필요도 없었고, 이어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넬라는 자네 말대로 하도록 노력하지. 하지만 그 아이가 하겠다면 나 또한 말릴 수는 없네.”

    “그래도 최대한 말려주게.”

    “그건 약속하지.”

    “그렇다면 나도 너희를 돕지. 하지만 다른 정령왕들을 설득할 수는 없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이렇게 엘라임이 그들의 전력에 포함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