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누구세요? (2)
그려지는 마법진 위로 천천히 떠오른 팬던트가 안착했다.
-우웅! 우우웅!
팬던트를 집어삼킬 듯 마법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어휴, 이거 오랜만에 하는 거라 잘한 건지 모르겠네요.”
이 마법진은 봉인된 영혼을 완전히 풀어주는 게 아닌, 잠시 형체를 갖춰 불러내는 것이었다.
“마법진은 완벽하다. 흠잡을 데가 없더구나.”
루카스가 슬쩍 봤을 때 마법진은 완벽했다. 하지만 루카스도 봉인된 영혼을 구태여 꺼내 대화할 일이 없었으므로 사실 단정 짓기가 어려웠다.
‘아니다. 완벽했다.’
마법진을 보는 루카스와 하셀의 심장이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우우웅! 우우우웅!
마법진 위에 올라선 펜던트가 미친 듯 떨리기 시작하더니.
-우우우웅! 파직…… 파지직!
붉은빛의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되는 건가……?”
하셀 역시 의심을 거두지 않은 채 한 손에 방어 마법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될 거다.”
그러는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로 방어 마법을 준비 중이었다.
‘이거 실패하면 어떻게 되더라.’
-파지직! 파아앗!
마지막으로 스파크가 한번 강렬하게 튀어 오르더니, 이내 펜던트가 환한 빛을 내뿜었다.
그와 동시에 시전된 방어 마법이 하셀과 루카스의 앞을 단단히 지켜냈다.
“크흠.”
“흠흠.”
둘 다 멋쩍은 표정으로 서로를 잠시 바라보고는 다시 앞을 바라봤다. 밝은 빛이 점차 사그라들더니 이내 펜던트의 모습이 드러났다.
“어……?”
하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고.
“어어…….”
루카스의 당황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저러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사실 루카스의 마음속에 외쳐지는 소리는 ‘X됐다.’였다.
펜던트에는 금이 가 있었고, 영혼을 담았을 보석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게다가 영혼이 있어야 할 주변은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질 않으니, 이거 뭐라 설명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차라리 제발 정령이었어라.’
루카스는 마음속으로 빌고 또 비는 중이었다.
“이거 그냥 사라진 겁니까?”
“모, 모르겠는데.”
‘차라리 그냥 소멸된 거였어라.’
하셀도 빌었다.
둘의 눈이 허공에서 멍하니 마주쳤다.
“이거…….”
“아니다.”
그때. 하셀의 레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에잇!”
“젠장!”
그래,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있나.
레어가 세차게 흔들리는 걸 보니, 사라져 버린 영혼은 소멸된 것도 아니고 정령도 아니었나 보다.
“이, 이거 어떡합니까?”
동굴이 흔들리다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하셀이 방어 마법을 단단히 펼쳐 동굴을 감쌌다.
-쿠구구구구
하지만 동굴은 그깟 마법 따위는 소용도 없다는 듯 미친 듯 흔들리고 있었고, 루카스의 마법도 더해졌지만, 그도 소용이 없었다.
“자, 잠깐!”
그때 루카스가 소리쳤다.
“이거…… 레드가 아닌가 본데?”
분명 보석 속에서 느껴진 기운은 레드 드래곤의 기운이었으나, 바깥에 나온 영혼의 기운은 생전 처음 마주하는 기운이었다.
골드 드래곤의 것과 비슷한 듯싶으면서, 레드 드래곤의 특징도 들어있었다. 불처럼 뜨거우면서도 황금처럼 차가운 기운.
“대, 대화를 시도해 볼까요?!”
분명 영혼은 근처에 있었다.
“대화?!”
어이가 없었다. 지금 형체도 없는 게 날뛰는데 대화라니? 참 하셀 다운 발상이었다.
“그래! 해봐라.”
하지만 다른 수가 없지 않은가. 말 그대로 형체가 없는데 공격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눈앞에 형체가 있다면 공격을 하든 봉인을 하든 또 할 수 있겠지만, 전에 마주한 적도 없는 존재 아닌가.
“저기 누군지 모를 영혼 씨!!!”
하셀이 소리쳤다.
“미친 새끼.”
루카스가 방어 마법을 단단히 유지하며 욕을 뱉었다.
