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이제 편히 쉬세요.
“바딤님 말입니다.”
레어에 돌아온 하셀과 루카스는 가벼운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
“어쩌다가 그런 곳에 봉인당한 걸까요?”
루카스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난들 어찌 알겠느냐. 본인 말대로길 바라는 것뿐이지.”
루카스 역시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도 그렇고 언제부터 그곳에 봉인되어 있던 것인지도 몰랐다.
전혀 다른 세계의 드래곤.
게다가 마법 실력 또한 저들보다 월등히 뛰어났기에 얼마든지 그들을 위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서로 했던 영혼의 계약을 믿고, 그가 했던 말들을 신뢰하는 수밖에.
“그렇겠지요.”
하셀 역시 루카스의 의견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로드?”
그때 아만이 나타났다.
“오랜만이구나.”
“쳇. 두 분이 여기서 뭐 하십니까? 저는 쏙 빼놓고?”
둘의 오붓한 티타임을 본 아만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크흠.”
“레어에 묘한 기운도 느껴지고…….”
마치 강아지가 냄새를 찾아 코를 벌름거리듯 아만의 얼굴이 이리저리 돌아갔다.
“저 일 시켜놓고 두 분이 매일 이렇게 앉아 노닥거리신 겁니까?!”
“노~ 닥?!”
하셀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예! 노닥이요!”
하지만 아만도 지지 않고 허리춤에 팔을 턱 올리고 큰 소리로 외쳤다.
“오오냐~ 너는 오늘 모락모락이다.”
“모, 모락모락이라뇨?”
하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손에 불꽃을 일으켰다.
“통구이로 만들어 주마.”
“어, 어? 로드! 로드!”
아만이 루카스의 이름을 얼른 외치며 도움을 청했다.
“그만하거라. 하셀.”
루카스가 찻잔을 든 채 느긋하게 말했다.
“하지만 이 자식 말하는 본새 좀 보십시오!”
“네가 좀 참아라.”
차를 한 모금 호록 마신 뒤 찡긋 윙크까지 해주자, 하셀은 작은 목소리로 ‘두고 보자’는 말을 남긴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아만. 내가 부탁한 일은 어찌 되고 있느냐?”
아만이 하셀의 눈치를 살피며 소파에 엉덩이를 살짝 붙이고 앉았다.
“진행 중입니다만, 쉽지는 않습니다.”
루카스는 아만에게 이종족들을 회유하는 일을 맡겼었다. 아만은 드래곤 중에 가장 성격이 유하기도 하고, 제 말을 잘 들으니 적임자였다.
“그래. 고생이 많구나.”
“예. 정말 고생이 많죠. 이것들이 도통 말을 안 듣습니다.”
아만이 한숨을 푹 내쉬고 소파에 몸을 묻자, 하셀의 눈초리가 매섭게 변했다.
“아, 왜요!”
그러자 아만은 얼른 몸을 일으키면서도 자존심이 상했는지 버럭 소리쳤다.
“너 진짜 그러다 오늘 노릇노릇하게 된다.”
하셀이 피식 웃으며 제 아들을 협박했다.
‘애랑 꼭 똑같이 굴지. 저거.’
루카스가 혀를 쯧 차며 다음 말을 이었다.
“네가 노릇노릇하게 되는 건 원치 않으니 둘 다 그만하거라. 그래서 지금 상황이 어떻지?”
“엘프가 가장 문제였는데 그들도 중립에 서겠다 밝혔습니다. 누구도 돕지 않는 대신 드래곤이 승기를 잡더라도 저들을 해치지 않겠다 약속해 달라 하더군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냐.”
“네. 그래서 그렇게 하겠다 약속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픽시들은 드래곤의 편에 서겠다 약속했습니다.”
조금 의외였다. 픽시들이 인간에게 당한 일이 얼마나 끔찍했던가.
“그래?”
“예.”
아만 역시 의외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우족들은?”
“그들은 중립을 유지하겠다 했습니다.”
“그럼 지금 마족의 편에 선 이종족이 없다는 말이냐?”
“예.”
아만이 어깨를 당당히 펼치며 대답했다.
“잘했구나. 정말 고생이 많았다.”
