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멍청한 것.
느껴진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기도 전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떤가.”
하셀이었다.
“나 하셀 테리디어. 드래곤 일족의 수장으로서 사과하지. 우리가 미안하네.”
하셀을 보고 선 엘프의 표정이 경악에 물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위치를 고수할 것이네. 그건 그대들이 미워서도 아니며 우리가 그대들에게 관심이 없어서는 더더욱 아닐세.”
“…….”
“흐트러진 세상의 균형을 우리 나름대로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주게. 수천 년을 거뜬히 살아내는 우리에게도 나름의 지혜가 있다는 것을 믿어주게.”
엘프의 고개가 푹 숙여졌다.
“그럼…… 그럼 왜 우리가 노예로 팔려 가 수많은 세월을 고통 속에 보내는 것을 두고 보셨습니까. 우리뿐 아니라 힘없이 끌려가 상품으로 전락한 종족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서러운 듯 떨려오는 목소리.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린 그 일에 관여할 수 없네. 이종족과 인간의 대립을 더욱 부추기는 일이 될 뿐이야. 그렇게 되면 언젠가 인간과 이종족의 서열이 확실히 나눠지고 말겠지.”
하셀의 말이 맞았다. 드래곤이 이종족의 편에 서서 인간을 벌한다면, 언젠가 인간은 이종족의 먹잇감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안전하게 살아가기만을 바랄 뿐이었어요. 인간과 교류해도 안전히 집에 돌아오고 싶었고, 인간을 의심하고 멀리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는 말입니다.”
하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 알아. 하지만 앞서 말했듯 우리 나름의 지혜를 믿어주게. 그래서 우리는 자네들의 터전을 지키고자 노력했네. 아무리 궁지에 몰려도 돌아올 곳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드래곤들이 했던 노력 중 하나였다.
이종족의 터전만은 안전히 지킬 것.
엘프와 픽시의 숲을 지키고 드워프의 불을 지켜줄 것.
때론 잘 안됐을 때도 있었지만, 노력을 거듭한 것은 사실이었다.
“자네들이 가진 역사 역시 지키려 했네. 자네들이 가진 유물과 역사가 담긴 터전을 말일세.”
고대부터 엘프들이 남겼던 벽화를 드워프가 남긴 철의 제조 방식을, 픽시들이 남겼던 주술을 지켜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스러웠습니다. 외출했던 우리 가족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매도 찾을 수 없을 때의 기분을 아십니까?”
원망에 찬 엘프의 눈이 하셀을 노려봤다.
“모른다. 그 고통을 내가 감히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셀의 미간이 고통스러운 듯 찌푸려졌다.
“그대들이 마족의 편에 서서 우리에게 활을 겨누는 순간,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군.”
“협박하시는 겁니까?”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공격한다고 하던가. 드래곤 앞에 선 엘프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하지만 하셀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니. 협박이라니. 당치도 않네. 우리는 그대들의 힘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그대들은 그저 이 숲에 남아 평화를 기다려 주길 바란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왔네.”
엘프의 정령술도 궁술도 대단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깟 게 드래곤에게 위협이 될 리는 없었다.
마족들도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종족들을 찾아다니며 제 편에 서 달라 말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드래곤의 심기를 거스르려고 말이다. 그들은 전쟁에 앞서 하는 아주 기본적인 심리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었어. 어찌 되었건 자네들의 마음이 상한 건 사실이니 말이야.”
엘프의 표정이 한층 누그러졌다.
“그러니 마족들의 손아귀에 놀아나 일족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지 말아주게.”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루카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대단하군.’
제가 하지 않을 행동을 예측하고 현명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하셀의 모습이 기특했다.
‘나는 아주 애새끼가 따로 없고 말이야.’
더불어 제 감정 하나 조절하지 못하고 날뛴 자신이 부끄러웠다.
“마을에 보호 마법을 걸어주지. 그리고 조만간 우리 일족 하나가 자네들을 찾아올 것이네.”
엘프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왜 이제야…… 이제야 저희를 돌아봐 주신 겁니까…….”
가슴에 쌓였던 울분이 터져 나온 듯 차올랐던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족의 편에 서더라도 우리 일족이 주는 물건은 잘 받아두게. 그 녀석 실력이 꽤 괜찮거든.”
“크흑…….”
하셀의 진심 어린 걱정에 엘프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다시 한번 미안하네. 그러니 일족들을 생각해서라도 모든 결정을 재고해 주면 좋겠어.”
하셀은 진심으로 엘프들을 걱정했다. 그들이 마족에게 놀아나 안타깝게 목숨을 잃게 될까 봐 목소리에도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럼 이만 가지.”
***
하셀과 함께 돌아온 루카스는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알았지? 내가 그들을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야.”
“흠…… 솔직히 말씀드려요?”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들의 마을 중 가장 작은 마을을 찾아가지 않으셨습니까. 진짜 죽이려고 하셨으면 가장 큰 마을부터 해치우려 하셨겠죠.”
“하. 작은 마을부터 시작해 모두 죽이려 했다만.”
그러자 하셀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셨겠죠.”
전혀 믿지 않는다는 말투였다.
“그리고 로드를 지켜봤습니다. 황성을 공격할 때와는 달리 망설이셨잖습니까. 뭐 망설이셨다는 것도 좀 그렇네요. 그럴 마음이 없으셨으니까.”
하셀이 입을 삐죽거리며 이죽거리자 루카스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래. 내가 가끔 잊는다.”
“뭘 말씀이십니까?”
“네가 아만의 아버지인 것을 말이다.”
부전자전이라 했던가. 저런 행동을 할 때면 아만과 정말 똑같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만이랑 저랑 똑같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아만 그 자식이랑 저랑 비교를 하시다니요!”