뭐? 누군지 모를 영혼 씨?
“혹시 드래곤이시면 저희와 대화를 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저희 말이 잘 통하는 드래곤, 아니 드래곤 하나와 인간입니다만, 드래곤이기도 한…….”
하셀도 뭔가 제 말이 이상했다는 것을 느꼈는지 잠시 말을 멈추고 루카스의 눈치를 살폈다.
“드래곤입니다! 여기 내려오시면 그쪽이 어떤 영혼이든 저희가 최대한 좋은 방법을 찾아내 돕겠습니다!”
마치 인질극을 벌이는 악당에게 할 법한 회유에 루카스가 혀를 찼다.
“그게 대화냐?”
결국 보다 못한 루카스가 한마디 툭 뱉었다.
“크흠…….”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흔들리던 동굴의 진동이 점차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 대화였나 본데요?”
어떤 상황이 와도 이 깝죽거림은 발동되는 걸 보니 정말이지 강한 유전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시면 당신을 다시 봉인하지도 않을 것이며! 저희가 당신의 뜻을 최대한 존중할 것을 드래곤의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그러자 진동이 완전히 멈춰섰다.
‘진짜 드래곤인가?’
드래곤은 약속의 종족이다. 그런데 하셀이 제 이름을 걸고 약속했으니, 이보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멀리서 영롱한 주홍빛 빛무리가 서서히 내려오기 시작했다.
‘횃불처럼 생겼군.’
저렇게 존재를 확실히 드러낸 영혼을 마주한 것은 루카스 역시 처음이었다.
“오…….”
주황색 빛무리가 점차 크기를 키워 가까워져 오자, 하셀이 감탄을 내뱉었다.
-파스스스…….
빛무리가 사그라드는가 싶더니.
-파앗!
이내 커다랗게 펼쳐져 사람 형상이 되어 나타났다.
[드래곤의 이름을 걸고 한 약속은 믿을 만하지.]
형태는 전체적으로 희끄무레했으나, 머리 색이나 눈동자 색은 선명한 주홍빛을 띠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먼저 나를 봉인에서 풀어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싶군.]
‘고맙다는 자식이 그따위로 행동했어?’
조금 전까지 레어를 미친 듯 흔들던 자의 언행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감사는요.”
하셀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속도 좋은 자식.’
루카스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하셀을 노려봤다.
[나는 바딤이다. 바딤 아르티스. 자네는 블루 일족이로군.]
“맞습니다. 그런데 죄송하지만…… 드래곤이셨습니까?”
[그렇다. 나는 토파즈 일족이지.]
‘토파즈? 그게 뭐야?’
그 말을 들은 하셀과 루카스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지금 지상에 존재하는 드래곤은 블루, 레드, 골드, 블랙, 실버 총 다섯 종류였다.
그런데 듣도 보도 못한 토파즈라니?
“토… 파즈요?”
[그래. 토파즈.]
멸종된 일족인가? 그렇다면 오천 년도 전, 아니 그보다 훨씬 전에 멸종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설마 우리 토파즈 일족을 들은 적이 없다는 건 아니겠지.]
하셀과 루카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있는 일족 중 토파즈라는 일족은 없습니다.”
루카스가 공손하게 대답했다.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는 화석 같은 존재가 아닌가.
[그, 그럴 리가. 이곳은 도대체 어디인가? 혹시 내가 다른 차원으로 온 게 아닌가!?]
자신을 바딤이라고 소개한 영혼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혹시 언제 봉인된 것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인간들의 짓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인간에게 꾀인 멍청이 같은 골드 일족들이 벌인 짓이라고 할 수 있지.]
바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인간들과 거리를 두려 하자, 골드 일족이 나를 봉인했다. 그 일엔 트롤과 오크도 연관되어 있었지.]
‘트롤과… 오크?’
다시 한번 루카스와 하셀의 눈이 마주쳤다.
그 하등한 종족이 끼어있다니? 엘프나 드워프도 아니고. 이상했다.
[트롤과 오크들이 인간들을 꾀어내고, 그 인간들의 윤기 나는 말재주에 홀린 골드 일족들이 나를 봉인시켰지. 언제인지는 모른다. 내가 기억하기론, 바론 370년쯤이라고밖에.]