아만에게 맡긴 것이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전쟁에서 이종족들은 말 그대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여태 그 수많은 수모를 당한 이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았는데……. 드래곤의 진심이 전해진 것 같아 기뻤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에헴!”
큰 공로를 세운 아만의 목이 뻣뻣하게 올라갔다.
“그래. 잘했구나.”
하셀도 아만을 칭찬했다. 잘한 건 잘한 거니 칭찬은 당연했다.
“에헤엠!”
그 모습을 보니 아만이 퍽 귀여웠다.
‘지켜야 할 텐데.’
주신의 자리가 공석인 지금 죽기라도 한다면 영혼의 행방을 알 수도 없었다. 그러니 누구 하나 다치거나 죽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아, 그보다 이 기운은 뭡니까? 본 적 없는 드래곤의 기운이 느껴지는데요. 아닌가?”
아만은 어릴 때부터 남들보다 기운을 예민하게 느꼈다. 지금도 남들은 느끼기 힘든 바딤의 기운을 알아차린 걸 보니, 마치 냄새를 잘 맡는 개를 보는 듯한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맞다. 토파즈 드래곤이었지.”
“풉. 토파즈요?”
듣도 보도 못한 이름에 아만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토파즈.”
“그런 게 어딨습니까?”
믿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있다. 이 자식아. 로드께서 거짓말이라도 한다는 말이냐?”
“그, 그런 건 아니고…….”
“이걸 그냥 불을 지펴가지고 모락모락하게 한 다음에 노릇노릇하게 만들어 버릴까 보다.”
하셀이 주먹을 치켜올렸다. 오늘따라 아만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다.
“그만하고 이야기나 해줘라.”
루카스가 결국 둘을 중재하고 나섰다.
“예.”
하셀이 아만에게 바딤을 만난 이야기를 풀어주자, 몇 번이나 놀란 듯한 반응이 이어졌다.
몇만 년이나 거뜬히 살아내는 것도 모자라 다른 마법을 쓰고 부화하지 못한 알에 들어간 것도 모자라 3일이면 깨어날 수 있다며 장담했다니.
“그래서 어떤 알로 들어간 겁니까?”
“그게…….”
하셀이 루카스의 눈치를 살폈다.
“내 알이다. 깨어나지 못했던.”
“아.”
그러자 둘은 얼른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괜찮다. 어차피 다 지난 일 아니냐.”
루카스가 괜찮다며 마저 이야기를 이으라는 듯 손짓하자, 하셀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뒤로도 영혼의 계약이나 다른 차원에 있는 같지만 다른 성향을 가진 종족들과 신들의 이야기에 아만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된 거다.”
이야기가 끝나자 아만은 입을 헤 벌린 채 고개를 찬찬히 끄덕였다.
“신기하네요. 정말 이곳과는 정반대군요.”
“그렇지.”
“그래도 다행입니다. 엄청난 전력이 생긴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아만 네가 알을 부화하는 걸 돕는 게 어떻겠느냐?”
루카스의 말에 아만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 제가요?!”
알을 부화시키는 것은 엄청난 노력과 정성이 필요했다.
“그래. 어차피 3일이면 부화하겠다 하였으니, 그도 알 속에서 마냥 노는 것은 아닐 것이다. 너는 그저 옆에 앉아 마력만 제때제때 부어주면 될 게다.”
“실수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아만도 해츨링 알을 부화시키는 과정에 대해 알고 있었기에 조심스러웠다.
“네가 적임자다.”
사실 루카스가 굳이 아만에게 이 일을 맡기려 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혹여 마족의 편에 선 드래곤이라도 있다면 그 알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만의 말대로 바딤은 그들의 엄청난 전력이 되어 줄 것인데, 누군가의 수작으로 깨어나지 못한다면 그것만큼 큰 손실이 없었다.
“알겠습니다.”
아만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아만이라면 믿을 수 있으니 조금은 안심이었다.
***
넓은 들판에 모인 사람들은 성녀를 만나기 위해 며칠 전부터 노숙을 하고 있었다.
곳곳에 피워진 모닥불과 남아있는 잿더미. 낙엽을 모아 쌓아둔 곳엔 낡은 모포를 깔고, 덮은 이들이 하염없이 성녀를 기다렸다.