하셀이 입을 떡 벌리며 바락바락 따져 들자, 루카스의 입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그렇겠지.”
루카스가 조금 전 보았던 하셀의 표정을 따라하며 어깨를 으쓱이자, 하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 어?! 그거 정말 나쁜 겁니다. 로드.”
“하하. 그래.”
결국 하하, 하고 웃어 버린 루카스가 하셀을 지그시 바라봤다.
“고맙구나.”
“쳇. 뭐가 말씀이십니까?”
“우리 일족을 잘 이끌어줘서.”
“……뭐. 로드께서 맡기고 가셨으니 하는 수 없죠.”
루카스의 칭찬이 부끄러운지 하셀은 괜히 퉁명스레 대답했다.
“정령왕들 모두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모두요?”
“안다. 껄끄러운 놈도 있는 거. 그래도 어쩌겠느냐. 마신이 무슨 힘을 가졌는지 모르지 않느냐.”
마신이 주신의 권능에 도전할 만한 힘을 가졌다면, 지상에서라도 우위를 점할만한 모든 힘을 끌어모아야 했다.
“그러니 그 일을 네게 좀 부탁하마.”
“……제가요?”
누가 봐도 하기 싫은 표정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네가 아니면 누가 하겠느냐. 너밖에 믿을 용이 없구나.”
루카스가 필살기를 꺼내 들었다.
“크흠. 그건 그렇죠.”
영락없는 아만의 아버지였다. 너무나도 쉬운 공략법에 루카스가 만족스레 웃었다.
“그래. 그러니 네가 좀 해주련? 어쩜 이리도 믿음직스러운지!”
그러자 하셀은 가슴을 활짝 펴고 대답했다.
“하하! 저만 믿으십시오. 로드.”
“그래. 너뿐이다.”
“하하!”
***
“……여기가 어디예요?”
깨어난 파멜라가 조심스레 주변을 살피며 물었다. 아늑해 보이지만 차가운 분위기의 공간. 제 곁을 지키고 선 잿빛 피부의 사내들이 위협적이었다.
“깨어났군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파멜라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리월!”
제 연인이자, 사랑하는 사람인 리월이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내 사랑.”
리월이 파멜라를 제 품에 끌어안고 속삭였다.
“리월, 리월…….”
리월의 품에 안긴 파멜라가 연신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낯선 공간도 낯선 사람도 더는 무섭지 않았다. 그가 있으니까.
“그래요. 나 여기 있어요.”
리월의 잔잔한 웃음이 제 귓가를 간질이니 마음에 평온이 깃들었다.
“성녀회가 공격받았어요. 쓰러진 당신을 이분들이 구해주셨어요.”
제게 힘을 주었던 잿빛 피부의 사내와 같은 피부를 가진 사내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자 파멜라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리월이 내 힘의 정체를 알게 되면 어떡하지?’
리월은 자신을 성스럽고 대단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힘의 원천이 신과 같은 대단한 자가 아닌 낯선 피부색을 가진 이런 자가 줬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파멜라의 동공이 거세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어느새 몸까지 떨려왔다.
“그, 그게…… 우리, 우리 이제 가요.”
파멜라가 리월의 팔을 꽉 붙잡았다.
“방금 말했잖아요. 파멜라. 성녀회가 공격받았어요. 우린 당분간 이곳에서 지낼 거예요. 이분들이 감사하게도 이곳에 머무를 수 있게 해주셨어요.”
리월이 파멜라의 등을 다정히 토닥이며 말했다.
“그, 그래도…… 우리 나가요. 가요.”
“파멜라.”
리월의 목소리가 차갑게 돌변했다.
“이곳에서 우린 머무를 거예요.”
리월이 제 팔을 잡은 파멜라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며 말했다.
“리월…….”
파멜라는 무서웠다. 리월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떠날까 봐.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차갑게 내려다보는 리월의 눈빛이 더욱 무서웠다.
‘리월을 화나게 해서는 안 돼.’
파멜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착한 우리 파멜라.”
그러자 리월은 다시 부드러운 목소리로 파멜라를 달래고 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깨어났군요.”
들려오는 목소리에 파멜라가 얼른 시선을 옮겨 그쪽을 바라봤다.
흡족한 표정으로 자신과 리월을 내려다보는 사내의 모습에 파멜라의 몸이 다시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 사람이야.’
제게 힘을 줬던 자였다. 원치도 않았던 힘을 제게 주고 떠났던 그 사람이었다.
“우리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요?”
야스탄이 파멜라를 보며 씩 웃었다.
“여기서 이야기할까요?”
야스탄의 말에 파멜라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른 곳에서…….”
저자와 안다는 사실 만으로도 의심을 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보다 더 나쁜 상황이 오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게다가 그렇게도 경멸했던 힘을 사용해 리월을 제 곁에 붙잡아 두고, 사람들의 선망을 받았다는 사실을 저 사람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아는 것이 분명했다. 저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분명 가소로운 것을 보는 것과 비슷했으니까.
파멜라는 낯이 뜨거워졌다.
“그래요.”
야스탄이 싱긋 웃고는 다른 마족들을 향해 휙 손짓하자, 모두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이쪽으로.”
야스탄이 한쪽에 난 다른 문을 가리키며 말하자, 파멜라가 자리에서 주춤주춤 일어났다.
“아니요. 리월. 저 혼자 갈게요.”
리월이 당연하다는 듯 파멜라를 따라나서려는 것을 저지한 파멜라가 싱긋 웃었다.
“아, 그래요.”
그러자 리월 역시 작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야스탄의 뒤를 따르는 파멜라의 뒷모습이 처량했다.
‘멍청한 것.’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리월이 생각했다.