‘바론 370년은 또 뭐야?’
이쯤 되니 말을 한번 끊어낼 필요가 있었다.
“제 생각엔 다른 차원에서 오신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무어라?! 그건 말도 안 된다. 이곳은 내가 살던 곳과 아주 흡사한 환경이다. 게다가 블루 일족도 눈앞에 있는데!]
하셀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붙였다.
“하지만 저희가 사는 땅에 있는 오크와 트롤은 지능이 아주 낮습니다.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지요.”
“말이 아닌 소통이 불가능합니다. 두 발로 서서 걷는다는 것 빼곤 인간과 같은 점이 없습니다.”
[마, 말도 안 된다…….]
바딤의 표정이 절망적으로 변했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곳에도 천계는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혼을 인도하면 그곳에서 잘 처리해 줄 거라고 믿습니다.”
[천계!? 그 타락한 놈들을 무슨 수로 믿는다는 말인가!]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다른 건지 짐작도 안 되었다. 천계는 하나로 이어진 게 아니었나?
[마계면 모를까 천계는 절대, 절대 안 된다!]
“…….”
정말이지 들으면 들을수록 답답함이 치밀었다.
“저 잠시…….”
결국 루카스가 하셀에게 살짝 눈짓했다. 이건 상의가 조금 필요한 문제인 것 같아서였다.
“이거 어떡하죠?”
“그러게나 말이다.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는 나도 처음 보는지라.”
“하…… 말을 들어보니 저곳은 천계가 이곳 마계보다 더한 곳이고, 마계가 천계의 역할을 수행하나 본데요.”
“그렇다고 인도하지 않을 수도 없고.”
“우선 설득해 볼까요?”
루카스와 하셀이 뒤로 슥 돌아 바딤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지금 머리를 감싸 쥔 채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우선 너는 가만히 있어봐라. 내가 한번 이야기해 볼 테니.”
하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딤님.”
[뭐냐. 인간.]
그러자 바딤이 갑작스러운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 인간에게 당했다고 했지.’
처음엔 당황스러워 하셀 옆에 선 루카스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지 못한 듯하지만, 지금은 루카스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한 듯 보였다.
“아, 이분은 전대 드래곤 로드셨습니다. 지금은 제가 로드 자리에 있고요.”
[그게 무슨 말이지?]
“복잡한 사정이 있습니다. 뭐, 간단히 말하면 환생하신 것이죠. 인간으로.”
그러자 바딤의 눈이 동그랗게 변하더니 이내 측은한 눈빛으로 바뀌었다.
[쯧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리도 험한 벌을 받고 있을꼬…….]
루카스의 미간에 힘줄이 돋아났다.
‘참자. 참아야 한다.’
루카스가 괜찮다는 듯 억지웃음을 짓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큰 죄를 지은 건 아닙니다. 신이 되라고 하기에 마지막으로 유희를 제대로 즐기고 싶었던 게지요.”
[에잉… 그래도 그렇지 인간이라니… 쯧쯔…….]
바딤이 안타깝다는 듯 다시 혀를 찼다.
“하하. 그보다 궁금한 게 많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차분히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겠군요.”
[그러지.]
바딤도 살아온 세월이 있는지라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듯 보였다. 여기서 당황하고 패닉에 빠져봤자 더 발전되는 것은 없다는 걸 안 거겠지.
“자, 앉으시죠.”
바딤의 희끄무레한 몸이 소파 위로 살짝 안착했다.
‘앉아지나?’
영혼이 과연 소파를 통과하지 않고 잘 앉을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 하셀과 루카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래. 이야기해 보게.]
하지만 영혼이 소파를 쑥 빠져나가는 것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 그러죠.”
조금 실망한 기색의 하셀이 건너편에 앉고, 루카스가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당신이 살던 세상은 어땠는지 먼저 듣고 싶군요. 그리고 당신의 세상엔 어떤 마법이 있었는지도 말입니다.”
바딤이 레어 전체를 흔들었을 때, 그들의 마법으로는 막을 수도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게다가 실체가 없는 영혼의 상태로 내는 힘이 이 정도라면, 육체가 있을 땐 더욱 대단할 것이다.
[흠.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꼬.]
바딤이 다리를 척 꼬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