“다들 오셔서 식사하세요!”
성녀회의 사제들이 사람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했다.
“저…… 사제님.”
한 사내가 다리를 절뚝이며 다가오자, 사제가 스튜를 크게 한 국자 떠 건네며 말했다.
“어휴. 앉아 계시면 가져다드릴 텐데요. 자꾸 움직이지 마셔요.”
“감사합니다. 저… 그보다 성녀님은 언제쯤…….”
“많이 지치시지요? 안 그래도 조금 전 연락을 받았습니다. 오늘 안에 도착한다고 하시더군요.”
그러자 사내의 얼굴이 활짝 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예. 물론입니다. 저희 역시 이러고 싶지 않으나, 악의 무리가 여러분을 돕는 걸 방해하니…….”
그러자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도대체 성녀회를 왜 막는다는 말입니까. 이리도 좋으신 분들인데!”
“하하. 너무 노여워 마세요. 그들 역시 두려운 것이겠지요. 저희는 모두 이해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저들더러 사람을 치료하고 도우라고 하십시오! 그러지도 않는 자들이 말리긴 왜 말린답니까!”
사내의 말에 주변에서 배식을 받던 사람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아니, 도대체 왜 성녀회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랍니까? 예전에 부활교도 그랬지 않아요?”
“맞소! 나도 화가 나서 죽겠소! 아니, 성녀회가 사람들의 돈을 뜯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료로 이리도 봉사를 하는데!”
“맞아요! 맞아!”
사람들의 언성이 높아지자 사제는 난처하다는 듯 웃으며 그들을 만류했다.
“자, 자. 괜찮습니다. 어찌 되었건 성녀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으시니까요. 오늘만 고생하시면 다들 가진 아픔들은 모두 훌훌 털고 집에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사제님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이들은 성녀회 본부가 습격받은 뒤로 섣불리 나서지도 못하고 있다가 회원 가입 때 적어 둔 주소로 사제들이 직접 방문하면서 모이게 된 이들이었다.
맨 처음 성녀회가 습격받고 사제들이 연기처럼 사라지면서 사람들의 공분을 샀었다.
가입비만 받고 일부러 연극을 꾸며 사라진 게 아니냐며 여론이 들들 끓었던 때 사제들이 나타났다.
평범한 일상복을 입고 찾아와 그들에게 비밀 집회 장소를 알려주었으며, 방문이 어렵거나, 사람이 없는 곳엔 쪽지나 편지를 보내 뜻을 전했다.
때문에 사람들의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하는 일인 것을요. 저희 성녀회는 여러분을 절대 외면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들은 약속을 지켰다.
“자, 얼른 식사하세요. 음식이 식습니다.”
사제의 말에 사람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어, 어! 저기, 저기!”
그때 한 사내가 숲길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치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성녀님이시다! 성녀님이셔!”
새하얀 로브를 입은 파멜라가 숲길을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성녀님!!!”
“오오…… 성녀님…….”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성녀의 걸음이 가까워지는 소릴 들으며 감탄했다.
“정말, 정말 다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파멜라가 사제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고 엎드린 사람들을 내려보며 말했다.
“자, 다들 일어나세요. 바닥이 차갑습니다.”
“성녀님……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찾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존재였다. 며칠을 찬 바닥에 누워 잤음에도 성녀의 발끝을 보는 것만으로 모든 피로가 잊혀지는 기분이었다.
“어서요. 어서 일어나세요.”
파멜라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사람들을 어루만지는 듯했다.
“저를 찾아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파멜라가 싱긋 웃자,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여러분들을 위한 축복을 내리겠어요.”
파멜라가 양손을 높게 치켜들자, 사람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혹여 저만 축복을 놓치기라도 할까 다닥다닥 붙은 사람들의 눈이 일제히 파멜라를 향했다.
“고통받은 자들이여.”
파멜라의 손에 빛이 일기 시작했다.
“영원한 안식에 잠들라.”
파멜라의 피부색이 잿빛으로 물들고, 눈동자와 머리칼 색이 순식간에 바뀌자, 사람들의 탄식이 경악으로 바뀌는 순간.
“이제 편히 쉬세요.”
-파아아아앗!
새하얀 빛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